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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강 -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

강의자료/하나님나라

by 발의무리 2007. 10. 6.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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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영적 전쟁의 차원에서 이해할 때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점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사건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비방하면서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조롱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는데 마가복음 3장 22절부터 30절에 나와 있습니다.


○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 ○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27절의 “강한 자”는 분명 사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간”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동안 사탄은 죄와 사망을 통해서 인류를 지배하고 통치하고 억압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탄보다 훨씬 더 강한 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탄의 능력보다 훨씬 더 강한 능력인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의 권세를 묶고 사탄의 억압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자유케하신 주님의 사역을 묘사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어떤 사역인지를 잘 보여주는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역을 하시되 어떤 방법으로 하셨는 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방법으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시되 치유를 행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억압적 환경을 대적하여 물리치고, 죄에 대한 용서를 선포하심으로서 전인치유의 모습으로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통해 사역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만이 이 사역을 감당하실뿐만 아니라 제자들 역시 이 사역으로 부르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을 부르신 첫 번째 목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두 번째 목적은 주님 자신의 사역을 제자들 역시 똑같이 감당하길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사역을 행하되 똑같은 사역을 똑같은 방법으로 감당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게 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며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교회인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역을 행하되 주님과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의 방법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방법이나 생각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살펴볼 능력과 권세는 주님의 사역을 행할 때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성령의 능력과 권세로 사역을 하셨으며 제자들 역시 성령의 능력과 권세로 사역을 감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능력과 권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부터 읽겠습니다.


①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②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③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④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⑥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⑦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⑧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위 구절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사역을 위해 보내신 장면입니다. 에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디로 갈 것인지 그리고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사역무대는 주로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식의 병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영혼들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노라고 답변하셨습니다. 물론 여인이 슬기롭게 구하자 주님은 여인의 자식의 병을 고쳐주시긴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에게 가서 …” 또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그 후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사역의 무대를 열방에까지 넓혀놓으셨습니다.


  7절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봅니다. 8절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행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자신이 하신 사역을 제자들 역시 그대로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6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당시의 백성들을 바라보시는 안목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셨습니다. 즉 목자없는 양처럼 유리방황하는 무리들에게로 제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내어 보내시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부터 38절입니다.


○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위 구절은 한 편으로는 제자들을 보내신 배경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35절에서 우리는 주님이 쉴 틈 없이 사역을 하셨던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리들을 돌보시던 주님은 백성들을 민망히 여기십니다. 민망히 여긴다는 말은 긍휼히 여겼다는 말입니다. 헬라어로 스플링커 니조마이(?)로서 스플링커란 단어는 여자들에게는 자궁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감정을 표현할 때 자주 몸에 은유하여 표현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민망히 여긴다는 말은 여인이 자기 배속에 있는 태아에 대해 가지는 긍휼히 여기는 사랑에 해당하는 말로서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가지는 사랑을 그나마 표현할 수 있는 말이기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무리들이 목자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무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일이 백성들에게 필요한 사실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이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돌아오는 길밖에 없음을 아셨습니다. 백성들의 절박한 필요를 보신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기에 이르셨습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마음을 배우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목회자로서 자주 놓치는 일이 있다면 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을 연속극의 주인공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단지 숫자에 불과할 때가 많습니다. 연속극의 엑스트라에 불과한 것처럼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을 배경으로 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사람들을 하나의 숫자로 이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보실 때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유리하고 방황하는 긍휼을 베푸실 대상으로 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이것입니다. 목회자이건 일반 성도이건 상관없이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 요구됩니다. 이런 자세와 마음으로 주님을 좇아갈 때 하나님의 더 큰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사역을 행하실 때와 연관지어 “긍휼”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치유하실 때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나, 문둥병을 고치실 때나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이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긍휼의 마음이 있는 기적과 능력이 더욱 나타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마음을 구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안목을 우리 모두 배워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의 일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신 후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때까지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과 권세있는 말씀을 경험하였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일, 손마른 사람이 나은 일, 다리가 늘어난 일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한 후였습니다. 그리고 보면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본 자들을 주님의 사역을 행하라고 보내신 셈이 됩니다. 소위 생짜배기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배운 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보내시지 않으시고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권세와 능력을 주시며 보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절실한 필요는 권세와 능력입니다.


















