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1강 - 병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강의자료/하나님나라

by 발의무리 2007. 10. 6. 12:54

본문

 

병을 이기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첫째, 병은 사단의 일입니다


  첫째, 병은 사단의 일입니다. 병은 하나님의 창조에 속하지 않은 일입니다. 즉 하나님은 병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병이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지 않았다고 저 개인적으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에는 병이 없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부터 7절입니다.


①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②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③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④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⑥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⑦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렇게 볼 때 병이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속에 속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에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위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병이 없음을 봅니다. 그렇다면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병이 없다면 이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병은 창조의 질서 속에 있지 않습니다. 병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사단이 인간을 지배하게된 열매입니다. 사단이 인간을 지배한 결과입니다. 이 말은, 인간에게 생기는 모든 질병이 사단이 지배한 결과이기에, 질병을 낫게하려면 귀신만 쫓아내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감기가 걸린 것도 귀신이 들린 것이기에 귀신만 쫓아내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머리에 열이 나는 일도 귀신이 가져다 준 것이기에 귀신만 쫓아내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귀신이 들려 감기에 걸린다거나 머리에서 열이 날 수도 있겠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이 났을 때 주님께서 열을 꾸짖으신 장면을 보면 분명 베드로의 장모의 머리에 열이 났던 일은 귀신이 꾸민 짓이었습니다. 누가복음 4장 38절과 39절입니다.


○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위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열을 향하여 꾸짖으셨던 일이나 병이 떠나갔더라 의 표현을 보면 열병의 배후에 귀신의 세력이 있었던 것같습니다. 여기서 꾸짖는 행위는 귀신을 꾸짖으실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 귀신들이 병을 가져다 주었다면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귀신들이 예수님 시대때에만 활동하고 오늘날에는 활동하지 않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명이 발달하니까 귀신들이 활동할 여지가 없어 활동을 중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많이 역사할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귀신들에 의해서 병이 올 수도 있겠지만 모든 병이 모두 다 귀신들에 의해서 원인이 되었기에 병을 낫게 하려면 귀신만 쫓으면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이 땅에 병이 있는 원인으로 사단에게서 나온 사단의 세력들이 사용하는 강한 무기로서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병은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0절입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핍근히 함이더라”는 가까히 하고자 힘쓰더라의 의미입니다. 또 “병이 고생하는 자”라는 뜻은 “마스티고스를 가진 자들이” 라고 헬라어에는 나옵니다. 여기서 병이란 질병과 전염병을 뜻합니다. 그런데 헬라어의 ‘마스티고스’라는 말은 원래 ‘채찍’을 뜻하는 말입니다. 5장 29절과 34절입니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기서 병은 마스티고스라고 나옵니다. 다 채찍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4절과 25절, 히브리서 11장 36절입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려가라 명하고 저희가 무슨 일로 그를 대하여 떠드나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한 대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 하니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여기서 채찍질이 마스티고스의 동사형으로 쓰여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단어가 어떤 곳에서는 병으로 번역되어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채찍질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것일까요?


  배경에는 병을 원수의 채찍으로 이해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는 병이 악한 자의 채찍으로 이해하는 병들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병이라고 말하는 병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병들은 예수님 당시에 원수의 채찍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사단의 억압으로 병을 이해하신 측면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병은 사단의 일입니다. 물론 모든 병들에 귀신의 역사가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귀신이 들렸기에 병이 들렸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그럼에도 병은 사단의 일입니다. 사단의 채찍과도 같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죄와 사망으로 다스리는 방편으로서 병을 사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이 병으로 인간을 괴롭힙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0절부터 17절입니다.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 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우선 여기서도 병을 사단의 채찍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봅니다. 12절입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여기서 병이란 단어가 마스티고스라는 단어입니다. 즉 채찍이란 단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병을 사단의 채찍으로 인해 생긴 결과로 이해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병의 배후에는 귀신의 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1절과 16절입니다.


십 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다만 귀신이 여인에게 들렸는지 그 점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의 영향력이 여인에게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누가복음을 쓴 저자 누가는 직업이 의사였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의학에서 하는 주장은 병의 원을이 신체적인 원인에서 찾습니다. 바이러스나 세균에 의해서 질병에 감염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누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누가가 현대 의학보다 더 뛰어난 의학적 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누가는 현대의학을 탄생시킨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누가와 같은 관점으로 병을 보시고 계셨습니다. 누가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입고 여인의 병이 귀신들려 생긴 것이라고 보았고 예수님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위 구절은 그같은 면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누가나 예수님 모두 여인의 병을 어둠의 세력에 의한 채찍으로 보았습니다.


