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자기자원 : 율법주의
우리가 자기중심적일 때 우리 신앙은 “참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비본질적인 수단으로 대체”해 버립니다. “신앙의 본질을 의식으로 대신하며,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삶을 자기행위로 대신하고, 실재를 이론으로 대신합니다.”
이때 대체하는 그것들을 붙잡고 그것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며 그것들을 자랑하며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의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행위로 대신’해 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1. 신앙적 ‘의식’들로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앞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친밀한 교제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본질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면 당연히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에도 헌신하고 봉사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복 때문입니다. 복 받는다는 것에 사람들은 매력을 느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수단으로 자기목적을 이루고자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도 이사야시대나 예레미야시대, 심지어 바리새인마저도 자신은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아십니다. 나누어진 마음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만! 이어야 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것, 즉 의식을 잘 지키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라고 이해한 결과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친밀함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성수, 헌금, 봉사, 성경공부 등을 열심히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친밀한 교제가 없이 하는 행위는 무거운 짐입니다. 단순히 행위를 잘 지키는 것이 신앙으로 이해할 때 그것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신앙적인 이해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형태의 억압이 있고 진정한 자유함도 열매도 없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신앙의 본질을 의식으로 대신한 것에 대해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대 | 하나님을 떠난 현실 | 신앙적 열심 | 문제의 원인 | 하나님의 징계 |
이사야(유대인) | 사1:2-4 | 사1:11-15 | 사29:9-13 | 사29:14 |
예레미야(유대인) | 렘2:13 | 렘6:20 | 렘7:21-23 | 렘6:16-19 |
예수님(바리새인) | 요5:42 | 눅18:12,빌3:6 | 요5:37-38 | 마23:16-22 |
이사야시대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 1장 2-4절)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이사야 1장 11절-15절)
그들은 무수한 제물과 제사를 드렸고, 모든 절기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또 많이 기도했습니다. 이미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제사를 받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 29장 13절)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수많은 의식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조상의 전통을 따른 흉내’(표준새번역)에 불과하였습니다. 이것에 그 당시 유대인들이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전혀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동의했다면 회개하고 돌이켰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사야 선지자를 대적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헌신은 대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들의 열심을 심판하시되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케 될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이사야 29장 14절)
그 결과 그들은 영적으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인격체 되신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지 않으면 영적 소경이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사와 나의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되 문제해결이나 자기목적을 위해 찾을 때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전혀 알 수 없게 됩니다.
지금 그들의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음으로부터라면 떠나는 것도 마음으로부터입니다(신30:17).
마음으로 떠났기 때문에 신앙의 본질을 의식으로 대체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의 교제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서 나누어지지 않는 한마음을 원하셨고, 그들이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주님을 청종하고 하나님만 신뢰하여 문제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의 처방을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자기 생각을 내리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때 놀라운 인도하심을 경험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이사야 55장 1-3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8)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장 6-9절)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13)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사야55장 12-13절)
예레미야 시대를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시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예레미야 2장 13절)
예레미야 시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사람들은 대단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원방과 시바, 아주 먼 외국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향품과 유향을 수입했다는 것입니다.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요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예레미야 6장 20절)
얼마나 대단한 열심입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화석화된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셨던 것은 제사가 아니라 그들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낼 때부터 친밀한 교제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세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지런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지 못함으로 영적 소경이 되어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였고, 주님께 엄청난 희생과 헌신을 하고서도 주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책망을 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22)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23)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예레미야 7장 21-23절)
“너희의 드리는 희생과 번제물을 너희나 먹으라! 내가 출애굽 할 때 너희에게 원한 것은 번제나 제사가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잘못된 예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출애굽 할 때 번제나 제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행위로 대체한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친밀한 교제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범사에 주를 인정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식을 잘 지킴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시대 유대인들의 문제였고, 다음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의식을 잘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그들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문제는 그들도 ‘신앙의 본질을 의식으로 대체해 버린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누가복음 18장 11-12절)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는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의식을 지키는 것으로 참 신앙을 대체 했습니다. 그들에게 참 신앙이 무엇인지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 의를 기초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고 있으며, 우월의식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자신들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한복음 5장 42절)
그럼에도 그들이 우월의식을 갖고 교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의식을 잘 지킴으로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자기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확대하여 613가지로 만들었고 그것을 힘써 지켰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립보서 3장 5하-6절)
