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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십자가의 진리에 동의하는 삶

시리즈설교/십자가능력으로사는삶

by 발의무리 2018. 2. 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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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십자가의 진리에 동의하는 삶

 

 

십자가에 의한 삶은 우리를 진리에 동의하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곧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것은 곧 성화를 이루는 삶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지만 반복적으로 실패했습니다. 몇 년 간 씨름하듯이 고민하다가 죄를 이기는 비결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게 될 때 놀라운 승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리려면 육체의 소욕이 내려져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기 때문(5:17)에 십자가에 의한 삶이 필요합니다.

 

 

1. 진리에 동의하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

 

첫째, 우리가 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로마서 610-11)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놀라운 진리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구원에 이르고 그 진리는 곧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 산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살핀 것처럼 그 진리들을 자동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왔지만, 그러나 아직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우리는 장차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오는 세대를 사모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소유한 자들입니다(5:24). 그러나 여전히 구속을 기다리는 몸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그 몸의 구속을 기다립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로마서 822-23)

 

성경은 죄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죄는 아직 우리 몸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투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도 여전히 그 몸에 세력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그 진리를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 몸에 여전히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몸이 악한 일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본능들은 정상적이지만 우리 속에 거하는 죄가 그 자연적인 본능들을 무절제한 정욕으로 이끌어 갑니다. 죄가 본능을 탐닉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이 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케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선함이 없음을 깨닫고 십자가를 체험적으로 경험한 뒤에, 우리 자원으로 살수 없으므로 주님께 항복하고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면 끝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자원으로 살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항복하며 주님께 온전히 의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진리를 알았다면 주님을 믿음으로 신뢰하여 그 진리를 따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소극적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분께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로마서 812-13)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현재형입니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려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에 동의하여 설 때 놀라운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6)

그것은 우리가 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투쟁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진리에 기초하여 몸의 행실을 죽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삶에 놀라운 승리가 있습니다.

 

 

둘째, 이것은 영적 전쟁과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 오셨을 때 이 세상임금인 사단은 예수님을 대적하여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여 싸움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원수가 우리를 공격하는 주된 통로는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은 삶의 영역들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12:43-44)

예수님은 인간 본성에 실재로 악한 영들을 받아들이고, 어떤 형태의 쉼을 줄 수 있는 차원의 세계가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서 악한 영이 거할 곳을 짓는 건축자료가 될 만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린도후서 103-5)

 

악한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이론과 생각들을 통해 요새를 삼고 공격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이론을 파하는 것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파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모든 생각들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때 원수의 견고한 진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한 요새들을 몇 가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죄의 통로가 있습니다.

원수는 우리의 죄를 통해 우리를 공격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8:34).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노릇 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 원수가 훼방하는 통로가 됩니다. 특히 제 경험으로는 다른 사람을 용서치 못할 때 그 공격은 더 심하게 됩니다. 불순종의 죄가 그 통로이기도 합니다. 사울은 불순종의 죄를 범한 후에 악신이 임합니다. 사무엘은 사울 임금이 불순종한 죄에 대해 사술의 죄와 같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사무엘상 1614)

(2) 감정의 통로가 있습니다.

원수마귀는 우리의 감정을 통해 공격합니다. 여러 감정들이 원수의 공격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하면서 의의 흉배를 말합니다. 의의 흉배는 우리의 감정을 보호하는 방어무기입니다.

분노의 감정이 마귀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품어도 하루해를 넘기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틈을 타기 때문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에베소서 426-27)

 

시기, 질투의 감정이 마귀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향한 사람들의 노래를 듣고 시기, 질투를 하게 되며 악신에게 통로를 내어줍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9)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10)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사무엘상 187-10)

그 외에도 많은 감정은 마귀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많은 감정들을 분별하고 진리에 동의하여 서야 합니다.

 

때로는 원수의 공격이 있을 때 감정의 혼돈이 올수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배경에는 원수의 까부름이 있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누가복음 2231). 그때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에게 있었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립니다.

