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단원 주님을 아는 것
제1과
주님을 아는 것의 정의
우리 신앙의 본질은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기초요 또한 핵심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성화에 있어서, 열매 맺는 삶을 위해서, 그리고 영적 승리를 위해서도 필수입니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주님을 아는 것
주님을 아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신앙체계에서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을 다른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님을 아는 것과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사고에서는 주님을 안다는 것을 주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아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론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면, 자기는 하나님을 더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성경 박사들인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요 5:37-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한마디로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 |
주님을 아는 것 |
‣주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아는 것 신학적인 지식 ‣자서전적인 지식 ‣교육과 공부를 통해서 습득 ‣신앙의 본질을 위한 수단 ‣삶의 변화를 주지 못함 |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 ‣저자와의 교제 ‣성령을 통해서 습득 ‣신앙의 본질 ‣삶에 근본적인 변화 |
⑴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인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지식을 성경공부와 교육을 통해 습득합니다.
자서전에 비유한다면,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자서전을 통해 저자의 출생지, 학력, 결혼생활, 취향,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옷 등등 그 사람에 관해 많은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자서전은 한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은 자서전과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물론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성품과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길에 대해서 기록하신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어떠한 일을 하셨고, 또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등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⑵ 주님을 아는 것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다릅니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자서전을 통해 그 저자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아는 것이라면, 주님을 아는 것은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 저자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의 자서전을 읽고, 그 저자에 관해 아무리 상세하게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을 아는 것은 그와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에 관해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주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기록인 반면,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유일하신 신이며, 살아계신 인격체이십니다. 주님을 아는 것은 그 분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 왔습니까? 해당하는 것에 ○표 하십시오.
□ 나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여,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생각해 왔다.
□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로 이해하고,
그분을 알기 위해 힘써 왔다.
⑶ 주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합니다.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연구와 교육을 통해서 습득되는 반면, 주님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만, 우리는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1:17을 읽으십시오.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이 기도는 누구를 위한 바울의 기도입니까? 불신자들 혹은 믿는 성도들?
이 기도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이 기도는 믿음과 사랑에서 뛰어난 에베소 교회를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엡 1:15). 이 기도는 불신자들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렇게 볼 때, 여기에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말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살펴본 것과 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해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라고 번역해야 더 옳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NIV 성경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입니다.
⑴ 우유병과 우유의 비유
우리는 주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 혹은 다른 말로 해서 신학을 우유병에, 그리고 주님을 아는 것을 우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유병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유병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우유가 있다 할지라도 우유를 담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유병이 우유에 비해 형편없이 작거나 혹은 구멍이 나 있으면, 우유는 다 쏟아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 즉 바른 신학이나 바른 교리도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의 신학이 찌그러지거나 구멍난 우유병과 같이 왜곡되거나 잘못되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서 올바로 아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데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성도들은 자신들의 체험만을 신뢰하며, 그 체험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고자 하는 배우는 자세나 지도자들의 조언을 듣고자 하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미혹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유병은 우유를 담기 위한 수단에 불과 하다는데에 있습니다. 우유병이 우유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리 우유병이 좋다 할지라도, 그 우유병이 비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나 신학은 주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우 훌륭한 성경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이나 마음을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주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입니다. 더 나아가 이론적인 지식 그 자체에는 어떠한 생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아무리 많이 전해도 그 자체가 절대로 사람들을 살리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을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다음의 구절들을 찾아서 성경이 그들의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써 보십시오.
요 5:37
[요한복음 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 5:42
(요한복음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요 5:46-47
(요한복음 5:46-47]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마 23:24
(마태복음 23: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마 23:25
(마태복음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 23:28
(마태복음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장님이었습니다.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죄와 탐심이 가득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했습니다. 외식이 가득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을 그들의 제자들에게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 내용에 있어서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3:3). 그런데 그 가르침들이 그 제자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었습니까?
(마태복음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마태복음 23:15을 읽고 당신의 생각을 써보십시오.
(마태복음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보십시오. 단순한 이론적인 지식의 전달은 그것을 듣고 배우는 자들에게 어떠한 생명도 전달해 주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⑴ 이사야의 예
이사야는 제사장이자 선지자였습니다. 당연히 그는 그전에도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6장에서 그는 바로 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즉, 그 거룩하신 하나님, 그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했습니다.
(이사야 6:1-5)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 날의 이 경험은 그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그에게 삼년동안 벌거벗은 채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사 20:2-3 참조). 거듭되는 선지자들을 통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그들에게 다가올 심판을 이사야를 통해서 실물로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을 돌이키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입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이사야는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환영 받지 못했습니다. 그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많은 거짓 선지자들의 것과는 달리,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벌거벗고 다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역시 그는 미친 자였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순종했습니다. 저는 이사야가 순종할 수 있었던 가장 주된 이유는 이사야 6장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사야는 그 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평가나 조롱이나 멸시는 더 이상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당신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수 년 동안 교회를 다니고, 여러 가지 직분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또 많은 성경 공부의 과정들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비해 하나님께 조금도 더 나아와 있지 않으며, 그 삶에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도 없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우리가 주님에 관해서 아는 지식을 마치 우리 신앙의 근본인 것처럼 여기며, 주님을 알기를 소홀히 여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주님에 관한 지식이 어느 때보다 더 범람하고 있고, 또 바른 교리와 신학적인 지식을 위한 수많은 성경공부들이 교회 안 밖에서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고갈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성도들의 삶 속에 변화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아는가를 알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시금석은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아무리 이론적으로 하나님에 관해서 많이 알고, 또 그것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의 삶이 지금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과의 요점
♡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릅니다.
♡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공부와 교육을 통해 습득됩니다.
♡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수단에 불과 합니다.
♡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자서전을 통해 저자를 아는 것과 같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교제를 통해 그 저자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필수적입니다.
♡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삶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삶에 근본적으로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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