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교회 회복의 필요성
요한 계시록 3장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1)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3:14-21]
우리는 자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심하냐면 설교 초반에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비춰지고 깨달아 졌는데 다른 부분을 쭉 살펴보다 보면 설교 〕?때쯤 되면, 불과 삼사십 분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잊어먹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행하시고 계시는 일들을 선명히 말씀하셨는데 그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우리가 깨닫고 때론 감격스러워하고 때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동참하고자 하는 각오를 가졌다가도 한 이삼일 지나면 우리는 그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리고 또 다른 새로운 메시지나 말씀을 듣기 원하는 그러한 경향이 우리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주 전에 쟌 폴 잭슨 목사님이 한국에 오셔서 집회를 인도 하셨습니다. 그분이 여기 오시기 전에 다른 한 단체에서 수요일 날 오전과 오후에 강의를 하셨는데 거기에서 그분이 그렇게 말씀했다고 합니다. 그 전부터 한국에 오기를 원했는데 기회가 없어서 오지 못했다고 그러면서 ‘1~2년 내에 북한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1~2년 내에 한국에 부흥이 올 것이다. 그런데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준에 선 그 곳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부흥을 보내실 것이다’라는 감동을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집회기간 동안에도 금요일 낮 시간에는 포도나무 교회와 새물결 선교회 사역자들을 위한 luncheon(가벼운 오찬)시간이 있었습니다. 사역자 부부 동반으로 같이 모여서 점심식사를 하는 중에 몇몇 사역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나누고 그리고 질문하는 과정에서 그 질문에 답변해 가면서 답변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쫙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 중에(이것은 단순히 포도나무교회에 주신 말씀만은 아닌 것 같고요, 이것은 새물결 선교회에 같이 연합하는 교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초청이요 약속 같습니다.) 하나가 뭐였느냐면 예를 들면 베드로의 경우에 베드로가 그날도 여느 날처럼 똑같이 자기 생계를 위해서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그 전날과도 같았고 그 전전날과도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하고 있는데, 그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부르신 겁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4:19] 또 마태도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걷고, 그 세금을 걷음으로 인해서 그가 얼마나 부수입을 잡았는지는 잘 모르지만(그 당시 사람들이 세리를 죄인으로 경멸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날도 마태는 여느 날과 똑같이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받고 있었는데, 그날 그곳에 갑자기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셨다는 겁니다. 이러한 얘기를 하면서 교회 가운데 여느 날과 똑같이 예배를 드리고 여느 날과 똑같이 모일 때에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임하실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임하시면 “Never did say” 이제는 절대로 예전과 같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사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시는 것이 부흥이요.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대규모로 부어지는 것이 부흥인데 그것이 갑자기 일어날 거라는 겁니다. “Suddenly”
그러므로 오순절 날만 하더라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승천을 배웅하고 나서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이 모여서 위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이 부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 그날도 여느 날과 똑같았습니다. 그날도 그 전날과 똑같았습니다.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갑자기 하나님의 성령이 그 자리에 임하신 겁니다. 그 날도 그 전날과 똑같은 날이었는데 갑자기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2-4] 그리고 그 때부터는 그들은 이전과는 전혀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하심은 이런 식으로 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에도 갑자기 옵니다, 심지어 부흥이 임하는 날짜를 사람들이 다 알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갑자기 임합니다. 예를 들면 미국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의 브라운스빌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갑자기 임했는데 그 날짜를 사람들이 다 압니다.(참조: ‘펜사콜라의 기적’ 도서출판 바울) 1995년 아버지의 날(Father' s Day) 주일에, 그 주일날도 이전처럼 똑같은 주일이었습니다. 그들이 교회로 나오면서 그날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 날거라는 것을 기대하고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부흥을 위해서 늘 중보기도하고는 있었지만, 그날 그렇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기대하는 사람도 많지 않은 가운데, 그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갑자기 홀연히 하나님의 성령께서 대규모로 그곳에 임하시고 그때부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이 나타나고 놀라운 성령의 역사들이 나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십니다. 그러면 이전과는 전연 근본적으로 다르게 되고, 또 놀라운 치유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고, 또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됨으로서 심지어는 그분의 표현에 의하면 “thousands of” 수천 명의 불신자들이 주께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금방 잊어버리는 경향이 심합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면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 주신 예언은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여러 차례 걸쳐서 말씀하셨고, 또 그 일을 위해 지금까지 준비하고 계시는데, 우리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확인시켜 주신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이러한 얘기를 들을 때, 우리는 맘이 설레고, 맘이 기쁘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구나. 그것도 세계적으로 쓰시는 분을 통해서, 그러면서 마음이 부풀어 오르고 소망이 생기고 열의가 생기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주일, 혹은 두 세주만 지나면 곧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전처럼 똑같이 살다가 또 하나님 뭐 주실 말씀이 없습니까? 하나님 또 말씀을 주세요. 