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성령사역의 요인
우리는 앞에서 성령 사역의 뿌리와 줄기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나무에 있어서 뿌리와 줄기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열매는 줄기에서 맺히지 않습니다.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적인 원리들과 영적인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성령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 사역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령 사역의 요인들이 필요합니다. 그 요인들은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시간 즉 성령 사역시간과 사역자들입니다. 그것들이 성령 사역에 있어서 가지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1. 성령 사역 시간
우리들이 성령의 역사를 원하면 실제적으로 그 분이 역사하실 수 있는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성령 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원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우리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 분이 역사하실 수 있는 시간을 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그 분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예배에는 그분이 역사하실 수 있는 시간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정해진 순서를 매끄럽게 진행하는 일에 바쁩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원합니다. 마치 성령께서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살짝 오셔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성령의 일을 마치시고 돌아가시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믿음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서 실제로 역사하실 것을 믿으면 그리고 그것을 원하면, 그 분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시간을 그 분께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포도나무교회나 제가 인도하는 집회에서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성령 사역 시간을 갖습니다. 성령께서 실제적으로 역사하실 수 있는 시간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포도나무교회와 새물결선교회의 예배는 크게 나누어 세 파트로 되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파트는 찬양과 경배이고, 두 번째 파트는 말씀 선포이고, 세 번째 파트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이것은 단지 주일 예배 뿐만이 아닙니다. 저녁 예배, 화요모임, 심지어 일반적으로 구역 예배라고 부르는 홈그룹 모임 등 모든 예배에서 그렇습니다.
또한 성령의 사역은 단지 예배 시간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서 심방할 때에도 심지어 전도할 때에도 할 수 있습니다. 포도 나무교회의 경우, 심방 중에 성령 사역(우리는 이것을 기도 사역이라고도 부름)을 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을 그 곳에서 경험합니다.
전도할 때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기도 사역하는 것 또한 참 효과적입니다. 이 부분을 잘 접목시킨 프로그램이 지금 세계적으로 놀랍게 사용되고 있는 알파 코스입니다. 알파 코스는 영국 홀리 브롬프톤 성공회 교회에서 시작되어 지금 전 세계적으로 놀랄게 퍼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침체에 빠져 있던 영국 교회 전체에 활력을 불어 넣을 만큼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예수님을 가감없이 전하는 것, 식사를 통한 친교,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의 질문과 답변 등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핵심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찬양과 경배 그리고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찬양과 경배나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가치관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가치관과 정확하게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이 합해진 알파 코스를 통해서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에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이 일은 교파를 초월해서 범교단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교회에서 알파코스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참석하는 규모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는데 있어서 성령 사역이 얼마나 요긴한지 벌써부터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 첫 번째 알파코스에 참여 했던 한 자매는 다른 여러 종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기 치료와 같은 것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알파 코스의 일부인 성령 수양회 중 성령께서 그 분에게 강하게 임하자 그 분은 주님을 영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도하는데 있어서의 성령 사역은 단지 알파 코스를 통해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하는 능력 전도의 예들이 가득하며, 이 일들은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경우에도 성도들이 전도 심방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을 따라 기도하고 순종함으로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경우가 요즈음 들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알파 코스가 우리나라에 몇 년 전에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것이 불신자 전도용으로 보다는 초신자 훈련이나 심지어 제직 훈련용으로 주로 쓰여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나라 교회에 찬양과 경배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가장 진수적인 부분이 빠져 버리니까 원래의 목적을 위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참고로,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 사역 혹은 기도 사역은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그 사람을 앞에 앉혀 놓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도록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성령 사역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 하는 것과 그 사람을 위해 기도 사역 하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방법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람들을 옆에 앉혀 놓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여러 시간 동안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즉, 치유사역 혹은 성령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2. 사역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한 두 번째 요인은 사역자입니다. 성령님은 사람의 손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직접 사람들을 만져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병을 치유해 주실 수도 있고, 그들에게 죄를 지적해 주실 수도 있고, 그들을 위로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실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성령님은 사역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직접 만져 주실 때에도 사역자들이 기도해 주면 훨씬 더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교회에서 처음에는 목회자 혼자서 사역자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여러 사람들을 동시에 만져 주실 때 그들 모두를 위해 기도해 주고, 또 각 사람을 위해 충분한 시간을 드려 기도해 주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사역자들이 필요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데만 한 시간 이상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사이즈에 따라 필요한 사역자들의 수는 다르겠지만, 그 많은 사역자들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요? 준비된 사역자들이 교회에 더해지면 좋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그런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어떤 사람들이 들어온다고 해도 그들을 쉽게 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머지않아 후회하게 될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훨씬 높습니다. 사역자들의 훈련은 전적으로 목회자의 몫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 중에서 그들을 발굴하고 또 그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우선 질문은 소위 평신도를 기도 사역자로 세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당연히 그렇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가끔 제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어떻게 평신도가 ’안수‘ 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평신도가목회자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가치관은 전혀 성경에 맞지 않는 편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1장 참조),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12제자와 같은 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모두는 만민 제사장설을 믿습니다. 또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지체가 지체를 서로 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 12:18, 25).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 그리고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별은 직분 상의 구별이지 결단코 신분상의 구별이 될 수 없습니다.
