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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강 - 하나님 나라와 기도

강의자료/하나님나라

by 발의무리 2007. 10. 6.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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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기도


  하나님 나라와 기도는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기도와의 연관성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같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일컫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능력으로 임하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는 기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집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여주는 가운데 그 사역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나오는 성령의 능력에 의한 사역이라고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합니다. 특히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이같은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누가복음의 예수님의 사역은 능력과 연관이 있는 것같고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사역은 권세와 연관이 있는 것같습니다.


  누가복에는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셔서 능력적인 사역을 감당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능력이란 성령의 임하심이나 기름부으심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언급에서 보여진 것처럼 주님은 스스로 일할 수 없으셨으며 아버지와의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일하시는 모습을 소개함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권세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능력은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연관이 있습니다. 권세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능력과 권세가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조화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능력에는 교제가 당연히 포함되고 권세에는 능력이 당연히 포함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능력은 있는데 권세가 없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가 뗘났음에도 능력을 나타내는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가복음은 성령의 능력 즉 성령의 임하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의 임하심으로 인한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신 장면을 보여줍니다.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민감하여 권세있게 사역을 감당하신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은 주님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그분이 인도하는만큼 그분이 하시는만큼 순종하셨음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하심으로 아버지의 권세를 가지고 사역을 하신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능력의 사역이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성령의 임하심이 기도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기도와 하나님 나라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누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시점들을 파악하는 가운데 기도와 하나님 나라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또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와의 연관성을 더욱 더 보길 원합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이 능력의 사역이었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사역이 기도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성경보다도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장면을 더욱 더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기도와 연관하여 열군데 이상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도라는 단어는 언급되어 있지 않아도 기도하러 가신 장면을 암시하는 부분도 여러 곳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시더라”에서 이 구절의 의미는 기도와 연관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1절과 22절입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 장면은 각복음서마다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누가복음만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과 아울러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성령의 임하심이 있었다는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 이 기록은 성령의 임하심과 기도가 연관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1장 9절부터 13절입니다.


⑨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⑩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⑪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⑫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 ⑬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하시니라


  마태복음에도 이 기록이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의 차이점은 “성령”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좋은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물론 마태의 눈에도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 기도하시는 장면이 더욱 기록되고 있는 것은 기도와 성령의 임하심이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강조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도의 비유가운데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가 둘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11장 5절에서 10절입니다.


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⑥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⑦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나와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 ⑧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이 비유는 기도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성령을 구하는 것과 연관된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성령을 구하는 기도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관습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의 관습은 이렇습니다. 어느 집에 손님이 오면 잘 대접해야 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손님을 잘 대접하는 일은 손님을 맞이한 가정의 책임일뿐 아니라 마을 전체의 책임이었습니다. 동네 사람 모두가 잘 대접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한 집에 잔치가 벌어지면 온동네에서 각각 음식을 하나씩 해가지고 잔치를 연 집에 찾아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콩나물을, 어떤 집에서는 시루떡을 해가지고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즐거워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예수님 당시의 관습이 이와 비슷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집에 손님이 왔는데 먹을 것이 없자 옆집에 가서 먹을 것을 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시점이 밤중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옆집 사람의 책임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 즉 성령과 연관된 기도의 비유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님을 구하는 기도가 정당한 기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주시기로 되어 있는 성령의 기름부음이기에 마땅히 구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밤중에 잠자리에 들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들깁니다. 누구내고 물으니 옆집 사람이었습니다. 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니까 손님이 왔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까 미안하지만 밥 한 그릇 남은 것이 있으면 달라고 말을 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중에 그 옆집 사람에게 밥 안줄 사람 있나요? 아마 왠만하면 다 줄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우리 중에도 아무리 밤중이라도 친구가 와서 밥을 달라면 주는 법인데 잠자리 핑계댈 사람이 없는 법인데,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는 법인데, 그리고 백만명에 하나 정말 주고싶지 않아 “나 잠자는 중이야”라고 소리칠 사람이 있어도 현관문을 계속 두들기다 보면 귀찮아도 줄 판인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게 비유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역사를 구하는 일은 즉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구하는 일은 당연히 구해야 할 권리가 있는 기도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기도가 연관이 있음을 봅니다.


















  이제 성령의 능력과 기도와 관련하여 주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8절입니다.


