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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이사야서를 통해 본 하나님의 약속

시리즈설교/교회회복

by 발의무리 2007. 9. 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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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이사야서를 통해 본 하나님의 약속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찌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펴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사 54:1-3]

교회회복에 대해 시리즈로 살펴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이사야서 하반부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도 이사야서 하반부 40장부터 66장까지 한번 쭉 읽어봤는데, 이사야서 하반부 전체 주제를 한마디로 말하면 회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으로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올 것과 그다음에는 예수님 안에서 회복과 그다음은 교회의 회복을 말합니다. 이사야서 65-66장은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궁극적인 회복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사야서 하반부는 전체적으로 회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55:17-25]

‘니키 검블’이라는 분은 현재 영국에 사시면서 세계적으로 알파코스를 이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참 귀하게 세우신 일군 중의 한 분입니다. 그 분이 쓴『부흥의 본질』이라는 책이 <서로사랑>에서 번역되어 나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정확하게 이사야서 40장부터 66장까지 나오는 부흥과 관련된 부분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면서 그분도 이러한 부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성경 66권의 요약 판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사야서는 총 6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서를 성경 66권의 요약 판이라고 말합니다. 전반부가 1장부터 39장까지인데 그 전반부에서는 구약의 삶에 대해서 다루는데, 구약이 39권입니다. 그리고 40장부터 66장까지는 회복에 대해서 다루는데, 신약성경에 나오는 주제가 거기에 다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27권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이사야서 40장에서 55장까지를 ‘구약의 복음’, 혹은 ‘고대인을 위한 복음’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떤 침례교 목사님은 이사야서 전체를 특별히 하반부를 ‘제 5 복음서’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신약의 4복음서가 없다할지라도 이사야서가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얘기할 만큼 복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사야서 하반부 40장 3절에서는 침례(세례)요한을 언급한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그리고 이사야서 하반부에 보면 고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구절이 4부분이 있는데, 신약의 복음서도 4개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하나님의 종’,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고, 그다음에 61장에 보면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마치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신 것처럼, 그리고 65장, 66장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처럼, 그러니까 이사야서 하반부가 어떻게 보면 신약성경 전체를 요약해 놓은 것과 같은 신약성경의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회복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사야서 하반부는 회복에 대해서 다루면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종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종이 이사야 본인이라고 얘기했다가 나중에는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이사야서 52장 하반 절부터 53장에 보면 인류의 죄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고난의 종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8:26-36) 그런데 어떤 때는 성경에 종을 복수인 이스라엘이라고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반면에 어떤 때에는 종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레스 왕이 종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가 거기에 나오는 종이라고 하기도 하고, 종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그 리키 검블 목사님이 종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설명을 잘했더라고요. 그분도 아이디어를 다른 분에게서 얻은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아주 잘 정리해 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종을 어떻게 정리했냐면, 십자가를 옆으로 뉘어 놓은 것처럼 그림을 그려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우측은 이스라엘을 비유하고, 가운데 정점을 예수 그리스도(메시야)를 비유하고, 우측은 신약의 교회를 비유합니다. 그런데 우측에 그린 종은 이스라엘로 하나님을 떠난 불충한 종이었습니다.

이스라엘(복수)
불충한 종                      (옆으로 된 십자가는 안뜹니다.)
신약의 교회
신실한 종(단수)
메시야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남은 자가 있고, 특별히 이스라엘에 최종적으로 이르게 된 정점과 같은 그 남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의도하신 바가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종이 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종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고, 보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완성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른편으로 다시 넓어지는데 그게 교회에 대한 것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약속이 교회에게도 그대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이 정의가 아주 잘 정리됐다고 생각하는데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 하반부의 전체 주제가 회복입니다. 이 회복에 있어서 가장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고레스 왕이라는 사람이 쓰임 받았습니다. 이 고레스 왕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되어있고,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라고 되어 있으되 종이라는 표현으로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물론 목자가 하나님의 종이기는 하지만 종이라고 쓰여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기름부음을 부으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고레스 왕은 바사 나라 왕이었는데 바벨론을 무찌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로 돌아가도록 하는데 쓰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회복이 있는 반면에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서 이루어질 새 언약의 시대에 놀라운 회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그 뿐만이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회복은 말세에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과 관련해서 교회회복을 담고 있는데, 그 회복이 새 하늘과 새 땅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귀하게 쓰임 받을 사람들이 누구냐면 교회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하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회복에 대해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 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부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약간 방향을 달리해서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약속과 예수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 그 약속의 성취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같이 보기 원합니다.

제가 오래간만에 지난주 목요일에 대전 정기 집회를 인도하러 갔었습니다. 그리고 전전 주에는 부산에 갔었습니다. 그때 부산에 갈 때도 하나님께서 이런 부분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전하라고 하는 것에 윤곽은 알겠는데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가닥이 안잡히는 겁니다. 제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전하는 게 아니고, 결국 그동안 비춰 오셨던 부분들을 전하는 건인데도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는 부분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면서 때로는 정리가 안 되니까 고속열차를 타고 가면서 하나님께서 감동주시는 만큼 정리하고, 그렇게 가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설교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부흥을 대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자세와 핵심적인 부분들을 선명하게 비추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도 아주 유익했습니다.