새물결선교회의 집회를 볼 때, 목회자 사역자들을 통해서 뿐 아니라, 평신도 사역자들을 통해서도 성령님은 놀라웁게 역사하십니다. 어떤 때는 평신도 사역자들을 통해서 더욱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는 전적으로 성령님이 선택하십니다. 그렇다고 평신도 사역자들이 목회자들을 무시하고 그 권위를 멸시합니까? 그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진실로 목회자들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순복합니다. 반면에 목회자들도 그들을 존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사역자들을 양육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을 자세히 다루려면 또 한 권의 책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 주된 부분을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 누구를 양육할 것인가?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일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류에 따라서 요구되는 자질도 약간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목사님을 위한 자질과 안내 위원을 위한 자질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홈그룹 리더와 같은 보다 중요한 직책을 위한 일꾼의 자질은 더 엄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도들을 양육하고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 사역자들을 위한 자질은 그보다는 덜 엄격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 사역자토 중요한 직책입니다. 사람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의 네 가지 자질을 갖춘 사람이면, 그들을 기도 사역자로 훈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네 가지는 십자가의 복음을 기초하고 신앙의 본질 위에 서 있는 자, 나타나는 은사, 배우고자 하는 자세, 그리고 목회자의 질서에 순복하는 자세입니다.
(2)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해서 신앙의 본질 위에 서 있는 자
모든 종류의 일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그가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해서 신앙의 본질 위에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십자가의 복음 위에 기초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나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철저하게 버리고, 오직 믿음에 의한, 오직 은혜에 의한, 로직 십자가에 의한 삶을 살 때만이 신앙의 본질 위에 설 수 있습니다(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더욱 알기 원하시면, 저의 책 『십자가의 복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회복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그 안에 부어집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겸손하게 섬길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은사가 강하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사역자로서 섬길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습니다. 올바른 신앙의 방향 위에 서 있지 않은 사람을 사역자로 세워 놓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상처를 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보다 교회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은사에 관한 올바른 길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그들은 은사의 올바른 길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올바른 신앙의 자세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아무리 올바른 은사의 길을 그들에게 가르친다 할지라토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길을 깨닫지도 못할 뿐 아니라, 듣고 소위 은혜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바로 다음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옛 방법과 자세로 사역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사역자일수록 반드시 하나님을 알고 전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본질 위에 서 있는 자이어야 합니다. 기도 사역자의 경우에는 아직 온전히 그렇게 서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방향을 이해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잘 따라오는 자이면, 훈련시켜도 될 것입니다.
(3) 나타나는 은사
먼저, 영적인 성숙이 자질에서 빠져 있는 것을 유의하십시오. 영적인 성숙은 참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더욱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일수록 같은 은사라도 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성령 사역에 있어서 일이 되어지게 하는 것은 영적인 성숙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곧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아직 영적으로 좀 덜 성숙한 사람일지라도 은사들이 나타나면, 그를 훈련시킬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많은 경우에 어린 신자들을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특히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성령께 민감해서 그분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비교적 정확하게 잘 듣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4) 배우고자하는 자세
모든 사역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자세 중의 하나는 배우고자하는 자세입니다. 이 자세가 없는 사람은 어떠한 사역자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아직 좀 덜 성숙한 사람이라도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면 기도 사역자로 훈련을 시킬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영적 성숙을 향하여 나아가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또 기도 사역자는 신앙 전반에 걸쳐 올바른 신앙의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인도하는 방향을 이해하고 따라오는 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그 면에서 아직 충분히 세워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따라오는 자이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는 적용시키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대입시킵니다. 그들은 자신이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배우려고는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저 사역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은사가 아무리 강하게 나타나고, 또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했어도 절대로 기도사역자로 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킬 것입니다.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이 은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사람은 "괴물" 이 될 수 있습니다.