  이제부터 권세와 능력의 개념과 차이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간혹 권세와 능력이 혼용되어 사용되곤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권세와 능력은 약간 다릅니다. 먼저 능력을 살펴봅니다. 신약성경에는 능력이란 단어가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을 가리킬 때 즉 영적인 세력을 가리킬 때 능력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의 일들을 가리킬 때 능력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셋째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때 능력이라 표현을 사용합니다. 똑같은 단어지만 이렇게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우리들이 살펴볼 부분은 세 번째 의미입니다.


  능력은 헬라어로 두나미스 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는 힘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힘을 말합니다. 영어로 enablement입니다. 곧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힘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한 능력이 성령의 임하심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미가서 3장 8절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But as for me, I am filled with power, with the Spirit of the LORD, and with justice and might, to declare to Jacob his transgression, to Israel his sin.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나에 관해선, 나는 능력으로 충만하고, 주님의 성령의 충만하고 …” 그런데 히브리어 문법에서 이런 부분은 평행법으로 해석함이 옳습니다. 그렇게본다면 “나는 능력으로 충만하다. 곧 나는 성령으로 충만하다”의 의미입니다. 즉 두 가지로 충만함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를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이 구절을 보아서도 능력은 성령의 임하심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그리고 2장 33절과 43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능력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란 하나님의 일을 가능케 하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이런 능력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제부터 성령의 기름부음과 능력의 임하심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성령님을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신약시대의 특징을 설명할 때 성령님이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오셔서 온전히 거하신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 곧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만약 어느 개인이 진실로 주님을 영접했다면 성령을 받기 위해서 어떤 현상이나 결과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성령님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마음 속에 거하신다고해서 모든 만사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후로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성령의 기름을 붓기 원하십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다 성령을 받는 것은 아니며 오직 방언을 해야만 성령을 받은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주장은 옳은 주장이 아닙니다. 이 주장은 성령을 받은 성도는 마치 1등급 성도이고, 방언을 하지 못하는 성도는 2등급 성도처럼 여기도록 만들기 때문에 잘못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순절 신학이 들어오면서 잘못 오해되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오순절 신학을 잘못 오해해서 방언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고로 오순절 신학은 장로교나 침례교처럼 매우 보수적인 신학입니다. 오순절 신학이 말하는 성령론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예수믿은 다음에 받는다. 둘째, 성령을 받은 증거는 방언이다. 셋째는 일정한 조건과 방법을 행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오순절 목회자들은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지 못하면 이러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세주로 믿을 때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2절, 4장 6절 그리고 로마서 8장 9절, 15절과 16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 듣고 믿음으로냐 ? …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성령님을 우리 속에 모셔들일 수 있고 만일 성령님이 속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가끔 방언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애기를 듣는데 이는 오순절 교리와 위 구절의 내용을 섞어 만들어낸 말이며 가치가 없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를 믿는 자 속에 이미 와 계십니다. 성경이 그것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바울은 위 구절을 통해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능력이라고 덧붙여 설명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역하시는 능력이 이미 성도들에게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1장 18절부터 22절입니다.


○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역사하시는 능력을 성도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눈이 밝아져서 그 능력을 볼 수 있게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위 구절에는 강한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힘의 강력, ”역사하심“, ”능력의 지극히 크심“ 등등 모두가 강한 느낌을 주는 표현들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의 표현이 부족한 것을 느낀 나머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것이 20절부터 22절입니다.