이렇게 나갑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기도하면서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는 우리가 그저 그때 그냥 좋았다가 금방 잊어버릴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예언을 당연히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확인되면 우리는 그냥 ‘좋다’라고 넘어 갈 것 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구체적으로 그것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더 구체적으로 깨닫기를 원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우리 개인과 교회의 삶을 조정하여 동참해야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심을 대비하고 그것을 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교회 회복에 관해서 시리즈로 살펴보는 것이 참 중요하겠다 라는 생각을 제가 갖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인도 될지 모르지만 교회회복 뿐만 아니라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심, 혹은 부흥과 관련해서 성경에 나와 있는 약속들, 또 우리가 그 하나님의 부흥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자로서의 준비와 우리가 갖추어야 할 태도와 자세, 이러한 전반적인 부분들을 앞으로 몇 달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시리즈로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가 더 유념하여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더 유념하여 더 깨어있고, 특별히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 더 준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흘 후에 시내산에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거라고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것을 위해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이 임하신다는 약속을 붙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하나님의 임하심을 준비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물론 그 조건 때문에 하나님이 오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오심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도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겠다고 여러 차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말씀해 오셨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그것을 새롭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하나님의 오심을 위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준비하기 위해서 그동안 나름대로 해왔다고 볼 수 있는데 더 필요한 요소들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또 있는가? 이러한 부분들을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배워가고 또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더 배워가는 것이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 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늘부터 시작해서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교회 회복의 필요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회복의 필요성
제가 설교 하러 나오기 전 사무실에 있는데 힘들어하니까 제 아내가 옆에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 부분에 살펴보게 된 계기도 사실 어제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께 묻기를 우리 선교회와 관련해서 지금 이 시점에서 특별히 알아야 할 부분이 뭐가 있습니까? 라고 묻고, 선교회 사역자들과 교제하는 과정에서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그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은 감동이 있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왜 힘들었냐면 오늘 아침에 인터넷을 보니까 지난 주일날 낮에 포도나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최근 일어난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나눈 것이 있었습니다. 지난주일 1부 예배 설교를 하려고 최종적으로 살펴보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설교하지 말고 나누라고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준비했던 설교는 2부 예배서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포도나무 교회만이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이다. 전혀 그런 차원도 아니고 쟌폴 잭슨 목사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초청을 받은 곳(하나님이 쓰시는 단체)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우리들만이 초청 받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을 당연히 저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교회도 하나님이 초청하시고 약속을 주시는 한 그룹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회를 사랑하시니까요. 그래서 포도나무교회가 초청받은 교회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그러한 부분을 나누게 되었는데, 그것을 듣고 어떤 한 분이 글을 올려 논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 생각에는 제가 말하는 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관점과 틀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부분에서 많이 부딪쳤는지 몇 가지 말을 쓰셨던데 한편으로는 제가 새겨 볼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고 또 마음 중심에 알게 모르게 항상 마음이 높아지고 잘못 될 수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 얘기를 해 주심에 대해 감사 하지만 제가 그 내용을 쭉 읽으면서 보니까 한편으로는 오해한 겁니다. 그 나눈 배경이라든가 전반적인 부분을 모른 체 단편적인 얘기만 듣다 보니까 저하고 이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자주 듣는 얘기인데, 제가 어떤 부분에 대해서 설교를 하다보면 마치 한국에 있는 전체 교회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매도하고 우리들만 옳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저에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설교하면 안되는 것 아니냐고 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그런 의미로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그래서 제가 설교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하나님께서 숨겨둔 자들이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를 칠천이나 숨겨두셨습니다. 그 당시 엘리야 눈에 보기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는 자기밖에 남지 않았노라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 할 정도로 너무나 타락한 신앙이 나라 전체에 팽배한 그 시점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칠천을 숨겨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날 우리나라에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칠천만 남겨 두셨겠습니까? 드러나진 않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진실하게 동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길 위해서 기도하고 있을 겁니다. 저는 그걸 확신합니다. 