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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의 세력을 이기는 |
하나님 나라의 능력 |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28절입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이 개인과 단체에 왕으로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지배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의 개념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토의 개념을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영토의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왕권이 미치는 통치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 나라의 어두운 세력에 대한 승리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로 임하셔서 어두움의 세력이 다스리는 곳을 빛으로 무너뜨리신 다음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란 어두움의 세력들에게 빼앗겼던 것을 다시 빼앗으시며 다시 회복하시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어두움에 대한 승리는 무엇보다 치유에서 나타납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어두움에 대한 승리중 가장 극적이며 눈에 확연하게 보이는 것은 귀신의 세력에 대한 승리입니다. 이 장에서는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승리의 부분을 살피겠습니다.
우선, 귀신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구약적인 예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사건에서 이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장차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일들을 그림자로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생활로부터 구원하실뿐만 아니라 메시야가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귀신의 세력들을 멸하실 것을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애굽에 내려진 10가지 재앙은
성육신하실 메시야가 하실 일을 예표한 사건입니다
바로는 사단의 모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사단의 그림자입니다. 실제로 바로는 어두움의 세력과 밀접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신접한 자들이나 박수 무당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이란 나라 자체가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는 국가였습니다. 자연히 바로의 뒤에는 어둠의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 보이시고 어두움의 세력에 붙잡혀 있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로 임하실 때 당신이 어떻게 어둠의 세력들을 대적하시고 물리치시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억압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서 우리 역시 이 싸움을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행한 열 가지 재앙이야말로 어두움의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열 가지 재앙들이 당시의 애굽사람들이 섬기고 있었던 우상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짙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를 들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나일강이 피로 물든 재앙이 가장 먼저 애굽에 내려진 재앙입니다. 당시 나일강은 나일신(神)의 신성한 거처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나일강을 피로 물들게 하시면서 하나님은 나일이란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나일강이 피로 불들자 나일강은 더 이상 신의 거처가 아닌 고기들이 죽어 악취가 나는 몹쓸 곳이 되었습니다. 죽음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원래 큰 강 주변으로 도시나 국가 건설되는 이유는 강물이 생명의 젖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일강을 더 이상 생명의 젖줄이 아닌 저주의 장소로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은 어두움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이 있습니다. 확실히 애굽의 열 재앙은 하나님이 능력과 권세로 임하셔서 어두움의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두번째 예로, 개구리 재앙을 보십시다. 당시 애굽사람들은 개구리신을 섬겼습니다. 개구리신은 풍산의 여신으로 근동지역에서 넓은 지역에서 섬겼던 풍산의 신들 중 하나입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귀신의 하는 일과 관련하여 풍산의 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할 것같습니다. 알다시피 바알신과 아세라신도 풍산의 신들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사람들은 그들 신에게 제사하러 신전에 왔다가 그곳에서 음란한 행위들을 행합니다. 음란한 행위가 제사의 한 순서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음행을 보고 바알과 아세라가 흥분하여 신들끼리의 성적 행위를 통해 지역에 풍요로움을 가져온다는 믿음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풍산의 신은 이런 음란한 행위와 대개 밀접한 연관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민수기 25장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땅에 이르렀을 때 모압 여인들과 음행했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모압 여인이란 단순히 아낙네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모압의 신전에서 신을 흥분시키는 일을 행했던 사제들을 일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여인들과의 음행으로 간음을 행했을뿐만 아니라 바알브올에게 부속되었습니다. 즉 영적으로 귀신의 세력에 억압당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일로 엄청난 상처를 받게됩니다. 어두움의 세력에게 붙잡한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처럼 풍산의 신들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와 음행들과 연관되어 어두움의 세력들이 사람들을 억압하는 대표적인 타락의 모습이었습니다. 개구리 재앙은 분명 하나님의 개구리신들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개구리 재앙을 읽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8장 1절부터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지경을 칠지라 ◇ 개구리가 하수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에와, 네 침실에와, 네 침상 위에와, 네 신하의 집에와, 네 백성에게와, 네 화덕에와, 네 떡반죽 그릇에 들어갈지며 ◇ 개구리가 네게와, 네 백성에게와, 네 모든 신하에게 오르리라 하셨다 하라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강들과 운하들과 못 위에 펴서 개구리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라 할지니라 ◇ 아론이 팔을 애굽 물들 위에 펴매 개구리가 올라와서 애굽 땅에 덮이니 ◇ 술객들도 자기 술법대로 이와 같이 하여 개구리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였더라 ◇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개구리를 나와 내 백성에게서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릴 것이니라' ◇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어느 때에 구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서 하수에만 있게 하오리이까 내게 보이소서' ◇ 그가 가로되 `내일이니라' 모세가 가로되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 개구리가 왕과, 왕궁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떠나서 하수에만 있으리이다' 하고 ◇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떠나 나가서 바로에게 내리신 개구리에 대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개구리가 집에서, 마당에서, 밭에서 나와서 죽은지라 ◇ 사람들이 모아 무더기로 쌓으니 땅에서 악취가 나더라
이 재앙은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고 믿던 개구리가 오히려 농사와 일상생활을 방해는 존재로 전락되었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온 나라가 개구리 썩는 냄새로 가득했으니 얼마나 악취가 심했겠습니까? 더 이상 개구리가 신적 존재가 아닌 삶을 파괴하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단순한 재앙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어두움의 세력들에 대한 심판으로 연결시키셨습니다.