(5) 목회자의 질서에 순복하는 자세
성령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 질서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17은 위로부터 나온 지혜의 특징 중 하나로 양순을 들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양순은 질서에 순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질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우산과 같습니다(고린도전서 11:1~10참조).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행할 때에만 하나님의 보호막이 우리에게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곳에 어두움의 세력들의 참으로 많은 공격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하나님의 보호막밖에 있다면, 그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을 만큼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나면 그 보호막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소위 자기가 받은 감동이나 체험만을 의지하며,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보고자 하는 겸손함이나 목회자의 지도를 따라 검증 받고자 하는 자세가 없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미혹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래도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데 무슨 소리야”라고 생각하며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6) 무엇을 양육할 것인가?
기도 사역자 뿐 아니라, 모든 일꾼은 세 가지 면에서 양육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분야의 조화가 필수적입니다. 그 세 가지 분야는 지식, 삶 그리고 능력입니다.
모든 종류의 일꾼은 성경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본질, 십자가의 복음 그리고 성령 사역에 관한 전반적인 성경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성경적인 지식은 물을 담는 컵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컵이 없으면 물을 담을 수 없듯이, 성경적인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습니다. 가끔 저는 율법주의가 무엇인지,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오직 믿음에 의한 삶이 무엇인지 등등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줄 때가 있습니다. 그릴 때 저는 참 난감합니다. 주님을 알기 위한 성경적인 지식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제가 아무리 기도해 주어도 그들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는 별 효과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종류의 일꾼은 실제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양육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아가도록 양육되어야 합니다. 신앙이나 사역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을 얻는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성경적인 지식을 갖추는 것은 그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살아갈 때, 실제적인 것들을 주님께로 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을 더욱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반면에 이 부분이 되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사역자로서 오래 가지 못 할 것입니다. 아무도 소위 사역만을 위한 사역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먼저 주님의 자녀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저는 소위 찬양 사역자라고 하면서 여기저기 다리며 찬양을 인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사역이 그들의 “직업”인 것을 봅니다. 그것은 절대로 올바른 자세가 아니며, 그들은 절대로 올바른 찬양 사역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만족이요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인도하시면 찬양을 인도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종류의 일꾼은 사역을 감당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그들에게 더 큰 능력과 은사가 임하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구체적으로 사역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에게 더 큰 능력과 은사가 임하도록 하는 것은 양육자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은사들을 축복하면 그 은사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저는 종종 집회를 인도하면서 성령님께서 감동하신 대로 성도들에게 어떤 은사들이 주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은사들이 성도들에게 실제로 부어지는 것을 여러 번 목도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섬기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더욱 큰 능력들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은사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부분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부분이 제일 쉬운 부분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충만한 곳에 있는 그 자체가 많은 경우에 은사가 임하는 가장 좋은 통로입니다. 저희 화요 집회의 경우를 보더라도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성령님의 은사들이 놀라웁게 부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하거나 헌신을 많이 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은사는 문자 그대로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려운 부분은 은사보다 다른 부분들입니다.
사역하는 방법 에 대한 양육은 바로 다음에 살펴봅니다.
(7)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사역을 위해 사역자를 훈련시키는데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께 사용하셨던 방법입니다. 그것은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수님께서 사역을 감당하시고, 계자들은 그것을 지켜보았다.
2) 제자들에게 사역을 시켜보시고, 예수님은 옆에서 조언하셨다.
3) 제자들에게 스스로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셨다.
이것을 일부에서는 도제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외과 의사들은 수술을 배울 때, 이런 방식으로 배운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역을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먼저 목회자가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피양육자들로 하여금 옆에서 지켜보게 합니다. 그들은 옆에서 지켜보면서 속으로 더 큰 성령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짐작 하셨듯이, 기도 사역은 눈을 뜨고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누구를 어떻게 만지시는가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일반적인 기도와 다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보십시오. 그분이 성령 사역 하실 때는 눈을 뜨고 하셨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경우에도 앞서 사역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 곁에서 먼저 배우는 것이 매우 효과적일 것입니다.
일정기간 동안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그 보는 것만 가지고도 피양육자들은 사역을 많이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물론 양육자가 그 옆에 가까이 서서 하나하나를 인도해 줍니다. 그리고 사역 후에도 지적해 줄 것이 있으면, 조목조목 설명해 줍니다. 이러한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되면, 피양육자들도 이제 제법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8) 어디서 양육할 것인가?
사역에 대한 양육은 실제적인 사역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되어져야 합니다. 만약 양육을 위한 공부 시간을 따로 갖는다면, 반드시 실제적인 사역도 겸해서 해야 합니다. 기도 사역자 양육을 위해 가장 좋은 교재 중 하나는 존 윔버가 저술한 『능력 치유』입니다. 그 책은 치유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만, 치유 뿐 아니라 기도 사역 전반에 걸쳐 사역을 감당하는 법을 잘 다루고 있습니다.
