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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자기관점 : 편견

시리즈설교/십자가능력으로사는삶

by 발의무리 2018. 2. 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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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자기관점 : 편견

 

 

우리 모두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영적사각지대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 편견은 우리 삶에 많은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배운 대로반응하지 않고 보는 대로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일때 신앙과 하나님 중심적일때 신앙

자기 중심적 신앙

하나님 중심적 신앙

자기 목적

기복신앙

자기영광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과 친밀함

하나님의 나라

자기 자원

율법주의

자기자원의 사역

하나님의 자원

은혜에 의한 삶

믿음에 의한 삶

자기 관점

영적소경

편 견

하나님의 관점

배우려는 자세

하나님의 다림줄

자기 방법

인본주의

하나님의 지혜

성령에 의한 삶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사람이 외출을 하고 약간 어두운 시간에 집에 들어오다가 정원에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정원에 한 마리의 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얼른 정원용 가위를 가지고 그 뱀을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기 위해 애씁니다. 잠자리에서도 계속 그 뱀이 생각났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뱀이 왔을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뱀 생각이 났습니다. 그것을 치워야겠다고 생각하고서 밖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뱀은 없고 정원에 물을 뿌리는 호수가 몇 조각으로 잘려 진 채 있었습니다. 그가 밤에 본 것은 뱀이 아니라 정원용 호수였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원용호수를 뱀으로 보았고, 호수가 아니라 뱀을 보았을 때의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편견의 정의를 내려보겠습니다.

 

사전에서는 편견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신 생각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편견은 치우친 것입니다. 즉 치우쳐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교회를 세우시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준이 잘못된다면 정말 심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가장 완전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렇고, 모든 삶에서 만나는 문제들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못할 때 자기 관점으로 보게 됩니다. 자기 관점을 가지고 보게 될 때 왜곡된 이해를 갖게 되고, 그것이 바로 편견입니다. 편견이 심각한 이유는 우리가 배운 지식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대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올바른 기준을 그대로 적용시킬 때에 우리 삶에 승리가 있는데, 편견은 그것을 왜곡시킴으로 우리가 진리 가운데 서는 것을 방해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만나는 사건이나 환경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출신에 따라서 나이에 따라서 학생, 주부, 회사원, 사업가, 공무원 다 각기 자기가 보는 관점에 따라 이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만나면 나름대로 관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음을 아십니까? 예수 믿기 전의 자기관점이 예수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서 진정한 자유도 승리하는 삶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믿음에 의한 삶도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편견은 우리의 모든 부분에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편견에 의하여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지 못하거나, 동참하지 못할 뻔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편견으로 그토록 기다렸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동참합니다. 베드로도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었고, 고넬료의 가정에 가지 못할 뻔 합니다(10).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 편견을 깨뜨리시고 그로 하여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중을 알게 하심으로 그 일에 순종하게 합니다. 우리 신앙에서 올바른 관점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1. 편견이 오는 통로

 

신학방법론에 대해 말할 때 4가지를 말합니다. 성경, 전통, 경험, 이성입니다. 이 네 가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을 갖으려면 이 4가지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앙의 선배들이 전해준 좋은 전통, 체험적인 신앙, 이성은 우리를 바르게 인도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의 기준 가운데 서야 합니다. 만일 전통이 성경을 앞서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경험이 성경을 앞서면 신비주의가 됩니다. 이성이 성경을 앞서면 자유주의가 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성경의 기준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기준아래서 전통을 점검해야 합니다. 성경의 기준아래서 경험(체험)은 점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생각하여 보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안에서 이어야 합니다. 만약 성경의 기준을 벗어나면 편견이 됩니다. 그러한 요소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편견을 가져오는 가장 주된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1) 경험(체험)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저희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요한 7:43-52)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속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설교는 권세있는 새 교훈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책망하면서 너희도 미혹되었느냐라고 말합니다. 이때 니고데모가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결하느냐고 말합니다. 즉 선입견 가지고 판단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내놓은 견해가 무엇입니까? 경험입니다.

생각해보라.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단언적으로 말합니다. 그들의 경험에 의하면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난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날수도 없다는 것이겠지요! 자신들의 경험에 기초하여 이미 판단해 버린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또 나옵니다. 나다니엘의 이야기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한 1:45-49)

 

빌립이 나다니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나다니엘은 단번에 무시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이것이 거절의 이유였습니다. 편견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지 못할 뻔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를 간사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견이 있었음에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과 대화속에서 자신의 편견이 내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을 주는 한편, 많은 편견을 갖게 합니다.

경험과 관련하여 편견을 갖게 하는 요소는 두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경험(상처, 실패)와 긍정적인 경험(익숙한 환경)입니다.

첫째, 부정적인 경험으로서 과거의 상처와 실패는 우리에게 많은 편견을 갖게 합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히브리서 1215)

 

우리 본성은 자기를 변호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으면 자기를 보호하려는 담을 세우고 스스로 그 뒤에 숨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처는 우리의 삶에 쓴 뿌리로 남게 됩니다. 그 쓴 뿌리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부분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비슷한 사람만 보아도 피하거나 싫어하는 경향을 갖게 됩니다. 또 어떤 환경에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 환경을 싫어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은 우리의 성격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찬양을 잘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의 찬양인도에 기름부음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분이 인도하면 은혜가 되지 않는다며 불평했습니다. 그 다음주에도 역시 똑같이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저분하고 닮은 분이 누가 있나요?”