세 번째 재앙으로, 심한 악질이 나서 가축들이 죽는 재앙이 있었습니다. 황소는 신을 대변하는 동물이었습니다. 개구리가 풍요를 상징하듯이 말입니다. 암소 역시 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었으며, 양도 신을 상징하는 동물들로서 모두 애굽 사람들에 의해서 신성시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들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로서의 가축들이 죽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축들을 죽이심으로 어둠의 권세를 멸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기 9장 7절입니다.
바로가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또한 독종의 재앙이 있었습니다. 당시 하늘은 각종 신들의 집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풀무의 재를 하늘에 던져 하늘을 오염시키는 재앙을 내리시면서 그 결과 독종이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이방신들을 멸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이방신들을 멸하시는 권세가 여호와께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풀무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독종이 발하리라
애굽인들이 섬겼던 각종 신들 가운데 태양신이 있었습니다. 영화 ‘스타게이트’에도 등장합니다. 태양신은 신들 중 가장 높은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의 재앙으로 태양이 사흘동안 빛을 잃었습니다. 출애굽기 10장 21절부터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서 애굽 땅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
아무래도 가장 큰 재앙은 바로와 바로의 백성들의 장자들이 죽는 재앙일 것입니다. 출애굽기 11장 5절과 6절입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애굽 사람들은 바로의 장자는 하늘이 주신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신들의 자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바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 바로를 숭배하였습니다.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신성 불가침의 권세가 바로에게 있었다고 여겼습니다. 장자를 하나님께서 죽이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애굽의 신을 죽이신 의미를 담고 있는 재앙입니다.
이와같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임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는 세력을 멸하시고 물리치심으로 자유케 하신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는 어둠의 세력들을 구체적으로 꺾으시며 물리치신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로 임하셔서 하나님이 지배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귀신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난 귀신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다시 복습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은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선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능력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능력사역이란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일을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능력사역은 말씀선포와 별개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능력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해 있는 모습을 실제로 증거해 보이셨습니다.
흔히 마가복음을 읽으며 실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사역하시는 모습을 ‘가르치셨다‘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가르치심‘이란 오늘날의 이해처럼 말로서만 가르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선포하심과 아울러 능력사역이 당연히 내포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마가복음 1장 38절과 39절입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38절의 ‘전도’란 오늘날의 노방전도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말씀선포를 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이 말씀을 선포하러 온 것이라고 하시면서 다음 절인 39절에서 말씀선포의 의미가 단순한 설교나 전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사역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마가복음을 지었던 마가 역시 예수님과 똑같은 이해를 갖고 있었기에 “이에 …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르침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였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비유, 치유 등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여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사단의 통치가 종식되어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일이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는 일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사건 중 가장 먼저 기록된 사건은 1장 21절 이하의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28절입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처음 시작하실 때부터 귀신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이가 은혜받고자 한 집회에 참석했는데 귀신들이 마구 소리치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시다. 이런 생각 안할까요? “아, 이 집회에는 오면 안되겠다. 자칫하면 귀신이 옮아올지 몰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귀신이 예배 시간에 옮겨온 것은 아닌 것같습니다. 원래 그 사람에게 귀신이 들려있다가 예배 시간에 드러난 것일 수 있습니다. 귀신의 정체가 드러난 이 사람. 혹시 이 사람 스스로도 자기 속에 귀신이 있었는지 몰랐을지 모릅니다. 그 사실을 모른채 회당에 찾아왔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 때 회당에 예배하러 온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귀신이 들렸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본문의 정황으로 보아 보통 때에는 정상인처럼 행동한 것같습니다. 많은 억압이 있었지만 본인은 모른채 살았을지 모릅니다.