이번에 대전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나누어서 전하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오전 11시에는 성경 공부하고 오후 2시에는 설교시간인데 오후 2시에 대한 부분은 제가 전에 전해보지 않았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어렵던 부분을 배워가게 하시는 부분인데, 오후 2시에 내용은 제가 보기에도 11시에 해야 맞을 것 같았습니다. 왜냐면 설교라기보다는 성경공부 할 내용이지 내가 거기에서 별로 설교할 내용이 없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그것을 11시에 전하면 어떨까, 그리고 오전에 할 것은 설교 내용이니까 오후에 하면 어떨까라고 하나님께 물었더니 머리가 엄청 복잡해지면서 혼돈이 오는 겁니다. 하나님 뜻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 잘못 했다고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니깐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서 하나님이 하라고 그러신 대로 처음 설교하면서 지금처럼 횡설수설하기도 하고, 이런 말 저런 말 하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하나하나 가닥을 잡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오전 성경공부를 마치고 오후 때에는 오전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께서 비춰 가시는데 너무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제가 오면서도 개인적으로 들으면서 비춰봐야 될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그 테이프를 2개 복사해서 달라고 부탁하고 왔습니다. 사실 오늘 오후에 이사야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회복의 약속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정리하기위해서도 몇 주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를 옆으로 본, 오른쪽이 이스라엘 백성이고, 가운데 만나는 정점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래서 구약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한 예언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이 이루어진 좌측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그 회복의 역사들이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되 가장 정점에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구약에 나와 있는 하나님 백성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는 그 삶을 그대로 살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를 보면 너무너무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이미 이사야서 하반부에 나타난 하나님의 그 길을 따라 그대로 왔습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처럼 이사야서 하반부에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대한 부분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예수님의 삶을 통해 가장 잘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실 때마다 그런 회복이 반듯이 있었고, 그 때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되었습니다.

제가 왜 횡설수설하며 얘기하느냐면, 제가 오늘 살펴보려고 했던 부분이 그런 패턴을 따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이 한 부분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어떻게 예수님의 삶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어서 이루어졌나하는 것을 같이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조직적으로 정리가 안될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를 보게 하기를 원하시는 부분이 있나 봅니다. 혹은 11시 성경공부 시간을 통해서 어떠한 부분을 선명히 비추셨는데 그것과 연결되어서 우리 자신들에게 오늘날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에 대해서 더욱더 선명하게 비취시고 하나님의 길로 전환하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 설교를 그러한 맥락에서 하려고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서 하반부에 보면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오늘날은 우리가 첫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되어야 할 절실한 필요 가운데 있습니다. 너무너무 절실한 필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럼 회복되는데 있어서 어떻게 회복되어야 할 것인가? 그 중요한 한 부분이 이사야서 54장 1절에 나옵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하는 너는 노래할 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 ‘구로’라는 말은 산고를 말하는데, 산고란 여자가 아이를 낳는데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에게 말하는 말입니다. “네 장막 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희 말뚝을 견고히 할찌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펴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이게 회복입니다.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말하고, 두 번째는 땅 끝까지 하나님의 빛이 비춰져서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 회복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자손이 좌우로 펴질 뿐만 아니라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도록 회복의 역사가 있을 거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은 누구고 홀로된 여인은 누구며, 어떻게 해서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을 것인가?  여기에 핵심을 보아야 합니다. 5절인데, 먼저 4절을 봅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여기에 보면 청년 때의 수치라는 것이 나오고, 과부 때의 치욕이라는 게 나옵니다. 그러면서 5절에 보시면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느냐면, 하나님이 홀로된 자들의 남편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회복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가 시리즈로 살펴보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주님의 오심을, 하나님이 영광의 임재로 방문하심을 준비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아서 살펴본 계기가 됐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교회회복에 대해서 살펴보고,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로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것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두 개가 서로 다른 일 같은데, 왜 두 개를 같이 살펴보느냐 하면 이 두 개가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4장 1-3절에 놀라운 약속이 주어졌는데, 이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느냐면 하나님이 저들의 남편 되실 것이기 때문에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저들의 남편 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것은 육체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저들 가운데 능력으로 임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회복과 하나님이 능력으로 임하시는 것이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 하반부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회복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반면에 동시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사야서 59장, 60장, 61장에서 집중적으로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훨씬 더 많을 거라” 그리고 이 구절을 잘 이해하려면 갈라디아서 4장을 보면 선명히 이해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두 종류의 신앙 체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십자가의 복음과 거짓신앙체계인 율법주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전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1절부터 봅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는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이 내용의 배경을 다 아시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75세 때,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가나안 땅으로 와서 정착을 하는 과정에서 10년을 기다렸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까 처음엔 자기에게 있는 종을 양자 삼아서 유업으로 줄까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그게 아니고 네 몸에서 태어난 자식이 유업을 이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또 생각한 것이 인간적인 방법인 씨받이로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자식을 낳은 게 이스마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소위 말하면 눈물의 씨앗이 된 겁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후에 아브라함 나이가 10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90세인 사라의 태를 여셔서 자식을 주신 게 이삭입니다. 