 

(3) 욕심의 통로가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4-15)

마귀는 욕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합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사단의 스스로 하나님 되라는 유혹 때문입니다. 그 이면에 스스로 자기 인생을 주도하려는 하와의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올바르지 않음에도 욕심에 미끌리어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욕심의 한 형태인 야망이 있습니다. 그 야망이 우리를 유혹케 하는 통로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야망의 노예가 됩니다. 연합하지 못하도록 원수가 훼방할 때도 이 야망을 이용합니다. 야망은 경쟁자를 그냥 두지 않게 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게 합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욕심이 있었고, 그것을 사단이 이용하여 성령을 속이게 되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도행전 53)

 

(4) 세상풍속의 통로가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베소서 22)

원수는 세상사랑을 통하여 공격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주님을 알기전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 풍속을 쫓았고, 그 뒤에는 공중권세 잡은 자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풍속은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없는 모든 삶의 가치관이 곧 세상입니다. 그 세상의 가치관 뒤에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있습니다(요일2:16).

 

(5) 하나님 없는 이론, 생각, 편견 등, 인본주의적 사고입니다.

이미 앞에서 본 것처럼 견고한 원수의 진이 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님 없는 이론, 편견 등 인본주의적인 사고들이 있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태복음 1621-23)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것을 만류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강력하게 책망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고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사람의 일을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뒤에 사단이 있음을 책망하십니다. 사단이 베드로를 이용할 수 있었던 부분이 바로 세상적인 생각과 편견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사건에도 사단의 작품임을 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고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기게 됩니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4)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 5)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누가복음 223-5)

유다는 예수님에 대해 실망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돈에 대한 탐심이 있어서 예수님의 돈궤를 맡은 자로서 가끔 돈을 훔치기도 했습니다(12:6). 그에게 편견과 탐심이 사단에게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에 동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이루신 일에 기초하여 진리에 동의할 때 모든 원수의 훼방은 단번에 끊어집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1)

셋째, 하나님의 기준가운데만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승리가 있습니다. 진정한 안식도 여기 있습니다.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뒷받침 하십니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647-49)

 

 

2. 진리에 동의하는 삶의 원리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로마서 617)

 

1)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첫째, 교훈의 본이 무엇일까요?

교훈의 본이란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진리들을 말합니다. 성경적인 모든 교리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었던 자요, 절망 가운데 있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피할 길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들이 교훈의 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가 된 것입니다. 자녀 된 우리에게 주신 모든 하나님의 기준이 교훈의 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훈의 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순복해야 하며,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순종의 과정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는 분명히 순종입니다. 이것은 아주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다만,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넘어 섭니다. 어떤 이들은 교훈의 본을 연구하고 이론으로는 잘 알고, 그것을 지적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떠한 생명력도 없습니다. 그것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육신적인 사람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지적인 동의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인격체 되신 주님을 신뢰함으로 순종의 자리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원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은혜 부으실 것을 믿음으로 신뢰하여 진리에 순종하는 자리에 가야 합니다.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서 1626-27)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비밀의 계시를 주신 것은 믿어 순종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주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우리를 능히 견고케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삶이 하나님 백성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순종은 먼저 마음으로 믿는 일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진리에 동의하는 일로부터 출발합니다. 마음으로 믿을 때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을 때 하나님의 주권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순종은 마음에 동의하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측면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지성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성에서는 하나님의 기준을 보게 됩니다. 모든 교훈의 본을 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거나 결정해야 될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기준을 찾고 기준을 보는 일이 지성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한 예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보십시오. 성경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었고, 그때 함께 죽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죄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죄는 여전히 우리 죽을 몸에 왕노릇 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 기초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로마서 611)

우리는 세상에 대해 못 박혔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세상적인 가치관, 세상적인 관심사에 대해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옛 사람에서 나오는 감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옛사람에서 나오는 감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목 박혔음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옛사람에서 나오는 감정은 왜곡된 감정입니다. 부정적인 감정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옛 본성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4)

“Those who belong to Christ Jesus have crucified the sinful nature with its passions and desires” (NIV번역)

 

 

(2) 감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동의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원인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입니다. 감정이 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데 감정을 가지고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8:10)’고 하셨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fear)하는 것에 놀라운 약속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부정적인 감정, 옛 본성에서 나오는 감정들입니다. 지성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보았다 할지라도 부정적인 많은 감정들이 그것을 방해합니다. 의심, 분노, 미움, 시기, 질투, 두려움, 불안, 억울함, 혼동, 낙심 등의 감정들이 진리에 동의하는 것을 가로막게 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어떤 사람과 상담을 하면서 하나님은 용서하기 원하십니다!’라고 하나님의 기준을 말하면 알아요, 그런데 안돼요!”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임을 아는 데 실재로 감정이 처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쓴 뿌리의 영향력이 우리의 감정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쓴 뿌리는 과거에 부정적인 경험과 연관이 있습니다. 억울한 경험들, 속임을 당한 경험들이 치유되지 않으면 쓴 뿌리로 남게 되어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욕심으로 인하여 어떤 것에 집착하면 사단은 그것을 쓴 뿌리로 심게 되고 심각한 죄로 나타납니다.

