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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목적으로 사는 삶(3) 열매 맺는 삶을 사는 방법

시리즈설교/하나님중심적삶

by 발의무리 2006. 9. 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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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목적으로 사는 삶(3) 열매 맺는 삶을 사는 방법

요15:1-8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셔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고 자신의 뜻을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열매 맺는 삶의 중요성

1)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바울을 전도한 아나니아와 빌립)

2)열매 맺지 못한 삶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요15:2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3)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심

요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이처럼 우리 신앙에 있어서 열매를 맺는 삶은 중요한데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는가?

그 해답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중(요15:7) “거한다”는 거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한다의 의미?

요일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

그 분이 사실 그 삶을 성령께서 그를 통하여 사시도록 그 자신을 온전히 성령께 내어 드려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우리도 가능한가?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요16:14-15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요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기도에서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속해서 계시해 주시리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의 ‘이름’은 아버지의 인격 혹은 성품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 모두 ‘인격’ 이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이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의 이름은 아버지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둘째, 우리에게 아버지를 계시해 주는 이유로써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연관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이렇게 주님을 깊이 알고 사랑하는 교회 가운데 친히 거하시며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 구절에서도 믿는 자는 누구나 예수님이 사셨던 삶(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 ‘나의 하는 일’ 일 이란 열매 맺는 삶을 인 것을 앞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요14:10-11,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성령님은 오늘날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님이 사셨던 것과 같은 그러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모두는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사는데 있어 핵심은 PLO의 삶입니다.


1.P(Pray) 기도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는 그저 우리가 임의로 열심히 노력해서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필 수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가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성도들 같이 기도많이하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으며 친밀함이 없기에 하나님의 의중, 뜻, 길은 더더욱 알지 못한 것이 오늘의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왜? 기도의 올바른 관점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많은 기도의 양을 통해 우리의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기도를 몇 시간 하느냐 = 교회성장, 은사의 강도 라는 공식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오늘날 기도가 온갖 자신들의 필요와 문제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기도라는 겁니다. 그들의 관심과 마음이 모두 문제와 필요에만 쏠려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올바른 기도의 방법이 아닙니다. 이러한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는 절대로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예 - 자녀의 관심은 오로지 그의 필요(돈)뿐이라면 아마 정신이 돌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정확하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 올바른 기도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가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갈 때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필요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필요와 문제는 그분의 필요와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로 나아갈 때 나의 문제와 의제를 내려놓고 그분 자신을 구하여 나가야 합니다. 그분을 더욱 알기를 구하며, 그분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알아서 그 가운데 같이 있기 위해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보기를 구해서 나가야 합니다.


즉 기도란? 주님의 얼굴을 구하여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분의 얼굴을 구하여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사역의 확장이 아니라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우선적으로 구하셨습니다.

눅5:15-16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과 전인적인 치유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신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마4:23, 9:35)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그렇다면 여기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일들을 위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본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 실로 기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금식기도(눅4:1-2)

새벽기도(눅4:42)

기도원에 가셔서 기도(눅9:28-29)

정기적으로 기도하심(눅22:39-45)


모세 -하나님의 길을 보여 달라 출32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골1:9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여호수아와 같이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만들어야합니다.


2.L(Listen) -듣는 것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있어서 알아야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1)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2)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양의 특징 -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3)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 - 사무엘, 여호수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배우고자 하는 자세) - 사무엘

엘리는 어제의 사람이 되어 버렸음

*하나님의 주권 앞에 엎드려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 -여호수아

*영적 경각심이 있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귀있는 자는 내 말을 들을 찌어다”

계시록 ->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특별한 귀를 창조하심.


렘6장 부지런히 나팔을 불어도 듣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자들인데 시바에까지 가져 향품을 사서 하나님께 드린 자들이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경각심이 없으니 예레미야의 말을 이단으로 생각하였음.


눅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엡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영적 경각심을 가지고 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각심을 가지고 듣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3.O(Obey) - 순종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더라고 순종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오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깨닫는 것은 순종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듣고 깨닫는 것이 아무 의무가 없습니다.


*모세

*빌립 -빌립은 사마리아 땅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행8:5-8), 그의 복음을 듣고 마술사 시몬도 개종하였다(행8:9-13절). 그 후 빌립은 천사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26-39절). 요한복음 가장 오래된 사본이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됨

*아나니아

순종은 쉽지 않음 -베드로 고넬료


요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의중을 보아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하면 아니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요10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요10:17-18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목숨을 스스로 버릴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 하나님께서 사랑하심 -> 의중을 보이심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가 잘못 이해하면 그럼 우리가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는 것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요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말씀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순종함으로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탕자 -> 아버지 품을 떠났을 지라도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그 아버지의 사랑가 운데 머물지 않은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는 것이 ->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 거할 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순종이 관건입니다.

눅8:16-18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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