  오늘날 어떤 성도들은 질병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훗 날 하늘나라에 가보면 왜 병에 걸렸는지 알게될 것이라고 하면서 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병을 잘 참고 견디면 병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예수님도 병을 이렇게 이해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니 예수님은 질병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은 예수님이 병을 사단의 일로 보시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병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병자들이 주님께 찾아왔을 때 주님은 그들을 고쳐주셨지 참고 견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질병을 앓으면 하나님의 뜻을 병을 통해 깨닫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치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떡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관점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7장 25절 이하입니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여인은 예수님이 자기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야말로 자기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데 예수님이 자기를 시험한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구절에서 우리들은 치유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주시는 떡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비가 많으셔서 믿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병 낫기를 구하면 고쳐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치유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떡입니다.


  마태복음 7장 9절부터 11절입니다.


⑨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⑩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⑪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보십시오. 자식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부모가 없노라고 하십니다. 자녀들이 좋은 것을 구하면 부모는 들어주는 법이라고 하시면서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병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가 어떠하셨는지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은 병을 사단의 일로 보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 원수를 공격하셨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4장 39절과 마가복음 9장 25절입니다.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성경은 여러군데에서 예수님이 질병을 고치실 때 “꾸짖으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병을 통해 사람을 억압하는 세력에 대해 공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원수의 채찍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멸하시고 자유케 하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었던 외식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누가복음 사건을 다시 읽겠습니다.


⑩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⑪ 십 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⑫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⑬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⑭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생각해 보십시오. 18년 동안을 꼬부라져 몸을 펼 수 없었던 여인이 나았으면 모두 다 축하할 일이지 비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일반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일주일 동안에 하필이면 안식일날 고칠 것은 무엇인가 하면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화를 내며 비방합니다. 나름대로 종교적인 열심에서 비롯된 분노였습니다. 나름대로 안식일 거룩하게 지킬려고 했던 열심말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이러한 외식은 분명 종교적인 열심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오늘날 주일 낮예배 시간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똑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주일 오후예배 때에나 수요예배 때에 할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주일대예배 시간에 할 것은 무어냐?”라고 반문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대예배 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본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자 하는 열심말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 〇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 〇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예수님께서 15절에 그들을 향해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 속에 18년 동안이나 고통 당했던 여인을 향한 긍휼이 그들 속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너무나도 사무적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한 비유를 드신 적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0절부터 37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한 강도만난 사람의 곁을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지나쳤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비유하셨을 것입니다.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은 누구보다도 더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줄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본인들이 돕지 않을지라도 당시의 제도면에서 볼 때 강도만나 몸까지 상한 사람을 여러 경로를 통해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냥 지나쳤노라고 에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은 아마 예배드리러 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구약에는 죽은 자를 만지면 몸이 부정해져서 예배할 수 없었기에 자기 몸을 예배들릴 수 있도록 거룩하게 보존하고자 그냥 지났쳤을지도 모릅니다. 나름대로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일부러 피해갔을지도 모릅니다. 거룩해야 예배에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테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의 지적헤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강도만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을 언급하신 다음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 곁을 지나다가 그를 긍휼히 여겨 살리는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강도만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그런데, 원래 이 스토리의 배경에는 자기를 의롭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물었던 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29절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예수님은 이 질문의 대답으로 강도만난 사람의 비유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들의 입장에서 이웃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강도만난 사람의 입장에서 이웃이 누구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종교적인 지도자들과 소위 말하는 열심있는 자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된 관점을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지적하신 것같습니다.


