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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자기목적 : 기복신앙

시리즈설교/십자가능력으로사는삶

by 발의무리 2018. 2. 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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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자기목적 : 기복신앙

 

 

우리가 하나님 중심 일 때 우리의 목표는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알기 원하며, 오직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그분의 주권아래 기꺼이 들어가며, 그분을 경외하는 자리에 섭니다. 그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의중을 알아 그 일에 자신을 헌신하게 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일 때 우리의 삶에서 자기가 목적이 됩니다.

 

 

자기 중심적일 때 신앙 : 하나님 중심적일 때 신앙

자기 중심적 신앙

하나님 중심적 신앙

자기 목적

기복신앙

자기영광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과 친밀함

하나님의 나라

자기 자원

율법주의

자기자원의 사역

하나님의 자원

은혜에 의한 삶

믿음에 의한 삶

자기 관점

영적소경

편 견

하나님의 관점

배우려는 자세

하나님의 다림줄

자기 방법

인본주의

하나님의 지혜

성령에 의한 삶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일 때 자기목적을 위하는 신앙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것이 기복신앙입니다.

 

모든 삶의 동기가 자기가 될 때 우리 신앙은 기복신앙으로 전락합니다. 즉 하나님을 수단으로 하여 자기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녀들 시험치를 때가 되면 주님을 찾습니다. 문제해결을 위해 주님을 찾습니다. 복 받기 원해서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점쟁이를 찾는 사람들이 갖는 생각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대상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샤머니즘이요, 거짓신앙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1.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헌신하면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에도 주님을 찾고 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때문입니다.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수단으로 자기의 목적하는 바를 얻으려는 신앙적 가치관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예배하고, 기도하되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 물질을 위해, 자신의 삶이 형통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궁극적으로 복을 받으려는 신앙관입니다.

우리는 복을 참 좋아합니다. ‘복 받으라!’는 덕담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설교도 축복과 관련된 설교를 듣기 좋아합니다. 예레미야 시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평강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13)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5)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612-15)

 

지금 그들의 상태는 심판이 가까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평화를 외쳤습니다. 문제를 보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평화를 외쳤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다 탐남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탐심이 가득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자기중심적이어서 듣고 싶은 말이 평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해야 교회가 성장합니다. 사람들이 축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는 노골적입니다.

 

축복받으려면 순종하라!

축복받으려면 헌금하라!

축복받으려면 헌신하라!

심는 대로 거둘 것이다. 축복을 위해 심으라!”

 

물론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을 따를 때, 그분께 순종할 때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약속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이 목적이 되면 위험합니다. 심각해집니다. 순서가 바뀌면 심각해집니다. 그 목적이 뒤바뀌면 축복이 앞서게 됩니다. 축복이 이유가 됩니다. 축복이 목적이 됩니다. 주님을 찾는 목적이 축복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기복신앙이 무슨 잘못인가?”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했지 않은가?”라고 말합니다. 기복신앙의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의 이해가 잘못된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찾는 것입니다. 그 뒤에는 자기가 자신을 책임지려는 사고, 즉 자기자원으로 살려는 불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아끼지 않을 만큼 사랑하십니다. 그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그분이 우리 삶에 목적되며 우리 가운데 내주하실 때, 그리고 그분의 주권아래 순복할 때 우리의 삶에 생명이 넘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찾되 자신을 위해 주님을 찾습니다.

자신의 문제해결을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축복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주님을 찾습니다. 단지 그것들을 위해서 찾는다면 그것은 돌부처를 찾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십니다. 인격체 되신 주님은 우리 중심을 아십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생명이 되신 주님은 우리가 목적이 오직 주님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뜻을 구하고 그의 나라를 구하기 원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는 주님께서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고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목적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전혀 다른 입장으로 주님을 찾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거짓된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진정한 승리도 능력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기에는 참된 안식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30:15 참조).