귀신에 대해 예민한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정상인도 속에 귀신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회당의 귀신들렸던 사람 본인이 자기 속에 귀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말이지 정상인 속에도 귀신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귀신들림에 대해 너무 예민해져서 아침에 일어나 조금만 머리가 무거워도 “아, 귀신이 역사하나보다” 감기기운만 있어도 “귀신아 떠나 가라” 소리치곤 합니다.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즉 귀신의 역사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회당에 예배하러 온 이 사람은 본인에게 귀신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가 주님이 그곳에 오시자 자기 속에 있던 어둠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곳에 참석하면 귀신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귀신은 숨어 있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누가 하나님의 임재가 강한 곳에 참석했다가 속에서 귀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전부터 억압을 통해 역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귀신은 자기 정체가 드러나면 쫓겨가야 할지도 모르기에 숨어서 역사하기를 좋아합니다.
귀신이 아니더라도 사람들 속에서 억압을 통해 역사하는 어두움의 세력들은 정체가 드러나면 끊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두움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를 좋아합니다. 억압은 숨어서 하는 귀신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빛이 오면 어둠의 세력은 정체가 드러나면서 쫓겨갈 수 밖에 없습니다. 24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 구절에서 귀신들이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봅니다. 첫째, 귀신은 예수님을 귀신같이 알아봅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나타나시자 귀신은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면 귀신들은 자기들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충만할 때 귀신들은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둘째, 귀신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멸하러 왔나이까?”라는 질문에서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요한일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하나가 사단의 일을 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정체를 드러낼 때마다 꾸짖고 잠잠하라고 하시면서 쫓아내셨습니다. “꾸짖다”는 단어는 ‘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심하게 질책하는 의미입니다. “강하게 내리친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잠잠하라”라는 단어 역시 조용히 하게끔 얼르는 의미를 넘어 상대방의 목을 죄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능력으로 귀신을 세력들을 보실 때마다 쫓아 내셨습니다. 귀신의 억압 가운데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자 어두움의 세력들이 빛 아래서 드러났습니다.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드러난 어두움의 세력들을 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멸하시는 일로 인해 억압 속에 묶였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귀신을 멸하신 일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4절에서 18절입니다.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모든 간질환자가 귀신들린 것은 아닙니다. 이 경우에는 귀신이 들려 간질을 앓고 있었습니다. 위 구절을 읽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가 귀신에 들려 간질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를 비롯하여 온 가정이 고생하였을 겁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서 귀신을 물리치시고 아이를 낫게 하심으로 빼앗겼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회복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치유와 어둠의 세력을 끊으심을 통해 아이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흐르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부모뿐만 아니라 가정 모두에게 다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였을 겁니다.