초등학교 선생님하고 닮았는데 그 초등학교 선생님을 아주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사람을 미워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 경험에 기초하여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경험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 동일한 이미지를 가짐으로 하나님에 대한 편견으로 심각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 한분이 저에게 상담을 해왔습니다. 그분은 안수집사로서 교회에 대표기도를 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면 그 다음에 기도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어떠하세요?” 그러자 그분은 즉각 말도 마세요. 우리 아버지요! 알콜 중독으로 매일 술드시고 오셔서 저희들을 구타하시고 무능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하나님을 부를 때 혼돈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치유받은 후에 자유케 되었습니다.

 

과거의 부정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편견은 생각보다 훨씬 그 뿌리가 깊습니다. 사역자가 이러한 부분에서 치유되지 않았을 때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다른 문제는 잘 상담하다가 어떤 사람의 문제가 과거 자신의 아픔과 비슷하면 분노로 상담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해야 하지만 부정적 경험에서 나오는 분노나 억울함의 감정이 그것을 가리 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과거의 긍정적인 경험이 우리에게 편견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익숙한 것을 바꾸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전에 사역하던 죽청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나는 우리 동네가 제일 좋더라제가 볼 때는 교통도 아주 불편하고, 문화적인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하는, 환경적으로도 불편한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항상 우리 동네가 제일 좋다고 말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익숙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교회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앉는 자리를 잘 바꾸지 않습니다.

편견이 깨뜨려 지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경험한 것을 기초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처음 신앙 생활한 교회에서 형성된 관점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이론보다 앞서는 것이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으로는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 경험을 통해 깊이 박혀있는 실재는 좀처럼 변화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여전히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긍정적인 경험, 자기가 합당하다고 생각했던 경험들이 하나님의 기준 앞에 내려지고 변화되는 것은 더욱 쉽지 않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익숙했던 순서와 조금만 달라도 뭔가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느 성도는 찬송가를 두 번하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든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주장하기를 자기가 큰 교회 오래 다녔는데 찬송가 두 번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품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것임을 확인하고서도 변화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내게 익숙하다 할지라도 성경적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뀌게 됩니다.

 

 

2) 전통

 

좋은 전통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좋은 전통을 지키고 보전하고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전통이 성경의 기준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 왜곡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전통에 집착하게 될 때, 편견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2)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태복음 151-6)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전통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것이 장로들의 전통을 범한 행위로서 바리새인들의 질책을 받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히려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것을 책망하십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할 몫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말함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그들을 책망하시되,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전통을 성경보다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왜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전통에 집착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전통에 집착할 때 편견을 갖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전통에 집착함으로 편견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확대해석하여 613가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지키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도 가졌습니다.(3:6)

그러나 그들의 전통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우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은 그들의 안식일에 대한 잘못된 점들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안식일관을 드러내시어 전통을 깨뜨리기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12)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요한복음 55-13)

 

베데스다 연못가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그곳은 종합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안식일 날 그곳을 지나시던 예수님께서 많은 환자 가운데 38년된 환자를 치유하십니다. 그를 향해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그것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안식일에 침상을 들고 가는 것은 유대인의 전통에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의 침상을 들고 가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율법을 범하시는 분이신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완성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5:17-18). 그렇다면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은 이 일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은 아버지의 일이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자기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한복음 517,19)

 

그렇다면 하나님은 안식일에 왜 침대를 들고 가게 하셨을까요? 기념으로 간직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치유된 것을 증명케 하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유대인의 안식일에 대한 잘못된 전통을 깨뜨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편견을 깨뜨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심각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켜야 한다는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쉼이었지만 오히려 사람들을 얽매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38년된 환자가 치유된 사건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환자의 치유와 그것으로 인한 감격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식일이 보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전통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겼다는 것에만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다른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안식일관을 책망하십니다.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누가복음 1310-16)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18년간 귀신들려 고통당하고 있는 한 여인을 치유하십니다. 그것을 본 회당장이 분을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안식일날 치유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들의 전통에 대한 집착은 전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행위를 외식하는 것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전통에 집착하게 되어 편견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기본적인 생각조차도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전통을 통한 편견은 심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전통이라는 편견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무척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것입니다.

 

 

3) 이성

 

이성은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생각하여 보라”(6:28,12:24,27)고 여러 차례 말씀하시고 또, 제자들의 생각을 물으심으로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성경의 기준을 토대로 할 때 이성은 영적인 분별력을 갖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온것인지, 혹은 아닌지 어느 부분까지는 알수 있습니다. 이성은 영적전쟁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원수는 속이는 전문가(8:44)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고 하십니다. 이때 진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범위는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성경적인 기준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원수에게 속게 되며 올무가 됩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가복음 833)

 

베드로가 생각을 했지만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관점으로 생각했고, 결과는 사단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분별하셔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은 성경의 토대 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성이 성경을 앞설 때 자유주의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도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모두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합니다. 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 하셔서 천사를 동원해 가지고 베드로를 감옥에서 건져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저들이 기도하는 마가의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로데라고 하는 여종이 문을 열려다가 미처 열지 못하고 다시 가서 베드로 선생님이 왔다고 말을 합니다. 제자들은 그 여종을 향해 네가 미쳤느냐?’라고 꾸짖습니다.