제가 그걸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이 숨겨놓은 칠천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나라 전체가 전반적으로 신앙의 분위기와 이해와 태도가 혼합주의적인 신앙이 가득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그들이 주께로 돌아서야 할 것을 아주 강력하게 촉구하시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 가운데 칠천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당연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면서 진실로 이 땅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많겠지만 또한 동시에 이 나라가 교회들의 전반적인 신앙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혼합주의적이어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하며 너무나 우리 가운데 율법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로 대표되는 거짓 신앙체계가 가득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만 있다면,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가장 먼저 나 자신부터 시작해서, 내가 속해 있는 교회부터 시작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가슴을 찢어 회개하고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주님께 돌아가기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가 오늘 교회 회복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날의 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와 비슷합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날이 말세지말이라고 말합니다. 또 많은 분들이 성경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가 말세지말의 교회를 대변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 두 사실이 맞건 틀리건, 저는 오늘날의 교회 모습이 라오디게아 교회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야 할 필요 가운데 있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오늘날 교회가 회복 되어야 할 필요성을 같이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째, 오늘날 교회 안에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인본주의가 가득차있습니다.
사실 라오디게아교회는 인본주의의 극치를 이룬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 문밖에 서 계신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이 구절을 전도하면서 사용합니다. 누가 그림을 그렸는지는 잘 모르지만 밖에서는 문을 열 수 없게 문고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A라는 사람에게 전도 하면서 예수님이 지금 문밖에서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문은 예수님이 억지로 여실 수 없습니다. 이문은 당신께서 여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시면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당신과 함께 더불어 먹고 당신은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먹는 교제와 승리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 구절을 인용해 전도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 인용합니다. 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예입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얘기하는 것처럼 그 문은 본인이 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문을 억지로 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옳습니다. 좋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계속 사용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은 교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요한 계시록 3장 20절에 나오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믿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이미 예수님을 마음 속에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사실은 예수님이 문 밖에 계십니다. 교회는 당연히 예수님이 그 안에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거하시며 통치하셔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성전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신구약 성경을 쭉 살펴보니까 그 성전을 짓는데 나타난 하나님의 가장 간절한 열망은 사람이 지은 그 건물에 거하시는 것이 전혀 아니고, 그 하나님의 열망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처소를 삼고 거하시며 그들 가운데 두루 행하시고 그들을 인도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열망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을 이스라엘 진 한 가운데 세우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 원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66장만 하더라도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요,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인데 어떻게 사람이 지은 건물 안에 거하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진실로 거하기 원하시는 곳은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애통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떠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 고린도후서 3장과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성전 삼고 거하시며 운행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에 대한 부분적인 성취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므로 예수를 믿는 성도들 속에 그리고 교회 가운데 성령님이 오셔서 거하시므로 개인과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성전 삼고 거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교회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과 교통하시며 그들을 친히 지도하시고 인도 하시는 그러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실제적인 교제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기를 원하시는 열망과 그 삶의 실제를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생명이 그 곳에 넘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우리가 교회로서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이 그 가운데 거하실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다고 말함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성령님이 우리 속에 오셔서 거하시고 교회 가운데 거하시므로 하나님의 성전이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 성전삼고 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직도 우리가 그 목표와 뜻을 향해서 교회가 세워져 가고 있다고 에베소서 2장은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도와 의중은 성령께서 교회 가운데 거하시며 저들의 실제적인 왕이 되시고 거하시며 저들 가운데 통치하시고 운행하시는 그러한 삶을 살기 원하는데 교회가 인본주의로 지극히 타락하여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교리적으론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교리적으론 성령님이 교회를 인도하시는 분일지는 몰라도 실제 삶에서는 예수님이 그들의 삶의 주인이거나 삶에 통치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거두어서 예수님이 문밖에 계시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실제적으로 그 가운데 왕으로 통치하시고 운행하실 때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게 되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걷혀 있기 때문에 교리적으로는 성령님이 그 가운데 계실지 모르지만 실제적인 성령님의 통치가 그들의 삶에 걷혀져 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본인들이 생각하기에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도 그 속에 단 하나의 생명도 없음을 봅니다. 