○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놀랍지 않으십니까? 성도들 속에 거하시며 역사하시는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말입니다. 마음 눈이 밝아지면 알게됩니다. 즉 성령의 조명으로 눈이 밝아지면 깨닫게 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수시로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그 능력을 쏟아부으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의하면,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님이 오시며 성령님이 오셨다는 말은 우리들 가운데 이미 능력이 임해 있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현상이 나타나야 능력이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은사가 주어져야 능력이 임하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은사나 현상을 아직은 결험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없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말씀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성도들 가운데 왜 이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아니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그토록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선, 이 질문의 해답을 찾기에 앞서서 은사의 네 단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단계는 Role 즉 역할입니다. 둘째 단계는 Anointing 즉 기름부음입니다. 셋째 단계는 Ministry 즉 사역입니다. 넷째 단계는 직분입니다.


  첫째 단계는 임무입니다. 이 단계는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임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은 적용되어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복음을 전할 임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전도해야 함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으로 전도할 마음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전도해야 함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전 전도할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못하겠는데요”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전도란 전도할 분위기나 마음이 생길 때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도뿐만 아니라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싶을 때에만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써야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병든 자를 치유하고,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시험에 든 자들을 권면해야 합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번째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합리적인 사고의 차원에 속합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실함입니다.  사실 성도로서 우리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는 바로 신실함입니다(히 3:1-6 참조).  우리가 예수를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이 신실하게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치유를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낫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차피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치유를 위해 신실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르치는 것이나 위로하는 것 등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급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엘리야의 경우에서와 같이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것이나 과부집에 가서 숨는 것이나 그 상급은 똑같을 것입니다. 


두번째 단계:  성령의 나타나심(Manifestation) 혹은 기름부음(Anointing)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예수님의 사역을 제자들 역시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 제자들을 부르실뿐만 아니라 그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기도 하였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들 역시 제자들에게 부여된 사명과 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름을 입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감당하였듯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전도건, 가르침이건,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이건, 치유건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내 계획과 방법으로 할 수 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해나갈 뿐입니다. 주님, 하나님의 도움이 지금 절실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옵소서. 저에게 능력을 나타내어 주십시오. 능력을 부어주십시오. 하나님, 역사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단계가 두 번째 단계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해 나감에 있어 성령께서 택하시는 대로 나타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께서 나에게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문제를 알려 주십니다.  그전에 내가 전혀 알지 못하던 사실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보에 기초해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그 사람이 놀라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고 내가 전한 복음에 대해 매우 많은 관심을 보이더니 결국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 순간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번째 단계입니다. 


우리의 지혜로 사역을 감당하는 것과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의 차이를 알면 이 단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가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다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전도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전도하면, 우리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말을 건네고, 또 어떤 순서를 따라 복음을 제시할 것인가를 잘 압니다.  그리고 그 순서대로 나가서 행합니다.  물론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의 나타나심을 따라 전도하는 능력 전도는 다릅니다.  우리는 먼저 나갑니다.  필요한 모든 연장을 준비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빈 연장통을 가지고 나갑니다.  나가면서 필요한 때에 성령께서 필요한 연장을 준비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나가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절박하게 구합니다.  그 때 성령께서 필요한 대로 지식의 말씀을 주시기도 하고, 지혜의 말씀을 주시기도 합니다.  혹은 다른 은사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나타나심을 따라 순종할 때,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옵니다. 