  다시 누가복음 13장 사건으로 돌아갑니다. 나름대로 종교적인 열심에서 나온 분노를 가지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예수님을 향하여 분노했던 회당장에게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셨습니다. 그리곤 “화 있을지어다”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여인의 처지와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던 회당장의 마음 자세를 보시고 야단을 치셨던 것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긍휼이 없는 마음 자세를 질책하시면서 동시에 회당장의 외식을 지적하셨습니다. 15절과 1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


  예수님의 이 말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안식일이라고 해도 소와 나귀를 마굿간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지 않느냐? 하물며 18년 동안 사단의 채찍에 얽매여 있던 하나님의 백성을 병에서 풀어 자유를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예수님께서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언급하신 것을 보면 그 여인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지금 18년 동안 사단의 채찍에 얽매여 있던 하나님의 백성을 병에서 풀어 자유를 주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하노라고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주의 신앙관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철저하게 대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일주일 전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아이들이 소리를 치며 주님을 반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은 분노가 가득하여 주님을 기뻐하던 아이들과 제자들을 향해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누가복음 19장 37절부터 40절입니다.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이걸 보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적인 열심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찬양하기를 싫어했으며 치유하기를 싫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대로입니다. 그들은 성전이 깨끗케하는 일도 싫어했습니다. 찬양과 치유, 성전을 깨끗케 하는 일은 모두 성령의 일입니다. 그들은 성령의 일을 싫어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성령의 일을 싫어하는 것 말입니다. 물론 말이야 성령을 환영한다고 하지만 말입니다.


  율법주의 신앙관에 빠지면 하나님께 찬양하며 경배드리는 일을 싫어하게 됩니다. 성령의 사역을 싫어합니다. 아픈 이들을 치유하고 연약한 이들을 강건케 하는 일을 싫어합니다. 거짓 신앙관에 물들면 중보기도를 싫어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날 주일맞예배 시간에 참석하셨다가 병든 이들을 고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셨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까요? 환영할까요? 아니면 “예배 마친 다음에 하던지 또 병고치는 일은 기도원같은 곳에서 해야지 어떻게 하필이면 경건해야할 주일낮예배 시간에 할 수 있느냐?”하지 않을까요? 모르겠습니다만 주님은 여러 교회들에 의해서 아예 이단으로 간주되어 주일낮예배 시간에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 마음을 다해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으면 성령께서 운행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의 참 모습입니다. 성령이 예배의 주관자이시기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령이 하시는대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떨 때 성령께서 그 시간을 빌어 치유하기를 원하시면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따라 병든 이를 위해 치유기도를 합니다. 어떨 때 성령께서 예배 시간에 회개를 촉구하시면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따라 회개할 사람들을 초청하여 회개하도록 합니다. 이 모습이 올바른 예배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예배가 회복되게 하기위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하면 당연히 그 예배 가운데에는 치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치유란 성령님이 운행하시면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한 가지. 이렇게 예배하면 울법주의 신앙관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이렇게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를 비방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하시는 일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은 예배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절차를 잘 진행하여 무리없이 끝내면 그것을 잘된 예배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성령의 인도따라 드리는 예배를 싫어합니다.


  간혹 이런 율법주의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을 인식하고 온 마음을 다해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일을 주저한다거나, 성령이 하시는 일에 위축함을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평가를 인식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방해를 방해를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이런 율법주의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의 사건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인식하여 하나님의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단의 채찍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고치는 일을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반면 외식하는 자들은 안식일 핑계를 대며 병자는 고쳐주지 않으면서 안식일에 소와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이는 이중 인격을 드러내었습니다.


  자, 이제 병이 사단의 채찍이라는 점이 머리에 들어오시나요? 주님은 과감하게 병을 고치심으로 사단의 채찍을 파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병나은 사람들에게 임하도록 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단의 일을 멸하러 오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사단의 일을 멸하러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시고 사단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치유사역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를 가지시고 치유사역을 통해 사단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치유사역은 사단의 일을 멸하신 예수님의 사역중 하나입니다.


  치유사역중 하나가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7장 18절부터 23절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1절입니다.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여기서 “고통”이란 단어는 채찍을 의미합니다. 원어의 채찍이란 단어가 우리말 성경에 고통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채찍이란 단어가 위 구절에서 ‘질병’과 ‘귀신들림’과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보아도 병을 사단의 채찍으로 이해한 가치관이 있음을 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인지가 궁금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었던 메시야의 행실과 주님의 행실이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급기야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당신이 오실 그 이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보고 들은 것을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당신이 오실 메시야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말하라”고 답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분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는 한 방편으로 ‘듣는 것’을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듣는 것만 아니라 ‘보는 것’을 함께 행하셧습니다. 즉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는 또 하나의 방편으로 ‘보는 것’을 하셨습니다. 보는 것이란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위 구절에서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시기 위해 ‘보고 듣는 것’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는 것’의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22절 하반절입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복음이 왜 복음입니까? 사전식으로 해석한다면 복음이란 문자 그대로 좋은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왜 좋은 소식입니까? 즉 왜 복음입니까? 다시 말하면 무엇이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걸까요?


