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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우리의 옛 본성 이해 : 자기중심성

시리즈설교/십자가능력으로사는삶

by 발의무리 2018. 2. 8. 08:32

본문

2장 우리의 옛 본성 이해 : 자기중심성

 

 

1장에서 자신을 보는 것의 중요성을 살폈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올바로 이해하게 될 때 십자가의 능력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구원의 감격을 깨닫고 진정한 예배자로도, 헌신하는 삶도 가능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보는 것과 함께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처리된 우리의 자아가 무엇이며, 그 자아가 어떤 영향력을 가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게 될 때 진리로 자유케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1. 십자가에 못 박힌 옛사람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먼저 십자가에서 처리된 옛사람의 특징과 그것의 영향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로마서 66)

이 구절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은 예수님이시다.

· 그분과 연합됨으로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 그 결과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옛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로마서 610-11)

 

예수님은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은 죄에 대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 살게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연합하여 우리의 옛사람이 함께 못 박힌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 때 우리 삶에 놀라운 승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위에 읽은 본문(6:10-11)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1) 우리는 죽은 자인가?

먼저 첫 번째 질문은 우리가 과연 죽은 자인가?”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대하면서 혼돈스러워합니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은 것 같다!”“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경험으로 진리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실재로 경험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얼른 죽어야 해!”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경험이 먼저가 아니라 진리가 먼저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기초하여 순종할 때 그 진리가 경험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지식으로 동의하고서는 그것이 경험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우리 구원을 위한 대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그 효력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는 진리에 기초하여 나아갈 때 승리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나타났지만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두 번에 걸쳐서 임합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천년 전입니다(1:14-15). 두 번째 오심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24:3). 이미 예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진리들이 두 번째 오심으로 완성된 나라에서는 완전하게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세대 사이에 있습니다. 이미 이루셨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에서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몸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몸은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로마서823)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로마서 813)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16-17)

 

이 말씀들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드려 선택을 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그 선택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는 옛 본성의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죄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께 반응하고 육체의 소욕을 거부할 때 놀라운 승리가 있게 됩니다.

로마서 612-13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기서 나오는 동사는 명령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믿고 나아갈 때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혼돈을 겪고 있기에 십자가의 능력을 실재로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 산자입니다.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며, 그 능력으로 함께 하십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죄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놀라운 승리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으로, 친밀함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매순간마다 이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에 동의할 때 놀라운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야 할 적극적인 이유입니다.

 

2) 옛사람의 출처와 그 특징이 무엇인가?

 

성경은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이 이미 처리되었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옛사람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처리된 옛사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 특징과 범위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체 가운데 있고 옛사람의 영향력이 여전히 역사한다면, 우리가 그것의 특징을 더 잘 이해할 때 능히 그것을 이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것의 범위와 특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것의 영향력 아래서 자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째, 옛사람의 근원과 특징

하나님을 반역하는 옛사람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곧 나의 옛사람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결과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원수 된 옛사람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언제 인류에게 나타나기 시작 했을까요?

 

에덴동산의 반역! 그것이 옛사람의 시작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반역이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있던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해 죽음을 가져왔고, 반면에 죄에 대해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시작입니다. 그때부터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죄의 종노릇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 3:1-6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사단이 에덴동산에 뱀의 형상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속이기 시작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것이 죽는 일이 아니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영적 전쟁의 중요한 한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사단은 거짓말쟁이(8:44)입니다. 하와의 손을 끌어 선악과를 따먹게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을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그것을 받아들여버린 것입니다. 영적전쟁의 많은 부분은 우리 마음 안에서 이뤄집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승리하거나 실패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와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속임수를 받아들였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원수는 이렇게 속입니다.

하나님처럼 된다! 이 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선악과 앞에 섰을 때 하와에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보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먹고 남편에게도 준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 하나님 없는 삶!

이것이 바로 옛사람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계속해서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리의 옛 본성입니다. 여전히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는 본성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인류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며, 십자가의 능력이 무력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문제입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급하는 능력으로 살도록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을 만드셔서 동산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세기 215)

 

거기에는 창조주가 공급하는 모든 풍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풍요를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창조주의 주권아래 있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로봇처럼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그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신 것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선악과를 따지 않는 것은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하는 행위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그것은 작은 행위가 아닙니다. 곧 하나님 되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노릇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철저한 결핍이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더 이상 풍요를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창조주의 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기의 내재적인 자원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자원이 끝나면 죽게 됩니다. 점점 모든 삶의 영역에서 결핍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결핍인 죽음이 왔습니다. 풍요의 결핍인 빈곤이, 건강의 결핍인 질병이 왔습니다. 사랑의 결핍인 미움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정적 감정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두려움과, 수치심, 그리고 시기, 질투!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심에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노릇하려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4:26절을 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왜 에노스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까요?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이 죽음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이 죽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본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본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입니다. 인간은 즉시 또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것이 성경의 역사입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슬그머니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이 구절은 예레미야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 말씀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했다.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렸다.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그 웅덩이는 물을 저축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무한한 공급원이시며,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스스로 파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려는 사고,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일이고,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은 반복된 결핍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백년간 노예 가운데 있었던 그들을 당신의 능력으로 출애굽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슬그머니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떠나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 노릇 하려 하여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를 통해서 이러한 본성을 발견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 보면 한 아버지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평안한 삶을 살지만 둘째 아들이 스스로 독립된 삶을 꿈꿉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비참한 자리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는 돼지 치는 자의 집에 취직합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고자 하지만 그것으로도 배를 채울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는 삶,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려는 것을 꿈꿉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순간, 결핍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고, 여기서 다시 보게 됩니다.