귀신이 쫓겨남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귀신이 쫓겨난 일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을 때 귀신의 세력들이 정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귀신의 세력을 끊으심으로 귀신에게 억압당하는 자들을 자유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내용은 반복하여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이 사역은 우리가 감당해야할 사역이 바로 이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부터 4절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4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듣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사역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배 때에 설교를 듣는 일에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 메시야로서 하실 수 있는 일을 요한에게 설명할 때 ‘듣는 것’과 ‘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5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구절에도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은 구분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할 사역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일들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예수의 ‘행하심’은 예수님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길을 걸어다니신 일을 “행하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위 구절 역시 예수님의 사역을 가르침과 사역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행하시며 가르치신 일을 시작하신 것을 기록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전부터 있었던 사건과 예수님의 잉태하신 사건들로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사건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누가는 사도행전에다가 예수님의 가르치시고 행하신 사역의 시작을 기록했노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은 예수님 사역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는 그렇게 이해하면서 누가복음을 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사역을 계속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누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신 것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 성령으로 당신의 사역을 계속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의 일은 성경의 관점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실 사역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이 땅의 사역은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인데,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사역은 모두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나머지는 똑같은 사역을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사도들 역시 예수님의 사역을 똑같이 하였습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일곱집사님들이 그렇게 했으며 일반 성도들까지 그대로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부터 10절, 8장 5절부터 8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보십시오. 스데반이나 빌립이 예수님이 행하셨던 사역과 똑같은 사역을 행했습니다. 이런 장면을 대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하셨던 사역은 시작입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똑같은 일을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집사들을 통해서도 그대로 하셨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사역 역시 예수님과 똑같이 행하는 것인데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둘이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이미 주셨습니다. 귀신들을 이기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즉 귀신들을 세력을 파하고 억압당한 자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는 능력과 권세가 필요한 것을 주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능력과 권세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우리들과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된 것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사역을 하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의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성도는 “이 내용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들 또는 직분자들에게나 해당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도가 따로 있고 제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사역을 감당하는 일은 우리의 선택에 있지않고 예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생애가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언급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하실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시작에 불과하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역의 지속을 위해 사역을 감당할 때 필요한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권세를 주시되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사람들과 동행하시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동행하심으로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적용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권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에서 나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본다고 오는 게 아닙니다. 집사나 장로가 되어야 오는 것도 아닙니다. 금식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서 나옵니다. 에베소서 1장 20절부터 23절입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여러분, 기도를 받으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기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권세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자로서 주님 앞에서 세워지십시오. 기도를 받는 일도 귀하지만 세워져야 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난 아냐”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 구절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신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모든 권세, 존재들 위에 뛰어 나게 하신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세계에 등급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계의 등급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보이는 세계가 있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더 큽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다시 둘로 나뉘는데 창조주의 세계와 피조물의 세계가 그것입니다. 피조물의 세계는 천사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세계는 천사의 세계보다 뛰어나지 못합니다. 천사 하나가 하룻밤에 아말렉 군인들을 수도 없이 죽이는 장면을 성경에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천사의 세계라 할지라도 창조주의 세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요? 창조주의 세계니까 그렇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인데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구별되어 존재하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다른 천사들의 세계들을 포함한 어떤 세계보다 근본적으로 다른 스스로 계신 분이시기에 거룩하십니다.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세계로 끌어 올리신 후, 모든 정사와 권세의 세계 즉 천사들의 세계보다 비교가 안될만큼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의 의미는 예수님의 위치가 다른 모든 세계보다 비교가 안될만큼 높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3절부터 7절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6절의 “앉히시니”는 완료형입니다. 이미 하늘보좌 우편에 안히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구원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리시고 함께 하늘보좌에 앉히시는 것입니다. 높은 세계에 앉히신 것은 다른 말로 예수님의 그 놀라운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즉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됨에서 나옵니다. 70인이 돌아와 귀신들도 자기들에게 순복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귀신들이 쫓겨난 일을 인하여 기뻐하기 보다는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일을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권세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 모두에게 권세가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권세가 주어지는 두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말한 것처럼 자녀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우리가 권세 아래 있어야 나타납니다. 이미 앞 장에서 살펴본대로 백부장의 믿음이 권세 아래 있는 자세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능력은 성령이 임하시면 주어지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찾아 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모두 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을 토대하여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엄청난 권세와 능력을 주셨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활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권세와 능력을 주신 것을 깨닫고 주님의 권세 아래 살면서 주님의 임재를 초청하며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환영하고 성령님의 능력을 더욱 더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배운 바를 실제로 활용해 보셔야 합니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으면 자전거 위에 올라 타 보아야 합니다. 어둠의 세력들을 향하여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활용해 보십시오. 어두움의 세력들이 쫓겨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환자들을 위해 실제로 기도해 보십시오. 말씀에 순종해 보아야 사역하는 법을 실제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실제로 행해보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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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의 세력을 이기는 |
하나님 나라의 능력 |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28절입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이 개인과 단체에 왕으로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지배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의 개념에 있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토의 개념을 포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영토의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왕권이 미치는 통치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에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 나라의 어두운 세력에 대한 승리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로 임하셔서 어두움의 세력이 다스리는 곳을 빛으로 무너뜨리신 다음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란 어두움의 세력들에게 빼앗겼던 것을 다시 빼앗으시며 다시 회복하시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어두움에 대한 승리는 무엇보다 치유에서 나타납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어두움에 대한 승리중 가장 극적이며 눈에 확연하게 보이는 것은 귀신의 세력에 대한 승리입니다. 이 장에서는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승리의 부분을 살피겠습니다.