이게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이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하나님이 쓰시는 빌리 그레엄 목사님이 말하기를 오늘날 미국의 교회에서 성령님이 떠나신다 할지라도 90% 이상의 일들이 전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대로 진행될 것이다. 라고 했는데, 저는 이것이 미국 교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 일은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님이 운행하시지 않으면 중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오늘날 성도들의 삶 속에 그것이 가정생활이건 직장 생활이건 ‘이 일은 성령께서 하셔야 하기 때문에 성령님이 행하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일은 성령님만이 하셔야 됩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내용이 얼마나 됩니까?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도 소위 목 좋은 슈퍼자리를 잡아서 교회를 세우고, 세상의 상업광고 효과를 최대한 살려 목회자를 선전하고, 그리고 소위 자기교회를 선전합니다. 그리고 사람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때론 사용하는 방법들이나 문구들이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세상의 것들도 많습니다. 이처럼 오늘날의 교회에는 인본주의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삶과 성도들의 삶 밖으로 쫓겨나신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인본주의는 사단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실 것은 인본주의는 사단의 방법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전형적인 특징이 인본주의입니다. 성경에 보면 루시퍼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장 가까이 거하는 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교만이 들어가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교만이 들어가서 그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는 것으로는 만족 할 수 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지금도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고 자기는 악한 신이라고 칭함을 받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타락한 사단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과 대칭이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피조물인 루시퍼 안에 교만이 들어가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으나 지옥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사14:12-15) 그런 다음에 사단은 자기가 당연히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제는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피조물인 인간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시험한 내용이 똑같습니다. 하와에게 뱀으로 찾아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가리키면서 하는 말이 저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고 유혹합니다. 저것을 먹으면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못 먹게 한거라고 미혹했습니다. 사단이 피조물인 인간에게도 자신과 똑같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단이 넘어졌던 죄악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 교만입니다. “Original sin" 이지요.
교만은 자기가 자기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Original sin"이 교만입니다. 이 교만을 가지고 사단이 인간에게도 하나님처럼 되라고 시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기 보다는 자기가 자기 하나님 되기를 선택해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다른 말로 하면 자기가 자기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하나님이 되는 것 그게 정확하게 인본주의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의 가장 큰 핵심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입니다. 그럼 인본주의가 뭐냐? 첫째, 자기 자원으로 사는 것이고 둘째, 자기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고 셋째, 자기 방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류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사야서 53장에 말씀하시기를 ‘저희가 다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특성에 대해 말하면서 저들이 거듭나지 못한 타락한 육신과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했다고 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 자기 자원으로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방법대로 사는 것이 인본주의인데 그것이 가장 전형적인 타락의 핵심이요 바로 사단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심각합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십시오. “너희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단을 가리키죠, 사단을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여기보시면 자기중심적인 인본주의 사고와 세상과 사단이 나눌 수 없도록 밀접하게 연결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사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이 실제로 그 가운데 주인이 아니요, 하나님이 실제로 그 가운데 왕이 아니며 하나님이 실제로 그 가운데 통치하지 아니하시고 거기에 육신과 세상과 사단의 영향력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지요. 그만큼 인본주의가 심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때로는 우리가 주를 위해서 혹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다고 하면서도 너무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인본주의적인 자원과 방법과 목적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는 그 가운데 사단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도시에 사람들이 입주하게 되면 서로 자기 교회로 데려가기 위해서 이제 막 이사 온 집에 교패를 붙이기 위해서 집주인과 싸웁니다. 집주인이 왜 남의 집에 교패를 붙이냐고 하면 교회를 정하실 때 까지만 붙여놓으라고, 그러면 집주인은 싫다고 실갱이를 합니다. 말이 될 수 없는 얘기들이지요. 또 A교회에서 보낸 전도자와 B교회에서 보낸 전도자가 한 가정을 놓고 서로 자기교회 교패를 붙이려고 싸우니까 A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하는 말이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마음대로 해버리라고. 그런 얘기도 나오고, 그런 얘기들이 비일비재 퍼지니까 아파트 수의 아저씨가 전도하러 왔다고 하면 당신네들 헌금 받아서 사업하는 거 아니냐고 들어가지 말라고, 나 더 이상 아파트 주민들에게 시달림 당하기 싫다고 못 들어가게 합니다. 이렇게 인본주의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에 육신과 세상과 사단은 나눠지지 않습니다.