①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②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③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④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⑤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⑥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⑦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⑧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분명 이 비유는 기도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불의한 재판관이 등장합니다. 주님이 불의한 재판관을 등장시킨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불의한 재판관같은 분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처럼 생각하는데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이 구절의 참된 의미를 모르면 하나님이 마치 열 두 대문 뒤에 숨어계시는 분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우리들은 밤낮으로 두들기며 부르짖어야 들어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오해해 버립니다. 우리의 밤낮 부르짖는 희생과 고생을 지켜보신 연후에야 응답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오해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마치 할수없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물론 말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입니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그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비유입니다. 한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과부가 와서 딱한 사연을 호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하도 과부가 귀찮을 정도로 부르짖으니까 그 사정을 들어줍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불의한 재판관도 이렇게 하는 법인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자기 백성들의 머리털까지라도 세신바 되신 하나님, 당신의 모든 것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하나님이신데 어찌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더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비유에서 과부가 구하는 바는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입니다. 원한을 풀어달라는 모습을 보면 과부의 구하는 것은 정당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당한 것을 구하지 않은 것같습니다. 분명 여자는 잘못된 것을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재판관은 들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구하는 것,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은 옳은 일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권세와 능력,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유업이기에 그렇습니다. 7절과 8절 전반부입니다.


⑦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⑧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여기서 성도들의 원한은 무엇일까요? 성도들 중 어느 누가 사기를 당해 돈을 뜯겼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이 성도들의 원한을 가리킬까요? 성도중 누가 길거리에서 까닭없이 뺨을 맞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이 성도들의 원한일까요? 우리는 마태복음에 묘사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통해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한이 될 수 없음을 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원한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땅에서 성도들이 당하는 억압과 상처, 하나님의 통치가 없기에 야기되는 죄의 만연, 죄를 이기지 못하는 유약함, 교회가 세상에서 조롱을 당하는 현실, 주님의 영광이 가리워져 있는 참담함,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권세가 우리의 현실에서 나타나지 못하는 안타까움 등이 주님이 의도하신 성도들의 원한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기도가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들을 방문해 주셔서 성도들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성도들의 고유의 권한임에 틀림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당하게 아버지께 기도할 권한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권한이 얼마나 당연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불의한 재판관도 계속해서 강청하면 들어주는 법인데 하물며 좋으신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기도하며 원한을 풀어달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며, 하나님의 생명이 백성들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일, 하나님의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당연히 구해야할 고유의 권한과도 같은 기도의 제목입니다. 우리들에게 부흥은 원한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할 때 하나님은 들어주실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누가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으며, 또 능력과 관련하여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성령의 능력과 기도가 항상 연결되고 있노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에는 그렇지 않은 장면이 있으니까요. 전혀 사모함도 없고, 기다림도 없는 가운데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한 장면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부분입니다. 일반적인 부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전체적으로 기도와 능력이 연관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언제 기도하셨는가? 또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는가? 또 기도의 결과는 어떠하였는가를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누가복음 4장 42절입니다.


○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예수님이 이 구절이 있기 전날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이 끝나자 즉 날이 저물자마자 사람들은 환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밤새도록 기도사역을 하시며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기도하시러 가신 장면이 이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는 ‘기도’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다른 복음에 보면 기도하시러 가셨노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시역 후에 기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면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기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노라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를 영적 전쟁 즉 하나님 나라의 전쟁 차원에서 이해하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주님의 기도를 보면 이렇습니다. 사탄은 창세기에서 권세를 넘겨받은 후 줄곧 세상을 지배해 왔습니다. 사탄은 귀신들의 억압과 통치, 타락한 가치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다스려 왔습니다. 이런 어두움이 있는 곳에 주님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시고서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더 큰 능력과 권세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던 어두움의 세력들을 물리치시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방법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능력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기에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기도들을 이해해야 그 의미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사역은 전쟁과도 같습니다. 사탄의 나라가 패배하면 반드시 반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임하는 곳에는 사탄의 엄청난 패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가만히 있질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다음에 기도하시러 가셨다는 사실은 영적 전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에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가신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같습니다.


  두 번째는 누가복음 5장 15절과 16절입니다.


○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여기서 허다한 무리들은 가까운 곳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멀리서 예수님을 사모하여 찾아와서 예수님에게서 말씀도 듣고 치유의 은혜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몰려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말씀선포와 능력사역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코자 주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역을 보고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둔 채 홀로 기도하시러 산 속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대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얼마나 기도를 앞세우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마음 속에 의욕을 가지고 있고, 좋은 생각이나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도 개인적인 기도를 통해 자라지 않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 법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사역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먼저 서시는 일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의기와 결단만 가지고 되지 않는 것이 열매맺는 삶입니다. 기도없이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깨닫는 데에 한계가 있게 됩니다. 기도가 없으면 개인의 주장과 개인의 생각들이 앞서기 쉽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있으면서 하나님의 의중을 먼저 들어야 하는데 기도가 없으면 어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선한 동기가 있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열매맺는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어느 것보다도 기도를 앞세우셨습니다. 기도가 없이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기도가 사라지면 사역 역시 점점 사무적으로 흐르게 됩니다. 마음이 담겨있는 사역을 하기보다는 습관적인 사역에 빠집니다. 이것이 깊어지면 생명은 전달되지 않은채 사역의 모습만 남게 됩니다.


