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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자기관점 : 영적소경

시리즈설교/십자가능력으로사는삶

by 발의무리 2018. 2. 8.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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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자기관점 : 영적소경

 

 

자기 중심적 신앙과 하나님 중심적 신앙

자기 중심적 신앙

하나님 중심적 신앙

자기 목적

기복신앙

자기영광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과 친밀함

하나님의 나라

자기 자원

율법주의

자기자원의 사역

하나님의 자원

은혜에 의한 삶

믿음에 의한 삶

자기 관점

영적소경

편 견

하나님의 관점

배우려는 자세

하나님의 다림줄

자기 방법

인본주의

하나님의 지혜

성령에 의한 삶

 

 

 

1. 우리가 자기중심적 일 때 영적소경이 됩니다.

 

구약의 이사야,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인들과 바리새인의 신앙이 똑같고, 오늘날 우리의 신앙도 똑같이 왜곡되어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왜 그렇게 심각하게 왜곡될까요? 그 원인은 영적소경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소경이겠느냐” (이사야 4218-19)

 

자기중심적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하며, 그분의 뜻을 알 수도 없습니다. 그 결과 영적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소경일 때 신앙의 본질을 의식으로 대체하며,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삶을 자기행위로 대체하고, 실재를 이론으로 대체합니다.” 이때 대체하는 그것들을 붙잡고 그것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며 그것들을 자랑하며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의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행위로 대체해 버리게 됩니다. 기복신앙과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복주의와 율법주의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미 살펴 본대로 기복주의와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는데 그 심판은 지혜가 없어지고 분별력이 가려서 더욱 영적으로 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299-14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10)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11)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12)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13)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14)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이 구절에서 몇 가지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떠난(이사야1:4) 결과 영적 소경이 됩니다. (9-12)

둘째, 소경된 결과 본질을 의식으로 대체하는 율법주의에 빠졌습니다.(13)

셋째,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심판하시어 지혜와 총명을 가리우십니다. (14)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13절에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없는 형식에 불과한 예배와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와 기복주의 입니다. 입술로는 외치지만 형식적입니다. 열심히 흉내는 내지만 실재 마음은 멀 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조상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함도, 그분이 목적되는 삶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더욱 소경이 되어버립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므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소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이사야 4418)

 

자기중심적 일 때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영적 소경이 됩니다. 그 결과 거짓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소경이 되게 하십니다. 결국 영적으로 완전히 어두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로 자유케 되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온갖 억압이 가득합니다.

 

 

2. 영적소경의 정의와 소경되는 이유

 

영적소경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그 이유를 도표로 묶어보았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다림줄(기준)에 세워져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기준을 따를 때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경험케 됩니다.

셋째, 영적소경의 정의: 하나님의 기준을 자기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넷째, 자기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다섯째, 영적소경의 이유: 자기중심일 때 자기 관심사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가 하나님의 다림줄(기준)에 기초하여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아모스77-8절입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8)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하나님은 그 백성을 심판하시되 하나님의 다림줄에 기초하여 심판하심을 말씀하십니다. 다림줄은 곧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하면 많은 사람이 성경을 떠올립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캐논()”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은 우리 삶과 사역과 신앙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기준을 전혀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준을 선포하십니다.

 

2)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기준에 따를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제사법과 제사장을 세우시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그 명령을 들은 모세는 전달하였고, 모세를 포함한 모든 백성이 함께 순종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면 대개 이런 패턴이었습니다.

이같이 모세에게 명하셨더라”(7:3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 (8:9,13,17,21,29)

834절 이하에서도 계속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 그리고 온 회중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이제 영광으로 임하실 것을 말씀한 후 실재로 하나님께서 그 백성 중에 영광으로 임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의 명한 모든 것을 회막 앞으로 가져오고 온 회중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선지라 6)모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레위기 95-6)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24)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레위기 923-24)

 

이처럼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순종할 때 하나님은 영광으로 임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준 가운데 놀라운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임재하실 때 하나님은 그 기준을 높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있지 않으면 거기 심판이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위기 101-2)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한 그들에게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에게 축복이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서지 않으면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3) 영적소경은 하나님의 기준(목적, )을 자기관점으로 봄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관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55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복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회복은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6)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8)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1-3,6-9)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청종하며 나아오라고 하시면서 자기생각과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버려야 합니까?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의 차이에 대해 주님은 악인, 혹은 불의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 앞에 죄였음을 볼수 있습니다.