그랬더니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유업이 그 이삭에게 갈까봐 시기가 나서  기회만 있으면 이삭을 핍박하는 겁니다. 이것을 두고 지금 비유로 설명한 겁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종의 종교인 율법주의로 비교하고 있고, 이삭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오직 믿음에 의한 삶인 십자가의 복음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하갈이 이스마엘을 난 것을 육체를 따라 났다고 그럽니다. 이 말은 이삭은 육체로 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체를 따라 났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게 아니라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 되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육체를 따라 났다고 그러는 겁니다. 반대로 이삭은 자유하게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는 말은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을 이루시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이루신 겁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자라고 말하고 있고 이삭을 약속으로 주어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비유니”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성경을 비유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왜 영적인 해석이 되니까요. 그런데 이 경우는 예외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이 사건을 지금 비유로 들고 있는 겁니다. 이해하시죠?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종의 종교인 거짓신앙체계인 율법주의를 나타내고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종의 종교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누구를 가리킵니까? 사라를 통해 주어진 이삭을 가리키지요. 그러면서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그러면서 여기에 우리가 아까 읽은 이사야서 54장을 인용합니다. 기록된바 라는 말은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성취되어져서 이렇게 되었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이삭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사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율법주의가 지금도 참다운 신앙을 핍박한다. 대적한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대적했던 사람들이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람들이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면서 핍박하던 사람들이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부흥이 임할 때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대적했던 사람들도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 신앙체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사야서 54장의 약속이 하갈 혹은 이스마엘로 대변되어지는 종의 종교인 율법주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사라 혹은 이삭으로 대변되어지는 십자가의 복음에 이 약속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다시 이사야서 54장으로 갑니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네가 좌우로 퍼지며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이 약속이 지금 남편 없는 자에게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라를 남편 없는 자, 홀로된 여인, 잉태치 못한 자, 구로치 못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 남편 없는 자라고 그러나요? 아니 남편인 아브라함이 버젓이 살아있는데요. 사실 이게 이 내용의 핵심입니다. 반대로 하갈은 남편 있는 자로 비유합니다. 여기 남편 있는 자라는 말은 아까 말한 대로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그 약속을 이루려고 하는 겁니다. 10년을 기다려도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조급해지니까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듯이 씨받이로 종을 집어넣어서 그 종을 통해서 자식을 낳아 본 부인 앞으로 입적을 시켜서 양자로 삼으면 되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세상에 잘 받아 들여졌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실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운행하지 않으니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것을 두고 남편 있는 자라고,  그것을 두고 육체를 따라 난 자라고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은 세상에서 잘 받아드려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2장을 보아도 세상과 육신적인 방법과 사단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라를 남편 없는 자라 잉태치 못한 자라 말하고 있나요? 이겁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은 주셨는데 이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하나님이 오셔야만 가능하지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게 문제인 겁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역사하셔야 가능한데 10년을 기다려도 15년을 기다려도 안 오시고, 20년을 기다렸는데도 안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수치를 당하는 겁니다. 여기 수치라는 말은 방법은 한 가지 하나님이 오셔야만 되는데 하나님이 아직 안 오시니까. 그때까지는 수치가 있고,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하며, 과부의 치욕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중에 이 부분도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숨겨진 기간,……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숨겨진 기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그 약속이 실현되기까지는 25년 동안 과부의 수치인 잉태치 못한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가 안디옥 교회에 가서 하나님이 인도하신 세계무대에 세움 받기까지는 10년 이상 숨겨진 기간이 있었습니다. 또한 요셉도 17세 때 꿈을 꾸고 총리가 된 것이 30살이니까 13년이라는 숨겨진 기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셨는데도, 13년 동안을 그에게는 수치의 기간이었습니다. 잉태치 못한 기간이었습니다. 그 기간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세요. 반드시 있습니다. 이 기간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기간을 견디지 못해서 하갈처럼 인간의 방법을 동원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성장하지 않으니까 그 기간을 견디지 못해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합니다. 수치의 기간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비쳐져야 됩니다. 남편이 있는 자는 그 당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갈을 집어넣으니까 그 당시에 자식이 있는 것은 복의 상징이었는데 상속자가 생겼잖아요. 이처럼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해도 사람들에게 내세울만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다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성공했다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리는 안 오신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한 번도 그렇게 오신 적이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단 한번도 이 원칙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야 되는데 오시지 않으니까 그것을 기다리지 못해서 자기의 목적과 목표를 위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오늘 설교는 예수님의 사역과 대조해서 보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사역이 정확하게 여기에게 나와 있는 것처럼. 잉태치 못하며 구로치 못하며 그 백성을 세우시는 거였습니다. 뭐하도록 거기에 하나님이 오시도록, 나중에 보시면 선명히 알겠지만 바로 예수님이 그러한 무리들을 세우셨고, 거기에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저들의 남편 되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저들에게 임하신 사건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니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 놓은 어떠한 사역보다도 비교도 안될 만큼 놀라운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역이 우리의 모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분의 사역을 통해서 철저하게 신앙의 본질을 전하셨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라와 하갈로 대변되어지는 이 두 신앙 체계 중에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사라로 대변되어지는 참다운 신앙을 세우시기 위해서 헌신하셨습니다. 왜? 거기에 하나님이 오시니까요.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되니까요.

