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성경적인 원리들
그렇다면 성령 사역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회에 접목시킬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부분을 나무에 비유해서 설명하고자합니다. 예를 들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기 위해서는 나무뿌리와 줄기와 가지가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열매는 가지에서 열립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성령사역의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비슷한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저는 일부 목회자들이 외국이나 국내의 세미나를 다니면서 그 곳의 열매만을 따다가 자신들의 나무에 매달아 놓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그것이 치유 사역이건, 찬양 사역이건, 혹은 보다 광범위한 성령 사역이건 단순한 사역의 모양과 방법만을 배워 그것을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접목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입니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과수원에 가서 좋고 탐스러운 열매를 따다가 자기 정원에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열매를 재생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만약 어디에 좋은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으면, 그 사역 배경에 놓여 있는 가치관과 그것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가치관과 원리들을 자신의 교회에 정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같은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훌륭한 외국 목사님에게서 한국 목사님들은 자료만을 원한다는 소리를 듣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 분의 말은 한국 목사님들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가치관과 기준 위에 서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려 하기보다는 성도들에게 가르칠 자료만을 원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한 자세로는 절대로 교회 안에 진정한 성령 사역을 접목할 수 없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당연히 뿌리가 있어야 합니다. 뿌리는 땅 속에 묻혀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뿌리는 거기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사역에 있어서도 뿌리가 있습니다. 이 뿌리는 성령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들입니다. 이 원리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새물결선교회나 포도나무교회의 성령 사역 시간에 참석한다 할지라도 그 원리들을 볼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그것들을 매번 말하지 않습니다. 벽에다 써 붙여 놓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거기에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 원리들을 토대로 그 위에서 행합니다. 저희들은 그것들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뿌리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저는 여기에서 중요한 세 가지 원리들을 다루고자 합니다.
1. 말씀과 성령의 조화는 필수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소위 “말씀, 말씀”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라는 단어에 강한 엑센트를 넣어서 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을 잘 연구해서 그것을 우리의 삶에 잘 적용하면 된다. 우리는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이 말은 매우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립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분명히 맞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의 신앙과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을 담고 있는 것도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잘 연구해서 우리들의 삶 속에 잘 적용해야 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위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틀립니다.
위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성경적인 표현으로 "문자'에 의한 삶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의 삶입니다. 구약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연구해서 최선을 다해 그것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은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은 옳고 거룩하지만, 우리 인간이 타락하여서 그것을 다 지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자, 즉 하나님의 계명과 법이 나쁜 것이어서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닙니다. 계명도 율법도 선하며 의롭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타락한 성품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을 다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들이 결국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은 이 점을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문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5-6, 10:12, 14).
그래서 하나님은 새 언약을 세우시면서, 그것을 문자에 의한 삶으로 세우지 아니하시고 성령에 의한 삶으로 세우셨습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여기에서 의문은 문자를 그리고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영어 NIV 성경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기 위해 우리 속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세우시는 분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경은 계속해서 바로 그 목적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더욱 상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저가 또 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성서학자인 F.F.부르스는 이 구절에 대해 주석을 달면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기독교인의 부활 사이의 현재 시간은 성령의 시대이다“라고 말했습니다(New Century Bible Commentary).
새 언약의 삶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한 삶이기 때문에 성령님이 없으면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선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도 성령님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을 잘 배우는 것은 성령이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잘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그것은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나 하나님은 전혀 알지 못한 삶의 본보기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 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7-39). 이 부분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알기 원하시면, 저의 책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와 다가오는 하나님의 군대를 참조하십시오.
우리의 사역을 위해서도 성령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사역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노아가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 그래 큰 배를 하나지어서 영광을 돌려야지”라고 말하고 방주를 지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그에게 말씀하셨고, 노아는 그저 믿음으로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이것은 신구약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은 우리가 임의로 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것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았다고 해서, 그 다음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의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또한 시간적인 면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은 모든 면에서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성령께 민감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아버지의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무리하게 교회를 건축하다 부도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성도들이 소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일을 벌였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만을 뒷받침하십니다.