 

실상 자기관점에서는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불신앙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르기보다는 자기관점에 옳은 길로 행하게 됩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3:7-19).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의 땅과 그 땅의 풍요를 약속하십니다. 그들의 장수와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그들을 훈련시키십니다. 그들에게 하나님만 목적되는 삶으로, 오직 하나님의 자원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지헤를 의지하여 살게 하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환경에 따라 반응했던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애굽의 군사들이 수장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경배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신뢰했습니다(14:31). 그러나 사흘 만에 마라의 쓴물 앞에서 불신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15:24). 자기관점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의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영적소경에서 심각한 것은 자기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인본주의로 나타나 결국 주님을 대적한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라면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그래서 자기생각을 버리지 않고는, 자기 길을 돌이키지 않고는 진정으로 돌아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모든 이론을 내리고 하나님께 기꺼이 순복하는 자세로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비춰질 때 기꺼이 삶을 돌이켜 조정하는 것입니다.

 

 

4) 자기관점에 있으면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아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이사야 4220)

이 구절은 영적소경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것을 봅니다. 귀가 밝아 많은 것을 듣습니다. 그럼에도 그 말씀을 유의하여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이 보고, 많이 듣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을 듣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관점으로 봄으로 영적소경이어서 그 말씀의 의미를 정확하게, 그리고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12)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37-13)

 

출애굽 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기적들을 경험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졌고, 적들이 물에 수장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는 것도 보았습니다.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것도 보았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과 많은 메추라기 고기로 배를 채우는 경험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몰랐을까요? 관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자기관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과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기적들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 자기관점에서 이해되지 않을 때 원망과 불평을 해댔습니다. 환경이 좋으면 감사하고 기뻐하지만 어려움이 오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환경에 기초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로 강퍅케 되어 자기길(인본주의)을 따라 하나님을 불신하고 대적함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던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관점과 예레미야 시대 유대인들의 관점

 

예레미야 시대 하나님의 심판으로 유대인들 중 대다수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때 남은 자들이 예레미야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

 

이에 모든 군대의 장관과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아와 2)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3)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4)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고하리라 5)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는 우리 중에 진실 무망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6)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 청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예레미야421-6)

남아있는 모든 자들이 다 나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길과 뜻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말씀대로 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특히 6절의 고백을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좋고, 좋지 아니하든청종하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들에게 가장 좋은 길이요. 복인 줄 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올바른 자세입니까? 사실 우리는 이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가장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결단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이 멸망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현실 앞에 각성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전에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 취급했지만 이제 예레미야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고 나아온 것입니다.

그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반응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1)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니라, 15)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16)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예레미야 4211, 15-16)

 

“1)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게 하신 이 모든 말씀을 다 말하매, 4)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대 장관과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거하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5)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대 장관이 유다의 남은 자 곧 쫓겨났던 열방 중에서 유다 땅에 거하려 하여 돌아온 자 6)곧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왕의 딸들과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영솔하고 7)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이러하였더라” (예레미야 431, 4-6)

 

하나님은 그들에게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고 선포하십니다. 애굽에 내려가는 것이 또 다른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왜 따르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자기들이 기대했던 것과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종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완전한 줄은 압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순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었던 그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메시지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미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교만합니다. 그래서 듣겠다고 말하면서도 순종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들의 관점으로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관점과 바리새인의 관점

예수님의 관점과 바리새인들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4-15)

 

예수님이 선포하신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때 유대인 중에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개에 대해서는 서로 이해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회개에 대해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다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세리나 죄인들이 회개해야 할 자들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들이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월의식에 빠져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누가복음 1811)

자신들을 의롭다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이기에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자신들에게 적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처방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으로 오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속죄 재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자가 없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보았고, 상대적인 의인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자신들을 차별하여 대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910-13)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리와 죄인들과 자주 식사하였습니다. 그것을 본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의인이 부정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의인인 자기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고 스스로 의롭게 할 사람이 없기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함으로 자기관점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호세아 66절을 인용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이 말씀은 의식과 본질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이 없이 드려지는 제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을 지적하면서 바리새인들이 가진 스스로 의인의식이 바로 본질 없는 의식에서 나온 것임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율법을 더 잘 지키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5:42)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인의식에 빠져있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말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소경이라고,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팽배한 유대인들에게 선포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준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20-22)