우선, 귀신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구약적인 예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사건에서 이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장차 성육신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일들을 그림자로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생활로부터 구원하실뿐만 아니라 메시야가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귀신의 세력들을 멸하실 것을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애굽에 내려진 10가지 재앙은
성육신하실 메시야가 하실 일을 예표한 사건입니다
바로는 사단의 모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사단의 그림자입니다. 실제로 바로는 어두움의 세력과 밀접하게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신접한 자들이나 박수 무당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이란 나라 자체가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는 국가였습니다. 자연히 바로의 뒤에는 어둠의 세력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 보이시고 어두움의 세력에 붙잡혀 있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구출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로 임하실 때 당신이 어떻게 어둠의 세력들을 대적하시고 물리치시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억압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서 우리 역시 이 싸움을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행한 열 가지 재앙이야말로 어두움의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열 가지 재앙들이 당시의 애굽사람들이 섬기고 있었던 우상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짙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를 들면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나일강이 피로 물든 재앙이 가장 먼저 애굽에 내려진 재앙입니다. 당시 나일강은 나일신(神)의 신성한 거처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나일강을 피로 물들게 하시면서 하나님은 나일이란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나일강이 피로 불들자 나일강은 더 이상 신의 거처가 아닌 고기들이 죽어 악취가 나는 몹쓸 곳이 되었습니다. 죽음으로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원래 큰 강 주변으로 도시나 국가 건설되는 이유는 강물이 생명의 젖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일강을 더 이상 생명의 젖줄이 아닌 저주의 장소로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애굽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은 어두움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이 있습니다. 확실히 애굽의 열 재앙은 하나님이 능력과 권세로 임하셔서 어두움의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두번째 예로, 개구리 재앙을 보십시다. 당시 애굽사람들은 개구리신을 섬겼습니다. 개구리신은 풍산의 여신으로 근동지역에서 넓은 지역에서 섬겼던 풍산의 신들 중 하나입니다.
아무래도 여기서 귀신의 하는 일과 관련하여 풍산의 신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야할 것같습니다. 알다시피 바알신과 아세라신도 풍산의 신들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던 사람들은 그들 신에게 제사하러 신전에 왔다가 그곳에서 음란한 행위들을 행합니다. 음란한 행위가 제사의 한 순서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음행을 보고 바알과 아세라가 흥분하여 신들끼리의 성적 행위를 통해 지역에 풍요로움을 가져온다는 믿음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풍산의 신은 이런 음란한 행위와 대개 밀접한 연관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민수기 25장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땅에 이르렀을 때 모압 여인들과 음행했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모압 여인이란 단순히 아낙네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모압의 신전에서 신을 흥분시키는 일을 행했던 사제들을 일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여인들과의 음행으로 간음을 행했을뿐만 아니라 바알브올에게 부속되었습니다. 즉 영적으로 귀신의 세력에 억압당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일로 엄청난 상처를 받게됩니다. 어두움의 세력에게 붙잡한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처럼 풍산의 신들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와 음행들과 연관되어 어두움의 세력들이 사람들을 억압하는 대표적인 타락의 모습이었습니다. 개구리 재앙은 분명 하나님의 개구리신들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개구리 재앙을 읽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8장 1절부터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 네가 만일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너의 온 지경을 칠지라 ◇ 개구리가 하수에서 무수히 생기고 올라와서 네 궁에와, 네 침실에와, 네 침상 위에와, 네 신하의 집에와, 네 백성에게와, 네 화덕에와, 네 떡반죽 그릇에 들어갈지며 ◇ 개구리가 네게와, 네 백성에게와, 네 모든 신하에게 오르리라 하셨다 하라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강들과 운하들과 못 위에 펴서 개구리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라 할지니라 ◇ 아론이 팔을 애굽 물들 위에 펴매 개구리가 올라와서 애굽 땅에 덮이니 ◇ 술객들도 자기 술법대로 이와 같이 하여 개구리로 애굽 땅에 올라오게 하였더라 ◇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개구리를 나와 내 백성에게서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희생을 드릴 것이니라' ◇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내가 왕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위하여 어느 때에 구하여 이 개구리를 왕과 왕궁에서 끊어서 하수에만 있게 하오리이까 내게 보이소서' ◇ 그가 가로되 `내일이니라' 모세가 가로되 `왕의 말씀대로 하여 왕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 개구리가 왕과, 왕궁과, 왕의 신하와, 왕의 백성을 떠나서 하수에만 있으리이다' 하고 ◇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떠나 나가서 바로에게 내리신 개구리에 대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개구리가 집에서, 마당에서, 밭에서 나와서 죽은지라 ◇ 사람들이 모아 무더기로 쌓으니 땅에서 악취가 나더라
이 재앙은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고 믿던 개구리가 오히려 농사와 일상생활을 방해는 존재로 전락되었다는 데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온 나라가 개구리 썩는 냄새로 가득했으니 얼마나 악취가 심했겠습니까? 더 이상 개구리가 신적 존재가 아닌 삶을 파괴하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단순한 재앙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어두움의 세력들에 대한 심판으로 연결시키셨습니다.