기복신앙은 거짓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겨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는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사랑도 모르는 행위입니다. 거기에 온갖 억압이 가득합니다. 영적으로 분별력이 전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사와 자기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복신앙을 분별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기에 그 헌신된 행동을 분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2. 고단수 기복신앙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도 영광 받고 나도 잘되고!”

 

이것은 기복신앙의 또 다른 형태로서 단수가 높아서 사람들에 잘 드러나지 않는 기복주의입니다. 자기의 목적을 교묘히 숨기고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면서 돌아올 댓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누어진 마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나누어진 마음으로는 절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누어진 마음에서는 영적으로 소경이 됩니다. 분별력이 가리웁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과 함께 다른 무엇인가를 함께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22-24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4절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나누어진 마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22절에 나오는 성하면이라는 단어는 후한이라고 번역할 수 있고, 23절의 나쁘면이라는 단어는 인색한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물질에 대해 인색하지 않고 후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물질을 사랑하는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나누어진 마음이고 그러한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져서 온몸이 어두워 질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물질이 우상입니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라면,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물질에 대한 주도권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청지기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22절의 성하면이라는 단어를 영어 kjv에서는 'single focus'(초점이 하나)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뜻은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께 고정될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아진다는 의미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만을 목적으로 할 때 영적분별력을 갖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고단수 기복신앙도 거짓 신앙입니다. 나누어진 마음으로서 우리가 속기 쉬운 미묘한 부분입니다. 기복신앙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노케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주셨습니다. 또한 모든 것 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에게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합니다. 그분 자신을 알고 사랑하기 원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 그분을 찾는 이유가 다른데 있습니다. 축복, 자녀문제, 건강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 다른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것이 해결되면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떠납니다. 그러다가 다시 필요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근심케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온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뭔가 기대하고 잘하다가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기대하는 바를 채워주지 않았더니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달라고 떼를 쓴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목적되시는 삶, 즉 하나님을 더 알기를 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계속해서 참 신앙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3. 하나님은 우리와 온전한 관계 가운데 친밀한 교제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함께 교제하셨습니다. 각종 짐승을 창조하시고 아담 에 지나게 하시며 아담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서늘한 곳을 함께 거닐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친밀한 교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신명기 1020)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여호수아 238)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부종하면” (신명기 1122)

 

여기에 나오는 친근히 하다는 말과 부종하다는 말의 히브리어 원어는 동일한 단어로서 다바크’(daw-bak') 라는 말입니다. 그 본래 의미는 착 달라붙다’, 혹은 들러붙다; 확고히 머물다, 굳게 결합하다, 바싹 뒤따르다, 따라가 미치다, 힘써 좇아가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친밀한 교제를 갖기 원하십니다.

 

사역과 친밀한 교제의 중요성

 

예수님이 12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에서도 친밀함의 중요성을 보게 됩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마가복음 314-15)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의 가장 우선순위가 바로 함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알게 되고 주님의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 진정한 사역입니다. 사역자의 가장 우선순위는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입니다. 친밀함 속에서 아버지의 일이 곧 자신의 일이 됩니다. 아버지의 소원이 자신의 소원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친밀함이 없이 사역할 때 금방 탈진하게 됩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친밀함에서 우리의 초점이 주님께 고정됩니다. 그때 담대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64-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마가복음 12:29-30)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다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십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친밀한 교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을 더 알게 되고 주님의 길을 알게 되며, 주님의 명령에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명기 3015-16)

 

이 구절은 우리가 얻을 생명과 복을 위한 올바른 신앙을 3가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함

둘째, 그 모든 길로 행함

셋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

 

이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순서입니다.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함으로 친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의 길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알게 되며 그분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를 풍요케 하시는 창조주로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먼저 사랑하셨고, 풍요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길을 여시고 그 풍요함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 몇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 창세기 2:15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준비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은 풍요의 곳입니다. 모든 필요가 구비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곳의 풍요함을 누리도록 아담을 에덴으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무한한 풍요를 공급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풍요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2:13) 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의 공급하는 능력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하나님의 풍요를 사단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거절하게 됩니다. 그리고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인간을 위해 다시 풍요를 준비하십니다.