한편으로 우리가 어디에서 선명하게 그것을 요약해서 볼 수 있느냐면,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나님나라 비유를 보면 예수님이 무슨 사역을 하셨는가? 우리가 어떤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너무나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 비유에 나와 있는 그 삶 그대로 사셨습니다. 사라로 대변되어지는 그 신앙체계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게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입니다. 왜? 그리로 하나님이 오실 것이니까요. 지금 제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지를 아시겠지요? 어디로 설교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을 아시겠지요? 하나님나라 비유만 하더라도 여러 곳에서 나와 있는데 특별히 마태복음 13장입니다. 거기에 하나님나라 비유가 쫙 나옵니다. 그래서 거기에 나와 있는 하나님나라 비유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선명히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우리에게 전파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정확하게 하나님나라 사역을 하셨습니다. 정확하게. 그래서 그러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는데, 지금부터가 설교 하반부입니다.
  
하반부에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나님나라 비유를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하나님나라의 성격, 특별히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기를 힘쓰셨는가?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한 마디로 줄이면 사라로 대변되어지는 그러한 신앙을 가진 무리를 세우시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의 초점을 볼 수 있고, 그게 왜 중요하냐면, 그게 이사야서 54장에 말한 대로 그리로 하나님이 오셔서 남편 되셔서, 잉태치 못한 자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 즉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세워진 그 사역의 열매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세우신 그 무리들 가운데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셔서 전 세계로 복음이 퍼진 것처럼, 순식간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셨던 것을 볼 수 있고, 너무나 놀라운 사실은 이 패턴이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실 때마다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원칙 그대로 이뤄지니까요?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회복, 하나님의 부흥을 예비할찐대 이 부분이 반드시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하나님나라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러면  제가 순서를 약간 달리하겠습니다.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설교하는데 흐름을 따라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제가 설명 드리고자 하는 비유는 마태복음 13장 44-46절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하나님나라의 가치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가치라고 볼 수 있고, 혹은 믿음의 성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목은 여러분이 달으세요. 하나님나라 비유에서 하나님나라는 가장 값진 보화와 진주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나라 가치는 세상의 값으로는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사는 겁니다. 여러분, 이 비유와 예수님의 메시지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거 아세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그 다음에 가장 가까운 식구, 자기 남편, 아내, 자식, 부모, 그야말로 자기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을 미워하라. 이 말은 이들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비교해 보면 미움이 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전혀 안 사랑해요. 그러니까 아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은 문제가 없데요. 왜냐하면? 아내를 안 사랑하니까. 또 자식새끼들 필요 없다는 합니다. 그러니까 자식들보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문제없어요. 왜 자식들을 안 사랑하니까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남편들에게 기도가 막힌다고 했습니다(베드로전서 3장 7절). 그러니까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되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을 주신 것만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같이 가야 이 말의 의미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선되시는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선되시는 사랑이라야 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주님께 합당치 않데요. 이 말은 문자 그래로 돈이면 돈, 모든 것을 다 갖다 버려야 하나님나라에 합당하다 그 말이 아니고, 돈만 하더라도 자기의 모든 재산, 그것이 땅이든지, 집이든지, 퇴직금이든지, 통장이든지, 보험이든지, 노후연금이든지, 무엇이든지 그 전체가 다 하나님께 그 소유권이 이전되어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기쁨으로 쓰여질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최근에 한 분이 저한테 그러는 겁니다.(그 분은 하나님이 물질적으로 복을 많이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입니다.) 자기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하나님이 원하시면 아무 때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드릴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 되었다고 생각했데요. 그런데 어느 날 비춰주시는데, 물질을 하나님께 드릴지 모르지만 내 체면,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 이러한 것을 비춰주는데, 아직도 물질에 대한 자기 집착이 얼마나 강한가를 하나님이 보여주셨다고 그러면서, 그게 너무 너무 집착이 강하더라고 고백했습니다. 실제로, 이 세 가지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요. 자기 자신, 자기 목표, 자기주장, 자기 미래, 자기체면, 자기 가족, 돈, 예나 지금이나 사실 이것을 내려놓는 다는 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만큼 어려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것을 내려놓으면 죽을 것 같거든요. 물질만 하더라도 돈을 내려놓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왜? 돈이 있어야 노후가 보장되는 건데. 그나마 그 돈 때문에 노후에 대해서 안심하고 살아가는데. 돈이 있으니까. 자식 놈들이 찾아와서 굽실굽실하는데, 돈이 있으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내게 굽실굽실하는데…….

그걸 내려놓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가르쳤는지 아세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의 삶에 주인이요, 왕이 되시려면, 이러한 것이 내려져야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말해도 이러한 부분들이 안 내려지면,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이란 책에서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되 영적인 징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것’에 대해서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말씀하시면서, “주님! 저는 주님의 뜻이면 무엇이든지 제가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제가 어떤 대가나 희생이 요구되더라도 제가 그것을 기꺼이 치루고 주님의 뜻을 아는 대로 제가 기꺼이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뭐라고 하느냐면 만약에 이 자세가 없다면 그거는 전혀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자세가 없다면 주님의 뜻을 순종하되 내 뜻에 대치되지 않는 한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아무리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말할지는 몰라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말 속에는 내 뜻이 내려지는 게 포함된다는 겁니다. 그 말은 주님의 뜻이면 무엇이든지 내 삶의 어떠한 대가나 조정이 요구 될지라도 내가 기꺼이 그 대가와 그 조정을 치루고 또한 지불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내가 내 삶을 드리겠습니다. 라는 게 포함된다는 겁니다. 그게 안 되면 말은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한다고 그래도 중심은 내가 원하는 뜻에 대치되지 않는 한 내가 주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고 그것은 실제로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고 말할지는 몰라도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이러한 부분이 하나님 앞에 내려지지 않으면 실제로는 주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고 내 자식과 내 부모가 주인이고 그리고 돈이 주인이어서 그것에 합당한 범위 내에만 그것이 충족되는 범위 내에서만 순종하고 나머지는 내가 주인인 삶을 사는 겁니다. 이 경우엔 전혀 주님이 실제적인 주인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요 영적인 간음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 이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전했는가 하면 하나님 나라의 성격 자체가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산다고 그랬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 안 되면 하갈에 의해 대변되는 삶 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아무리 하나님의 방법대로 한다고 말해도 우리는 우리의 목표와 목적이 원하는 대로 하게 되어 있고 그대로 안 되면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이 동원하게 되어 있고 그것을 위해서 본질보다 의식을 치르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얻고자하는 하나님이 수단되어진 신앙체계로 전락 할 수밖에 없다. 그 말입니다. 거기로 부흥이 온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사람을 떨어뜨리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면 돌아서서 그렇게 가르치니까 아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그 당시에 있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내 소망 내 계획 내 선호하는 바, 이것들을 다 포기 하라는 겁니다.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 그러면 좋은데 예수 믿으면 내 죄 치유 받고 능력 받는다. 그러면 좋은데 자신과 돈을 포기하라고 그러니까 그런데 또 이제는 부모나 자식을 미워하라니,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말씀도 다 좋고, 능력도 좋고, 치유도 다 좋은데,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떨어뜨리려고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의 아픔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을 예수님은 절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는가? 그것은 그래야  진정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그들이 세워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넘칠 수 있으니까요.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될 수 있으니까요. 여기 비유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정확히 그 삶을 사셨습니다.