 

율법을 잘 지켜서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동기를 가지고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말씀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라면 그날 이후 예수님을 많이 미워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자기중심적 신앙에 대해 설교하면 사람들이 그럼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 생활한 것은 뭐란 말이야!”라고 말하며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율법은 행위를 다룬다면 예수님은 동기를 다루십니다. 율법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죄인임을 발견케 하는 것이고 결국 그리스도께 인도한다고 이미 살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 중에 어떤이들은 그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18:21,3:6). 정말 대단한 열심입니다. 그 결과 누구보다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그들이 결국 그리스도를 눈앞에 두고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왜 오셔야 했는가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어떤 말씀은 깨닫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말씀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떠났을 뿐 아니라 주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21-59절 참조)

넷째, 오늘날 우리의 현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대로 오늘날 우리도 자기중심적인 자리에 있어서 신앙의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어 있습니다. 실재가 없이 이론으로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현실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회복시키시며, 부흥으로 인도하십니다. 부흥은 갑자기 임하는 것 같지만 준비작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보기도입니다. 그런데 중보기도는 처지를 인식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처지를 인식하게 될 때, 회개하고, 중보기도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얼마나 멀리있는가를 보게 될 때 처지를 인식하게 됩니다. 시대마다 처지를 인식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시대의 현실을 보면서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을 의식하게 될 때에 처지를 인식하여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서를 읽다고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70년만에 마치리라는 말씀을 대하면서 그 때가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회개하지 않고 있는 처지를 인식하고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요시야시대는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임금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퇴락한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케 됩니다. 서기관 사반이 그 율법 책을 요시야 임금 앞에서 읽던 중에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져서 말씀을 듣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요시야가 발견하고 옷을 찢고 회개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대할 때, 또 현실을 보면서 처지를 인식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도 처지를 인식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회개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도 합니다. 그러나 실재로 애통함으로 삶을 조정하며 하나님의 기준가운데 서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오히려 문제라고 말하면서 판단은 하지만 그런 문제를 자신의 일로 여겨 회개하고, 주님의 교회를 회복시켜 달라고 중보기도하는 사람은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평가와 사람의 평가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열매가 있지 않은가?”라고 말합니다. “다 잘 되어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옳다고 동의하지만 심각하게 듣지 못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는 잘 모릅니다. 우리가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가와 우리 평가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관점으로 보는 것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다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었고 벌거벗었다고 평가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은 자기관점으로 자신들을 본 것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평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우리의 관점으로 평가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물질주의 적인 평가입니다. 오늘날 목회의 성공을 말할 때 그 평가 기준이 교회의 크기를 말하거나, 결산 혹은 성도수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기준이 아닙니다. 세상적 판단입니다. 얼마나 심각합니까?

하나님의 평가와 우리의 평가는 다릅니다. 우리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평가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그 당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 자기중심적인 가치관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시대의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태복음 1116-17)

오늘날에도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말씀을 들으면서 애통해하고 회개합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분명히 자신들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심각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돌이켜 애통함으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왜 선지자들처럼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지 못할까요?

자기중심적인 신앙일 때 하나님의 관점이 가려져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말씀을 들었고 이해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자기관점에서 들었고, 이했기에 근본적인 전환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 앞에 삶을 조정하지 못합니다.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합니다.

 

 

5) 영적소경의 이유: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의 관심과 자기관심이 다르게 됩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일 때 영적으로 소경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관심과 자기 관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중심적일 때 하나님이 목적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며 우리의 초점은 주님께 있게 됩니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1232).

그때 하나님의 관심에 자기의 관심을 온전히 집중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알기 원하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복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의 일이 곧 자신의 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모세의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금송아지를 만든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모세의 중보기도로 그들을 용서하셨지만 이제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에 가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출애굽기 3312-13)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 합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알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은총을 입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보내지 마옵소서”(15). 모세는 하나님 없는 가나안보다 하나님 계시는 광야에서 사는 것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세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영적 분별력과 권세를 주십니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8)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민수기 126-8)

반면에 자기중심일 때 자기가 목적이 됩니다.