개인적으로 저의 겨우에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가 자주 나타나는 것을 느낍니다.  상담을 하면서 자주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저는 자주 난관에 부닥치곤 합니다.  도무지 내 지혜로는 무엇이라고 권면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자주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저는 겉으로 계속 상담을 하면서, 속으로 ‘성령님, 도와주세요.  성령님,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그 분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면 저는 자주 성령께서 대화를 인도해 가시면서 감히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로 그 사람의 당면한 문제와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정확하게 제시해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런 경우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해 나감에 있어 성령께서 택하시는 대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혹은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의 차원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면서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고 구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속으로라도 ‘성령님, 도와주세요.’ 라는 기도를 자주 드리면서 그 분의 인도와 역사를 기다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가끔 성령께서 택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혹은 우리를 통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세 단계로 나누지 않고, 네 단계로 나누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번째 단계가 직접으로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첫번째 단계를 신실하게 잘 하는 사람에게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단계가 더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실하게 전도를 잘 하는 사람에게 그들이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구할 때 지식의 말씀의 은사, 치유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등 전도를 위한 은사들이 강하게 자주 나타납니다.  어차피 은사들은 우리 가슴에 달고 다니기 위한 훈장들이 아니라, 주님의 사역을 위한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번째 단계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성령의 나타나심이 우리에게 있을 때 이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한 삶을 사는데 있어 순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더욱 강하게 나타나시고, 순종할 때 우리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작은 감동에 순종했는데 참으로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타나실 때, 그대로 순종한다는 것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나는 주님을 위한 바보다'(고전 4:10)라는 자세를 가지고 사람들로부터 창피와 모욕을 당할 각오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령께서 놀라웁게 사용하시는 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나님의 인도를 배워 갈 때, 하나님은 가끔 길가에 앉아 있는 중에게 가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말하라는 것과 같은 감동을 종종 주셨습니다.  그런 일이 쉽겠습니까?  그러나 그 분은 창피를 무릅쓰고 순종했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은사가 마치 우리들이 하나님께 받아 호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면서 우리가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은사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은사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방언의 은사 외에는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서 임의대로 할 수 있지 않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말할 수 있는 은사이지만 나머지 은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은사이지만 다른 은사는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기 위한 은사이기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예언의 은사가 자주 빈번하게 나타나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임의대로 예언이 주어지도록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사역을 받을 때 “이 기도사역자를 통해서 반드시 예언이 주어질꺼야”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은사가 빈번하게 나타나는 기도사역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상황 가운데에서 부어주시는 기름부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사역자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은사가 나타나게해 주옵소서”라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구할 때 하나님은 그 때 그 때 필요한 때에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세번째 단계:  사역(ministry)


세번째 단계는 사역입니다.  방금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아갈 때 때로는 성령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특정한 은사가 자주 나타날 뿐 아니라, 또한 더욱 깊고 높은 차원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그 사람에게는 그 사역이 성령님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 모두가 성경 말씀에 따라 전도를 하는데 어떤 분에게는 특별히 전도를 잘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역사가 잘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전도의 기름부음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역을 맡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전도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복음전하는 자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언의 은사가 자주 빈번하게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더 강하게 나타나는 사람들입니다. 모두에게 예언의 은사가 주어지지만 이런 분들에게는 더욱 더 은사가 부어져서 손만 얹고 기도해도 입에서 술술 예언이 나옵니다. 이는 이들에게 사역이 맡겨진 것을 의미합니다.

 

여주봉 목사님의 경우, 그가 어떤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놀라운 예언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숨쉬기가 바쁠 만큼 줄줄이 주어진 적도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언이 주어지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이 드뭅니다.  보통 한 두 마디의 감동을 주시는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녀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도 나를 통해서 주신 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예언을 주십니다.  그것은 곧 제 아내에게는 예언 사역이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주봉 목사님의 경우, 가르치는 은사가 자주 그리고 때로는 매우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에게 맡겨주신 사역과 관련이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은사에 대해서 말하면서 몸의 지체에 비유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역이 바로 이 부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네번째 단계:  직분(offices)