 

· 로마서 310-14입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은 서신서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한 것이며, 그 결과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신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미련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사단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야 14:12-14절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이 본문은 사단의 반역을 나타내는 구절입니다. 사단은 원래 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순간 교만하였습니다. 그때 스스로 다짐합니다.

내가 나를 높이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그는 스스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다짐하며 반역을 합니다. 그 결과 그는 쫓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쫓겨난 사단은 에덴동산에서 뱀으로 나타나서 하와를 유혹하되 동일한 방법으로 유혹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라!” 이것이 인간의 타락이었고, 옛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그 옛사람의 본성 뒤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1-3)

 

인간은 세상 풍속을 쫓았습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성에서 나온 가치관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사단이 있습니다. 사단이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려는 자리, 즉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 중심으로 돌아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사단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단을 이 세상 임금으로, 신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한복음 1231)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후서 44)

 

 

그 사단은 아담이후 계속해서 인간들에게 속삭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라! 네 마음대로 살아라!”

하나님 없는 삶, 스스로 하나님노릇 하려는 삶, 즉 자기 중심성!”

 

 

2. 자기 중심성에서 나타나는 옛 본성의 4가지 특징들

 

우리의 옛사람의 특징은 자기중심성입니다. 이 자기중심성은 구체적으로 4가지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1)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경향입니다.

창세기 43-8절을 보겠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 없는 삶을 꿈꾸고 반역한 아담이후에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는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경향에서 시작됩니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각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아벨의 제사만 합당한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분하게 여긴 가인은 죄를 지으려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그에게는 경쟁심이 있었습니다. 시기, 질투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밀려난 것에 대해 매우 분해합니다.

우리 가운데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경향이 우리를 죄로 인도합니다. 언제나 자기가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경쟁심, 시기, 질투가 나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진정한 연합도 되지 못합니다. 자기가 중심에 서지 못하면 못 견뎌 합니다. 그래서 연합이 잘 안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의 둘러리나 서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비극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중심에 서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통해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중심에 서지 못하면 함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경쟁심이 죄로 인도합니다.

이세상의 수많은 다툼은 여기서 나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형제 사이에, 이웃 사이에 지역 사이에, 나라 사이에, 민족들 사이에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마음을 갖기에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부분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로마서 128-32)

자기가 중심에 있기에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꿈꿉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저희를 그대로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온갖 죄악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에 나타난 죄된 모습들입니다.

 

 

2) 자기를 변호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때 아담과 하와의 대답을 보십시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13)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그의 대답은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저 여자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타락은 사람과 그 이웃사이를 파괴하였습니다. 그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아내 탓으로 돌려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 합니다. 아마도 그날 하와는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가까운 사람 사이에 상처를 주고받는 문제와 너무나 동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와에게 묻습니다. 그녀도 역시 뱀이 나를 꾀어서..”라고 변명합니다. 자기 탓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담은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그 이유를 둘러 댑니다. 이때 이후로 인류는 자기를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고 모세로부터 책망을 받았을 때, 그는 회중들 때문이라고 둘러대려 합니다(32:22-24). 같은 방식으로 불순종한 사울왕은 자기의 잘못을 백성들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습니다(삼상15:21). 이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변호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해댑니다. 아담의 범죄 후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지만, 그는 모른 채 하며 거짓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세기 49)

 

우리 안에는변호사가 있습니다. 우리 본성은 끊임없이 자기를 변호하며 또, 거짓말을 해댑니다. 자기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변호합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옛 본성에서 나옵니다. 심지어 우리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변호할까요? 죄를 핑계됨으로자기를 정당화시키려는 태도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떠넘김으로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로 심각한 이유는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해야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변호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옛 본성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말씀 앞에 정직하게 대면할 때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애통함으로 주님을 찾게 됩니다.

 

 

3) 자기 과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를 신뢰함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233-34)

 

베드로는 죽는 자리까지 갈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의 예언하신대로 얼마 가지 않아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리고 맙니다. 그는 자신을 과신함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옛 본성은 자기를 과신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원으로 살려고 합니다. 자기 열심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려고 도전합니다. 그러나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과 사역과 신앙의 모델이십니다.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5:19, 30, 8:26, 28, 14: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반해 베드로는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있다고 상상하는 한,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옛 본성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기과신이 주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살고,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

 

 

4) 자부심입니다.