예수님이 오신 후,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사단의 능력은 깨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사단의 채찍은 깨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사단의 억압은 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복음이 좋은 소식인 줄 알았을까요? 소경이 보게되며, 문둥이가 깨끗케 되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앉은뱅이가 일어서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사단의 지배를 부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고 가난한 자들은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듣고, 알고, 보게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분명히 이해하고 깨달아서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더 나타나기를 사모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시리즈를 살펴보게 하시는 것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 가운데 이런 하나님의 강한 역사를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같습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해 주님의 답변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는 이런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더욱 나타나야 된다고 믿습니다. 또한 더욱 더 이런 일들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위해 기도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더 일어나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런 역사를 볼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한 증거를 보게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를 나타내 보이실 것입니다. 또한 이런 역사들이 예수님을 증거하실 것입니다.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며 복음이 담대하게 전파될 것이기에 더욱 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역사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사단의 채찍들은 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일정한 절차를 따라 순서를 잘 진행하는 일로 전락해 버린 현실 속에서 이런 역사는 새로운 힘을 줄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가슴 찡하며 마음 뿌듯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시점에서 이러한 역사는 예배의 놀라운 회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초대교회 예배 가운데에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일과 놀라운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 예배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낮예배나 오후예배, 성경공부, 셀모임, 부흥회 상관없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런 일들은 부흥회때나 기도원집회 등에서만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전인적인 사역이었습니다. 치유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이아오마이 라는 단어입니다. 구원하다는 말은 소조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환자들을 치료하신 사건을 두고 소조라는 단어를 씁니다. 육신적인 질병을 고치신 사건인데도 소조 라는 말을 씁니다. 마태복음 9장 20절부터 22절입니다.


▲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가를 만지니 ▲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분명 치유하신 일임에도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치유와 구원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치유가 전인사역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흔히 ‘구원’이라하면 영혼의 구원만을 의미할 때가 많지만 주님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구원’은 영혼의 구원을 포함하여 육신적 치료를 포함한 전인적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품고 계셨던 구원이란 영혼의 구원을 포함하여 한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의 빛으로 충만한 구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성취되는 전인적 구원입니다.


  이런 이유로 병자를 위해 기도 사역할 때 환자의 아픈 부위만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환자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삶의 영역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자동차와 인간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동차는 필요한 부품들을 모아놓은 것입니다. 고장나면 고장난 부분만 고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를 들어, 라이트가 깨어졌으면 라이트만 새로 갈아 끼우면 불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오장육부를 연결시켜 모아 놓았다고해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한 부분이 잘못되었다고해서 그 부분만 고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슴이 답답하고 아플 때 심장을 새로 바꿔 낀다고해서 낫는 게 아닙니다. 가슴을 통째로 오려내고 새가슴을 규겨에 맞춰 끼워놓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플 때 어쩌면 가슴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이 가지고 있는 억압이나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가 원인일 수 있습니다. 혹 죄로 인해 가슴이 아플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영과 혼과 함께 연결되어 있는 탓에 하나의 전인적 구조로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치유사역을 할 때 환자의 전인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단순히 병만 낫도록 하지 않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사역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증상만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방면에 본이 되어주셨습니다. 인간을 전인으로 보시면서 사역을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십자가를 통해 치유를 위한 기초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치유와 십자가의 구속은 떼래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구절은 구약의 이사야서 53장 4절부터 6절의 말씀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서 53장 4절부터 6절과, 마태복음 8장 16절과 17절입니다.