둘째, 오늘날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라오디게아교회는 철저히 눈 먼 교회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제가 모든 교회가 그렇다. 모든 백성들이 그렇다고 하나님의 교회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려고 하는 말도 아닙니다. 지금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저와 포도나무 교회를 포함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여기 보시면 얼마나 저들이 철저하게 눈이 멀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저들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가 하면 ‘너희는 곤고하다 너희는 가련하다 너희는 가난하다 너희는 눈멀었다 너희는 벌거벗었다 그러는데 그 사실도 모를 뿐만 아니라 자기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부자라 부족함이 없다’라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눈이 멀었나 보세요.
지금이 어느 때보다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워진 시대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보다 많은 기독교 서적들이 출판되고 있고, 어느 때보다 많은 세미나들이 있습니다.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느 시대보다 우리는 더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혐오시설 취급하는지를 아십니까? 그들은 우리 가운데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전혀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결과만 보아도 우리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서 2장을 보면 유대인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이렇게 표현 한 것처럼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도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요 눈 먼 자들의 인도자요 우둔한 자들의 교사라고 자부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소경된 인도자여 소경된 인도자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3:16,24,26) 실제로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에서 철저하게 눈멀었습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분별의 벽이 철저하게 무너져있습니다.
레위기 10장의 사건이 저는 이 시점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나옵니다. 이들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행할 때,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제사를 드린 게 아니라 자기들 임의대로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그랬을 때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서 그들을 그 자리에서 살라 죽였습니다. 그들을 일시에 불살라 죽였을 뿐 아니라 아들을 동시에 둘이나 잃어버린 아론에게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머리를 풀고 자녀들을 위해서 곡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론은 자녀들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또 여호와가 모세로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레10:8]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여 거룩한 가운데 행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여 정한 것 가운데 행하라는 겁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제사하러 들어가면서 전날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정한 것과 속된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부정하고 속된 것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되 하나님이 세우신 방법을 따라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한 것인데, 나답과 아비후는 술에 취해서 자기들의 생각대로 임의대로 행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얼마큼 철저하게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져있는지 우리 자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누구보다 철저히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야 말로 세상의 빛이요, 눈먼 자들의 가이드요 우둔한 자들의 교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잘 알았기에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성경이 말씀하신 인격적인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하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형용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거하는 거라고 하셨는데,(요5:37-38) 그들은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기초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분별해야 되는데,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고 그릇 행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누구보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행하심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분별력이 가리워져 있어서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분별하는 눈을 잃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나답과 아비후처럼 진짜 독주에는 안취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술에 취해있었고 그들은 탐심의 술에 취해있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하기를 저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했거든요. 세상의 탐심과 세상에 대한 집착과 욕심에 취한 자들로서 그들은 문자 그대로 독주에는 안취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술에 취해 있어서 영적인 분별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되 정말 하나님의 길을 따라 나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여 속된 것을 버리고 거룩한 것을 취하는 가운데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본인들은 신앙이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었고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교리적인 수준은 가득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완전히 걷혀있는 그러한 상황 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또한 신앙의 가장 핵심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쉐마’로써 이스라엘 아기들이 태어날 때 제일 먼저 교육을 받는 구절입니다. 오늘날도 보수적인 유대인들은 모자 속에 그 구절을 써서 넣어가지고 다니고, 자기 집 문설주(다윗의 별)에 그 구절을 써가지고 넣어두고, 그 구절을 손에 매고 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나는 다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알았노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의식을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 그 분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어지는,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 그분을 사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한국에 일천만이 넘는 기독교인이 있다고 그러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안 사랑한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관점에서 진실로 인격체이신 그 분이 자신의 유일한 삶의 목표와 목적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극히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늘 오전 성경 공부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할지니라. 그래서 부자 청년에게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으라. 그랬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부자 관원에게는 탐심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명을 잘 지키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탐심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눅18:18-23]