얼마나 불신앙입니까? 그들은 방금까지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베드로가 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전혀 다른 반응을 합니다. 그들은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기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경험한 것 이상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면서도 실재로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잭 디어는 그의 책 놀라운 성령의 능력에서 오늘날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자기들이 경험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계관의 문제

 

또 다른 이유는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세계관은 세계를 보는 관점입니다. 챨스 크래프트 박사는 세계관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세계관이란 한 문화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실재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관념들이 체계화한 것으로서, 그들의 가치체계에 있어 근간이 되는 것이다.”

 

세계관은 보통 한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오랜 기간 동안 실재로 여기는 것들이 체계화 된 것으로서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삶의 모든 면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관은 어릴 때부터 지극히 당연한 공식으로 공식, 비공식적으로 주입되며, 의식, 무의식으로 강화됩니다. 그러므로 세계관은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세계관에서 가치관이 나옵니다. 모든 생각은 이 세계관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어떤 행동을 하는 이면에 이 세계관이 작용합니다. 세계관은 세상을 보는 렌즈입니다. 색맹을 가진 사람이 어떤 색을 잘 못보고, 정상적인 색을 잘 모르는 것처럼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릅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계몽주의적 세계관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세 가지 세계관을 접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령숭배적인 세계관입니다.

오늘날 비서구 세계의 많은 선조들은 정령 숭배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전을 가진 종교가 아닙니다.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비인격적인 영적인 힘은 우리에게 행운을 줄 수도 있고,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고 보아서 많은 신들을 섬깁니다. 정령숭배적인 세계관에서 초자연적인 역사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역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관에는 물리적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서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여러 신들 중에 한분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범신론입니다.

 

둘째, 서구적 세계관으로서 계몽주의 세계관입니다.

블래미어스는 그의 저서에서 서구적인 세계관에 있어 지배적인 요소는 세속화된 사고방식이며, 그것은 차안적인 사고방식(영원한 세계에 초점이 있지 않고 현세에 초점을 둔 삶의 방식)을 말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초자연적인 개입이 불가능하며, 오직 경험적인 방법과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것은 세속화된 사고방식입니다.

서구적 세계관의 기초는 15세기 문예부흥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만들어 놓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합리주의와 유물론이 등장합니다.

합리주의는 인간의 모든 경험을 이성을 통해 설명하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 합리주의는 과학을 동원하여 측정이나 설명이 불가능한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질과 그 운동 및 변형이라는 생각을 기초로 하고 있는 유물론적인 세계관이 서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유물론을 신봉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을 갖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서구세계관의 영향으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계몽주의는 모든 사물에 대해 합리적으로 접근토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심지어 성경조차도 순전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학에 영향을 미치면서 진보적인 경향에서는 모든 성경해석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역사를 합리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여 비신화화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모든 초자연적인 것들을 신화로 몰고 갔습니다. 반면에 복음주의에서도 이러한 영향으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들이 오늘날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의 영향으로 성경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단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으로만 받아들이고 또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며, 오늘날에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셋째,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우리가 갖어야 할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기독교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 세계관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만물을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구성요소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영원에 대한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세계를 지향하면서 이 땅에서 천국과 지옥의 관념을 가지고 살도록 합니다. 이때, 이 땅에 만연되어 있는 악의 세력을 인식하고 사단의 세력과 영적전쟁을 하는 하나님의 군대로서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하며, 초자연적인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물질적인 세계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계시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당연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지 못하는 것은 서구적인 세계관의 영향이라 할수 있습니다.

 

 

4) 잘못된 가르침

 

우리가 가르침을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가르침이 우리에게 편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잘못된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갖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배운다면 가르치는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면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합니다. 특히 그 부분에 전 이해가 없다면 더욱 그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잘못된 가르침이라면 그 사람에게 심각한 편견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편견이 내려지고 올바른 관점으로 전환되어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훈련원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대해 강의할 때마다 이러한 편견의 영향력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신학적인 부분에서의 편견은 쉽게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들어도 하나님음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무시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론으로 이해하면 입술로는 인정을 하면서도 실재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견고합니다. 그것이 내려지기까지는 주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 잭 디어는 놀라운 성령의 능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맨 처음 내가 이런 주제들에 대해 성경을 연구할 때, 나는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연구하지 못했었다. 경건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나에게 성경은 성령의 은사들이 마지막 사도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그러한 많은 말들로 그들은 내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치유하시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치유란 드물게 일어나는 것이고 오늘날 교회의 사역에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했다. 그러므로 내가 성경을 연구할 때..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오늘날 더 이상 하시지 않는지에 대해 더 많은 이유들을 수집하기 위한 것이었다

 

잭 디어는 달라스 신학대학 구약학 교수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그는 성령의 은사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사경회를 개최하기 위해 존 화이트 박사를 초청하게 되었고, 그의 강의 주제로 치유에 대한 주님의 권위라는 말에 그가 성경을 새롭게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부정적인 관점으로 보는 눈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경건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가르침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누군가 존경하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막강한 권위를 행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가르침에 기초한 관점을 갖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분별력을 갖기 전에, 분별할 능력이 없을 때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분별력의 기초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잘못된 가르침을 기초로 한다면 그것이 바로 편견을 갖게 합니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 예언과 환상을 선포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노로 심판을 선포하시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그 담이 무너진즉 혹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겠느냐”(에스겔 139-12)