겨자씨의 비유
그 다음에 겨자씨의 비유가 있습니다. 31-32절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왜 겨자씨에 비유했을까요. 여기 포인트는 하나는 가장 작다는 겁니다. 참고로 씨앗 중에 겨자씨가 제일 작지는 않습니다. 식물의 크기에 비해 그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작은 씨로 인식되어진 겁니다. 예수님은 과학적으로 비유하신 게 아니라 그 당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거니까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느 기도원을 갔더니 겨자나무를 심었는데 그 씨앗을 보니깐 진짜 작습니다. 그런데 왜 처음엔 작은 줄 아세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정직하게 전하니까 작게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린 내용이 그 얘깁니다. 오늘날 교회성장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사역을 실패했습니다. 제가 설교해 놓은 테이프를 들으니까 저도 기분이 나쁘더라고요. 이 말은 진짜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했다는 얘기가 아니고, 오늘날 교회성장의 관점이 잘못됐다는 얘깁니다. 무슨 말이냐면 예수님을 보세요. 사람들을 끌어 모으러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즘은 개척하려면 아파트 단지 내 상가나 소위 슈퍼자리를 찾아서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 가까이 가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 다니셨습니다. 너무나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어떨 때는 밥 먹을 시간도 없고 쉴 시간도 없으니까 잠깐 쉬려고 몰래 피해가면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미리 거기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산이면 산으로, 바다면 바다로, 골짜기면 골짜기로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사천 명을 먹이실 때 한적한 들이였는데 사흘 동안 저들이 먹지 않고 쫓아 다녀서 가다가 허기질까봐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신 겁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만 해도 장정이 오천명이였는데 일반적으로 어린아이까지 이만명이라고 그러는데 사람들 가서 모을 필요 없이 오는 사람만 모아놔도 최소한 몇 십만은 되어야 될 겁니다. 이해되세요? 그래서 예루살렘에 교회하나 세워놓고 나사렛에도 하나 세워놓고 갈릴리에도 하나 세워놓고 베드로를 여기 부목사 세워 놓고  여기는 요한 세워놓고 그렇게 관리하면 예수님은 최소한 몇 십만 명의 성도는 이끌어야 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 남았습니다. 무슨 얘긴지 아세요? 제 얘기는 예수님의 관점과 오늘 날 목회자들의 관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 여러분 예수님 시대에 신앙이 타락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예를 들면 요한복음 5장 39절에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해 증거 한다고 말하면서 37-38절에 “너희는 하나님의 형용을 한번도 본적도 없고  그 음성을 들은 적도 없고 그 말씀이 지금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면 뭘 알 수 있냐면 여러번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성경적인 지식을 인격체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처해 죽은 정통주의에 빠져있던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나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기들은 의식을 잘함으로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다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음을 알았도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조차 모를 만큼 그들의 신앙이 왜곡되어 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랑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말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고한 자를 징계치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워져 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보다 자신들이 빛이요, 소경의 인도자라고 자부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소경된 인도자여 소경된 자라고 말할 만큼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 드리는 것을 해도 제물로 짐승을 잡아 제사 드리는 것은 옳은데 문제는 신앙의 이해가 잘못되어져서 성전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요, 만민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집인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고 의식을 잘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진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린 율법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이만큼도 관심도 없고, 그래서 학자들이 얘기 하듯이 이방인의 뜰에서 그들을 위한 자리도 없이 짐승을 팔았고 짐승을 파는 것이 필요했을지 몰라도 그들은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해서 성전의 의미와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들은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렸고 그래서 이방인을 위한 자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독점이 이루어지니까 제사장들과 결탁해서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고, 종교적인 외부적 모양은 있으나 그 속에는 전혀 세상사랑과 탐심과 탐욕과 미움이 다루어지지 아니한,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시대를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자들은 많은데 나름대로 사역을 크게 하는 자들도 많은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리로 백성들을 인도하는 자들이 없다고, 이것을 보면 신앙이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심판이 코앞에 까지 닥쳐왔는데 성경을 보면 저들이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천기는 구분할 줄 알면서 하나님의 시대는 분별하지 못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니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주는 게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위로와 축복을 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니 깨닫는 자들이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작게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언제 오는지 아세요? 하나님의 부흥은 예외 없이 교회가 지극히 영적으로 타락한 시대 이후에 옵니다. 항상 그래왔습니다.  역사가들이 얘기하듯이 하나님의 부흥이 없으면 교회는 벌써 끝났을 거라고. 그런데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부흥이 왔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더 살펴보겠지만 왜 부흥이 오느냐면 에스겔서 36장을 보아도 선명히 알 수 있고, 스가랴 3장을 보아도 알 수 있고, 그 외에도 여러 구절에서 볼 수 있는데 이사야서 하반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왜 부흥을 보내시는가? 그것은 우리 때문에 임하신 게 아니고, 우리로 인하여 열방 가운데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임하신다고 그랬습니다. 신앙이 타락 할수록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있습니다. 신앙이 타락 할수록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요. 신앙이 타락 할수록 성도들 삶 속에 하나님의 실제가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믿는 사람이 조롱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조롱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멸시를 당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혐오시설처럼 인정됩니다. 그것을 못 느끼셨으면 동떨어져 사시는 겁니다. 지금 사회에서는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함부로 못합니다. 옛날에는 예수 믿는다고 그러면 존경은 못해도 좋게 봤는데 지금은 예수 믿는다고 그러면 정신 나갔거나 좀 모자란 자로 취급하기 때문에 멸시를 받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말 안한다고 합니다.

신앙이 타락 할수록 하나님의 심판이 교회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고 하나님의 실체가 걷히기 때문에 세상은 조롱해 왔습니다. 신앙이 타락 할수록 교회는 전혀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아무리 믿는 사람이 많고 그럴듯한 의식들이 많아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길을 위해 교회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를 당합니다. 우리 때문에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를 당합니다. 그때 항상 임하셨습니다. 뭣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때문에 더럽혀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로 인해 임하셨습니다. 여러분 부흥에 관한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임하실 때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사라로 대변되어진 그 신앙, 바로 예수님이 전파하신 그 신앙관을 집중적으로 전하게 하셨는데, 그 신앙을 이해하고 거기에 서는 사람은 항상 소수였습니다. 신앙이 타락한 시대니깐 영적인 분별력이 가리워진 시대니까.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그러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주인인 시대니까. 심지어 교회에서도 목회에서도. 그러니까 겨자씨처럼 작은 일의 출발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잉태치 못하며 구로치 못한 자”들입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하나님이 오셔야 되는데, 하나님이 안 오시면 안 되는데, 다른 방법은 없는데, 하나님이 아직 안 오시니까 열매가 없습니다.

