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성령의 은사 下
1. 은사가 주어지는 목적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목적 중 가장 주된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그런데 여기에서 ‘덕을 세우다’ 라는 말은 영어로 build up이라는 단어로서 마치 건물을 세우듯이 우리를 주 안에서 세워 주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가 덕을 세우되 방언의 은사를 제외하고는 상대방의 혹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방언의 은사만 독특하게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고전 14:4). 우리는 방언의 은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고전 14:5, 39 참조). 사도 바울은 심지어 자기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함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고전 14:18) 위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은사는 온전하고 귀한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우리에게 영적인 안테나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령께 더욱 민감하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저 개인의 경우를 보더라도 만약 저에게 방언의 은사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저는 오늘의 제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적으로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제가 순종하여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방언으로 기도할 때 개인적인 통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들도 가능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외 모든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덕을 세우는 방언도 좋지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을 더욱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4:1-5). 그리고 고린도전서 14:12에서는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NIV 성경은 위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12:7에서 은사가 주어지는 목적을 공동의 유익(for the common good) 을 위한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만져주시기 위해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 환자 한 사람이 있는데 성령께서 나를 통해 나타나셔서 그 사람을 고치셨다면, 바로 병 고치는 은사가 그 순간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또 여기 하나님의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사람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저를 통해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셨다면,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저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들로 인해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자기의 부를 축적하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 교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 파벌을 조성하고 성도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 결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지는 성령의 은사로 인하여 교회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여 분열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목적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이 한 가지 사실만이라도 분명히 깨닫고 기억한다면, 성령의 은사로 인한 많은 부작용들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부를 축적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 다른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으로 만져주시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2. 은사의 종류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은 네 곳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14장, 에베소서 4장, 그리고 베드로전서 4장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성령의 사역이 회복되기 위해서 절실하게 필요한 은사들은 그 중에서도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9가지 은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는 그 9가지 은사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9가지 은사들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님의 눈에 해당하는 분별의 은사들과 하나님의 손에 해당하는 능력의 은사들과 하나님의 입에 해당하는 말씀의 언어의 은사들이 그것입니다.
(1) 분별의 은사
분별의 은사는 하나님의 눈에 해당하는 은사들입니다. 즉, 사람이나 사물이나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은사들입니다. 여기에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영분별의 은사가 있습니다.
① 지식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사람이나 상황에 관해 사전 지식이 없는 정보나 사실들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성경적인 예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대화는 평행선을 긋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이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 4:18). 이것이 지식의 말씀입니다. 바로 이 지식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중대한 전환을 맞이했습니다. 그 결과 그 여인은 결국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여인을 통해 온 사마리아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화순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가족이 대구에서 기도를 받으러 왔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아들의 정신이 안정되지 않아서 동생의 소개로 어머니가 아들과 아들의 여자 친구와 함께 대구에서 화순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들을 말했으나 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이름 하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그 아들의 과거 여자 친구의 이름이었고, 그 여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그 아들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가족들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계속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그 외 여러 가지 감동들을 주셨습니다. 이제 아들의 여자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무당 너무 좋아하지 말라고 해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 말을 했더니 그 여자 친구가 막 울기 시작했습니다. 오는 차 속에서 그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의 어머니에게 이런 일은 무당을 찾아 가야지 교회 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들 세 사람은 그 날 모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 가까운 교회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②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비슷합니다만 약간 다릅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특정한 상황에 관한 하나님의 지혜와 통찰력을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은 성경 말씀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좋은 예는 마태복음 22:15~22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올무를 씌우기 위해 사람을 보내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존경하고 신뢰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건 상관없이 그들은 예수님에게 뒤 집어 씌울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들 마음속의 의도를 아셨습니다(18절). 그리고 그들에게 동전에 새겨진 형상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21절). 이 말을 들은 그들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말씀입니다.