 

그러한 거짓말의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을 약하고 불안정한 벽으로 세우게 되었고 그 위에 회칠을 덧입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폭풍우로 그 회칠한 것을 쓸어버릴 것이며 부서지기 쉽고 거짓된 그들의 벽이 땅에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내 노를 담과 회칠한 자에게 다 이루고 또 너희에게 말하기를 담도 없어지고 칠한 자들도 없어졌다 하리니 이들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의 묵시를 본다 하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에스겔 1315-16)

 

오늘날에도 잘못된 가르침의 결과로 잘못된 벽을 쌓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영향으로 비뚤어진 담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림줄에 기초해야 합니다.(7:7-8)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림줄에 기초해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점도 하나님의 다림줄에 기초해야 합니다. 잘못 쌓여졌다면 헐어서 새롭게 하나님의 다림줄에 기초해서 쌓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관계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봅니다. 편견 때문입니다. 그 편견이 어디서 기인할까요? 그 이유는 두 가지 인 것 같습니다. 자신에 대한 편견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편견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열등의식에 빠져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많은 경우 성장과정에서 실패감과 마음의 상처가 그 원인입니다. 그것들과 함께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말한 왜곡된 평가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너는 그렇게 못 났니!” “넌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야” “넌 어쩜 그렇게 부정적이니!”

자신에 대한 온갖 부정적 평가를 진실로 받아들일 때 자신에 대한 편견으로 자리 잡게 되고, 평생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올바른 정체성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된 편견은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편견을 갖게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편견을 자녀들에게 주입시킵니다. “이런 사람은 상대하면 안 된다!” “이런 인상을 가진 사람은 조심해라!” 외모를 가지고 평가하게 합니다. 그 결과 사람에 대한 편견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진리 아닌 잘못된 가르침, 특히 자기 욕심에 미끌려 거짓된 교훈들을 듣기 좋아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을 경계하도록 가르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디모데후서 43-4)

 

 

2. 편견이 우리 신앙에 미치는 영향

편견은 우리 신앙의 여러 가지 부분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과 삶의 모든 부분에서 왜곡을 가져오게 됩니다. 말씀을 듣는데 있어서 충돌이 일어나고 왜곡되며 자기식의 이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오해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태복음 166-12)

 

예수님께서 너희가 바리새인들에 떡을 주의하라.” 그랬더니 제자들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 우리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 먹이고 남은 떡을 안 가져왔더니 주님이 그것을 찾으시는구나이렇게 얘기합니다. 동문서답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데 전혀 엉뚱한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경험을 보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의 열심이 부족함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었고, 고백했습니다. 그분을 삼 년 동안이나 같이 가까이 모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왜 그가 그렇게 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이적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아를 생각하며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관은 지상왕국을 세우러 오실 것이라고 단정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군사적인, 정치적인 왕으로 오셔서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으로 오실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16:21-22). 심지어 그러한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은 우리 중에 누가 크냐는 논쟁을 하곤 했습니다(22:24). , “당신에 나라에 이를 때에 우리를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제자는 사도행전 16절에 예수님께서 승천을 준비하시는 시간까지 하나님이 천군 천사를 동원해 오셔서 이제 죽음에서 살리신 주님을 만왕에 왕으로 오실 때가 이때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제자들은 자기들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베드로가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을 단정했었는데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붙잡히고 마침내 수치를 당하는 자리에 대단히 혼돈스러움을 경험하면서 그 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리고 맙니다. 편견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이 편견이 깨뜨려지지 않으면 우리도 승리하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1) 편견과 하나님 아는 것

 

첫째,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편견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 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 남겼으되 18)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오랜 후에 그 종들에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개 할세 20)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 받은 것을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하고 22)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하고 24)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음으로 25)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감추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데서 모으는 줄을 네가 알았느냐 27)그러면 내가 마땅히 내 돈을 치리 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이 무익한 종을 밖 갓 어두운데 내어 쫒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느니라 하니라” (마태복음 2514-30)

한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그 종을 불러 각각 그 재능대로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랜 후에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와 두 달란트 받았던 자는 열심히 장사하여 배나 남기게 되어 주인 앞에 그 이익을 내놓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인에게 그 한 달란트를 내놓았습니다. 그때,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으로 어두운데 내어 쫓기게 되리라고 그를 심하게 책망합니다.

이 비유는 맡겨진 일에 대한 충성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장사하지 않고, 땅에 묻어 두었다가 훗날 주인 앞에 한 달란트만 내놓음으로 책망을 받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주인 앞에 한 달란트를 내어 놓으면서 말하는 구절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는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음으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 감추었나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 속에 주인에 대한 편견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주인을 마음이 굳은 사람, 심지도 않고 거두는, 뿌리지도 않고 거두려는 사람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도둑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그 돈을 잃어버리면 자기에게 엄한 벌이 내릴까 두려워 땅에 묻어둔 것입니다.