이렇게 사역이 맡겨진 것을 보면서 그를 사역자로 세워서 직분을 주는 단계입니다. 예어 사역자로, 치유 사역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여기가 마지막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직분입니다.  이 단계는 교회가 각 성도에게 나타나는 사역을 발견하고 그를 공식적으로 그 직분에 임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28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은사가 바로 직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사용된 단어의 시제가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2:10-11절에 나오는 단어들의 시제와는 달리 단순과거형인 것을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은사는 앞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나타내 주시는 은사와는 달리 아예 임명해 주신 은사를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 집사의 네 딸들은 모두 예언 사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예언이 빈번하게 그리고 깊이 주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가보에 대해서는 선지자라는 칭호가 붙었습니다(행 21:9-10).  그 이유는 그에게 주어진 사역을 교회가 발견하고 그를 선지자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일군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세워져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야 그 일군들이 하나님이 세우시는 일군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사역에 대한 어떠한 검증과정도 전혀 거치지 않습니다.  제직들의 경우 우리는 단지 교회에 대한 충성도나 교회에 등록한 연도 등을 감안하여 임명합니다.  그리고 전도사나 목사의 경우는 목회 경력이나 학력을 보고 임명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교회가 되지 못하는 가장 주된 원인 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또한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직분이 타락하게 된 가장 주된 원인 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시면서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창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5-12절)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들은 직분을 마치 신분처럼 여기며, 그것을 통해서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려고 하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내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사용합니다.









  능력은 우리에게 이미 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때에라도 마치 호주머니에서 꺼내 쓰듯이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때 그때 필요하신대로 부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을 따라 우리의 임무를 신실하게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도움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보시는 바에 합당하면 그때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대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능력이 부어져야 지식의 말씀이 나타나 상대방을 알게하시기도 하고, 치유의 은사를 통해 병자를 낫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부어져야 합니다.


  한 편으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현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순종하는 삶의 자세는 신실함과 사모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리할 때 더욱 큰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능력이 나타나면 교만할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주님께 간구하며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을 사모하면서 주님이 힘주시기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5장 17절입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위 구절에서 우리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에수님에게도 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항상 함께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그러니까 에수님에게 있어서 어떨 때에는 치유의 능력이 강하게 함께 있었고 어떨 때에는 다른 능력이 강하게 머물러 있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집회를 인도하다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가끔 집회 때,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이 시간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이것은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치유의 능력을 베풀기 원하셔서 치유의 능력을 부으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시간 다른 시간에서보다 치유가 더 많이 일어납니다. 훨씬 다양하게 치유가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특별히 치유의 기름부음을 더 강하게 붇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능력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권세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권세는 영어로 Authority 입니다. 권세란 주어진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 또는 자격을 뜻하는 말입니다. 능력이 그 자체가 가능케 하는 힘이라면 권세는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우리는 권세에 대한 이해를 교통경찰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8톤 트럭이 과속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연약하게 생긴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세차게 불며 손을 들어 법규를 어긴 트럭을 세웁니다. 그럼 트럭은 꼼짝없이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경찰관의 능력이 트럭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힘으로 따지면 연약한 경찰관은 트럭을 세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힘으로 부딪혀 트럭을 세우다가 자신이 죽을 것입니다. 힘으로는 안됩니다. 달리는 트럭을 세울 힘은 경찰관에게 있지 않습니다. 트럭을 세운 것은 경찰관에게 있는 권세 때문입니다. 교통경찰에게는 국가가 부여해 준 권세가 있습니다. 트럭은 권세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려면 능력과 권세, 이 두 가지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예수님이 삶에는 권세와 능력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화 속에서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사역을 감당하신 것을 압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러차례 자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은 자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기 위해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가운데 주님은 자기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간구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주님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들어가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세와 관련하여 좋은 예가 마태복음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절부터 13절입니다.


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⑥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⑦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⑧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⑨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⑩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⑪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⑫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⑬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우리 모두 잘 아는 스토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보려고 주님께 부탁을 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주님은 고쳐주시겠노라고 답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집으로 가기를 희망하셨습니다. 이 때 백부장은 8절과 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⑧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⑨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절의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라는 말에서 그는 권세 아래 있는 자신을 말하고 있으며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에서는 자신에게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권세 아래 있었고 동시에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10절입니다.