 

· 출애굽기 3:7-8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사백년간 종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계획을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나오는 동사들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볼수 있습니다.

보고, 듣고, 알고, 내려와서, 인도하여, 이르려하노라!!”

하나님은 당신의 열심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시되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아름답고 광대한 땅을 준비하사 그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신약의 예표입니다. 우리가 바로 마귀의 종노릇 가운데 소망이 없을 때, 주님은 우리를 위해 계획하셨고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풍요로 인도하셨습니다.

 

· 출애굽기 193-6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내게로 인도했다!” “그것은 나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종살이하던 그들을 당신의 능력으로 당신께 인도하여 그 언약아래 있을 때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 요한복음 10:10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사단의 꾐에 빠져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사람사이가 끊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결핍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창조주의 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자원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철저한 결핍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생명의 결핍인 죽음

풍요의 결핍인 가난

사랑의 결핍인 미움

건강의 결핍인 질병...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한 처방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불순종으로 창조주와의 관계가 끊어진 결과 결핍에 처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 안에서 영광의 기업을 누리도록,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오신 것입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행전 2618)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로마서8:32)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16)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1014-16)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신명기 3020)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며,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빠가 되어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아들을 보내어서 우리와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제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모든 것을 주심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복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복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자신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땅에 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완전하고 선한 길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풍요케 하실 뿐 아니라 친히 생명이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화목제물 삼으셔서 막힌 담을 헐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며 그분과의 친밀함 속에서 주님이 생명이 되셔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겸손함으로 주님께 순복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정의 - 하나님이 목적되는 삶

 

하나님은 인격체십니다. 그 인격체 되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이 목적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미 살펴 본대로 하나님은 유일한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한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먼저 마음 안에서부터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음 안에서 사랑의 열정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나누어진 마음이 아닙니다. 여럿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선순위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26)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도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부모나 처자 등 모든 이들을 미워하라고 하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신앙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많은 사랑 중에서 하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것들을 하나님 위에 둘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 인생의 우상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 위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의 열정이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열정을 갖게 됩니다. 그 열정이 없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사랑하되, “나누어지지 않는 한 마음으로 사랑하면, 마음 안에 사랑의 열정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잠언 817)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함께 가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시편기자는 그 열정을 노래하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를 찾나이다”(42:1)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삶의 주도권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음에서부터이며 우선순위의 문제라면 우리는 주도권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도권을 주님께 드리지 못하면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족에 대한 부분의 주도권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을 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도권을 드리는 그것이 우리 삶의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탐사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반응하는 것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반응하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 반응할 것입니다.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께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환경이나 상황, 혹은 사람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만 반응한다면 우리 삶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분이 힘이시기 때문에 그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며, 문제 앞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엇에 반응하고 있습니까?

지금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십시오. 자주 낙심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기쁘거나, 혹은 슬프게 됩니까? 무엇이 나로 좌절케 하는지 살펴보십시오. 내가 자주 반응하는 그것에게 나도 모르게 주도권을 넘긴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내 삶의 우상입니다.

자기 자신의 야망에서 나오는 자신의 명성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고 그것에 심하게 좌우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를 좋게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물질일수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하면 기쁨이 넘치지만 물질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물론 물질은 우리의 필요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불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6:24-34).

배우자나 자녀일 수 있습니다. 배우자나 자녀가 변화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변화되었는지를 보다가 약간 변화의 조짐이 있으면 기뻐하고 변화의 조짐이 없으면 낙심해 버립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께로 가지 못합니다. 다 맡겼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가 그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그것의 주도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때에 이루실 것을 신뢰하며 주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이러한 주도권을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수단으로 하여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이 가게 됩니다.