자기 과신의 결과는 자부심으로 남게 됩니다. 자기가 한 행위를 보면서 자부심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가 이루어 놓은 일을 봅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을 보면서 상대적인 우월의식에 빠지게 됩니다. 모든 것에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부심의 출처는 자기입니다. 그리고 자부심은 자기를 놓지 않습니다. 자기를 강하게 붙잡게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따라서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관점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볼수 없으며, 영적 분별력도 없습니다.

 

 

3. 자기 중심성이 우리 신앙에 미치는 영향

 

자기 중심성은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아담적 옛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성도들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기복신앙과 자기영광으로 나타납니다.

자기중심적일 때 신앙의 목적이 자기가 됩니다. 하나님을 찾되 자기문제해결을 위해, 자기축복을 위해 찾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찾지만 결국 하나님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에서는 섬김과 봉사도 자기유익을 위한 수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축복받으려면 이렇게 이렇게 해라!”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축복을 위해 하는 행위는 결국 하나님을 수단으로 하여 자기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사역도 결국 자기 영광을 구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 일 때 아주 교묘하게 자기 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에 관심을 갖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면 진정한 연합이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 율법주의로, 불신과 불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자기중심적일 때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가 자기 과신입니다. 자기 과신은 자기자원을 붙들게 합니다. 자기자원을 붙들 때, 우리는 신앙적으로 자신의 행위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자신의 행위에 관심을 두고, 그것으로 자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의지하며, 그것들을 자랑합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인생임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율법주의에 빠지게 될 때, 십자가의 능력이 무력하게 되어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됩니다.

 

이때, 필연적으로 불신과 불순종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되,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행할 때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위험부담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크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순종함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자원을 의지하는 삶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행하는 위험부담을 감수할 수 없습니다. 자기자원으로 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영적소경입니다.

자기중심적일 때 또 다른 특징은 자만심, 교만입니다. 자만심은 자기자신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자기관점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세계, 그것도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일 때 신앙에 미치는 가장 심각한 영향력은 바로 영적 소경입니다. 이때 영적 분별력이 가려지고, 편견이 깨뜨려지지 않으며, 삶의 변화도 없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넷째, 인본주의로 나타납니다.

 

자기를 변호하는 본성이 자기 중심적인 또 다른 특징입니다. 그렇게 변호하는 자리에 있게 될 때 정직하게 말씀 앞에 대면하지 못합니다. 말씀 앞에 정직하게 직면할 때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변호하면, 절대로 말씀 앞에 직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당히 타협해 버립니다. 타협하면 다른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지혜를 의지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본주의입니다.

 

이것을 도표로 정리하겠습니다.

 

 

자기 중심적일 때 신앙 : 하나님 중심적일 때 신앙

자기 중심적 신앙

하나님 중심적 신앙

자기 목적

기복신앙

자기영광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과 친밀함

하나님의 나라

자기 자원

율법주의

자기자원의 사역

하나님의 자원

은혜에 의한 삶

믿음에 의한 삶

자기 관점

영적소경

편 견

하나님의 관점

배우려는 자세

하나님의 다림줄

자기 방법

인본주의

하나님의 지혜

성령에 의한 삶

 

 

우리 신앙은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 일 때 승리가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적 신앙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목적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자원인 믿음에 의한, 은혜에 의한 삶을 살고 사역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며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게 되어 실재적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기 위해 성령께 주도권을 드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을 목적으로 사셨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자기를 부인하셨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요한복음 1227-28)

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4-15)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행전 13)

 

2)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셨고,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역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요한복음 334)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누가복음 1120)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누가복음 517)

 

3) 예수님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셨습니다.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16)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요한복음 815-16)

 

4)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셨고, 친밀한 교제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시고 사역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누가복음 41-2)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519-20)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은 하나님이 목적이 됩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자원으로 삽니다. 이때 초점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이론으로 아는 것이 실재가 아님을 알고 배우려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만족을 누리기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성숙되었다할지라도 스스로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향한 끊임없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준가운데만 승리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우월의식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기 때문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2:3) 자리에 섭니다. 이때 진정한 겸손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며 성령께 주도권을 드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게 됩니다.

반면에 자기중심성에 있으면 절대로 승리가 없습니다. 참된 안식과 기쁨도 없습니다. 하나님중심적인 신앙과 정반대입니다. 자기목적을 위해 주님을 찾습니다. 자기자원으로 살려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사역을 할 때도 자기자원으로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자원으로 사역하신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사역에 대해서도 이론으로 알지만 실재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자원으로 살아왔고, 자기자원 이상의 크기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또한 철저히 자기방법을 따릅니다. 자기경험, 지식에 근거해서 결정하고 따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기준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관점이 내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관점이 내려지지 않을 때 편견이 깨지지 않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적 소경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성에는 온갖 억압이 가득합니다.

 

자기중심적 신앙에서는 결코 십자가의 능력에 의한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성은 사단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자기중심성 뒤에는 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 신앙이 이토록 심각하며 무섭습니다. 앞서 우리가 자기중심적 신앙과 하나님 중심적 신앙을 도표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자기중심성이 우리 신앙에 미치는 영향들에 대하여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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