제가 개척초기에 그랬습니다. 서울 오금동에 있을 때 주부 영어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주로 낮에 하는데 영어성경을 쭉 읽어 가면서 지금 나누는 것처럼 성경에 나와 있는 그런 부분들을 나누는 겁니다. 내용은 지금 설교한 이런 내용입니다. 다 정리가 안 되었을지 몰라도 그러한 성격입니다. 그런데 방학 때가 되면 주부들이니까 같이 방학합니다. 그리고 한 학기 동안 수고 했다고 다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분들이 얘기하기를 목사님 우리가 여기 성경공부 오는 게 쉬운 줄 아세요? 그래서 무슨 말이냐고 하니까 여기 한 번 오면 뒤통수를 쾅 맞고 가는 것 같데요. 너무 충격적이라는 얘기죠. 그렇다면 우리 신앙은 뭐냐는 얘기죠. 여태까지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뭐냐? 충격적이라는 얘기죠. 뒤통수 한대 쾅 맞고 간데요. 너무 너무 아프다는 거죠. 나름대로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돌아가면서 끙끙 앓는데요. 그래서 그 다음주에 오기가 진짜 싫데요. 나는 그걸 몰랐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말이 맞는 말이래요. 그런데 그 다음주에 오면 깐 이마 또 까는 거죠. 내가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니고 아까 말한 대로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살펴가는 건데 또 맞는 거예요. 그러면 돌아가서 진짜 쓰러진데요. 며칠 동안 누워있기도 하고 하루 누워있기도 하고 그러면서 오기가 쉽냐고요? 그러니까 옆에 있는 분이 또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조금만 쉽게 가르쳤더라면 우리가 벌써 이 교회로 왔을 텐데 그러는 겁니다. 그 분들이 어떤 사람 들이였냐면 저는 지금 개척교회 하느라고 땀 뻘뻘 흘리고 있는데 하나님이 또 다루시는 시기입니다. 저는 그 때를 하나님이 사방을 꽉 막아놓으시고 팍팍 밟은 시기였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와가지고 자기가 그 동네 있는 교회는 다 돌아다녀 봤데요. 그런데 여기에 이런 교회가 있는 줄 몰랐데요. 그러니까 찾다찾다 제일 마지막으로 온 교회가 우리 교회였습니다. 그랬는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온 분들이 그냥 초신자들이 아닙니다. 큰 교회에서 소위 목사님 오른팔 왼팔 하는 분들이고 여전도회 연합회장 이런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내 설교 메시지가 강해서 못 온다고 그러면 누가 올 까 싶어서 낙심이 되더라고요. 아니 목회하면서 지하실에 콱 가둬놓으시고 사방이 안 보이는데, 아니 성도들이 와야 부흥이 되고 이거도 저거도 할 텐데 아니 저 양반들이 메시지가 강해서 못 온다고 그러면 누가 올까 싶어서 잠도 안 오고 뜬 눈으로 밤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엎치락뒤치락합니다. 며칠동안 아주 낙심되고 힘이 쫙 빠집니다. 그런데 왜 다시 일어섰냐면 아무리 돌이켜봐도 다른 메시지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그 때마다 한 가지 붙드는 게 있었는데, ‘하나님이 오셔야 한다. 하나님이 오시면 된다.’ 저도 압니다. 앞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다른 선택이 없으니까 전하는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 태는 열리지 않지, 이래가지고 될지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지, 모든 게 캄캄하지, 압니다. 저도 거기에 있어봤습니다. 하나님 나라요? 작게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능력과 그 말씀과 그 엄청난 사람들을 가지고 3년 반 동안 120명이 남았다면 저와 여러분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사실 3년 반 동안 120명 남은 것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왜 그 겨자씨부터 비유인 줄 아세요? 여기 보시면 가장 작은데 모든 나물 보다 크게 자랍니다. 왜 크게 자라는 줄 아세요? 그리로 하나님이 오실 거니까요. 하나님이 남편 되실 거니까요. 반드시 오십니다. 언제 오실지는 몰라요. 아브라함은 25년 걸렸습니다. 요셉은 13년 걸렸고. 그러나 줄기차게 주님만을 의지할 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내려놨다니까요. 그러니까 사라입니다. 언제 오실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그 때는 게임이 달라집니다. 완전히 달라집니다.