저는 성도들을 심방할 때,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위한 말씀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감동 주신 성경구절을 가지고가서 전합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말씀 속에 그들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 지혜의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③ 영분별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는 어떤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는 요인이 성령인지 악한 영인지 혹은 그 사람의 영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해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계시가 주어지거나 능력이 나타날 때,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영은 성령이나 사탄의 세력이나 그 사람의 영 중 하나입니다. 영분별의 은사는 이 셋 중 어느 것이 역사하고 있는지를 분별하게 해줍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절)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 말의 배후에 성령님이 계신 것을 아셨습니다. 그것이 단순히 베드로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에게 가르쳐 주신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칭찬하시고 그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얼마 후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 그 뒤에 사탄이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23절)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똑같은 사람을 통해서 거의 같은 시간에 나온 말 중 하나는 그 배후에 성령이 계신 것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뒤에 사탄이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것이 영분별의 은사입니다.
(2) 분별의 은사들이 주어지는 방법
분별의 은사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 감동 : 특정한 사실이나 상황에 대한 생각들이 넘쳐흐르는 현상
어떤 때는 한 문장의 서두나 한 두 단어가 주어지기도 하고, 그것이 일련의 감동들을 촉발하기도 한다.
◈ 꿈, 환상 그리고 마음의 영상
◈ 때로는 그냥 안다.
◈ 마음속에 주어지는 인상(impression)
◈ 성경 구절
◈ 신체 부위에 나타나는 증상 : 기도 받는 사람에게 있는 것과 같은 동일한 증상이 동일한 신체 부위
에 나타나는 것
(3) 능력의 은사
능력의 은사는 하나님의 손에 해당하는 은사들입니다. 이 은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그리고 능력 행함의 은사가 포함됩니다.
① 믿음의 은사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믿음 곧 신실함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믿음은 은사로서의 믿음을 말합니다. 믿음의 은사는 아무리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리라는 굳건한 확신이 신비롭게 밀려오는 현상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믿음의 은사는 대부분 하나님의 기적을 유발합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고전 13:2).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바보섬에서의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성령의 보내심을 따라 전도 여행에 나섰습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바보라는 섬이었습니다. 그 섬의 총독은 서기오라는 자인데 복음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곁에 보좌하고 있던 박수 무당 엘루마가 자꾸 영적으로 방해를 놓았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바울에게 강력하게 임하셨고 바울은 엘루마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19~11절). 그러자 엘루마의 눈이 즉시 어두워져서 그는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으며, 이를 본 서기오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선포하였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신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도 자기 임의대로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바울에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확신, 즉 믿음의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것을 선포했을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② 치유의 은사들
치유의 은사는 병을 고치는 은사를 말하는 것으로 복수입니다. 다양한 병들이 있으며, 치유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방법 또한 다양함을 보여줍니다.
열왕기하 5:1~14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의 치유나 사도행전 5:12~16에 나오는 사도들을 통한 놀라운 치유가 대표적인 두 가지 예입니다.
③ 능력 행함의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입니다. 여기 능력 행함이란 말에서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입니다. 두나미스라는 단어에서 다이나마이트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은사는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 눈에 보이는 결과를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고전 15:43~44)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가운데서 자기를 통해서 나타내신 역사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 가운데서 이 은사가 놀라웁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5).
치유의 은사와 능력 행함의 은사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능력 행함 속에는 당연히 치유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 능력의 은사들이 주어지는 방법
능력의 은사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존 윔버 목사는 능력 치유에서 이 부분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 기름부음 :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 보통 쑤시는듯한 느낌이나 열기, 또는 초자연적인 확신 등의 느낌
을 통해 체험된다.
◈ 초탈(Detachment) : 자신을 초월하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
성령의 임재와 그 역사를 인식하는 것.
◈ 믿음의 말씀 : 어떤 말을 하기에 앞서 전혀 예기치 않던 다른 말이 튀어나오는 현상.
◈ 환상 : 기적이나 치유의 장면이 꿈이나 환상을 통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른 후에 실제로 그 러한 상황이 전개될 경우, 그 사람은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게 된다.
◈ 인상(Impression) : 이는 하나님께서 치유나 기적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고요하고도 확고한 믿음의 형 태로 우리에게 찾아온다.