그럼에도 주님의 평가는 부정적입니다. 외식하는 자들, 소경된 자들(마23:16-2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재로 그들은 누구보다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고 평가하십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님의 평가와 그들의 이해가 달랐던 것입니다. 주님의 평가는 그들의 행위들을 잘 지키는 여부에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행위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되 그 행위를 의지함으로 교만했습니다. 사실 행위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자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겸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로 인하여 자기만족에 빠졌고, 교만하여 배우려는 자세가 없었으며, 가르치고 판단하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겸손히 순종하려는 자세보다는, 행위 그 자체에 초점을 두게 됨으로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앙을 행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신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주일성수, 십일조, 기도, 전도, 봉사 등 의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잘하는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직분을 세울 때도 이 행위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기준도 신앙적인 의식을 잘 지키는 것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물론 믿음이 좋으면 의식도 잘 지키게 됩니다. 그러나 의식을 잘 지키는 것이 꼭 믿음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살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신앙적 관점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역사가 걷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습니다. 죄를 이길 능력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열매도 맺힐 수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안일함에 빠져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실상은 헐벗고 굶주려 있음에도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임재가 없으면 소망이 없음에도 그것도 알지 못한채로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본질을 의식으로 대체하는 화석화된 신앙은 하루 이틀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담적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에 가지 않으면 자유할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한복음 5장 42절)
그럼에도 그들이 우월의식을 갖고 교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의식을 잘 지킴으로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자기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확대하여 613가지로 만들었고 그것을 힘써 지켰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립보서 3장 5하-6절)
그럼에도 주님의 평가는 부정적입니다. 외식하는 자들, 소경된 자들(마23:16-2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재로 그들은 누구보다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고 평가하십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님의 평가와 그들의 이해가 달랐던 것입니다. 주님의 평가는 그들의 행위들을 잘 지키는 여부에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행위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되 그 행위를 의지함으로 교만했습니다. 사실 행위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자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겸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로 인하여 자기만족에 빠졌고, 교만하여 배우려는 자세가 없었으며, 가르치고 판단하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겸손히 순종하려는 자세보다는, 행위 그 자체에 초점을 두게 됨으로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앙을 행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신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주일성수, 십일조, 기도, 전도, 봉사 등 의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잘하는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직분을 세울 때도 이 행위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기준도 신앙적인 의식을 잘 지키는 것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물론 믿음이 좋으면 의식도 잘 지키게 됩니다. 그러나 의식을 잘 지키는 것이 꼭 믿음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살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신앙적 관점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역사가 걷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습니다. 죄를 이길 능력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열매도 맺힐 수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안일함에 빠져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실상은 헐벗고 굶주려 있음에도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임재가 없으면 소망이 없음에도 그것도 알지 못한채로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본질을 의식으로 대체하는 화석화된 신앙은 하루 이틀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담적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에 가지 않으면 자유할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한복음 5장 42절)
그럼에도 그들이 우월의식을 갖고 교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의식을 잘 지킴으로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자기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확대하여 613가지로 만들었고 그것을 힘써 지켰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빌립보서 3장 5하-6절)
그럼에도 주님의 평가는 부정적입니다. 외식하는 자들, 소경된 자들(마23:16-2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재로 그들은 누구보다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다’고 평가하십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주님의 평가와 그들의 이해가 달랐던 것입니다. 주님의 평가는 그들의 행위들을 잘 지키는 여부에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행위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오되 그 행위를 의지함으로 교만했습니다. 사실 행위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자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겸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로 인하여 자기만족에 빠졌고, 교만하여 배우려는 자세가 없었으며, 가르치고 판단하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겸손히 순종하려는 자세보다는, 행위 그 자체에 초점을 두게 됨으로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앙을 행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신앙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주일성수, 십일조, 기도, 전도, 봉사 등 의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의식을 잘하는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직분을 세울 때도 이 행위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믿음이 좋다는 기준도 신앙적인 의식을 잘 지키는 것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물론 믿음이 좋으면 의식도 잘 지키게 됩니다. 그러나 의식을 잘 지키는 것이 꼭 믿음이 좋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살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같은 신앙적 관점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역사가 걷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 있습니다. 죄를 이길 능력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어떤 열매도 맺힐 수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안일함에 빠져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실상은 헐벗고 굶주려 있음에도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임재가 없으면 소망이 없음에도 그것도 알지 못한채로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본질을 의식으로 대체하는 화석화된 신앙은 하루 이틀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담적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에 가지 않으면 자유할
수 없습니다.