이 얘기는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따르려면 우리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가장 값진 보화와 같으니 어떤 사람이 발견하매 묻어두고 가서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샀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가장 값진 진주와 같으니 그것을 발견하매 어떤 상인이 모든 것을 팔아 샀느니라.’ 그와 똑같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내게 합당치 않다.’고, 예수님을 따르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야한다. 혹은 우리의 모든 재산을 다 헌금해야한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재산의 소유권이 실재로 하나님께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그것이 집이건 논밭이건 빌딩이건 저금통장이건 적금이건 보험이건 퇴직금이건 모두 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야 실제적으로 주님이 그 삶의 주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주여, 주여 할지는 몰라도 실재로는 주님이 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또 아비나 가장 친한 친척, 처자, 부모 가장 친한 사람들을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이 세 가지야 말로 자기 자신의 가장 핵심이고,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인 부모, 처자, 자식을 미워하라는 말은 실재로 미워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되 저들에 대한 사랑이 미움이 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고, 돈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예수님이 이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여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라고 입으로 말할지는 몰라도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지 않으면 실제로는 하나님이 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탐심이 우상숭배요, 나눠진 마음이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할지는 모르지만 자기를 기뻐하는 범위 내에서, 자기가 원하고 자기 유익이 되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전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기에 요한 웨슬러는 세 가지가 거듭나야 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영이 거듭나고, 둘째는 지갑이 거듭나고, 셋째는 성품이 거듭나야 된다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주님의 통치권에 들어가야 주님이 진정한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사실 돈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과연 몇 %나 자기의 집 자기의 땅 자기의 저금통장 자기의 적금 자기의 퇴직금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면 기꺼이 주님께 원하시는 대로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 %나 있겠습니까? 일천만이 넘는 크리스천 중에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예, 있습니다. 제 얘기는 몇 명이나 되겠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전존재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래도 바리새인처럼 자기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그 의미가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분별력이 상실 되었으니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여 거룩한 것을 따라 주 앞에 나오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탐심과 세상과 정욕과 육신에 취해 있어서 분별력을 잃었기 때문에 선한 것과 속된 것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종교적인 행위는 잘 할지는 몰라도 그래서 열심히 봉사하고 많이 기도할지는 몰라도 결국 그 뒤에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그것을 통해서 자기의 세상에서 원하는 것들을 얻기 위함이고, 세상에서 돈 많이 벌기를 원하고, 결국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진 경우가 너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인격체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우리 신앙에서 고단수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신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의 가. 나. 다에 해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 신앙의 “가”에 해당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우리 신앙의 “가”에 해당하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 지금 얘기합니다.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을 누구보다 철저히 그대로 다 믿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철저한 보수 신앙을 가졌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에 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에게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으리라” 한마디로 안 믿었다는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분별력이 상실 된 겁니다. 그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그대로 믿으면 그게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전 존재로 신뢰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에도 바리새인처럼 믿음에 대해서조차 너무나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신걸 믿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심을 믿습니까? 그러면 다 아멘 합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에게 필요가 닥치면 전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우리의 수단과 방범을 동원하고 그게 안 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은 바리새인처럼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믿는 지식적인 긍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믿음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약2:19)