그 외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하면 거듭나는 순간부터 하나님 앞에 가는 그 순간까지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오직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 4:30). 왜냐하면, 부활의 날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고,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이시는 등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기 위해 성령님이 와 계신데, 우리들이 그 분을 지속적으로 근심케 하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한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승천하실 때, 우리에게 책을 한 권 남겨두고 가신 것이 아니라,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경은 필요없다는 말인가?“라고 어떤 분은 반문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기준을 담고 있습니다. 심지어 성령의 역사에 대한 판단의 기준도 성경 속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말씀과 성령의 조화가 필수적입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이 정확하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속에서는 말씀과 성령이 온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아셨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아도 이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것을 왜곡하여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도, 예수님은 사탄의 의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해답을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이 자세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말씀, 말씀” 하면서도 실제로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에는 소홀히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옳은 교리에만 집착합니다. 물론 옳은 교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도 반드시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세가 없이 성령의 은사나 역사만을 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뿐 아니라, 영적인 간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로는 진정한 성령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능력이 임해도 얼마 있지 않아서 말라버릴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철저하게 성령에 의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철저하게 성령께 민감하여 사셨고,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조화에 대한 또 하나의 좋은 예는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의 중요성을 매우 강하게 강조하셨습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우리는 여호수아가 그 당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들을 모세 다음으로 가장 가까이서 지켜 본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역사의 한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그에게 이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강조하셨습니다.
오늘날 조그마한 영적 체험만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거나 영적 지도자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소위 자기가 받은 감동이나 자신의 체험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미혹됩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다림줄 위에 철저히 서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반면에 여호수아는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따랐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은 그 당시 성경인 모세 오경을 잘 연구하고 그대로 실천한 결과일까요? 아닙니다. 모세오경 어디에도 가나안 땅을 정복할 방법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할 때, 그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호수아는 바로 그 성령께 민감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신 34:9).
초대교회 당시 전세계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안디옥교회도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이룬 교회였습니다. 그 곳에서 교사들과 선지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하나님을 찾던 중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그들이 그 명령에 순종한 결과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행 13:1~3참조). 여기에서 교사들은 말씀을 대변하는 자들이요 선지자들은 성령을 대변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파송된 사도들의 삶에도 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때마다 항상 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사실 그것이 모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특히 오늘날은 말세지말로서 말씀과 성령의 조화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령 사역을 교회 안에 접목시키는 그 뿌리에는 우리의 삶과 교회의 삶에 말씀과 성령의 조화가 필수적이라는 가치관이 놓여 있습니다.
2. 말씀의 선포와 아울러 성령의 역사를 자동적으로 간주한다.
성경은 세상을 하나님께로 화목시키시는 것이 우리의 일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고후 5:19). 이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잃은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일이 마치 우리의 일인 것처럼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 모든 무거운 부담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우리들이 짊어집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우리들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사실을 올바로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그 모든 노력을 내려놓고 조용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도록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역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그 진리를 진실로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모든 역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일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그 일들을 뒷받침하신 것에 대한 예로 가득합니다.
먼저 사도행전 14장을 보십시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여기도 보면,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은혜의 말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무엇보다 우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분의 복음입니다. 둘째,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복음을 증거하시기 위해 사도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셋째, 이 구절은 또한 하나님께서 사도들이 자신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힘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저 분은 참으로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야.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 분을 통해 놀라웁게 역사하신다.“ ”저 분은 참으로 헌신적인 분이야.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행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그러한 관점에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하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행 3:12-13). 베드로는 먼저 이 사건이 전혀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그를 고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이 자신의 경건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행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 날 그 사람을 치유하기로 택하신 것은 예수님께 최고의 영광이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오래 전부터 그 곳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살전 1:4-5). 이 구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하신 것을 내가 알겠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 너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능력과 큰 성령의 역사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3-4도 말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성령님의 역사는 또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바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위임령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그리고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이 나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복음을 뒷받침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을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복음을 뒷받침해 주실 것을 당연히 간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뒷받침을 기대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확신이 가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감정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십시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혀진 『능력치유』의 저자인 죤 윔버 목사에게 그의 사역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그에게 감동하시기를 매주일마다 치유에 대해서 설교하고, 설교를 마치고 나면 환자들에게 나오라고 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죤 윔버 목사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해 준 사람들이 환자들이 앓고 있던 감기에 전염되어 아팠습니다. 아무런 효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주일을 계속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성령께서 또렷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네 경험을 전하지 말고, 내 말씀을 전해라.” 성령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생각과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성령의 역사들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해서 우리가 성령 사역을 행하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해서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감정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옳지 않은 자세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죤 윔버 목사는 그 후로 계속해서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했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놀라운 치유의 역사들을 나타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들 가운데 치유사역이 회복되는 일을 위해 그를 놀라웁게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면, 이제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뒷받침해 주시도록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기를 원하시는 만큼 내가 순종하리라 하는 자세를 가지고 그 분의 행하심을 기대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부터 몇 년 전 제가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처음으로 예배 시간에 성령님의 역사를 초청했을 때, 초기에는 별다른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과 저는 눈을 감고 하나님을 묵상하며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이따금씩 하나님께서 감동주신 대로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을 종종 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성령의 역사는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 볼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던 그 초기에도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나님께서 성도들 속에서 귀한 일들을 행하셨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난 뒤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을 당연히 간주합니다. 그분이 역사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제가 성령님을 초청하였을 때 겉으로 보이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아직 아무런 감동을 주시지 않는다 할지라도 전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역사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이 역사하시는 만큼만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날 성령께서 아무런 역사를 나타내지 않기로 선택하신다면, 그것조차도 저는 “할렐루야” 입니다. 어차피 선택은 성령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성령님을 신뢰함으로 기다리면, 그 분은 놀라운 역사들을 나타내십니다.