쓴 뿌리가 있으면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병든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를 계속해서 듣게 되고 결국 진리 가운데 서지 못하게 됩니다.

 

사울임금은 쓴 뿌리를 가진 대표적인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왕으로 세워졌을 때 그는 매우 겸손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순간부터 자기중심적으로 가버리고 교만해 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사무엘선지자에 의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때 그것이 그의 상처로 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겠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22-2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29)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26-29)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35)

 

사무엘에 의해 세워진 사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다는 말씀이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쓴 뿌리로 남게 됩니다. 그 마음은 다윗이 블레셋군대를 물리치고 돌아올 때에 들어납니다.

 

사무엘상 185-10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6)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7)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9)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10)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쓴 뿌리를 가진 사울에게 다윗의 지혜와 사람들의 인기는 시기와 질투로 그리고 마침내 악신이 들려 충성된 종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에게는 지금 진리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쓴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충성된 종을 죽도록 미워합니다. 그의 쓴 마음은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결국 자신이 죽게 됩니다.

 

쓴 뿌리가 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많은 사람이 더러움을 입을 수 있습니다(12:15). 억울한 생각이 들 때 십자가를 보십시오. 과거의 억울한 경험이 떠오르면 십자가를 보십시오. 거기 계시된 주님의 성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자신의 잘못이 있다면 먼저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품을 빚어 가심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오직 주님께만 반응하는 삶입니다.

 

 

(3) 의지의 영역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문제를 만날 때 성령님은 진리를 보게 하십니다. 그러나 다음순간 부정적인 감정이 그것을 보지 못하게 하거나 혼돈케 하여 진리에 동의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무엇에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반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진리에 반응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의 혼돈이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진리에 드려야 합니다. 진리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의지가 수반되지 않으면 어떠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것이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는 과정입니다. 그때 우리는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618)

 

2) 마음으로 순종하는 삶의 구체적인 예들

 

첫째, 주신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반응하는 삶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을 때 그 약속이 이뤄지기까지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하시지만, 많은 경우 그 약속을 내일 이루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때 불신에 빠지면 환경을 보면서 조급해 지고, 자기 스스로의 방법을 모색하다가 낙심케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우리는 많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 속에서 영적인 혼돈을 경험케 됩니다. 그때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 놓으셨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아신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신다! 주님은 실수하시지 않으신다! 지금 최선의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리고 과거의 정체성과 현재의 신분을 보면서 주님께 반응합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당신의 때에 이루실 것을 신뢰할 때 마음 안에 안식이 있게 됩니다. 더 이상 환경에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둘째, 죄책감의 문제

 

우리가 반복적으로 실패하게 되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볼 때 죄책감에 눌리게 됩니다. 죄책감이 있으면 기도도 잘 할 수 없게 됩니다. 자주 졸리기도 하고 의욕이 상실되어지게 됩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여러 차례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우선적으로 할 일은 회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죄책감에 눌리면 회개도 잘 되지 않습니다. 자주 실패했기에 또 다시 회개하는 것이 너무 뻔뻔스럽게 생각되어지기도 합니다. 그때 십자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래 선함이 없는 자였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실패한 자신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되, 자신에게 깨달아지는 대로 회개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히브리서 1019)

그렇게 회개한 후 주님께서 용서하셨음을 적극적으로 신뢰하고서 죄책감을 대적해야 합니다. 죄책감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께만 반응하기를 결단하고 주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그때 놀라운 자유함과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됩니다.

셋째, 야망과 관련된 부정적 감정들

 

낙담이나 좌절, 혹은 시기 질투의 감정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대개 야망이 원인입니다. 그 야망은 비교의식을 갖게 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교회가 부흥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시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정말 기뻐야 하는데 많은 목회자들이 즉각 자신이 섬기는 교회와 비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른 교회는 부흥하는데 왜 우리 교회는 부흥하지 않는 걸까?”라고 생각하면서 금방 낙담합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아집니다. 이쯤 되면 기도도 잘 되지 않습니다.