실재로는 안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까? 그러면 다 아멘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 앞에 설 것을 믿습니까? 그래도 다 아멘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이세상의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을 믿습니까? 또 아멘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를 포함해서 우리가 진짜 그걸 믿으면 절대로 이렇게 안 살 겁니다. 그걸 진짜 믿으면 절대 이렇게 목회 안할 겁니다. 많은 경우에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소유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것만 해도 우리가 진짜 그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의 소유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것 전혀 어렵지 않을 겁니다. 부자 청년이 왜 어려웠는가? 자신의 앞에 서계신 분이 누구인지 못 봤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그가 그렇게 원하는 영생을 주시는 유일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그가 알았더라면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그 앞에 계신 예수님을 표면적으로는 보았지만, 그래서 예수님께 달려왔지만, 베드로와 요한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영생의 말씀의 소유자 메시아를 못 봤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다 이론적으로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그리고 그 앞에 설 때에 우리가 심판을 받을 거라고,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는 전혀 안믿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세상사랑, 탐심, 돈에 대한 집착에 완전히 매여 삽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고 계신가 하면 ‘내게 나오는 자들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그리하여야 너희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여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독주에는 실제로 안 취하기 때문에 그 말이 상관없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리새인처럼 똑같이 세상과 돈, 탐심, 야망에 취해 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어져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그걸 구분하지 못하고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은 자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경험은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오늘날 교회가 사역하는 방법을 보십시오. 인본주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은 자기중심입니다. 죄의 Original sin은 교만인데 그 교만의 전형적인 특징이 자기가 자기 자원으로 자기목적을 위해 자기 방법대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무엇이 세상에 속한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소중한 것인지 무엇이 사단에게서 나온 악한 것인지 분별이 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주의 일을 주의 이름으로 하면서도 우리는 지극히 타락한 사단에게서 나온 인본주의적인 세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만큼 철저하게 우리는 눈이 멀었습니다. 지금 심각합니다. 아주 심각합니다. 너무 너무 심각합니다. 그래서 레위기 10장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부흥을 보내실 때, 이 레위기 10장은 특별히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20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 산에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여기 나온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것을 본 자들 속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여 거룩한 것 가운데 나아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뭐가 거룩인지도 뭐가 경배인지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열망하고 기다리는 우리들로서 이 구절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뭐가 거룩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뭐가 경배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주일날 예배 올 때에 좋은 옷을 입고 나와서 정숙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 그게 경건인 줄 압니다. 그건 경건하고 상관없는 일입니다. 당연히 예배드릴 때 단정한 옷을 입고 나와서 정숙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잘못됐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경건하고는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깔끔하게 입고 앉아 있어도 마음속에 시기, 질투, 세상사랑, 돈에 대한 탐심, 미움이 가득하면 그것은 무엇보다 타락한겁니다. 경건은 외부적인 모양에 전혀 있지 않습니다. 경건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경건의 능력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알고 내가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내 삶 가운데 운행하고 계시고 그 분이 실제적인 내 삶의 주인으로서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 안에 거룩함과 경건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건함과 거룩함이 무엇인지 그 의미조차 모릅니다. 철저하게 분별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외부적인 경건함은 추구하되 진짜 경건함이 뭔지도 모르기 때문에 본인은 경건하다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회칠한 무덤과 같아서 겉으론 아름답게 단장되어 종교적인 모양과 아름다운 모습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는 온갖 사람의 썩은 뼈와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것처럼, 우리가 종교적인 모양은 그럴듯하게 갖출지는 모르지만 그 속의 시기, 질투, 싸움, 다툼, 미움, 사기, 간음, 세상사랑 이러한 것들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거룩함이 뭔지 경건이 뭔지가 가려져 있습니다.
의가 뭔지도 가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의가 뭔지도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성수주일을 잘하고 십일조 잘하고 목사님 말씀 잘 듣고 그러면 그게 의로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행함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인데, 우리는 행함으로 의롭게 될 사람은 아무 사람도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조차 이해하는 경우가 너무너무 드문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도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도 가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 세상의 방법이 무엇인지가 가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가려져 있어서 우리 신앙의 전반적인 영역에 걸쳐서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져 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술 취함입니다. 세상과 탐심에 취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과 정한 것과 속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잃어버려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거룩함과 정함 가운데 나아가기보다는 나답과 아비후처럼 세상적인 방법과 개인의 욕심과 탐심과 개인의 주장과 의견을 따라 나가는 경우가 너무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말은 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을 소중히 여긴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삶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사실 지금까지만 살펴보아도 우리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축복은 아닙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산업이 발달해서 그들의 생활이 부요하니까 하나님의 축복으로 부유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이만하면 살만하고 때로는 교회도 크고 예산도 많고 또 좋은 차도 타고 다니고 집도 좋고 큰 문제없고 하니까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자부심이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 존귀한 것이 무엇인지 조차 철저하게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소중한 것이 단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도 깨닫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너무 너무 비슷한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의로운 행실이 없으면 벌거벗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하나님의 의로운 행실이 없는 벌거벗은 교회입니다. 