이러한 우상될 만한 것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목회자인 저로서는 심지어 교회나 성도들, 또는 사역이 우상인 경우를 봅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더해지거나 헌금이 많아질 때 기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는 낙심됩니다. 저의 기쁨은 오직 주님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신뢰하며 친밀한 교제 가운데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짊어집니다. 그 이면에는 야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한 사람에게 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반응합니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흔들도록 나둬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우상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서 내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발견되었다면 지금 주님께 주도권을 넘기십시오. 거기에 진정한 안식과 위로와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이러한 안식과 위로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흉내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주도권을 주님께 드릴 때 오는 결과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할 때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선순위와 관련되어 있음을 살폈습니다. 우리 신앙의 우선순위가 주님이라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엘리 제사장은 영적으로 타락된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불량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중에 가장 좋은 것들을 탈취해서 자기들의 배를 채웠고, 성적으로 타락된 행동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자기의 자녀들을 꾸중하지만 말리지는 않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사무엘상 230)

 

엘리제사장의 집안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영영히 제사장으로 섬기게 될 것을 약속받았지만 그 약속이 파기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선포하십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택하셨고,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구원하셨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자주 들으면서도 삶을 조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행위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방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그분의 주권아래 기꺼이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삶은 하루아침에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좋은 환경일 때 식물이 잘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함과 경외함에서 점점 더 자라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명기1012-13)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2514)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친밀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친밀함에서 하나님의 길을 알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길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넷째, 하나님을 사랑하면 순종하게 됩니다.

 

순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이를 위한 섬김은 더 이상 부담이나 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꺼이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하려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만 기꺼이 주님께 순종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분의 계명을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사랑하셔서 거처를 삼으시고 주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주님을 더 알게 될 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되 온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선별적인 순종은 참된 순종이 아닙니다.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기를 원하셨지만 몇 마리의 짐승들과 아말렉왕 아각만은 남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불순종이라고 평가하십니다. 그리고 그 불순종 때문에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게 됩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100% 순종해야만 버림받지 않는 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기꺼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따라 나오는 기본자세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은 모순입니다.

우리가 순종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말하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이며 그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111, 8)

모든 명령을 항상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그러한 순종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사랑함 없이 순종 할 수 없습니다.

친밀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길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목적과 의도를 알 때 우리는 기꺼이 그분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순종합니다. 이때 주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더 이상 무거운 짐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무거운 짐으로 여깁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앙을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생각할 때, 행위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면 주님께 복종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은 주님을 향한 열정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떤 보상이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분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기꺼이 주님의 일에 기쁨으로 순종합니다. 이것이 바로 친밀함의 삶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전 존재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을 믿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한계를 가졌기에 우리를 실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신뢰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가장 선한 길로, 완전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다윗은 그의 삶 가운데 경험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81)

 

4)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친밀한 교제가 가능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317-19)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울은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학적인 지식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됨으로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 때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먼저 주님의 사랑하심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순종에는 위험부담이 따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크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1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여기서 그런즉이라는 말은 이유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앞 신명기10장에 나옵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4)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16)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19)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 21)그는 네 찬송이시요 네 하나님이시라 네가 목도한 바 이같이 크고 두려운 일을 너를 위하여 행하셨느니라 22)애굽에 내려간 네 열조가 겨우 칠십 인이었으나 이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셨느니라” (신명기 1014-22)

 

여기 하나님의 주권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사랑하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십니다. 약속하신대로 이루신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먼저 하나님께서 사랑하셨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 될 때 신실하심을 알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되 이론으로가 아니라 실재로 알아야 합니다. 이론은 능력이 아닙니다. 그분을 알기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통과하여 전능하신 주님과 사랑의 주님과 마주칠 때까지 그분을 계속 추구해야 합니다.

 

주님을 구하십시오. 주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그분이 목적되십시오. 친밀함을 목표로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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