저 역시 자주 이런 낙담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제 삶의 근거와 토대이기 때문에 이런 좌절이 있었을 때 다시 십자가를 묵상함으로 주님 앞에 섭니다. 그때 주님 앞에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기뻐하고 축복하지 못한 자신을 성령님께서 보여주십니다. 도리어 비교의식을 가졌던 잘못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즉시 회개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잘 세워지는 것이 놀라운 축복인데 그것을 보면서 경쟁심을 가졌던 것을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 제가 그런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축복합니다. 그 교회가 은혜 가운데 잘 세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의지하여 기도하면 순식간에 원수의 참소와 낙담, 좌절과 경쟁심은 끊어지고 놀라운 자유와 평강이 찾아옵니다.

 

넷째,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예

 

사람과의 관계에서 억울함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저에게 그런 경험들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십자가를 적용했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상황을 보지 않으려고 했고, 그때마다 놀라운 승리가 있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억울함을 경험케 되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는 하나님의 기준을 붙잡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진리에 동의하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1) 그 억울함을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마음과 처지를 아십니다(139).

(2) 원수 갚는 것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로마서 1219)

(3) 원수까지도 사랑하십시오.

그를 최선의 마음으로 축복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

(4) 이때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억울함의 감정과 싸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처리되지 않은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에 대해 싸워야 합니다. ‘분노의 감정, 억울함의 감정은 죽었다!’라고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대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사건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그럼에도 우리의 삶에 불의한 일이 닥쳤다면, 그것을 우연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만 반응하는 법을 가르치시고 계실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인내를 가르치고 계실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교만을 들춰내 실수 있습니다. 비춰지는 대로 회개하거나 조정하십시오. 그리고 십자가를 삶에 적용하십시오. 거기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과 나를 향한 신실하심에 반응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수하시지 않으심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죄인 된 나를 용서하시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셨던 주님의 마음을 배우십시오.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진리를 붙드는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개 자존심 때문에 부부간의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진리에 동의하여 서야 합니다. 거기에 놀라운 승리가 있습니다. 진리에 동의하는 삶이 곧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제가 죽청광림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 때 가끔 아내와 의견충돌로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투고 나면 저는 성격상 속히 화해를 하려고 하지만 제 아내의 성격은 저와 달리 속히 화도 내지 않지만, 일단 화가 나면 화해가 금방 잘 안되는 성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다투면 그 다음날까지 말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어느 날에도 다투고 난 다음날까지 화해하지 못한 상태로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의 처지를 깨닫게 하시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가지고 이곳 목회지에 와서, 다투고 화해도 않고 있는 제 모습을 깨닫게 하시면서 그것이 분리의 영인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여, 오직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겠다고 기도하면서 목회자가 되어 목회지에 왔는데 정작 마귀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니 이건 아니다싶었습니다. 그 즉시 제 아내에게 눈물을 흘리며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그날 이후 저희 부부사이에 몇 가지 원칙을 정했습니다.

먼저, “싸우기 전에 누구편이 될 것인지 생각해보자. 하나님 편 될 것인지! 마귀 편 될 것인지!” 그 다음에는 혹시 싸우더라도 극단적인 말은 하지 말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리 다투고 화가 나더라도 마귀가 틈을 탈까 생각하여 자기 전에 화해하자.”

 

마귀가 분리를 좋아한다면 우리는 어찌하든지 하나 되어야 합니다. 특히 부부간의 모든 자존심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배우자를 주님께서 주셨다는 주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피차에 자존심을 내리고 진리에 동의하여 하나 되어야 합니다.

 

 

3) 믿음의 순종이 어려운 이유

 

이런 부분을 나눌 때마다 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이러한 원리대로 사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그러면 대다수의 대답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 원리를 설명해도 어렵게만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잔뜩 기대를 하고 듣다가 실망한 것 같은 눈치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어려울까요?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권위를 갖습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6)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이 옳음을 알고도 순종이 안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권위의 문제입니다. 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내가 순종하는 그것이 내 삶에서 권위를 행사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순종한 그것이 현재 내 삶에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권위에 대해 아십니까?