④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⑥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위 구절들에서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치유를 위한 구속을 성취하신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구속 사역 속에 치유가 포함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위 구절들은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치유를 위해 기초를 이룬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어떤 이들에게는 치유가 일어나고 왜 어떤 이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선 십자가의 구속과 치유와 관련하여 한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위구절들에 의하면 분명 주님은 우리의 구속뿐만 아니라 우리의 치유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말하기를, “보아라, 주님이 이미 구속뿐만 아니라 우리의 치유를 행하셨기에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믿음으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치유가 일어나는 법이다”라고 합니다. 이 견해는 예수님의 대속하심 속에 육체적인 치유가 포함되어 있기에 이미 치유가 완성되었다는 면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완성된 측면이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치유가 일어난다 는 면을 강조합니다. 치유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처럼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치유를 모두 이루셨기에 믿음으로 이 치유를 주장하면 치유를 받게되어 있다. 만일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믿음으로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치유되지 않는 이유를 믿음의 부족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견해는 그럴 듯 하지만 질문에 대해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선교여행하는 도중 까닭모를 병에 걸립니다. 그렇다면 위 견해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믿음이 없었다는 말이 되는데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것같습니다. 바울이 믿음이 없었다는 말은 여러 가지 성경적 정황으로 보아 말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귀하게 쓰임받았던 종들 중에 많은 분들이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치유의 능력 때문에 많은 환자들을 고쳤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아도 모든 환자가 기도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 치유를 받았던 것같지는 않습니다. 그럼 치유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서 치유되지 않았던 걸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같지 않습니다.


  이 견해는 자칫 상처를 유발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기도를 한 후 낫지 않으면 “당신이 믿음이 없어서 낫질 못하는거야”라고 한다면 환자가 상처를 입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치유를 이해해야 할까요?


  마태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온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 구속하시기 위함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죄와 죄의 결과인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치유가 일어나는 일은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속하신 사역의 결과로  치유를 받습니다. 이 말은 전적으로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르 용서하셨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십자가를 의지하여 서서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또한 치유 역시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믿음으로 의지하면 치유를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천국에 가서도 이 구속은 이어질 것입니다. 알다시피 완성된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가면 질병이 없습니다. 그곳은 죽음이 없는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구속은 이와같이 이 땅에서의 구속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구속까지 포함합니다. 여기까지는 앞서 언급한 견해가 맞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견해가 틀린 부분이 여기입니다. “주님이 이미 모든 구속을 이루셨기에 믿음으로만 의지하면 치유가 일어난다”에서 ‘~하면 치유된다’ 는 대목이 잘못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상태로 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시작되었고 예수님 당시부터 침노를 당하고 있으며 훗 날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도 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이며, 바울의 곁에 있던 디모데 역시 위장이 아팠습니다. 바울이 치유의 능력이 없어서 아들같은 디모데를 고치지 않았을까요? 믿음이 없어서 자신의 병뿐만 아니라 아들의 병을 고치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긴 하였지만 완성되진 않았다는 사실과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낫지 않는 병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언급된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질고가 나았다는 구절의 의미는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의 구속의 기초가 마련된 것처럼 십자가의 대속의 결과를 통해 치유의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가지시고 사단의 일을 멸하시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역사로 사단의 채찍을 꺾으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단의 궁극적인 채찍의 근원이 끊어지게 만드셨습니다. 그 결과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사역 할 수 있는 근거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래서 우리들 역시 예수님의 이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마 28장입니다.


♡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 중에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치유하라는 말씀도 포함됩니다.


  우리들에게 흔히 있는 세계관이 성경적인 세계관과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창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 잘못된 세계관이 있습니다. 과학만능적 세계관과 모든 일을 귀신과 관련짓는 세계관이 그것입니다. 서구적인 교육은 사람들을 계몽주의적, 과학만능적으로 만듭니다. 이 세계관은 모든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한다는 미명하에 과학만능을 믿습니다. 또 한 편에서는 서구적인 교육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사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국회의원 선거때가 되면 소위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마저도 무당을 찾습니다. 일반 사람들 역시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리기만 해도 일진 운운 하면서 운명과 결부짓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모든 병을 다 귀신의 역사로 보아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모든 총력을 기우리기도 합니다. 과학적이거나 계몽적이어도 문제지만 모든 것 귀신과 결부짓는 일도 잘못입니다.