(5) 언어의 은사
언어의 은사는 하나님의 입에 해당하는 은사들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이 주어지거나 하나님께 말이 올라가는 은사입니다. 여기에는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그리고 통역의 은사가 있습니다.
① 예언의 은사
예언은 특정한 개인(들)이나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서 즉흥적으로 주신 감동을 받아 그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언이 주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고전 14:3). 물론 예언이 주어지는 목적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 예언은 죄를 드러나게 합니다(고전 14:25). 예언은 생각을 드러나게 합니다(마 9:4~5). 예언은 치유가 일어나는데 도움을 줍니다(요 4:46~53). 예언은 우리를 인도하기도 하고, 우리에게 경고하기도 합니다(왕하 6:8~10). 예언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행 10:19~20). 그 외에도 예언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일꾼을 분별하게 해주기도 하고, 영적 전쟁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한 가지인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이 예언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28-30).
그리고 특히 초대교회 때는 성도들이 모이면 같이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신 감동들(예언)을 같이 나누는 것이 보편적인 신앙생활의 한 부분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 21:4).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행 21:10-11). 물론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예언의 3단계를 이해하면 쉽게 납득할 수 있습니다(제 책 다가오는 하나님의 군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참조하십시오). 그리고 예언을 시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한 가지는 그 당시 성도들의 신앙생활입니다. 같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감동을 서로 나누는 것이 그들 신앙생활의 보편적인 한 부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성경이 다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이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다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가보를 통한 가뭄에 대한 예언이라든가, 두로의 성도들이나 빌립 집사의 딸들, 그리고 아가보의 예언 모두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기준으로서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그 당시 그들에게 필요한 현재적인 하나님의 감동들이었습니다.
예언은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의 일상적인 한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필요로 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욱 필요하겠습니까?
저는 오늘날 하나님께서 저희들 가운데서 예언을 회복시켜 가시면서,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일에 필수적인 도움을 주고 있음을 수없이 경험합니다. 물론 저희들은 예언을 따라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모든 예언은 다 분별되어져야 합니다(살전 5:21). 그러나 예언에 대한 모든 성경적인 기준이 준수될 때, 예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참으로 교회에 유익을 줍니다.
② 방언의 은사와 통역의 은사
우선 고린도전서 14장을 자세히 보면 두 종류의 방언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의 언어로서의 방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서의 방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고전 14:28)라고 말한 구절을 토대로, 교회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금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자세히 보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 경우 방언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서의 방언을 말합니다. 27절을 보면 이 사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방언의 은사, 특히 기도의 언어로서의 방언은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으로써 대부분 일반적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통해서 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 14:2).
9가지 은사 중에서 오직 방언의 은사만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고전 14:4). 방언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영적인 안테나를 높이 세워주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방언은 많은 경우에 그 사람 자신도 모르는 그러나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게 함으로써 유익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도 언어로서의 방언이건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방언이건 방언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통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방언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3-15).
방언 통역은 방언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방언과 통역이 되어지면, 예언과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고전 14:5). 방언 통역은 때로는 방언하는 당사자에게 주어질 수도 있고(고전 14:13),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고전 14:28).
(6) 언어의 은사들이 주어지는 방법
언어의 은사들이 주어지는 대표적인 방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외의 방법으로도 언어의 은사들을 나타내십니다.
◈ 내적 감동이나 인상(impression) 이것이 가장 흔한 방법이다.
◈ 때로는 그냥 안다.
◈ 꿈이나 환상이나 마음속의 영상.
◈ 기록된 글씨가 보임.
◈ 몸의 통증.
◈ 거의 의도하지 않는 말을 즉흥적으로 하게 되는 것 : 말이 입에서 ‘튀어 나온다.’