 

편견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알고 있다면, 잘못 알고 믿는다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성경이 있어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성경은 완전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 줍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가진 바리새인들이 부지런히 성경을 상고했던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함은 어찌 된 것일까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그들은 성경을 보는 눈에 있어서 이미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는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였습니다. 그러하기에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물었을때 즉각적으로 유대 땅 베들레헴이니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들 중 아무도 베들레헴에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왔다면 자기들이 가장 먼저 알았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편견이 너무나 잘못된 사실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반응하기 때문에 편견을 깨뜨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주인에 대해 가진 편견이 어디서 온 걸까요?

아마도 이 사람은 주인에 대해 상처를 받은 것 같습니다. 주인이 사람들을 불러놓고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다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각각 주었습니다. 주인이 각 사람의 재능을 따라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누구는 다섯 달란트 주고, 누구는 두 달란트 주고, 나는 한 달란트 밖에 안 줍니다. 아마도 무척 상처받았을 것입니다. 상처를 받으면 우리는 상대편을 비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보호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주인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들을 갖게 되었고, 주인에 대해 편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를 땅 속에다 꼭꼭 묻어 놓았다가 돌아 올 때 그것을 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색하신 분으로 이해합니다. 기도응답을 위해 철야하고 작정하고 금식해도 잘 들어주지 않으신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그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은 들으십니다(요일5:14). 그러나 자기 뜻을 위해서 자기 방법을 따라 구하다가 응답하지 않으시면 인색한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경험이 반복될 때 하나님은 기도응답을 잘 안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자기의 것을 빼앗아가는 분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주님을 위해 계속해서 뭔가를 드려야 하고 드리지 않으면 자기의 삶에 화가 미칠 것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내 것을 다 빼앗아 가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입니까?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8:32)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는 우리의 재물이나 헌신이 필요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달란트 비유로 돌아가서 사실 주인한테는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나 한 달란트가 다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내어놓으니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음으로 내가 네게 큰 일을 맡기노라그랬습니다. 각자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나 한 달란트가 주인이 보기에는 비슷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에게 상처가 되어 그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편견에 사로 잡혀서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전지하셔서 우리의 모든 상황과 필요를, 그리고 가장 완전한 길을 아십니다. 그뿐 아니라 전능하셔서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가장선하고 완전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하심을 인정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둘째, 편견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이론으로 아는 것에 만족해 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 그 지식이 이론적으로 정확하다 할지라도 실재가 안 되는 것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론으로 안다고 할지라도 그 개념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실재적 이해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편견은 우리에게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서도 다 같이 말할 수 있지만 전혀 다른 관점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예화를 합니다.

큰 코끼리를 데려다 놓고 코끼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코끼리를 만저 보고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릴까요? 어떤 사람이 큰 기둥을 그렸다면, 그는 다리를 만졌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바위를 그렸다면 그는 몸통을 만졌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려놓은 부분적인 그림을 보이면서 이것이 코끼리이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웃을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 모세는 여호와 닛시...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 이러한 이론들을 다 암송한 후 주님을 안다고 말할지라도 전혀 능력이 없습니다. 또한 그가 이해하는 실재의 하나님과 이론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편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압니다. 그런데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지 못합니다. 실재로는 자기식으로 이해하고 있어서 드러나지 않지만 왜곡된 부분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에 대해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에 자유나 억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론으로는 편견도 깨지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전지하심에 대해 편견이 어떻게 역사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하나님 사랑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심을 믿으십니까?”라고 물으면 모두 다 아멘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이해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아원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거기서 섬기는 보모들은 그 설교를 듣는 중에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였습니다. 그런데 왠일 인지 아이들은 그 설교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낯설고 추상적인 단어였던 것 같았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느껴보지도 못한 힘든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사랑으로 말미암았고, 우리가 그분의 보좌 앞에 설수 있는 것도 하나님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친밀함으로 나아가는 것도 하나님 사랑을 알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의 개념도 이론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소개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읽어야 합니다.

 

(1) 잘하면 상, 못하면 벌이라는 율법주의적 편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두 아들의 모습입니다.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누가복음 1511-20)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둘째가 아버지를 졸라서 유산을 얻어가지고 집을 나갑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독립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합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실패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실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기에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돼지 치는 집에 취직했습니다. 그러나 돼지가 먹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려 하지만 그것도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얼마나 비참한 상황입니까?

드디어 그는 집에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 행위가 보입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도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나름대로 처방을 준비합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그의 생각에는 잘하면 상, 못하면 벌이라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잘못했기 때문에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죄책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식의 처방을 생각한 것입니다.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반면에 큰 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아들은 아버지에게 충실했던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잘 이해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의 관점이 드러납니다.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을 받아야 할 자식은 바로 자기라고 생각했는데 죄를 범한 동생이 상을 받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 분노합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누가복음 1525-30)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인간세상의 법칙은 바로 이런 식입니다.

잘하면 상, 못하면 벌!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아들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과 경험과 성경에 대한 무지는 우리의 행위를 가지고 주님앞에 서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기행위가 남보다 더 잘 할때 상대적인 우월의식에 빠져서 자기 의를 붙잡습니다. 큰아들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됩니다. 반면에 자기 행위가 내놓을 것이 없을때 실패감에 빠져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잘하면 상, 못하면 벌! 이것이 율법주의적 관점입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자원을 가지고 설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설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9)

 

(2)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인간세계의 부자관계를 다룬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1:18)께서 아버지가 누구신가를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하면 상, 못하면 벌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탕자와 큰아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20)

 

누가 먼저 보았습니까? 아버지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보십니까?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보십니다.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아버지를 떠나 죄책감에 빠져 있을 때 주님은 측은한 마음으로 우리를 먼저 보시는 분이십니다.