자기의 목적하는 바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것을 소망하며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관심이 더 이상 자기의 관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자기에게 유익이 될 때 그것을 자기 관심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실재는 자기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관심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자신이었습니다. 그러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게 됩니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출애굽기 328)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속히 떠났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들고 그것들을 소중히 여겨 경배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의 길을 떠났을까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이 안보인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일 때 자기관심에 집중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길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하신 대로 행하신 놀라운 이적들을 경험했음에도 하나님의 길을 속히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놀라운 이적을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그렇게 보고도 아무 능력도 없는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게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미 분별력이 없습니다. 이 영적으로 소경되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을 진노케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사울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되 모든 사람과 짐승들을 남기지 말라”(삼상15:3)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왕 아각을 살리고 살진 짐승 몇 마리를 남김(삼상15:9)으로 선별적인 순종에 그치게 됩니다. 그가 선별적으로 순종한 이유는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사울은 자기를 위해서 기념비를 세우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무엘과 자기 길로 행하는 사울의 자세를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1)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12)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났더니 혹이 사무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돌이켜 행하여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무엘상 1510-12)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메시지는 아주 강력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처지에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운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무엘상 1530)

 

영적으로 소경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일 때 자기관심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소경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불신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낙심케 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삶에 온갖 억압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영적 소경의 결과

 

나는 너희를 죄악과 원수들에게서 해방시키려고 항상 너희에게 율법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22)그러나 너희가 그토록 귀중한 가르침을 거절하더니 이제는 모조리 약탈을 당하고 적진으로 끌려와서 굴속에 묶여 있고 옥중에 갇혀 있다. 원수들이 너희를 불잡아 포로로 끌어 갔어도 너희를 풀어 준 이가 아무도 없고 너희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는 이가 없다 23)너희 가운데에는 이런 일을 당하고서도 깨닫는 이가 아무도 없느냐 ? 이토록 무서운 경험을 하고서도 귀기울여 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 24)도대체 누가 이스라엘 백성을 강도 떼에게 넘겨 주고 야곱의 후손들을 약탈자들에게 내주었느냐?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아니냐? 우리가 주께 불순종하고 범죄하였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주신 것이 아니냐?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지 않았고 주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25)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무서운 진노를 쏟아 징벌하시고 엄청난 전란에 빠뜨리셨다. 주님의 분노의 불길이 사방에서 밀려와 이스라엘을 태워 없앴으나 그들은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주께서 내린 분노의 불꽃이 이 백성을 태웠으나 그들은 조금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이사야 4221-25. 현대어 성경)

 

이 성경구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심각한 표현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승리케 하려고 율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항상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 소경 되어 가르침을 거절 했습니다. 그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 진리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그 진리를 볼 눈이 없었습니다. 보기는 보아도 주의하여 보지 못했습니다.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했습니다.

 

말씀에는 치유의 기능이 있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315)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될 때 고침이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신분은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신다는 약속이 우리로 담대하게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치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셔서 우리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환경을 만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될 때 소망을 갖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진리는 우리를 승리케 합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8:44)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 때 우리는 승리케 되며, 자유케 되며,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왜 고침을 받지 못합니까?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기 때문입니다. 즉 영적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합니다. 그들은 영적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놀라운 승리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진리들을 놓쳐버림으로 그들의 삶에 온갖 억압이 가득합니다. 그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도 없습니다. 진정한 안식도 생명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도적맞고 빼앗겨 버렸습니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얼마나 비극입니까? 이것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지만 오늘날 이 시대에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도록 말씀하십니다. 주님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을 무거운 짐으로 여깁니다. 친밀한 관계 안에서 내 멍애를 매고 내게 배우라 내 멍애는 쉽고 가볍다”(11:28-29)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주님의 멍애는 더 이상 쉽고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로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원으로 갈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오히려 무거운 짐으로 받아들입니다. 말씀을 올무로 생각합니다.

그 결과 자기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론으로 실재이신, 인격체 이신 하나님을 대체 해 버림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신뢰함으로 누릴 놀라운 승리를 잃어버림으로 억압이 가득합니다. 죄를 이길 능력도, 세상을 이길 능력도,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4.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1) 예수님의 오심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사야 426-7)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한복음 19-11)

 

이사야 42장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입니다. “소경의 눈을 밝히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12)

그러나 사람들은 빛 되신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이해되지도 않았고, 그 결과 주님을 영접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부르시면서 예수님과 동일한 사역으로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승리를 얻게 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행전 2617-18)

 