3. 성령의 은사의 길
오늘날 주일학생들에게 "성경에서 사랑장이 어디입니까?“라고 물어도 "고린도전서 13장이요"라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 고린도전서 13장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성도들의 가정에 가면 고린도전서 13장이 쓰여 있는 액자가 걸려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소위 사랑장이 왜 하필이면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까지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중간에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은 단순한 기독교적인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길로서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맥을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가장 좋은 은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 뒤를 따라 바로 나오는 구절이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고린도전서 13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고린도전서 12:31과 14:1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고린도전서 13장은 마치 괄호와도 같습니다.
그럼 고린도전서 13장은 무엇에 대해 말하는 구절입니까?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에서 말하는 "제일 좋은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곧바로 이어서 나오는 14장 1절도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린도전서 13장은 가장 좋은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구절이 아니라, 모든 성령의 은사를 활용함에 있어 지켜야 할 사랑의 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13장의 내용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은 네 가지 은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네 가지 은사가 가장 강력하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은사의 길인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보십시오. 대표적으로 바울은 방언, 믿음, 예언 그리고 구제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방언의 경우 심지어 천사의 말을 하는 경우를, 우리 앞에 있는 산을 옳길 만큼 큰 믿음의 은사를, 예언의 은사 중에서도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 만큼 강한 예언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불사르도록 줄 만큼의 구제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의 구제는 은사로서의 구제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성령의 은사가 우리에게 아무리 강하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것을 사랑의 길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들이 상대방에게는 큰 유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그들이 병 고침을 받는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거나, 도움의 손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도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가 우리를 통해 아무리 강하게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길을 따라 성령의 은사들을 행해야 하며,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성령께서 주신 은사들을 잘 활용한 것에 대한 유익과 상급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성령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구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구절은 우리들이 손바닥에 써가지고 다니든지, 이마에 붙이고 다니든지, 침대 위나 부엌에 붙여 놓고 날마다 읽든지 해야 할 만큼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과 야고보서 3:17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우리는 이 구절들을 반드시 이해하고 철저하게 그 기준을 따라 성령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은사의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린도전서 13:17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1) 성령의 은사는 오래 참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급해서 몇 차례 기도해 주었는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거나 또 그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성급해서는 안 됩니다. 인내를 가지고 행해야 합니다.
(2) 성령의 은사는 온유함으로 행해야 합니다.
겸손함과 친절함으로 행해야 합니다. 오늘날 조금만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도 매우 거칠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욕설을 하고, 기도 받는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철저하게 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친절해야 합니다. 사역자들이 압도적이고 강하면 기도 받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우리보다 낫게 여겨야합니다. 심지어 상대방이 하나님의 길에 서 있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동주신 만큼만 철저하게 섬기는 자세로 감당해야 합니다.
(3) 성령의 은사는 투기함으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시기하거나 질투함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번은 몇 명의 목회자들이 함께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집회를 인도하던 목사님이 우리 모두를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 앞에서 무슨 감동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분 저 분이 이런 저런 감동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아무런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런 감동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날 저는 감동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감동을 주시지 않으실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 앞에서 '영적'으로 보이는 것이 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를 만날 때, 사역자들은 성도들을 의식하기 쉽습니다. 다른 사역자들과 비교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의식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면, 그것은 아직 우리의 개인적인 야망이나 시기가 다루어지지 않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세가 빨리 버려지지 않으면, 우리 사역의 참된 생명은 끝납니다.
(4)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거나 그로 인하여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은사가 조금만 나타나도 자기가 제일인 것처럼 교만하고 자랑을 일삼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대방의 칭찬을 받아들이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이 교만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그 놀라운 은사들로 인하여 그 분을 칭찬할 때, 하나님은 귀를 씻으라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저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저를 칭찬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꼭 주지시키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가장 주된 이유는 제 마음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은사로 인하여 제 생각이 높아지는 것을 막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5) 성령의 은사를 무례함으로 행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사가 조금 나타난다고 해서 나이가 많은 분들에게도 반말을 함부로 하고, 또 마치 교황처럼 사람들 앞에서 군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인격적이고 겸손해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저는 성령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세 중의 하나가 자연적으로 초자연적인(naturally supernatural)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상대방을 사랑하셔서 우리를 통해서 가끔 놀라웁게 나타나실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성도로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겸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너무 영적으로 비쳐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외식일 수 있습니다.