제가 20여 년 전에 군대를 제대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한 부대에서 근무했던 3개월 고참을 만났습니다. 그와 나이도 같았고, 아주 오랜만의 만남인데도 여전히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그는 말을 낮추고 서로 편하게 대하자고 했지만 저는 여전히 그에게 말을 높여 대화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권위입니다. 제가 오래전 약 20여 개월 함께 살면서 권위를 주었던 것인데,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권위를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진리에 동의하여 순종하는 삶이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기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오래토록 순종해 왔다면, 그것을 거스려 진리에 동의하는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친 두려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갖는 두려움의 대다수는 실재로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것을 무수히 경험하면서 두려움을 갖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되면 똑같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래전부터 그 감정에 순종함으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이미 견고한 진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게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의에게 종 된 자들입니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6:18). 이것은 과거에, 단번에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순간,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의 삶에 권위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죄에게 권위를 내어주었기 때문에 여전히 그렇게 속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전략입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미 감당하셨고, 우리는 이미 거기서 해방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올 때에 진리의 말씀을 암송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복음 1427). 그리고 거기에 동의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감정은 이미 죽었다(5:24)고 선포하십시오. 그 두려움은 거짓이라고 선포하십시오.

 

내가 무엇이든 반복적으로 순종했다면 그것이 우리 삶에서 권위를 행사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거스리기가 쉽지 않게 됩니다. 분노에 자주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기 질투에 넘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먼저, 진리에 기초하여 회개하십시오. 특히 반복적으로 속은 것에 대해 회개하십시오. 그런 다음 그 감정은 십자가에서 죽었다(5:24)고 소리쳐 보십시오. 큰 소리를 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축복하십시오. 온 마음을 다해 축복하십시오. 그때 끊어집니다.

 

 

둘째,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동의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지 때문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하심, 그리고 사랑을 실재로 안다면 우리는 담대할 것입니다. 또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놀라운 진리를 알게 될 때 승리케 됩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지 못하고 알아도 언제 그 진리를 적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자매는 과거의 지은 죄에 대해 오랫동안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친밀함도 자유함도 없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이론으로는 알지만 실재로는 납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용서하신다는 말씀들을 나누는 가운데 성령님께서 그 마음에 선명히 깨닫게 하셨고, 곧 그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영적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영적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죄, 세상, 욕심, 감정, 편견 등을 통해 원수가 훼방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진리를 가려서 보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4)

 

 

4) 우리가 순종하여 승리할 수 있는 이유

 

진리에 순종하는 삶이 어려워 보이는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이유가 훨씬 더 강력합니다. 사실 순종이 어려워 보이는 이유는 진리가 아닌 거짓에 속는 것입니다. 반면에 순종할 수 있는 있는 이유들은 이미 이루어진 진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종할 수 있는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그 말은 죄가 우리 삶에서 더 이상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영의 영역에서 살아있다는 것과 죄에 대하여 죽고 죄와 율법의 영역과 육신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로마서 614)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 할지니얼마나 강력한 표현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죄가 왕 노릇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죄와 세상에 대해 단번에 죽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자꾸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사실과 함께 꼭 붙들어야 할 진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눈을 열어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6:11).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살았다는 말은 은혜가 내속에서 왕 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521)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제 죄의 권위아래 있는 자가 아니요, 은혜의 권위아래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진노가운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2:16-18). 그리스도 안에서 에덴동산의 축복들이 회복되어 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해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안에 들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빚어 가실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에베소서 14)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빚어 가십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그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살았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거룩케 하십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6)

 

우리가 진리에 동의하는 것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때 하나님께 대해 살아있는 우리를 주님은 당신의 능력으로 도우십니다. 자신의 자원으로 할 수 없으나 그 능력의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음으로 신뢰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하고 은혜 속에서 자라게 하시고 성숙시키실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진리에 순종할수록 진리의 권세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근육과 같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할수록 그 다음에 순종이 쉽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경험으로 주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순종할수록 말씀이 내 삶에 권위를 갖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들에 권위를 주었기 때문임을 살폈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순종하든지 순종하는 것의 종이라”(6: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할수록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권위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진리로 자유케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은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3:12)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진리에 동의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영적전쟁에 승리하는 삶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강이 넘치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수 있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놀라운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이렇게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화의 삶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로마서 612-14)

 

십자가로 사십시오.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십시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놀라운 진리에 토대로 서서 승리하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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