씨 뿌리는 비유
그 다음에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그 비유입니다. 여기 씨앗은 하나님 나라 메시지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전하고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서 보이시고 계십니다. 이게 씨앗입니다, 그럼 여기에 나오는 4종류의 밭은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자세입니다. 자! 그러면 보세요. 4종류가 나오는데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대로 4종류가 있고, 기독교 역사에 보아도 4종류가 항상 있고,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대전에 가서 2번째 했던 부분은 바로 이 부분과 관련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4종류의 밭을 분별하는 것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4종류가 반드시 있습니다. 4종류가 뭐냐? 이런 겁니다. 하나님나라에  말씀이 전파됩니다. 아까 말씀의 성격을 말씀드렸고, 하나님나라 성격도 말씀드렸고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믿음이 뭔가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말씀이 전파되면, 이때 4종류의 반응이 있는데 첫째가 길가인데 길가는 굳은 마음입니다. 배우고자하는 자세가 없는 겁니다. 이 굳은 마음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전통을 따라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선입견이 투철했기 때문에 그 신앙에 대한 자기들의 관점에 맞지 않으면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없는 굳은 마음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영적인 분별력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못 받아들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항상 그래왔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핵심은 분별력입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해석하시기전에 예수님이 “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있는 자는 더 가지게 될 것이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핵심이 분별력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시밭과 돌밭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가시밭과 돌밭이 누구냐면 예수님을 따라다닌 그래서 때론 사흘 동안이나 먹지 않고 때론 전국에서 걸어서 몰려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고 그야말로 놀라운 치유를 개인이 경험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목도한 그 사람들 대부분이 돌밭과 가시밭입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여기 돌밭과 가시밭은 종교지도자들 처럼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기 돌밭과 가시밭은 예수님을 그토록 쫓았던 자들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돌밭과 가시밭인 줄 아십니까? 이렇습니다. 돌밭이 뭐예요? 돌이 많아가지고 흙이 얇아서 씨앗이 떨어질 때 금방 싹이 나오지만 흙이 얇아서 태양이 뜨면 금방 시듭니다. 그러면 돌밭이 뭔지 아세요?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듣고 은혜스러워서 감격하고 눈물 흘리며 삼일 동안이나 나흘 동안이나 줄기차게 쫓아다닌 그러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까 말한 대로 참된 제자 도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삶과 자신이 내려져야 했을 때, 자신의 삶의 대가와 조정이 요구 되었을 때, 이내 그들은 돌아섰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어제 우리 지방회하면서 목사님 설교하시는데 감동 받았다니까요. 참 귀한 설교 하셨습니다. 금년 초엔가 어떤 분은 7000명 성도가 있는 교회 목회자고 어떤 분은 700명, 800명 모이는 목회자고, 그분보다 훨씬 더 성도가 많은 그러한 목사님들과 같이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자기는 교회가 작다보니까 그분들은 성도들도 많고 예산도 풍부하고 그래서 참 기쁘게 목회할 줄 알았는데 그 분들이 다 똑같이 엄청난 스트레스 가운데 정신적 압박감에 살아갈 뿐 아니라 너무 너무나 마음 아파 탄식하는 게 교회 나오는 교인은 있어도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없다는 겁니다. 저는 오늘날 1200만 기독교인 중에 대부분이 이 2종류 밭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시밭과 돌밭은 열매를 못 맺었습니다. 가시밭이 어떤 경우인지 아세요? 부자 청년 같은 경우 입니다. 가시가 나가지고 죄에 대한 유혹, 돈에 대한 탐심, 돈에 대한 집착, 생활의 염려로 찔려서 자라긴 자라는데 열매를 못 맺는 겁니다. 전형적인 예는 부자 청년 같은 사람입니다. 부자 청년은 관원이었어요. 그 당시 관원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엘리트층이에요. 지배계급입니다. 여러분 이들에게 있어서요. 일반 서민은 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바알세불 지폈다고 사단 들렸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까?  그러면서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 청년은 그렇게 자기 동료들처럼 비방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니고데모처럼 몰래 숨어서 온 것도 아니고 그것도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동료들에게서 왕따 당할 것을 불구하고 뛰어와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길가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대단한 결단입니다. 그 당시 사회적인 그의 입지와 그의 지위와 그가 처해 있는 사회를 알면 이건 대단한 결단입니다. 너무 너무 목마름입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영생을 얻고자 하는 그 갈급함이 그 속에 있었거든요. 영생에 대한 갈급함이 얼마나 갈급했으면 사람들 앞에 자기체면 이런 거 다 내려치고 달려와서 대낮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길거리에서 무릎을 꿇고 선생님 어떻게 하여야 내가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말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당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신앙관을 그대로 말할 뿐이에요. 그러면서 계명을 말합니다. 그런데 계명을 말하되 사람에게 대한 계명만 말합니다. 십계명을 크게 나누면 2종류로 나눕니다. 그래서 1-4계명까지를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라고 보기도 하고요, 5계명까지 보기도 하고요.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인데 왜냐하면 부모를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이해해서 5계명까지를 하나님께 대한 계명으로 보기도 하고  때론 4계명까지를 보기도 하고 나머지를 사람에 대한 계명으로 이렇게 두개로 나누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계명만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냐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탐심이 문제입니다. 돈에 대한 집착이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신앙관을 그냥 대변할 뿐입니다. 제가 이해하기에는 그때까지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부자 청년이 선생님 그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대단히 윤리적인 사람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때야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간단한 것 같지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좇아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고 부르셨던 부르심과 똑같은 부르심의 기회를 지금 이 사람에게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부자청년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왜냐면 돈이 많은 사람인데 그걸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니 그럼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과 똑같은데, 그게 가시밭입니다. 돈에 대한 집착이 안 내려졌습니다. 이 부분이 되어지지 않으면 주님이 우리의 진정한 주된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승리는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는 그러한 삶은 잊어버리셔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겁니다. 우리는 다 그러한 자리에 있으니까요. 제가 제일 먼저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요.