3. 예배의 주관자는 성령님이시다.
우리의 예배 가운데 성령의 사역이 접목되기 위해서는 예배의 주관자는 성령님이라는 성경적인 원리가 그 뿌리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한편으로는 너무 인본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예배는 잘 짜여진 순서에 따라 매끄럽게 진행됩니다. 시간도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 오전 11시에 예배를 시작하면, 12시 정각에 예배를 마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렇게 예배를 잘 진행하는 목회자를 센스 있는 목회자라고 말하고, 그것이 목회를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는 성경이 말하는 예배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예배의 주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빌립보서 3:3에서 사도 바울이 참다운 기독교인의 특징에 대해서 말하면서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여기에서 "봉사하다"라는 단어는 "예배하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실제로 영어 NIV 성경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의 주된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성령으로 예배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4:23-24 참조). 그런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저의 책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의 3장을 보십시오.
성경에 보면 초대교회의 예배는 또한 성령의 주관하에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나는 예배였습니다. 성령님이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았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있어서 각 악기는 지휘자의 지시를 따라 소리를 냅니다. 마치 각 소리가 지휘자의 손끝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도 그러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만지시면 각 사람을 통해서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이나타나 교회를 유익하게 했습니다. 즉, 교회를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
갔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고전 14:26). 여기서 “모일 때”는 교회가 예배로 모일 때를 말하고, “계시”는 예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예배의 주도권을 성령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 분의 인도에 민감하여야 하며, 그 분의 모든 역사를 환영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임의대로 정해 놓은 순서에 따라 그저 우리 생각대로 예배를 드리면 성령을 거역하고 소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설교자라고 말하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 위험성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매우 두려운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주목 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습니다. 어느 한 지점을 향하여 모든 일들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항목이 미리 정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에 마쳐야 하는 것이 다 되어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제 친구 가운데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순회 설교를 하면 할수록 이러한 일을 더 많이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에서마저 강사로 오는 목사에게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것을 저는 반복적으로 듣습니다. 그리고 그 문자 그대로 그 앞에서 그 순서지를 놓고 그대로 행할 것을 종용합니다. 11시에 시작합니다. 성경을 봉독하고 또 거기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하여 12시가 됩니다. 그런 다음에 축도가 이어 집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아주 심각합니다. 그처럼 길지 않은 설교가 덕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설교의 길이를 위해서 설교를 길게 늘어뜨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프로그램에 너무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이처럼 묶어 놓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매우 심각하게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로이드 존스 목사 저 『부흥』, 103-104쪽, 생명의 말씀사)
우리들이 예배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배에 대한 오늘날 우리의 그릇된 인식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바꾸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너무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서 예배의 성경적인 원리와 태도보다 전통에 기초한 모양과 순서를 중요시 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율법주의적인 사고가 깨뜨려지지 않는 한 우리는 절대로 성령님의 참되고 자유로운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는 항상 성령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기를 원하시면 제 책 성령이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와 『다가오는 하나님의 군대』를 참조하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질서대로 하라고 하신 성경을 인용하면서 반문합니다(고전 14:40).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질서는 우리가 짜놓은 순서를 따라서 하라는 말이 아니고, 성령이 인도하시는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질서를 따라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고린도전서 12-14장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임을 기억하십시오.
저희들은 성령님이 예배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예배 중에 그 분의 인도에 민감하려고 애씁니다. 또한 그 분의 역사하심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사모합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실 때, 그 인도를 따라 순종합니다. 그것이 치유이건 예언이건 우리의 죄를 회개케 하시는 것이건 우리의 헌신이건 그 분의 인도에 우리 순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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