또 달려갔습니다. 두 팔로 목을 안았습니다. 그리고 입을 맞춥니다. 이것은 그림언어입니다. 그냥 문자로만 이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그려보시오.

아버지는 눈을 가지고 보셨습니다. 그 마음으로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두 다리는 죄책감을 가지고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십니다. 그리고 팔로 그를 꼭 끌어안으십니다. 그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입을 맞춤으로 최고의 사랑과 친밀함을 표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는 그러한 아버지 앞에 죄송해하는 아들의 준비된 고백(“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에 대해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면서 4가지를 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누가복음 1522-24)

a)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게 합니다.

옷은 잔치에 들어갈 예복입니다. 예복이 없이는 잔치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22:11-13) 자기의는 더러운 옷(64:4)과 같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자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예복을 입게 된 우리와 같습니다.

 

b) 손에 가락지를 끼워줍니다.

그것은 상속받을 자임을 의미합니다. 그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자녀로서 누릴 권세를 다시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자녀로서의 권세를 갖게 됩니다.

 

c) 발에 신을 신깁니다.

그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를 종으로 받지 않습니다. 아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종 이전에 아들로 삼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아버지의 일에 자신을 드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기꺼이 아버지의 일에 종이 되는 것입니다.

 

d)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잔치는 하나님나라의 풍요를 가르칩니다. 주님이 오셔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의 개념에는 풍요의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핍이 있습니다. 생명의 결핍인 죽음, 건강의 결핍인 질병, 사랑의 결핍인 미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풍요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의 풍요하심의 공급이 중단됩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돌아옴으로 그 풍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15장에 나오는 3가지 비유의 끝에는 항상 잔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모든 것을 주기를 기뻐하심으로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던 것(8:32)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궁극적으로 풍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첫 목회하던 곳에서의 경험입니다.

그곳은 기독교에 대해 매우 배타적인 사람들로서 같은 성씨로 이루어진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에서 전도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교회의 전도사였던 저를 인정하지도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사람에게 다가가면 슬슬 피하는 눈치였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냉대하는 분위기에 열정이 식어가고, 주눅도 들면서 점차 방안에만 머물게 되었습니다. 가끔 제 아내가 저녁 식사를 대하는 저에게 이렇게 농담 삼아 말했습니다. “오늘 밥 값 했어요그 말에 저는 주눅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송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밥값 하려고 기도하러 가곤 했습니다. 죄책감이 제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매우 힘들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하나님 은혜로 외국의 어떤 세미나에 참석케 되었습니다. 거기서 설교하시던 목사님이 탕자의 비유를 가지고 설교하실 때 항상 종으로서 밥값을 못했다는 죄책감에 붙잡혀 있는 제 모습이 바로 탕자의 모습이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어느 기도 사역자가 와서 기도해 주면서 저와 교회의 상황을 그대로 말씀하면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 원한다!” 고 하실 때 잘 하면 상, 못하면 벌이라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날 저는 획기적인 관점의 전환을 경험했습니다.

항상 하나님 사랑을 설교했지만 정작 제게는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전혀 실재가 아니었습니다. 제게 있던 편견이 그것을 가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는 편견 때문입니다. 우리의 편견이 그것을 가려버림으로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헤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전지하심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전지 하시다'는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편견은 그 사실을 가려버립니다. 사실 인간의 세계에서 전지하다는 개념은 없습니다. 인간이 가진 개념은 한 길 사람속도 모른다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지하시다라는 개념이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이나 느낌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 실패와 죄책감이 있을 때 더욱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지하시다는 사실을 붙잡는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에 기초하여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편139:4)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의 모든 말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만 실제로 알아도 우리 신앙은 획기적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몇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1) 부정적인 말도 아십니다.

오늘날 성도들 간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후욕과 판단입니다. 후욕은 뒤에서 욕하는 것으로서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새 부대의 교회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루어져야 할 부분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루어지지 않으면, 성령의 임재는 걷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이 되면서 신년 초에 정확 하지는 않지만외국인이 본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T.V에서 대담프로를 진행하는 중에 독일에서 귀화한 어떤 분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한국인의 부정적인 것에 대해 묘사하기를 의 특성과 비교하여 설명했습니다. ‘는 통속에 두 마리만 함께 두어도 절대 밖에 나올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를 물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매우 기분 나빴지만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우리가 두세 사람만 모여도 부정적인 말이나 후욕을 일삼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말을 아신다는 그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부정적인 말들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2) 우리의 찬양과 기도생활, 모든 신앙생활이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부르는 찬양을 주께서 들으심을 안다면 우리는 열정을 다해 찬양할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주께서 내가 하는 기도를 들으심을 안다면 얼마나 담대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잘 못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내 기도를 주님께서 듣고 계실까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들으심을 분명히 안다면 우리의 기도생활을 달라질 것입니다.

예향교회에서 몇 년 전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뒤에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저는 그날이후 제 기도생활이 달라졌습니다! 주님의 전지하심을 아는 일은 매우 신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그분이 아십니다. 우리가 사람을 의식하는 자리에서 내려서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절대로 성숙하지 못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전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편견이 가려서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순간 사람을 의식하며 삽니까?