2. 신앙의 행위로 십자가의 공로를 대체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사는 삶’ 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 일 때 우리는 모든 삶을 자기자원으로 살려고 합니다. 심지어 주님 앞에 나갈 때도 자신의 자원으로 갈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1) 십자가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야 할 것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자신의 자원을 가지고 나아갈 인생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소망이 없었던 자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입니다(에베소서2:1).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오직 주님의 자원으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에베소서 2장 8-9절)
은혜로 구원받은 자요.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삶에 오직 그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2)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보좌 앞에 나아갈 때에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갈수 있습니다.
성경은 때를 따라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주님의 보좌앞에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앞에 나아갈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히브리서 4:16과 히브리서10:19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우리가 보좌 앞에 나아 갈 때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타락한 옛 본성은 자신의 자원을 가지고 살려하며 심지어 하나님 앞에까지 자기 자원을 가지고 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인줄 알지만 그 이후의 삶은 자신의 자원으로 살려고 합니다.
3) 우리가 자기자원으로 보좌 앞에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때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책감 혹은, 자기의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중심적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을 때 언제나 자신의 행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세 가지 태도가 나타납니다.
· 주로 죄책감에 있는 경우
· 주로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경우
· 죄책감과 자기 의를 오락가락하는 경우
좀더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주로 죄책감에 빠져있는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함이 없는 주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중에 한 이유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려고 할 때 자신의 행위를 봅니다. 그리고는 주님 앞에 내 놓을 것이 없는 실패한 자신을 볼 때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자신의 행위를 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와 같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돌아오려 할 때 면목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고 아버지를 거스린 죄를 범한 자신을 아버지가 그냥 받아주실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대책을 세웁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누가복음 15장 18-19절)
얼마나 기막힌 대책입니까?
죄책감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대책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헌금이나, 헌신 등, 뭔가 댓가를 지불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문밖에 와서 존귀하신 주님이 계시는 지성소의 문고리만 만지작거리다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지 못합니다. 항상 죄송함과 죄책감에 있다가 어떤 순간 타협하는 자리에 가버립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든지, 말씀 앞에 정직하게 직면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타협의 선을 그어 놓고 습관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래서 복음안에 있는 자유함도 평강도, 하나님의 놀라운 풍요함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신앙생활이 아주 어렵게 생각되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자기의 행위를 보면서 실패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눌리게 됩니다.
둘째, 자기 행위를 보면서 ‘자기 의’를 붙들게 됩니다.