  어떤 분은 병을 사단의 채찍이라고 말하면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통하지 않는 말이라고 반박하기도 합니다. 병균이나 바이러스 등으로 풀 수 있는 문제를 왜 귀신과 결부시키느냐 하면서 질병을 귀신의 채찍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물론 질병을 귀신의 채찍으로 말하니까 병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해 질병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실제로 병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해 병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모든 병이 병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병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해 생긴 병의 배경에 어둠의 세력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8년 동안 허리가 굽었던 사람도 예수님에 의해 그것이 귀신의 장난이었음이 들통났습니다. 아마 나같은 경우 그 사람을 보았더라면 척추수술을 운운했을지도 모릅니다. “웬 귀신?” 했을 겁니다. 지금 전 모든 허리굽으신 분들이 귀신의 장난에 걸렸다는 말을 드리고 있지 않습니다. 어�든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셨고 허리는 펴졌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의학으로는 모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실이며 실제였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을 놓고 벌어지는 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 사이의 영적 전쟁의 한 복판에 서 있습니다. 세상의 전쟁은 영토를 놓고 벌어집니다. 전쟁을 치룬 결과 이쪽 영토에 속해 있으면 이쪽 사람, 저쪽 영토에 속해 있으면 저쪽 사람이라고 구분해 버립니다. 6․25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쟁 끝에 휴전선 이북이면 북한 사람, 남쪽이면 남한 사람으로 구분되어 살게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 사이의 영적 전쟁은 사람들의 영혼이 대상입니다. 사실 전쟁을 영토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일로 인해 영적 전쟁을 잘못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영적 전쟁은 영토적 개념의 전쟁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하나님 나라가 영토적 개념으로도 정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영적 전쟁의 개념은 하나님 나라의 전쟁 즉 하나님의 통치와 연관된 전쟁입니다. 북한에 살던지 남한에 살던지 사단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하나님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남한에 있건 북한에 있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영향력 아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누가 내 삶을 영향력과 지배력으로 다스리냐 하는 문제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영적 전쟁이 하나님의 통치와 연관된 싸움이기에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뿐더러 실감도 나지 않는다는 데에 커다란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시면서 고통 중에 있던 사람들을 고치실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전인구속을 이루심으로 치유의 근거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부활하셔서 우리들에게 주님이 하셨던 것과 똑같은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전인적인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때로는 병자를 위해 치유하고 복음을 전파할 때도 있으며 병을 가져오는 귀신의 세력들을 무력화시키기도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전쟁입니다.


  어떤 이는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자세는 잘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분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사실을 잊어서 안됩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를 보내시는 분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명령이기에 그렇습니다. 모두가 사역자 직분을 가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역은 모두가 해야 합니다. 명령을 따라 전도하고 치유사역을 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믿음, 사랑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축복하신다는 믿음, 하나님의 뜻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나아갈 때 하나님은 더욱 역사하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끼리 모여 기뻐하며 예배하는 일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나가서 억압당하는 자, 낙담하는 자에게 가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 하나님의 역사하십니다.


  무언가 준비가 되엇노라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려서도 안됩니다. 나가지 않으면 신앙은 절름발이가 됩니다. 이론적이 됩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흔히 영성사역을 한답시고 예배 시간에 주로 치유사역과 예언사역을 주로 하면서 말씀을 대강 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예수님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두 가지는 항상 같이 가야합니다. 존 윔버 목사님의 경우는 예수님의 본을 잘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존 윔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나서 평가하기를 “당신의 설교에는 고기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즉 말씀을 잘 쪼개서 사람들에게 강하게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알맹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존 윔버 목사님은 고민이 되어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설교에 고기가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한 번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고기는 길거리에 있다.” 알맹이가 거리에 있다는 말입니다. “고기가 길거리에 있다”는 말은 말씀을 들은 것을 실천하게 될 때 거기서 실제를 경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쪼개는 설교가 아니면 마음에 차지 않아 하는 자세로는 아무리 말씀을 많이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깊은 설교는 분명 좋은 설교입니다. 그러나 설교로서만 멈춘다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설교에만 멈춘다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설교를 들었으면 나가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 보아야 합니다. 실패하던지 성공하던지 살아 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 부분이 되지 않으면 우리의 사역은 자칫 프로화되어 직업적으로 사역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나가서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해야 합니다. 알맹이는 그곳에 있습니다. 설교를 들은대로 나가서 살아보는 가운데 주를 향한 열정이 더 치솟는 법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판단하거나 비교하게 됩니다. 속으로 논쟁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가보면 생명이 나타나기를 구하게 되기 때문에 판단이나 비교가 자리할 곳이 없게 됩니다.


  치유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 사역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잃은 영혼을 구원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더 나갈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나가기 위해서 고민하고 이 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애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매달려야 합니다. 실제로 나갈 때 하나님은 더욱 우리들을 세워가십니다. 하나님이 세우셔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더욱 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