  세 번째, 누가복음 6장 12절과 13절입니다.


○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열두 제자들을 세우시면서 주님은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일군들을 분별하실 수 있는 안목이 있으셨던 분입니다. 우리 역시 일군을 세우기 전에 먼저 안목을 가져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보실 때 “네 이름을 반석이라 하리라” 하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목과 더불어 반드시 기도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민감하려고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릴 때에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쨌든 주님은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선택하셨고 곧바로 사역에 임하셨습니다. 17절부터 19절입니다.


○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예수님을 만진 사람마다 모든 병이 나았던 것같지는 않습니다.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의 치유사건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혈루증앓던 여인만이 믿음의 자세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고침을 받았으니까요. 베드로 역시 당시 예수님께 “아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지고 있는데 누가 주님을 만졌다고 하십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위 구절은 조금 다르게 기록합니다. 즉 주님께 나온 모든 사람들이 나았노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그러한 능력이 기도와 연관이 있음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도 후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졌음을 소개함으로 말입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신 연후에 병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모든 병자들을 고치신 장면을 누가는 연결시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의 사건 역시 같은 맥락을 보여줍니다. 34절부터 36절입니다.


○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 그 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 풍랑 만난 제자들에게로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케 하신 후에 위 구절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주님은 모든 병자들을 고치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네 번째입니다. 누가복음 9장 28절부터 43절입니다.


○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 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 귀신이 저를 잡아 졸지에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심히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가나이다 ○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 올 때에 귀신이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비에게 도로 주시니 ○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이 구절은 변화산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주님이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고 영광 중에 거하신 것을 봅니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뿐만 아니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외에는 기도를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복음만 기도하실 때 변화하셨노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누가복음이 성령의 능력과 기도가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 복음서들의 고유한 특징들을 모아 전체적인 예수님 사역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위 구절은 또 한가지를 연결시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위 구절들의 경험을 한 후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 마침 귀신들린 아이의 일로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꾸지람으로 귀신들린 아이는 귀신의 세력에게서 자유케 되었고 사람들과 제자들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가를 질문하였고 주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시면서 “기도와 금식외에는 이런 류가 나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섯 번째로, 누가복음 22장 39절부터 46절입니다.


○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기도하셨습니다. 오늘날 지도자들이 배워야할 모습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기도생활을 잘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예수님의 사역지와 관련된 구절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공관복음 즉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은 예수님이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셨음을 봅니다. 물론 가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긴 하였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도 많은 사역을 하셨던 것을 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사역하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짧은 시간의 사역이셨지만 예수님께서는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짧은 기간에도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가 기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넘기려 찾아갔던 곳이 바로 겟세마네동산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유다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러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유다는 성찬식하다가 밖으로 나갔던 터라 예수님이 어디 계실지 몰랐을테니까요. 그런데도 유다는 예수님이 틀림없이 기도하시러 산에 가셨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산 속 중에서도 유다는 예수님이 어디 계실 것이라는 사실조차도 알았습니다. 당시에 가로등이 있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유다는 금새 길을 찾아 주님이 계신 곳을 찾아 갈 수 있었습니다. 이는 유다 역시 그곳에 예수님을 따라 그곳에 가본 적이 있었던 것을 압니다. 이처럼 주님의 일생은 기도하시는 일생이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위 구절입니다. 우선 여기서 주님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봅니다. 오늘날 많은 경우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내가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기도할 때가 많은 법인데 주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또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때부리듯 자신의 뜻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할 때가 많은데도 주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금식하며 때를 부리려면 누가복음의 비유에서 나타난 성도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그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 태가 열리기 위해서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여 그것에 내 삶을 순복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하시고 계십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주님의 기도를 도우셨습니다. 기도하실 때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시고, 기도하실 때 사자가 나타나 도와주는 일이 일어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 역시 많이 힘드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친 후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러 오셨을 때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당당하셨습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났나요? 누가복음 22장 47절부터 53절입니다.