그 다음에 그럼 좋은 밭이 누구냐?  좋은 밭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그랬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생명의 말씀, 영생의 말씀을 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치를 보았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으로 예수님을 삽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요한이 그랬습니다. 부자 청년만 하더라도 그가 자기 앞에 있는 분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그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게 전혀 문제가 안 되었을 겁니다. 자! 그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메시지를 전파하실 때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그 당시 신앙적으로 아주 암울한 시기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신앙적으로 아주 율법주의가 횡횡한 인본주의가 가득 찬 영적으로 그야말로 눈먼 의식은 가득하나 하나님의 실체는 걷힌 신앙의 능력이 없어서 심지어 종교지도자들까지 전혀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죄와 세상사랑과 탐심이 그 속에 가득한 그런 시대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에 보면  그러한 시대라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 너무나 신선하기도 하고 그동안 선지자가 없어서 400년 동안 굶주렸는데 하나님의 메시야가 올 때를 그들은 그렇게 애태우고 기다렸는데 그래서 요한이 나와서 말씀을 전하니까 혹시 메시야인가 해서 전국에서 몰려왔는데, 요한이 하는 말이 나는 메시야가 아니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다고 집중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했고, 주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니까 그야말로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날카롭게 전파되고 그 말씀의 권세에 놀랐다고 그랬잖아요. 그렇게 되면서 사람들이 3일 동안 쫓아다니고 4일 동안 쫓아다니고 전국에서 걸어오고 사모하고 갈급했는데 그렇게 하면서도 그 시기에 하나님의 길을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전 존재로 주님을 사는 자들은 아주 적었습니다. 그들이 120명이였습니다. 그들이 좋은 밭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렇게 살 수 있었느냐면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았기 때문에 메시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메시야일거라 생각해서 왕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해 가르치시자 자신이 생명의 떡인 걸 가르치시자 그들은 이내 돌아서 떠납니다. 피상적인 지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 여기 비유가 바로 그 비유입니다. 여러분 부흥이 올 때 어떤 자들을 통해서 오는지 아십니까? 항상 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는 자들을 통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부흥이 오는 단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가장 첫 번째가 인식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들이 영적인 눈이 열려 자기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보게 된 겁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있는가를 보게 된 겁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자신들에게서 걷혀 있는 것을 보게 된 겁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진가를 보게 된 겁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전체 삶을 거기에 걸었습니다. 자기들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길을 보았으니까요. 거기에 부흥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렇게 사셨을 뿐만 아니라 그 무리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를 그렇게 전하셨습니다. 그렇게 전해야 그 무리가 세워지니까요. 그렇게 세워지되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전 존재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주님은 찾으셨습니다. 왜요? 그들에게 하나님이 오실 거거든요. 여러분 그렇게 해서 모아진 무리가 120명인데 말씀드린 대로 이 무리가 모아지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부흥이 왔어도 부흥이 쏟아집니다. 이 무리가 준비되어지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이 아무리 성령으로 놀랍게 방문하셔도 쏟아집니다.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으니까요. 저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이해가 되더라고요. 제가 어떤 단체에서 부흥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는 걸 들으면서 아르헨티나에 타미힉스라는 미국분이 가서 집회를 하는 중에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게 함께하셨는지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동아, 중앙일보 이런 주요 일간지들의 일면에 날마다 대서특필하는 겁니다. 그 나라 대통령이 허가를 해줘서 종합운동장 같은데서 집회를 하는데 그것도 대통령이 그냥 허가를 해준 게 아니라 하나님이 대통령을 찾아가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비서가 갑자기 다리를 삐었는데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해줬는데 나아가지고 대통령을 소개해 줘가지고 얘기 나누는 중에 집회를 허가해 줘서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겁니다. 집회 인도 중에 얼마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는가 하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어떤 사람들은 리어카에 환자를 끌고 오기도 하고 소달구지에 끌고 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치유되고 그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면서 그 날 신문에 날마다 대서특필하는 놀라운 역사가 수일 동안 지속되었데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가 지속되었는데 그게 다 쏟아져 버리고 그 결과가 거의 안 나타났어요. 왜요?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예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부흥을 얘기하는데 그것은 나중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시 세워지면서 그릇들이 준비되었을 때 다시 부으셨다고, 그 아르헨티나 부흥의 주역 중에 한 분이 설교하는 내용을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 테이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무리가 준비되어지지 않으면 부흥이 와도 쏟아집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들을 준비 시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성령이 임하실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남편 되실 때, 그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가라지의 비유
사단은 기회만 있으면 방해합니다. 여기에 가라지는 사단이 불어넣은 겁니다. 흉내 내는 것인데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시대만 하더라도 벌써 여러 사람들이 와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그러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제자를 삼았다가 로마군에 의해서 철저하게 전멸당하는 경우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와서 행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이것도 그런 사람 아니야!”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수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시기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요.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재림파’, ‘휴거파들’이 나오면서 재림에 대해서 사람들이 더 이상 재림이야기를 하는 그 자체를 이상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좋은 현상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과 기준위에 세워지지 않아서 많은 물의를 일으킴으로써 성령의 역사 자체를 다 매도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이러한 일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항상 그러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는 사탄도 역사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가라지 뽑으려고 좋은 곡식까지 상할까 두려우니 너희는 부지런히 좋은 곡식 심는 일, 좋은 곡식 되는 일. 거기에 힘쓰라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단시비 무서워서, 혹은 그렇게 되면 영적으로 잘못될까 두려워서 주님의 길을 못 따라가는 것 아세요. 사탄은 가라지를 뿌려 놓습니다. 항상 그래 왔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그렇게 할 것입니다.

누룩의 비유
누룩의 비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자라날 거라는 것입니다. 퍼질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또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룩은 번져갑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번져 갑니다. 그래서 퍼져 갑니다.

그물의 비유
여러 가지 사람들이 얘기합니다만,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말세지말에 전 세계에 걸친 대추수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될 때 거기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분별하여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전 세계에 걸치는 추수가 있을 때에 이렇게 예비된 주의 백성들이 그물코처럼 모아져서 전 세계에 대추수를 이루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사실, 말세지말에 있는 교회회복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부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회복된 교회가 다가오는 하나님의 부흥을 담을 수 있는 그물이 될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 그물들이 연결되어서 전 세계에 걸친 대추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사야서 54장에 하반부에 나와 있는 약속, 그리고 그것이 이 구절만 보면 이해를 잘 못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성경은 절묘하게도 신약성경에서 사라로 대변되어지는 십자가의 복음과 하갈로 대변되어진 거짓신앙체계 사이에 있는 전쟁을 다루면서 사도바울이 이사야 54장의 약속을 사라를 통해서 이루어 질 것이라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인용함으로써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볼 때에 예수님은 정확하게 여기에서 말하는 ‘잉태치 못하며 구로치 못한 그 여인’으로 대변되어지는 혹은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사라로 대변되어지는 그러한 신앙을 집중적으로 전하며 그러한 무리를 세우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투자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비유에서 그대로 나올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정확하게 그러한 삶을 사셨던 것을 볼 수 있고,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너무나 실패한 것 같고, 왜 그 몰려온 사람들만 모아도 몇 십만 될 텐데,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고 하나님나라의 행하심에 전적으로 동참하는 그러한 자들을 예수님은 훈련시키시고 양육시키셔서 그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그들을 양육시키셨을 때, 그 무리가 세워졌을 때, 그리고 이제 그 토대위에 “구로치 못하며 잉태치 못한 자”에게 하나님이 임하실 것이라고, 그래서 그 자녀가 남편 있는 자들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께서 오순절 날 그 위에 성령으로 임하심으로 전 세계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 아세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그 후로 불과 30년 동안에 그 당시 로마 세계에 전 주요도시에 복음이 확산 되어졌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 숫자가 3만~5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이 오시니까요. 하나님이 오시면 우리가 100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은 하루에도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 기회 되는 대로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온전히 통치하시도록, 하나님나라의 무리를 세우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무리, 하나님이 목표와 목적인 무리, 철저히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과 길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믿음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사모하는 무리를 세우기보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고 역사하시길 기다리며 주님을 구하기보다, 우리는 그 때를 못 기다려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세상의 방법을 따라 교회를 세우려 하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부흥을 일으키시려 하실 때에 예수님 시대에 하셨던 것처럼 똑같은 일에 항상 해 오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침노하는 무리를 세우십니다. 그 신앙의 본질위에 선자들을 세우십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위에 선자들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숨겨진 기간을 통해서 그들을 다루십니다. 다루시는 동안 그들의 중심을 시험하시고, 그들을 빚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 무리들이 세워지는 그 날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그리로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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