(6) 성령의 은사를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그것을 통해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저는 기도원을 차려놓고 헌금 받아서 주식투자 했다가다 날리고 금식 기도하러 산에 올라온 목사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말로가 참으로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기도원 원장은 설교하면서 사람들이 어려울 때만 찾아와서 도움을 받고 일이 해결되면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하나님의 만지심을 받는 그 자체가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자기의 금전적인 유익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또한 자기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은사를 통해서 성도들을 소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들을 자기의 영향력 하에 두고 그들을 조정하려 합니다. 얼마나 타락하고 안타까운 자세인지요. 그렇기 때문에 덕을 세워야 할 은사가 오히려 교회에 해를 가져오고, 성도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세례 요한처럼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소리를 듣고 기뻐하는 신랑의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성도들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로 중매하는 중매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우리는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는 더욱 강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7)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섬김에 있어 성내지 말아야합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예언이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자기에게도 예언을 부어달라고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기만 하면 진실로 섬기는 자가 되겠다고 반복해서 고백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계시들이 주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받은 계시대로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하고 도움을 받게 됩니다. 소문이 조금씩 나면서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와서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밤늦게까지 사역하게 되고, 또 밤중에 일어나서 기도해 주러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시간이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원망하고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또 그렇게 기도해 주고 보살펴 주었는데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변하지 않거나 못 따라 온다고 화를 내기도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사를 가지고 섬김에 있어, 철저하게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섬기는 그 자체가 우리의 기쁨이요 만족이 되어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8) 은사를 가지고 섬김에 있어 악한 것을 생각지 말아야합니다.
야고보서 3:17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지혜 내지는 계시의 특징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첫 번째가 성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물론 여기에서의 성결은 하나님의 진리 위에 타협 없이 서는 교리적인 면에서의 성결, 세상 사랑과 개인적인 야망이 다루어진 동기적인 면에서의 성결, 그리고 삶의 행동과 자세를 포함한 윤리적인 면에서의 성결이 다 포함됩니다.
우리들이 은사를 가지고 섬김에 있어 모든 면에서의 성결은 필수 중의 필수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지혜롭게 해야지"라는 말로 진리를 희석시키고 불의와 타협하는 자세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지혜가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의 성결을 유지함이 없이 은사를 가지고 섬기는 것은 머지않아 타락으로 이르게 되는 첩경입니다.
(9) 은사를 가지고 섬김에 있어 불의를 기뻐하지 말고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합니다.
우리들이 범하기 쉬운 불의 중의 하나는 외식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지혜의 중요한 한 특징은 외식이 없다는 것입니다(약 3:17). 우리말 성경에 "거짓이 없는"이란 말은 영어 NIV성경에는 "외식이 없는"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가지고 섬김에 있어 철저하게 외식을 버려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표면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이해를 요구합니다.
우리들이 외식이 없이 사람들을 섬길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 두려워하는 것이 철저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에서 이 자세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갈 2:4-5).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9).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기도해 주면서 종종 난처한 입장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예언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옆에서 다음으로 기도 받을 사람이 그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와 잘 아는 사람이고, 또 사역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의 아무런 감동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저는 참 갈등을 느낍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 감동주신 대로만 합니다. 그 사람에게 오해 받을 것을 각오하고 말입니다.
사람을 의식해서 그 사람이 좋아하는 대로 감동을 타협하기 시작하면 그 사역의 생명은 그리 길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가 받는 감동은 개인의 생각과 섞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사람들의 띄워 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 중심에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감동을 정직하게 전한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타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식입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 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러한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10) 은사를 가지고 섬김에 있어 모든 것을 참고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야합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참으로 소중하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은 강력합니다. 예리한 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들을 활용함에 있어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준과 길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어린아이 손에 들려 있는 예리한 칼과 같이, 성령의 은사들은 우리에게 많은 해와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두 장에 걸쳐서 성령의 은사와 그것에 관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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