세 번째 재앙으로, 심한 악질이 나서 가축들이 죽는 재앙이 있었습니다. 황소는 신을 대변하는 동물이었습니다. 개구리가 풍요를 상징하듯이 말입니다. 암소 역시 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었으며, 양도 신을 상징하는 동물들로서 모두 애굽 사람들에 의해서 신성시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들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로서의 가축들이 죽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축들을 죽이심으로 어둠의 권세를 멸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기 9장 7절입니다.
바로가 보내어 본즉 이스라엘의 생축은 하나도 죽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니라
또한 독종의 재앙이 있었습니다. 당시 하늘은 각종 신들의 집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풀무의 재를 하늘에 던져 하늘을 오염시키는 재앙을 내리시면서 그 결과 독종이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이방신들을 멸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이방신들을 멸하시는 권세가 여호와께 있음을 알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풀무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모세가 바로의 목전에서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 ◇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독종이 발하리라
애굽인들이 섬겼던 각종 신들 가운데 태양신이 있었습니다. 영화 ‘스타게이트’에도 등장합니다. 태양신은 신들 중 가장 높은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의 재앙으로 태양이 사흘동안 빛을 잃었습니다. 출애굽기 10장 21절부터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들어서 애굽 땅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
아무래도 가장 큰 재앙은 바로와 바로의 백성들의 장자들이 죽는 재앙일 것입니다. 출애굽기 11장 5절과 6절입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지라 ◇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애굽 사람들은 바로의 장자는 하늘이 주신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신들의 자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바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믿어 바로를 숭배하였습니다.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신성 불가침의 권세가 바로에게 있었다고 여겼습니다. 장자를 하나님께서 죽이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애굽의 신을 죽이신 의미를 담고 있는 재앙입니다.
이와같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임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는 세력을 멸하시고 물리치심으로 자유케 하신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는 어둠의 세력들을 구체적으로 꺾으시며 물리치신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로 임하셔서 하나님이 지배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귀신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역에 나타난 귀신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다시 복습하지만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은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선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능력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을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능력사역이란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일을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능력사역은 말씀선포와 별개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능력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해 있는 모습을 실제로 증거해 보이셨습니다.
흔히 마가복음을 읽으며 실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사역하시는 모습을 ‘가르치셨다‘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가르치심‘이란 오늘날의 이해처럼 말로서만 가르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선포하심과 아울러 능력사역이 당연히 내포되어 있는 표현입니다. 마가복음 1장 38절과 39절입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38절의 ‘전도’란 오늘날의 노방전도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 말씀선포를 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이 말씀을 선포하러 온 것이라고 하시면서 다음 절인 39절에서 말씀선포의 의미가 단순한 설교나 전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사역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마가복음을 지었던 마가 역시 예수님과 똑같은 이해를 갖고 있었기에 “이에 …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르침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은 하나였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비유, 치유 등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여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사단의 통치가 종식되어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일이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는 일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사건 중 가장 먼저 기록된 사건은 1장 21절 이하의 사건입니다. 마가복음 1장 21절부터 28절입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처음 시작하실 때부터 귀신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이가 은혜받고자 한 집회에 참석했는데 귀신들이 마구 소리치는 장면을 보았다고 합시다. 이런 생각 안할까요? “아, 이 집회에는 오면 안되겠다. 자칫하면 귀신이 옮아올지 몰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귀신이 예배 시간에 옮겨온 것은 아닌 것같습니다. 원래 그 사람에게 귀신이 들려있다가 예배 시간에 드러난 것일 수 있습니다. 귀신의 정체가 드러난 이 사람. 혹시 이 사람 스스로도 자기 속에 귀신이 있었는지 몰랐을지 모릅니다. 그 사실을 모른채 회당에 찾아왔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 때 회당에 예배하러 온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귀신이 들렸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본문의 정황으로 보아 보통 때에는 정상인처럼 행동한 것같습니다. 많은 억압이 있었지만 본인은 모른채 살았을지 모릅니다.