저에게 있어서 가장 처리되기 힘들었던 부분이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 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자리에서 성숙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께서 비춰주셔야 합니다.

 

 

2)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는 사역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과 사역, 모든 부분에서 우리의 모델이십니다. 아들이시지만 오직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사역이 성령의 사역임을 증거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복음 418-19)

 

누가도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의 사역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사도행전 1038)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님의 의한 사역이었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말씀을 증거 하실 때도 성령의 능력으로 선포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요한복음 334)

둘째, 예수님의 치유사역도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228)

 

셋째, 예수님은 성령의 각양 은사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 지혜의 은사 (22:15-22)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에 대해 질문합니다. 아주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심으로 아주 지혜롭게 대답하십니다. 이것이 지혜의 은사입니다. (21:23-27,7:53-8:11참조)

· 지식의 은사 (4:7-25)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셨을 때 그 여인이 감춰진 과거의 죄악된 삶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이 지식의 은사입니다. 그 지식의 은사를 통해 그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게 됩니다. (1:47-50, 9:1-7참조)

· 영분별의 은사 (16:15-24)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근원에 대해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베드로의 그리 마옵소서라고 반응하는 것에 대해 그 근원이 사단임을 아시고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책망하십니다.

· 능력 행함의 은사

예수님은 능력행함의 은사를 통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누가복음 517)

예수님의 사역뿐 아니라 제자들도 동일하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서 기다리라”(24:29)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놀라운 능력의 사역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사역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역해야 합니다. 우리도 성령의 능력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410-12절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의 사역은 스스로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나아갈 때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셔서 은사의 나타남으로 사역하신 것입니다. 그때마다 놀라운 능력의 역사들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사역할 때 예수님처럼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역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데 있어서 신학적 편견이 이러한 사역을 방해합니다. ‘하나님 음성 듣는 법을 강의하면서 여러 번 느끼는 바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학적 편견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봅니다. 그 신학적 편견이 깨뜨려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하게 됩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부분에서도 신학적 편견이 매우 심각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신학적 편견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세계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는데, 이것은 서구적 세계관, 계몽주의의 영향이 신학에까지 영향을 끼쳐서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정한 시대 이후에 끝났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특히 은사에 대한 이해에서 성경시대 이후에 특정한 은사들(병 고침, 방언, 통변)은 끝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하는 증거본문은 고전139-12절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서 부분적인 것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온전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성경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주고 확신시키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은사를 주셨으며 그 이후에 성령의 은사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온전한 것성경으로 봅니다. 성경이 오면 모든 불완전한 은사들이 끝났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온전한 것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문법상 중성입니다. 즉 사람이 아닌 물건을 가리키는 중성이며, 디모데후서 315-16절에 나오는 성경의 단어가 바로 중성이기 때문에 온전한 것이 곧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1311-12절에 어린아이 같은 것장성한 사람의 분량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서 잠정적인 은사는 어린아이 같은 것이 유치한 것으로 보며, 성경말씀은 장성한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온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논리에 약점이 있습니다. ‘온전한 것이라는 구절이 중성으로 쓰여 있다고 해서 다른 중성명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다른 많은 단어들을 중성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남성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독생자’(3:16)라는 단어도 중성으로 쓰여 있습니다.

, 고린도 사람들이 이서신서를 받을 당시 디모데후서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온전한 것성경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국의 신학자 “FF. 부루스는 그의 고린도전,후서 주석에서 온전한 것은 예수의 재림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앞뒤 문맥을 보아도 온전한 것은 성경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더 타당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서구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인한 신학에 기초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해 자연스럽게 반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표적, 기사를 통한 사역(능력사역)을 행할 수 있게 되려면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의 역사를 인정하는 성경적 세계관을 가져야만 합니다.

요엘서 기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요엘서 228-30)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얼마나 꿈과 환상을 믿습니까? 오늘날 목회자들 앞에서 꿈과 환상을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세계관으로 인한 편견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적극적으로 기대하지 못합니다. 세계관에서 오는 편견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독교교리에 서구적 합리주의를 결합하여 초자연적인 영감에 의한 꿈이나 환상의 가능성을 배재하는 신학의 영향입니다. 이것의 영향력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학적인 입장이 예수님의 사역과 능력사역이 오늘날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사역을 행할 수 없습니다.

 

 

3) 사람에 대한 편견

많은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부딪칩니다. 왜 그럴까요? 서로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관점으로 보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저는 이것을 관점의 사각지대라고 부릅니다. 오래 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간에도 다툼과 상처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이 관점의 사각지대때문입니다. 서로가 상대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미 살펴 본대로 편견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에서 살았기 때문에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관점으로 판단하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71-5)

 