사역 시간을 통해 사역자들을 양육시키고자 할 때, 주일 낮 예배는 좋은 시간이 못될 것입니다 좋은 시간은 저녁 예배 시간이나 개인기도 사역 시간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일 좋은 시간은 홈그룹(구역 예배)과 같은 소그룹 모임입니다. 홈그룹 시간은 성도간의 교제, 치유, 성령 사역, 전도 그리고 양육을 위해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요즈음 교회들이 소그룹의 활성화를 부르짖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홈그룹과 같은 소그룹 모임이 좋은 이유는 그 곳에서는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가 가능하고 또 상대방의 실수가 용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걷게 되기까지 넘어지는 것을 수 없이 반복합니다. 그렇다고 그 어린아이를 꾸짖는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기도 사역자의 양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받은 성령의 감동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 틀립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비웃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거기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립니다. 또 누구를 위해 기도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당장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도 그것을 집어치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지속되면서 하나님은 그 사역자들을 매우 훌륭한 기도 사역자로 혹은 예언 사역자로 혹은 치유 사역자로 세우십니다.
(9) 천천히 세우라.
피양육자들이 사역하는 것을 스스로 잘 해가고, 또 사역의 열매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이제 그들을 기도사역자로 임명하여 세웁니다. 그런데 여기서 열매들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열매들이 아직 바람직하게 나타나지 않으면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방법을 배우는 것으로 절대 충분하지 않습니다. 너무 일찍 세우면 성도들에게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본인 자신에게도 큰 부담만 주어져서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꾼들을 세웠으면, 가능한 한 많이 그들을 축복하십시오.
한 가지 모든 일꾼을 세우는데 있어서 항상 반드시 기억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천히'라는 단어입니다. 일꾼을 세우는데 절대로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딤전 5:22).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일꾼을 세우기는 쉽지만, 끌어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단계적으로 일꾼을 세우는 것은 이러한 면에서 좋은 지혜입니다. 지금 현재 새물결선교회의 찬양 사역자인 임태집 간사를 교회에서 처음 찬양 사역자로 세울 때, 저는 처음부터 그를 찬양 사역자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찬양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또 찬양을 인도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저는 처음에는 제가 찬양을 인도할 때 그에게 옆에서 기타로 반주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저녁 예배 시간에만 한 달에 한 번씩 그에게 찬양을 인도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역시 그렇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주일 낮에도 그에게 찬양을 인도하도록 하되, 처음에는 제가 곡을 선정해 주었고, 나중에는 그 스스로 하도록 맡겼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를 교회의 찬양 사역자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는 교회에서 그리고 선교회에서 훌륭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렇게 일꾼을 세우는 법을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많은 실수를 범한 이후에 배운 지혜입니다.
이렇게 기도 사역자들이 세워졌다고 해서 그들은 성령 사역 시간에 임의대로 사역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인도하는 인도자의 지시를 따라서 그들은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질서대로 되어질 것이고, 사역의 열매들이 아름답게 맺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교회에 성령 사역을 접목하는 순서
이 장을 마치기 전에 저는 성령 사역을 교회에 접목시킬 수 있는 순서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물론 교회마다 형편이 다 다르고, 또 특정한 순서대로 되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 자신이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순종해 가면서, 그리고 다른 교회 가운데 성령의 사역이 접목되도록 섬기면서 배운 몇 가지 지혜를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령 사역을 교회에 접목시키는 일을 서두르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 사이즈가 클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성령사역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성도들에게 먼저 심어지기 전에 사역부터 시작하면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다음의 순서를 제안합니다.
1) 십자가의 복음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2) 찬양과 경배에 대한 성경적인 진리를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3) 찬양과 경배를 저녁 예배나 구역 예배부터 점진적으로 도입합니다.
4) 성령의 사역에 대해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5) 성령의 사역을 저녁 예배나 구역 예배부터 점진적으로 도입합니다.
6) 그러나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여 순종하십시오.
위의 순서에서 보셨겠지만, 어떠한 사역이든지 그것을 도입하기에 앞서 그것에 대한 성경적인 진리를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성도들에게 심어지게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성경적인 확신을 가지고 따라 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성도들이 다 따라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많은 성도들은 따라올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사역을 점진적으로 도입하십시오. 그것도 가능하면 저녁 예배나 구역 예배나 철야 기도부터 시작해서 주일 낮 예배까지, 그리고 시간도 처음에는 짧게 시작해서 점점 더 길게 점진적으로 도입하십시오. 그래도 부작용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그것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에 있어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가장 먼저 철저하게 가르치고 선포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교회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온 교회와 성도들이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해서 주님을 알고 전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방향이 되어야하고,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를 포함한 지도자들과 중추적인 성도들이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토대 위에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경배도 그리고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도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저를 인도하신 과정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나서 찬양과 경배를 가르치고 도입하십시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성령의 사역을 도입하십시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찬양과 경배와 성령의 사역을 거의 동시에 가르치고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결국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그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제 민감하여 그 분의 인도에 순종하십시오.