귀신에 대해 예민한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정상인도 속에 귀신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회당의 귀신들렸던 사람 본인이 자기 속에 귀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말이지 정상인 속에도 귀신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귀신들림에 대해 너무 예민해져서 아침에 일어나 조금만 머리가 무거워도 “아, 귀신이 역사하나보다” 감기기운만 있어도 “귀신아 떠나 가라” 소리치곤 합니다.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즉 귀신의 역사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회당에 예배하러 온 이 사람은 본인에게 귀신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가 주님이 그곳에 오시자 자기 속에 있던 어둠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시는 곳에 참석하면 귀신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귀신은 숨어 있기를 좋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누가 하나님의 임재가 강한 곳에 참석했다가 속에서 귀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전부터 억압을 통해 역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귀신은 자기 정체가 드러나면 쫓겨가야 할지도 모르기에 숨어서 역사하기를 좋아합니다.
귀신이 아니더라도 사람들 속에서 억압을 통해 역사하는 어두움의 세력들은 정체가 드러나면 끊어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두움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를 좋아합니다. 억압은 숨어서 하는 귀신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빛이 오면 어둠의 세력은 정체가 드러나면서 쫓겨갈 수 밖에 없습니다. 24절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 구절에서 귀신들이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봅니다. 첫째, 귀신은 예수님을 귀신같이 알아봅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나타나시자 귀신은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하면 귀신들은 자기들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충만할 때 귀신들은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둘째, 귀신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멸하러 왔나이까?”라는 질문에서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요한일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중 하나가 사단의 일을 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정체를 드러낼 때마다 꾸짖고 잠잠하라고 하시면서 쫓아내셨습니다. “꾸짖다”는 단어는 ‘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심하게 질책하는 의미입니다. “강하게 내리친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잠잠하라”라는 단어 역시 조용히 하게끔 얼르는 의미를 넘어 상대방의 목을 죄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권세와 능력으로 귀신을 세력들을 보실 때마다 쫓아 내셨습니다. 귀신의 억압 가운데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자 어두움의 세력들이 빛 아래서 드러났습니다.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드러난 어두움의 세력들을 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멸하시는 일로 인해 억압 속에 묶였던 사람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귀신을 멸하신 일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4절에서 18절입니다.
저희가 무리에게 이르매 한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가로되 ◇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모든 간질환자가 귀신들린 것은 아닙니다. 이 경우에는 귀신이 들려 간질을 앓고 있었습니다. 위 구절을 읽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아이가 귀신에 들려 간질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를 비롯하여 온 가정이 고생하였을 겁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서 귀신을 물리치시고 아이를 낫게 하심으로 빼앗겼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회복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치유와 어둠의 세력을 끊으심을 통해 아이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흐르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부모뿐만 아니라 가정 모두에게 다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였을 겁니다.