⑩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백부장은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권세의 문제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같습니다. 백부장이 에수님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권세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배겨에는 그가 권세와 관련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려됩니다. 그의 직업은 군인이었습니다. 군인은 권세 아래 있기도 하지만 권세를 가지고 있는 신분입니다. 더 높은 계금 아래 있었고 낮은 계급보다는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Under Authority and In Authority"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통해서 놀라운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렇게 권세가 나타나기 위해서 주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권유에 따라 말씀으로 하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가 우리에게서 나타나기 위해서 권세 아래 있어야 합니다. 즉 권세 아래 있는 자가 권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권세의 원리중 하나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을지는 모르지만 개인의 삶의 주인으로는 모셔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세주로서의 예수와 주로서의 예수를 구분한 것입니다. 죄의 용서와 구원을 주시는 것은 좋지만 그러나 개인의 삶에서 주권을 행사하시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도 구세주와 주님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권세가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철저하게 하나님의 권세 아래 들어가야 합니다. 권세 아래 들어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장 먼저 개인적인 야망이 내려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본주의와 기복신앙이 다루어져야 합니다. 인본주의란 자기의 자원으로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기복신앙이란 개인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수단삼는 삶은 말합니다. 개인적인 야망과 함께 개인적인 주장이 내려져야 합니다. 주관적인 사고가 내려져야 합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아들은 다만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것을 행할 뿐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본을 따라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온 것은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마치는 것이 자신의 먹을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본을 좇아야 합니다. 주님은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 가운데 살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길 소원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개인의 뜻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자세로 살면 하나님의 뜻 앞에 우리 개인의 삶이 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 앞에 우리 개인의 모든 것이 복종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점점 더 주님의 권세 아래 들어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권세가 없이도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예, 가능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부터 23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너무나도 많은 경우,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때 보여지는 현상이나 겉모습만 가지고 분별할 때가 많습니다. “아니, 목사라는 사람이 넥타이도 안하고 강단에 설 수 있는가?”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아니, 기도받으며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은 도대체 뭐야? 이단 아냐?”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열매를 보고 나무를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열매를 보고 판단해야 성경적입니다.


  위 구절을 보면서 우리들은 불법을 행한 사람들이 예언사역을 잘 행했던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권능을 행하였던 것을 보아 그들을 통해 능력이 많이 나타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권세 아래 있지는 않았습니다. “불법“이란 단어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역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은 이 점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24절부터 27절입니다.


○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집을 반석 위에 세운 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자, 즉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행하심을 보고 자기도 행하셨던 것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 구절들은 권세 아래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권세 아래 들어가지 않으면 얼마나 비참한지를 말합니다. 권세 아래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능력을 행할 수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오히려 능력을 행한 것이 도리어 자신에게는 해가 되기도 합니다.


  사도들에게도 주어진 능력과 권세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분명하게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주변에 있던 사도들에게 당신의 능력과 권세를 부어주셔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하심을 통해 우리에게까지 능력과 권세를 부어주실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부터 20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보십시오. 사도들에게 주신 능력과 권세는 온 땅 끝까지 나아갈 우리들에게도 역시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약속은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모든 제자들과 함께 있겠다고 다짐하시는 약속중의 약속입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과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행01:0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두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능력을 입히운다는 의미가 성령이 임하는 것과 같은 뜻임을 봅니다. 즉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능력과 권세가 부어지는 것과 함께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성령이 부어지며 그 사실은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능력과 권세가 우리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성령이 이미 우리 속에 와계시기 때문에 능력은 이미 우리 속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능력은 한층 더 부어지는 바가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권세 아래 들어가 이미 우리 속에 와 계신 성령의 능력을 깨닫고 그것을 사용하게 될 때 하나님의 권세가 더욱 더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럼 우리는 권세와 능력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요? 아니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선 우리에게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을 주셨다는 진리를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미 그들에게 소망과 능력이 주어졌고 역사하고 있음을 깨닫도록 바울은 기도합니다. 이처럼 이미 와 있는 능력을 깨닫지 못하거나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능력을 활용할 수 없게됩니다. 그 능력에 기초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 은혜가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조명을 통해 에베소교인들의 마음 눈을 밝혀주셔서 저들 가운데 부어진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과 역사들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이미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주어진 것을 깨닫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그것을 행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은 행할 때 나타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믿을뿐만 아니라 말씀을 행하는 자가 열매를 봅니다.