끝으로 성령의 사역을 이러한 방식으로 교회 가운데 접목해 간다 할지라도 많은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가르쳐도 막무가내로 반대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 성도들이 오히려 줄어들기 시작할 것입니다. 설교가 그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찬양과 경배와 성령의 사역이 도입되기 시작하면, 전통 혹은 다른 교회들과의 비교를 내세우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 목회자에게 대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 사역이 교회 가운데 접목되는 것에 대해서 책을 쓰면서 이러한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해보시면 알겠지만, 우리나라는 오늘날 율법주의적인 사고에 너무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교회 가운데 성령의 사역이 회복되기를 위해 헌신하실 여러분을 위해서 다음의 세 가지 자세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자세만 있으면, 하나님의 교회는 반드시 세워지는 것 같습니다.
(1) 비전을 가지고 행하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세운 목표를 비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야망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참다운 비전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우리의 모든 것으로 그 일에 동참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또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위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들 중에는 아무리 가르쳐도 성도들의 삶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고민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은혜를 받는 것 같은데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은 이것이 아닌데“라며 고민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열망과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행하심, 즉 비전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비전을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댓가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큰 비전 일수록 큰 댓가가 요구됩니다. 물론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따라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건, 노아건, 모세건, 다니엘이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하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댓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댓가를 지불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으면, 그것을 위해 무슨 댓가라도 치룰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십시오.
초기에 저와 제 아내는 주님을 따라 가면서 “죽기 밖에 더 하겠냐”라는 말을 종종 했습니다. 그냥 빈 말로 한 것이 아니고, 진심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의 사역이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제 아내는 그 안에서 우리의 목숨을 다 드려도 조금도 아깝지 않을 소중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각오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최소한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는(물론 이것은 항상 그러리라고 생각합니다만)소위 목회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야망을 반드시 다루실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이 길은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소명감을 갖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교회의 경우,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초기에는 그냥 방문 온 성도들이 교회에 등록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와 성도들은 이런 자세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축복합니다. 기존적인 교회를 원하십니까? 그러한 교회들은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가지 않는다면, 구태여 또 하나의 교회가 이 땅에 태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세워져야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떠한 댓가라도 지불할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라 가면,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놀라웁게 세워가실 것입니다. 힘을 내십시오. 자꾸 제 경험을 나누어서 죄송합니다만, 여러분에게 혹시 조금이라도 격려가 될까 해서요. 우리가 그렇게 주님을 따라갔더니 사람의 생각으로는 전혀 안될 것 같은데,하나님은 하나하나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가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더욱 증가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일은 이제 하나님께서 교회를 놀라웁게 세워가시고, 사람들을 보내시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도들이 위에서 말한 그러한 태도를 가지고 여전히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자세를 지적하고 깨뜨려야 했습니다.
(2) 담대함을 가지고 나가십시오.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는 담대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1장에서 여호수아에게 담대함을 그렇게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절대로 심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전력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말하는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아말렉을 물리치는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그는 용맹스러운 장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따라감에는 담대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토록 담대함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 1:5-7, 9).
특히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이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의 평가를 극복해야 합니다.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삼상 10:10). 그러나 그는 사람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삼상 13:8~9). 반면에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것을 극복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그의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즉, 사람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이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 1:10).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여러분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 길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하십시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분을 보호하시고,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의 길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담대하십시오.
(3)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십시오.
이 길은 사람을 의지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의지하는 자세를 반드시 다루실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십시오. 어느 누구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은 마치 베드로가 물 위로 걷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되돌아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이 나왔습니다. 가만히 있자니 물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은 단 하나 뿐입니다. 오직 주님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이를 악물고 그분만을 향하여 줄기차게 전진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놓인 배와 같다고 비유하더군요. 뒤에는 엄청난 나이아가라 폭포입니다. 조금이라도 쉬면 배는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선을 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선택은 단 하나 뿐 부지런히 상류를 향해 노를 젓는 것입니다. 같은 비유입니다.
이렇게 주님만을 의지하여 주님께 순종하여 나가면,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세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일지라토 앞에 계신 주님만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그 분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오직 주님 길만을 따라 행하십시오.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가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인도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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