귀신이 쫓겨남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귀신이 쫓겨난 일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을 때 귀신의 세력들이 정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귀신의 세력을 끊으심으로 귀신에게 억압당하는 자들을 자유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내용은 반복하여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이 사역은 우리가 감당해야할 사역이 바로 이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절부터 4절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4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듣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사역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배 때에 설교를 듣는 일에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 메시야로서 하실 수 있는 일을 요한에게 설명할 때 ‘듣는 것’과 ‘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5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구절에도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은 구분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모해야할 사역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일들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예수의 ‘행하심’은 예수님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길을 걸어다니신 일을 “행하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위 구절 역시 예수님의 사역을 가르침과 사역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행하시며 가르치신 일을 시작하신 것을 기록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전부터 있었던 사건과 예수님의 잉태하신 사건들로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사건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누가는 사도행전에다가 예수님의 가르치시고 행하신 사역의 시작을 기록했노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은 예수님 사역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는 그렇게 이해하면서 누가복음을 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사역을 계속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누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신 것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 성령으로 당신의 사역을 계속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후 승천하실 때까지의 일은 성경의 관점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실 사역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이 땅의 사역은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인데,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사역은 모두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나머지는 똑같은 사역을 예수님이 사도들을 통해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사도들 역시 예수님의 사역을 똑같이 하였습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일곱집사님들이 그렇게 했으며 일반 성도들까지 그대로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 3절부터 10절, 8장 5절부터 8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보십시오. 스데반이나 빌립이 예수님이 행하셨던 사역과 똑같은 사역을 행했습니다. 이런 장면을 대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하셨던 사역은 시작입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똑같은 일을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집사들을 통해서도 그대로 하셨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사역 역시 예수님과 똑같이 행하는 것인데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둘이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이미 주셨습니다. 귀신들을 이기고 치유하기 위해서는 즉 귀신들을 세력을 파하고 억압당한 자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는 능력과 권세가 필요한 것을 주님은 이미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능력과 권세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우리들과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된 것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사역을 하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의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성도는 “이 내용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들 또는 직분자들에게나 해당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되기를 바라십니다. 성도가 따로 있고 제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사역을 감당하는 일은 우리의 선택에 있지않고 예수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생애가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언급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하실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시작에 불과하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역의 지속을 위해 사역을 감당할 때 필요한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권세를 주시되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사람들과 동행하시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동행하심으로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내게 적용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권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에서 나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성경 많이 본다고 오는 게 아닙니다. 집사나 장로가 되어야 오는 것도 아닙니다. 금식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서 나옵니다. 에베소서 1장 20절부터 23절입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여러분, 기도를 받으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기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권세가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자로서 주님 앞에서 세워지십시오. 기도를 받는 일도 귀하지만 세워져야 합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난 아냐”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 구절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신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모든 권세, 존재들 위에 뛰어 나게 하신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세계에 등급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계의 등급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보이는 세계가 있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더 큽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다시 둘로 나뉘는데 창조주의 세계와 피조물의 세계가 그것입니다. 피조물의 세계는 천사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세계는 천사의 세계보다 뛰어나지 못합니다. 천사 하나가 하룻밤에 아말렉 군인들을 수도 없이 죽이는 장면을 성경에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천사의 세계라 할지라도 창조주의 세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요? 창조주의 세계니까 그렇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인데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구별되어 존재하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다른 천사들의 세계들을 포함한 어떤 세계보다 근본적으로 다른 스스로 계신 분이시기에 거룩하십니다.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세계로 끌어 올리신 후, 모든 정사와 권세의 세계 즉 천사들의 세계보다 비교가 안될만큼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의 의미는 예수님의 위치가 다른 모든 세계보다 비교가 안될만큼 높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3절부터 7절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6절의 “앉히시니”는 완료형입니다. 이미 하늘보좌 우편에 안히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구원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리시고 함께 하늘보좌에 앉히시는 것입니다. 높은 세계에 앉히신 것은 다른 말로 예수님의 그 놀라운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즉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됨에서 나옵니다. 70인이 돌아와 귀신들도 자기들에게 순복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귀신들이 쫓겨난 일을 인하여 기뻐하기 보다는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일을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권세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 모두에게 권세가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권세가 주어지는 두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앞서말한 것처럼 자녀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우리가 권세 아래 있어야 나타납니다. 이미 앞 장에서 살펴본대로 백부장의 믿음이 권세 아래 있는 자세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능력은 성령이 임하시면 주어지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찾아 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모두 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을 토대하여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엄청난 권세와 능력을 주셨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활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권세와 능력을 주신 것을 깨닫고 주님의 권세 아래 살면서 주님의 임재를 초청하며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환영하고 성령님의 능력을 더욱 더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배운 바를 실제로 활용해 보셔야 합니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으면 자전거 위에 올라 타 보아야 합니다. 어둠의 세력들을 향하여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활용해 보십시오. 어두움의 세력들이 쫓겨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환자들을 위해 실제로 기도해 보십시오. 말씀에 순종해 보아야 사역하는 법을 실제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실제로 행해보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4강 - 능력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능력 (0) | 2007.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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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강 - 억압적 환경과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0) | 2007.10.06 |
21강 - 병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0) | 2007.10.06 |
20강 -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 (0) | 2007.10.06 |
19강 - 하나님 나라와 기도 (0) | 2007.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