예수님은 바울을 보내시며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우선, “그 눈을 뜨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명이시며, 그것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눈을 뜰 때 네 가지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어둠은 진리를 가립니다. 사단은 우리에게서 진리를 가립니다(고후4:3-4). 우리 눈을 멀게 합니다. 그러나 빛에 있을 때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놀라운 승리가 있습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요한일서 210-11)

 

둘째,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눈을 뜨게 될 때 영적인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났을 때 죄의 종이요, 사단의 권세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심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단의 권세는 깨뜨려 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로새서 113)

 

셋째, 죄사함을 얻게 합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경되어서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진리가 우리에게 선명히 비춰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넷째,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누릴 기업을 얻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소유했고, 하늘나라의 시민권(3:20)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살지만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끊어졌던 창조주의 공급이 회복되어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하나님의 풍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적 눈을 뜰 때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들을 누리게 됩니다. 진리로 자유케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눈을 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과 겸손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명기 294)

 

그런데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한 자세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겸손은 하나님 없으면 안됨을 아는 것입니다. 실상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전혀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539-40)

 

그들은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영생의 길이 되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한복음 939-41)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보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들이 본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성경도 열심히 읽었지만 자기 관점으로 듣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히려 본다고 함으로 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았고 자기들이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기에 가장 잘 보는 자들이라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다고 하면서도 영적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마태복음 1514)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겸손하게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겸손한 자는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 앞에 자기 생각을 내리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마음자세가 중요합니다. 이러한 마음자세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에서 나옵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예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마음 자세의 중요성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씨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이고, 밭은 마음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선포 될 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4가지 마음이 나옵니다.

길가 밭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듣고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돌밭은 가르침을 듣고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시험이 오면, 대가가 요구되는 조정의 순간이 오면 열정은 식어지고 순식간에 믿음이 흔들려 넘어져버립니다. 가시떨기가 덮인 땅은 말씀을 들었지만 생활에 대한 걱정과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말씀보다 앞서서 말씀을 막아버림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왜 듣지 못하며 들어도 열매를 맺는데 까지 이르지 못할까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밭들은 자기중심적인 신앙에서 나옵니다. 자기중심적일 때 자기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그 의미를 정확히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깨닫게 되었을지라도 결국 자기가 내려지지 않아서 시험이 오거나 문제가 오면 순식간에 믿음에서 떠나버립니다. 참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일 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적인 가치관이 내려지지 않아서 하나님 말씀을 뒤로 하고 돈벌고, 육체를 즐기고, 자신의 이름을 더 많이 알리기 위해서 사력을 다하는 삶을 삽니다. 결국 이러한 마음은 신앙의 목적이 자기입니다. 그래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함으로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밭은 좋은 마음자세를 가르칩니다.

열매 맺는 마음은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목적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곧 생명이심을 알고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며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값진 진주되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르되 모든 것으로 값진 진주되신 주님을 사려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려는 마음입니다. 말씀 앞에 순복하려는 마음자세입니다. 거기에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이것이 겸손한 마음자세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의 특징 중에 하나는 겸손입니다. 이러한 마음자세에 열매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만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고자 하는 자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점점 더 소경되어집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은 배우기를 갈망합니다. 잘 알아듣지 못할 때 알기를 구합니다. 이론이 능력이 아님을 알기에 깨닫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욱 영적으로 민감하며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태복음 1312)

 

하나님 중심적일 때는 언제나 선순환(善循環)입니다. 하나님이 목적될 때 하나님을 더 알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의 관점을 더 갖게 되며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수록 하나님 앞에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그때 더욱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일 때 악순환(惡循環)입니다. 자기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이해합니다. 그리고는 안다고 생각합니다. 안다고 생각하기에 배우려는 자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욱 소경되고 목이 굳어 마침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러한 자세는 우리가 하나님 중심일 때 나타나게 됩니다.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세도, 흉내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일이 가능합니다. 자기중심적일 때 절대로 볼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소경이 되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알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됩니다(고후1:20). 그러므로 사모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온유하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순종해야 합니다. 배우고자 하는 어린 아이 같은 자세가 필수입니다. 세례요한처럼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릴까요?”(11:2-4)라고 묻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마태복음 1313)

 

자기중심적일 때 우리는 영적으로 소경됩니다. 자기관점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더욱 심각한 것은 편견의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편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일 때 편견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혹 안다고 할지라도 편견이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자기관점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음 장에서 편견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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