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단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제1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1)
십자가의 복음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인 주님을 알고, 전 존재로 주님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십자가의 복음의 내용도 실제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그것이 전환점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기 시작할 때, 그들의 신앙과 삶에 근본적인 전환이 시작되는 것을 반복적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
우리의 신앙에서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에서는 신앙의 본질이나 십자가 복음의 삶이 불가능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기 원하고, 주님이 우리 속에서 사시는 믿음에 의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 전환이 없이 우리가 아무리 많이 기도하고, 아무리 많이 봉사하고, 아무리 많이 전도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은 서로 각기 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떠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 삶의 특징이 우리의 삶 속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의 특징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의 특징
1.하나님을 근심케 한다. 2.하나님의 길을 모른다. 3.불신이 가득하다. 4.세상 사랑이 다루어지지 않는다. 5.참다운 순종이 없다. |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의 좋은 본보기는 바로 광야에서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의 전형적인 특징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하나님을 근심케 합니다.
히브리서 3:7-19을 자세하게 읽으십시오. 그리고 다음 물음에 답하십시오.
(히브리서 3:7-19)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이 성경 구절은 오늘날 우리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까?
□ 이 구절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 이 구절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보기로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경고하는 구절이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어떻게 했습니까?(10-11, 16절)
그들은 그 사실을 알았다고 생각합니까?
오늘날 어떤 성도들은 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를 들어서 말하면, 그들은 구약 시대 사람들이고, 오늘날 우리는 은혜의 시대인 신약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히브리서 3장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들을 위해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보기로 들어서 바로 은혜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격노케 했습니다. 하나님의 노가 불처럼 타오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연히 그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화가 펄펄 끓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러한 일을 하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근심케 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근심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그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⑴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신임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근심케 하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신임 사이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하나님의 무엇을 보았습니까?(히 3:9)
(히 3: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그런데 그들은 그 40년 동안 하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히 3:17)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를 보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행사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 즉 하나님의 손으로 행하신 일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본 하나님의 행사는 예수님 시대를 제외하고는 신구약을 통털어 찾아보기 힘들 만큼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은 말할 것도 없고, 홍해의 사건, 하늘에서 만나가 내린 사건,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와 사막에서 2백만명에 이르는 사람을 먹인 사건 등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날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40년 동안 그들의 의복과 신발이 전혀 닳지 않았으며, 그들 중 발이 부르트는 자가 한 사람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신 8:4).
(신명기 8:4)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반면에 그들은 그 40년 동안 내내 하나님을 분노케 했습니다. 하나님의 노를 들끓케 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행사가 반드시 하나님의 신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반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법을 행한 자들에 대해 하신 말씀도 이 점을 뒷받침합니다(마 7:22-23).
(마태복음 7:22-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점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자기의 욕심대로 구하여 응답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세상에서 자기를 제일로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사들을 자기의 명예와 안락을 위해 사용하면서도, 자기를 통해 능력들이 여전히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자기를 제일로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근심케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나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환상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위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틀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법을 행한 자들 중에는 예수 이름으로 예언한 자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후회함이 없습니다(로마서 11:29). 그렇기 때문에, 그 은사를 가지고 잘못 사용해도 그 은사는, 최소한 당분간이라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가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놀라운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머지않아 그에게서 하나님의 임재는 걷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후 20년이 넘도록 왕으로서 다스렸고, 또한 많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로마서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반면에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즉 하나님과 친밀함을 가진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자신의 길과 마음과 목적, 그리고 자기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음성과 그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고, 올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3:10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격노케 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히브리서 3: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그들은 40년 동안 반복해서 하나님을 분노케 하면서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근심케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격노케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⑴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의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마음 혹은 하나님의 의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행하심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그 곳에서 이루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에게서 그 당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근심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분노케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을 알아야 그렇게 행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행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근심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⑵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임의대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무조건 열심히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과 길이 다르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간다고 해도 전혀 엉뚱한 곳에 도달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나가야 합니다. 내 조건과 내 생각을 따라 행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조건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시편 86:11을 읽고 다윗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두 가지가 무엇인지 써보십시오.
(시편 86:11)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그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길과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시편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시 25:4, 27:11, 143:8, 10).
(시편 25: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편 27:11)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43:8)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니이다
(시편 143:10)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순수한 동기만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그들은 낙심하고 실망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순수한 동기가 중요합니다. 순수한 동기가 없으면, 그것은 나누어진 마음이요, 나누어진 마음은 곧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동기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순수한 동기를 가질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알고, 그 길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⑶ 하나님의 길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길을 올바로 알기 위해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성령의 조명으로만이 우리에게 계시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그릇된 신앙의 각도의 심각성입니다. 이 각도에서는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길이 계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이 계시되지 않기 때문에, 결과는 자기 임의대로 행하며 하나님을 근심케 하고 분노케 하는 삶뿐입니다.
이과의 요점
♡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필수적입니다.
♡ 하나님의 선을 구하는 삶은 하나님을 근심케 할 수밖에 없습니다.
♡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이 반드시 하나님의 신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 그릇된 신앙의 각도에서는 하나님의 길이 계시되지 않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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