○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의 앞에 서서 와서 ○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 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 하시니 ○ 좌우가 그 될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 하고 ○ 그 중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편 귀를 떨어뜨린지라 ○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 ○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참으로 넉넉함과 담대함, 그리고 확신이 있는 모습입니다. 처음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오셨을 때의 불안한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확신과 담대함을 있게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주님은 담대한 확신 속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기도문 역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절부터 13절입니다.


①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②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③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④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⑥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⑦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⑧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⑨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⑩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⑪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⑫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알다시피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에 강조점을 두고 쓰여졌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의의 행동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구제나 기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성도들이 주님 앞에 설 때에 입게되는 세마포가 의의 행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입니다.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마태복음은 의의 행실을 구제나 금식, 기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의의 행실을 행할 때 은밀하게 행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제나 금식, 기도는 의의 행실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서도 필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은혜 가운데 서기 위해서도 의의 행실을 은밀하게 행하는 일은 필수입니다. 사람에게 하듯하지말고 주님께 하듯 구제헌금과 선교를 단마음으로 하면 분명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로 인도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의 행실 가운데 하나가 기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제는 주기도문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부분을 보기 원합니다. 우선, 주기도문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해달라는 부분과 개인을 위해서 무엇을 구할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9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즉 이러이러한 것들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라고 하시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은 원한을 풀어주는 기도와 흡사합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부분은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높임을 받으시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이나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사탄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늘에서는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이 땅에서도 하늘에서처럼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중보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마치 열두 대문 안에 꼭꼭 숨어계신 분인양 오해하여 스스로를 자해하며 기도하는 일을 버리고 당당하게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이 나라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당당하게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 나라와 온 세상 가운데에서 높임을 받으시게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세요. 우리의 막힌 태를 열어주세요” 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전쟁 가운데에서 승리를 달라고 밤낮으로 눈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은밀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도를 듣고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당연한 성도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권리를 갖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을 구하는 기도는 성도들의 당연히 구할 기도입니다. 이 나라와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지며 하나님의 영광을 온 교회 가운데 부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당연한 권리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것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옵소서. 하나님, 우리를 성령으로 방문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게 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부분은 크게 세 부분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시험에 들지 않게해달라는 부분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기도라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첫째,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갖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히브리어 단어 속에는 내일 먹을 양식을 오늘 달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내일의 양식을 오늘 달라는 의미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의 진정한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에는 억압의 상태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난 후 세상에는 억압과 저주가 임해서 땅이 엉겅퀴를 내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실제로 구약에서을 우리들은 울법주의 사고관이 깨어지면 깨어질수록 가난의 저주들이 풀려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의 저주라던가 억압적인 환경등도 가만히 보면 어둠의 세력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믿으면 다 복을 받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들 가운데 사탄의 영향으로 가난의 저주와 억압적인 환경들이 만연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먹을 양식을 위해서 구하는 것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할 내일에 있게될 하나님의 권세를 지금 주셔서 하나님의 자원으로 살게하시고, 지금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현시점에서 이기게 하옵소서. 가난의 저주와 억압적인 환경이 끊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도하심이 우리 생명 가운데 있게하시고 열매맺는 삶이 나타나도록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드려지는 삶을 살게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만큼 먹을 양식의 의미를 넘어서 내일 양식을 오늘 달라는 말인데 오늘의 억압적인 환경을 이기기 위해 내일의 하나님의 자원을 오늘 주옵소서 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내일의 하나님의 자원이란 다가올 하나님 나라, 온전히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둘째, 죄의 용서를 또한 구하라고 하십니다. 죄를 용서하되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것처럼 용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사탄의 즉각적인 억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개인에게 잘못을 저질렀다고해도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면 즉각 억압 가운데 거하게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히고 온갖 억압이 찾아옵니다. 영적 전쟁 차원에서 이 부분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우리 속에는 온갖 죄가 스며듭니다. 속에 미워함이 있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함이 필요합니다.


  셋째, 영적 전쟁에서는 공격이 있고 반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격하시는 입장이라면 사탄은 즉각 반격을 시도합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신음하는 무리들을 구출하며 거짓된 가치관들을 끊으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함을 얻으면 얻을수록, 또 어두움에 사로잡혔던 영혼들이 자유케되어 하나님 나라에 헌신되어지고 그 생각과 가치관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놓이게되면 사탄은 자기 나라가 깨어지는 것을 보면서 여러 모양으로 반격해 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단순히 유혹정도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적극적 공격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악한 자의 공격 앞에서 무릎꿇지 않게해주옵시고 악한 자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옵소서” 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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