여기 벌거벗었다는 말은 의로운 행실이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 계시록 19장 7절-8절을 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여기에 보면 말세가 되면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때 성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될 텐데, 그 혼인잔치의 세마포가 뭐냐면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 “acts of the righteousness”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벌거벗었다는 말은 성도들이 의에 행실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세마포가 없으면 결혼식장에 벌거벗고 나가는 거랑 똑같습니다. 신부가 결혼할 때에 가장 아름답게 꾸며야 되는데 벌거벗고 나가는 거랑 똑같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혼인잔치에는 벌거벗은 채로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의로운 행실이 뭘까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의로운 행실이 4가지가 나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 하라.” 영어 NIV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e careful not to do your acts of righteousness” 여기 “acts of righteousness” 라는 말에 따옴표 해놨습니다. 아까하고 똑같은 말로서 “before men, to be seen by them”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의의 행실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러면서 은밀하게 거하시는 하나님이 보시도록 그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 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하면, 사람 앞에서 칭찬받으면 이미 다 상급이 끝났으니까 그 나라에 상급이 없을 거라 그러면서 나오는 게 뭐냐면 네 가지가 나옵니다. 기도, 금식, 구제, 헌금 입니다. “acts of righteousness”
진정한 헌신은 끈이 달리지 않고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칭찬 받기위해서도 아니고 혹은 내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 물질을 쌓는다든가 내가 추구하는 바를 하나님이 채워 주시도록 헌금을 드린다던가, 끈이 달린 게 아닌,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헌금하고 구제하는 그것이 성도들의 의에 행실 중에 일부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투자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게 뭐냐면 사람 앞에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도 아니요. 그것으로 인해서 내 목표와 목적을 위한 끈 달린 헌신도 아닌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내 삶을 투자하는 헌신, 그것이 의의 행실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위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기 위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 그것이 기도든지 금식이든지 그것이 헌금이든지 구제든지 내 삶을 드려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하는 것, 드리는 것, 이것이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 설 때에 입을 세마포 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러한 의의 행실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이번에 이 길수 목사님 차량만 해도 헌금 다 합쳐도 백만 원도 안되고 구십 팔 만원인가 그랬는데 나머지는 한분이 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부자가 아닙니다. 그 분이 돈이 많아서 헌금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구체적으로 보여 주시더래요. 그래서 순종했습니다.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누군지 제가 이 목사님에게도 안 알려 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진실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열망으로 주께 드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시는 헌금이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헌금드릴 때 헌금바구니로 헌금을 걷으면 사람들이 민망해 할까봐 적당히 넣고 들어오라고 뒤에 헌금함을 놓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헌금할 때 헌금 바구니 돌리는 정도가 아니고, 헌금 통 앞에서 사람들이 차례로 나와서 헌금할 때, 누가 얼마나 헌금하는지 다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면 그들의 신앙에 그게 중요한 부분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보는 가운데 차례대로 나와서 헌금을 냅니다. 부자들은 많은 헌금을 넣습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사람들이 야! 저 양반 헌금 많이 하는데 하면서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별로 놀라워하지 않으시고 그냥 쳐다만 봅니다. 그리고 적게 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도 반응도 없습니다. 또 다른 부자가 나와서 이번에는 더 많이 헌금을 넣습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또 놀라서 그 사람을 쳐다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듯 헌금(동전)을 넣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지금 보고 계시고, 또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싶어 하고, 자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다. 드디어 어떤 과부의 차례가 되었는데 그 과부는 겨우 엽전 두 닢을 가지고 와서 부끄러워서 가만히 넣고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들어갑니다. 그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그 당시 가장 가볍고 적은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그걸 보시고 깜짝 놀라시면서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것 좀 봐라, 이것 좀 봐라, 이것 좀 봐라. 이 여자가 제일 많이 넣었다. 이 여자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 그러면서 무척이나 기뻐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과부처럼 헌신할 자를 찾으십니다.
그럼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귀하게 여기시고 부자들은 귀하게 여기시지 않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선호하시는 편견도 없고요. 부자들을 배타하는 편견도 없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헌금이 많건 적건 전혀 그것 때문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어떤 분이 주석을 달기를 사람은 얼마를 냈는가를 보는데 하나님은 얼마를 남겼는가를 보신다고 했습니다. 부자들은 헌금을 많이 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 남겨 놓은 것은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훨씬 더 많은 걸 남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부는 엽전 두 닢밖에 안 넣었지만 그것은 그 여인의 재산 전부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가장 많았던 겁니다. 우리 중에 그 과부처럼 하나님나라에 그렇게 헌신할 사람, 참 드�니다.
오늘날 교회는 실로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교회대로 회복되어야 할 절실한 필요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일반적으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완전히 걷혀 있어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실제적인 만남과 교제보다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순서를 잘 마치는 것이 예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야말로 견딜 수 없도록 숨 막힐 수밖에 없는 그러한 예배가 되어버린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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