  세번째 우리들은 사역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세 가지 방편이 있습니다.


  1) 배워야 합니다. 배우는 자세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냥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많은 시간들을 그들과 함께 보내셧습니다. 제자들은 그 시간들을 통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사역을 보았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기도 사역 때 발이 길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도 일어나는 것을 감안할 때 예수님 당시에는 얼마나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치유하셨는지, 그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보았습니다. 바로 옆에서 보았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라야 합니다. 배우는 자세가 이 때 필수입니다. 리더가 될려면 팔로우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가지 않는 자는 리더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리더가 될려면 먼저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보내져야 합니다. 실제로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명령을 따라 나아가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나가서 전도해 보고, 기도사역해 보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병든 자를 찾아가 기도해 보아야 합니다. 이론이 아닌 실제로 다른 사람을 위해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리 많은 능력이 부어졌다고 할지라도 활용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만 많이 안 것은 어떻게 보면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습니다. 어떨 대 설교를 하면서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대개 이 때는 내 스스로가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제를 모르면서 전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는 부분입니다. 그 때에는 애통하는 마음이 듭니다. 우리는 앵무새가 아닙니다. 들은 바를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실재를 알고 전하는 자라야 합니다. 이게 진짜입니다. 야고보서 4장 8절부터 10절입니다.


약04:0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약04:0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약0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빌립보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슬퍼하라고 하시며 애통하라고 합니다. 왜 그러하셨을까요? 그런데 항상 문맥을 보면서 해석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들이 어떤 환경 가운데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야고보서의 이 말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과정에서 슬퍼하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찾는 과정에서 애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과정에는 반드시 애통하는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왜 이 기간이 있을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찾고 싶은데 전 하나님을 너무 몰라요”라고 구하다 보면 이 기간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기간이 없으면 하나님의 실재를 모릅니다. 물론 성경을 충분히 이론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설교 역시 잘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을 통해 그 실재를 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전 이 구절의 실제 의미를 모르겠나이다.” 이렇게 애통하게 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배우는 자세의 중요성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정보를 던지는 자가 아닌 배우는 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배운 바를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게 안되면 실재를 모릅니다. 그리고 이 때쯤 되면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왜 저렇게밖에 설교를 못하실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행해보아야 무엇을 모르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3) 순종하십시오. 이 말은 이렇습니다. 제자들은 나가서 복음을 저한 다음 매우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자기들에게 순종하엿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때 귀신들도 복종하는 모습을 보며 신이 났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귀신들이 복종한 사실 때문에 기뻐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이름이 기록된 일로 인하여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권세가 그곳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부터 20절,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권세의 근원은 하나님의 자녀됨에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름이 기록되는 일이 권세의 근원입니다. 주님은 이런 연유로 제자들에게 기뻐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제자들은 귀신들을 쫓아내고 능력사역을 감당한 것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다녀오실 때 나머지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니 하나를 고치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사실은 제자들은 이런 실패나 성공을 통하여 자라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바울 역시 자라났습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기에 계속적으로 순종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모르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배운 그대로 개인의 삶이나 교회 가운데에서 실제로 행해보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해보면서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 안 것같지만 실제로 해보려고 하면서 자신의 정도를 알게 됩니다. 실제로 해보면 잘 안되니까 하나님을 붙잡으려 듭니다. 여기서부터 진짜입니다. 실천해 보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런 순종을 계속적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러하니까 말씀대로 순종해보는 가운데 비록 실수를 거듭할지 모르지만 자라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럴 때 더욱 더 주님의 사역을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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