자기 행위를 보면서 나타나는 또 다른 한가지는 ‘자기 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 하다고 생각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과 인정받을 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가 낫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자기의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제 경험으로는 죄책감에 눌려있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자기의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죄책감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금방 깨닫습니다. 그러나 자기의를 붙들고 있는 사람은 이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큰 문제가 없는 한 자신이 아는 지식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재로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믿음을 의지하여 주님의 보좌에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수 있습니다. 여전히 자기의를 붙들고 있으면서 착각 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의를 붙들고 있을때 몇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자기 의를 붙들때 필연적으로 영적 우월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게 되며, 가르침을 받기 보다는 주로 가르치는 자리에 서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고도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충성된 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자 그는 화를 내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기였습니다. 그런데 벌을 받아야 마땅한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이고 있는 아버지를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만약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보다 좀더 낫다고 우리가 주님께 합당한자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이해할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에 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이 사람도 존귀하신 주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는 어쩌면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 나는 주님 앞에 나아 갈 수 있다! 나의 행실을 보라!”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이사야 64장 6절)
자기 의를 붙잡고도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으로 알고 있으면 다른 문제가 없는 한 자기는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가를 보려면 믿음이 필요한 상황이 닥쳐보아야 압니다. 문제가 없으면 다 믿음이 좋습니다. 건드리지 않으면 좋은 사람인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모든 행실이 괜찮아 보이고, 주변에서 인정하는 선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자기 의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잘 들어나지 않습니다. 실패를 경험하고 내 놓을 만한 어떤 선함도 없음을 발견할 때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 하는지, 아니면 자기 의에 기초하고 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 웨슬리의 예
요한 웨슬리가 그랬습니다. 그는 1725년 주님에게 자신을 삶을 드렸고, 그 후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을 하고, 거기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시절 홀리 클럽이라는 모임을 조직했습니다. 그 모임은 철저한 모임이었습니다. 정기적으로 예배하고, 성경공부하고, 철야하고, 금식하며 구제하기를 힘쓰는 모임이었습니다. 어찌나 철저했든지 그들은 ‘규칙쟁이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열심이었습니다.
그 후 요한웨슬리가 미국 조지아 주 인디언들을 선교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미국 선교에서 철저하게 실패합니다. 여러 부분에서 실패를 경험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내어 놓을만한 것이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이번 선교에 실패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 한 가지를 깨닫게 하셨다. 그것은 내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 후 피터 뵐러라는 친구와 교제하며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해 논합니다. 그런 가운데 1738년 5월 24일 모라비안 교도들이 모이는 밤 집회에 참석했다가 인도자가 마틴루터가 쓴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중에 이상하게 그의 마음이 뜨거워지며 확신이 들게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실패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자원을 의지합니다. 웨슬리가 자신의 실패를 보기 전까지 자기 의로 충만했던 것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의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주 심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교묘하여 잘 들어나지 않지만 자신의 의롭다 함을 행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또 다른 특징은 죄책감과 자기-의를 반복하며 빠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행위를 보면서 내 놓을 만 하면 자기-의에 빠지고, 내 놓을 것이 없으면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 되어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정죄하며 우월의식에 빠지기도 하고, 반대로 죄책감에 빠져 헤매기도 합니다.
우리가 행위를 신뢰하는 자리에 있게 될 때 우리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몇 가지 진리를 놓치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심각한 일입니다.
4) 행위를 의지함으로 나타나는 신앙적인 결과들
첫째, 십자가의 공로를 놓치게 됩니다. 둘째, 은혜에 의한 삶이 실재가 아닙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넷째, 구원의 확신이 흔들립니다. |
첫째, 십자가의 공로를 놓치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에서는 십자가의 공로를 놓쳐버리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 모든 삶의 토대요. 능력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십자가의 능력이 쏟아져 버렸습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공로임을 알지만 그 이후의 삶은 자기 자원으로 가려고 합니다. 행위를 의존합니다. 그래서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반대로 자기의를 기초하여 가려고 보좌 앞에 나아가려고 합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어디 있습니까? 오직 자기 행위만 있을 뿐입니다.
그 결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삶이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안식도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주님의 놀라운 일들이 가리워진다면 우리 신앙에 온갖 억압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계시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도, 능력도 다 가리워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놀라운 일들이 이론이거나 보이지 않습니다.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진리안에서 자유케 되는 삶도 실재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놀라운 능력이 상실되어 버립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무수히 사용합니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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