우리는 자신에게 편견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관점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판단할 때 그 판단으로 훗날 판단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과 사역과 신앙에서 우리의 모델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요한복음 815)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요한복음 826)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도 판단치 않으심으로 우리도 또한 스스로 판단치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판단치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네 눈 속에 들보는 편견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들보’, 즉 편견을 제거한 후에 먼저 밝히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그 편견이 혼돈을 가져오게 합니다. 형제를 자기 관점으로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툽니다.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쓴뿌리의 영향력은 아주 심각합니다. 쓴뿌리는 우리의 삶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과거에 자신이 당한 불의한 일에 너무 집착할 때 쓴뿌리로 남게 되고, 그러한 병든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를 계속 듣게 되어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판단하는 마음입니다. 쓴뿌리는 죄인을 고발하는 검사와 같은 소리를 냅니다. 쓴뿌리의 영향력은 삶의 모든 부분에서 나타나게 되지만, 대부분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좋은 사람과 싫은 사람이 분명한 사람은 편견이 심한 사람입니다. 과거의 경험과 상처로 인해 좋은 타입의 사람과 싫은 타입의 사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편견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다루십니다. 하나님께 나의 주권을 드릴 때 하나님은 내가 좋은 사람만 좋아하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싫은 사람도 주님의 마음으로 기꺼이 섬기게 하십니다. 그것이 참 종의 삶입니다. 그것이 동역자의 삶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편견은 자신이 좋은 사람만 좋아하고 싫은 사람과 함께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편견이 깨지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불가능합니다. 그 편견이 깨뜨려지지 않는 한 진정한 하나 됨도 불가능합니다.

 

4) 편견은 원수의 견고한 진으로서 영적전쟁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린도후서 103-5)

 

이 말씀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영적전쟁을 하고 있다.

· 우리의 병기는 육체에 속한지 않고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한무기이다.

· 강한 무기는 모든 생각과 이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다.

· 견고한 진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과 생각들이다.

편견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 가운데 심각한 이유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과 생각들, 즉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는 편견들이 견고한 진으로서 원수마귀가 우리의 삶을 공격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편견들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 강력한 무기이며, 그때 견고한 진이 파하는 강력한 승리를 얻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을 이용합니다. 마귀의 주된 무기는 거짓말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 사고를 이용하여 거짓말을 믿게 합니다.

에덴동산의 반역을 보십시오.

그 중심에 사단이 있습니다. 사단은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하와의 손을 끌어다가 선악과를 따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거짓된 생각을 넣어주고 하와가 그 생각을 받아들임으로 반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수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통해 대적합니다.

 

베드로의 편견은 사단의 통로였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태복음 1621-24)

베드로의 신앙고백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비로서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오신 목적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류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선생님에 대한 제자로서 가질 만한 매우 훌륭한 세상적인 가치관입니다. 그뿐아니라 그는 약간은 자신의 입지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돌아가신다면.., 사실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쫓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장래는 어찌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더 분명한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에 대한 이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종으로 오실 메시야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말에 대해 사단아 물러가라!”고 선포하십니다.

그의 편견 뒤에 있었던 사단의 역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해서 팔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달랐습니다. 육신적 이유로 그는 예수님에 대해 실망했습니다. 예수님을 법정에 넘겨서라도 메시아라는 사실을 밝히려 했습니다. 편견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뒤에 사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편견을 통해 사단이 역사한 것입니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4)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 (누가복음 223-4)

 

 

편견은 결국 철저한 인본주의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편견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며 근심케 합니다. 그래서 철저히 깨뜨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편견이 있음을 알지도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편견이 있다고 동의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편견을 무시합니다. 무시하게 될 때 자기가 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관점으로 평가합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자기관점에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기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특히 이론으로 알면 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잘 보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삶이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서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편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편견은 우리 삶과 신앙에 있어서 많은 왜곡과 문제를 가져옵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편견은 하나님을 왜곡되게 이해하게 합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심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이해에서 우리의 삶과 신앙은 능력이 있게 됩니다. 또한, 편견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편견이 심할 때 그렇게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편견이 깨뜨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성에서는 편견이 잘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비춰질 때 어떤 부분에서 편견이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편견은 깨지지 않습니다. 자기관점에서는 편견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편견이 있음을 알아도 깨뜨려지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성은 근본적으로 교만합니다. 그래서 배우려는 자세를 갖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적일 때, 또 한 가지 문제는 실재를 이론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론으로 알면 실재인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론으로 알아도 실재의 상황이 닥치면 자기가 보는 바 편견에 기초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의 삶이 변화지 않고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편견이 깨뜨려지기 위해서 안다고 하는 생각을 내리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어야 합니다.

에이든 토저는 그의 책 하나님을 추구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발견하는가? 하나님은 왜 자신의 임재를 어떤 이들에게는 나타내시면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불완전한 그리스도인 경험의 반 조명 속에서 고투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 그 차이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한 가지 중대한 자질은 영적 수용성이었다고 나는 감히 제의한다. 그들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하늘을 향해 열려 있었고, 무엇인가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게 강권했다. 그들이 내적 갈망을 느꼈을 때 그것에 관해 무슨 일인가를 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수용성은 어떤 것을 향한 친근성이며, 어떤 것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요, 어떤 것에 대한 공감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이요, 어떤 것을 갖고자 하는 갈망이다. 그것은 연습에 의해 커질 수도 있고,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없어질 수도 있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지식을 말하기보다는 정반대를 말합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누가복음 1021)

 

바울은 최고의 지성을 가졌지만 하나님은 그를 광야에서 10년 동안 재 교육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안다고 하는 생각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은 편견으로 아무 쓸모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비추심이 필요합니다. 겸손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의 편견이 깨뜨려지고 하나님의 지혜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안다고 하는 생각, 배우고자 하는 자세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한 자의 삶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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