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편지
계시록 2:18-29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각 교회마다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 다릅니다. 교회 상황에 따라 나타나신 모습이 다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분에게 위로의 하나님으로 병가운데 있는 분에게 치유의 하나님으로 오시는 것 같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오신 예수님은 심판주로 나타나셨습니다. 눈이 불꽃 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은 심판의 주로 나타나십니다.
우선 우리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심판의 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판하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싫어하고 거부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주님 이신 동시에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책을 두 권 가지고 나왔어요. 헨리블랙가비의 하나님과 신선한 만남이라는 책입니다. 여기에 보면 말씀을 가르치다 보면 사람들의 이런 저런 반응들이 나타나는데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것을 불편해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심판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 자비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긍정적인 결과를 소망하며 긍정적인 사고를 발휘합니다. 성경에 보면 평강이 없을 때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고 외치고 다니는 자들을 가증히 여겼습니다. 죄가 만연된 교회안에 있으면서도 우리 교회는 훌륭한 교회다. 잘못된 것이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책은 로이드 존스의 부흥이라는 책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부흥에 관해서 말하면서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시는데 그 성품중에 거룩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을 드러내신다고 합니다. 이사야의 경우에 하나님이 제일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셨고 그래서 하나님의 부흥 때 임재앞에 선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됨을 보고 가슴을 치며 개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타락할수록 하나님의 성품 중에 사랑을 강조하면서 공의와 거룩을 제해버린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상태는 바로 한 가지 주요한 동인에 기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노를 삭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계시하신 공의와 의롤 떼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책을 면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사람이 무엇을 행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 나가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용서를 구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나 교회에서 목격하는 방종은 바로 그런 태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죄책을 가진 자를 나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며 자비와 인애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여젼히 그분은 거룩하시며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즉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저는 세 가지를 보기 원합니다.
첫째, 이세벨의 영의 실체 둘째, 심판주이신 예수님, 셋째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각각에서 세 가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1.이세벨의 영의 실체.
여기보면 이세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에 실제로 이세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여인은 구약에서 아합왕때 아합왕을 조정했던 여인입니다. 그래서 참선지자를 죽이고 대규모로 거짓선지자를 양성하고 우상을 섬긴 여인입니다. 우상숭배와 음란을 확산시킨 여인입니다. 이세벨은 악의 화신 악의 대면자라고 인식되는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이세벨이란 여인이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그 가치관 태도 자세 그런 습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도 버가모 교회에 대한 편지에도 발람의 예 니골라당이 나오고 이세벨이 나오는데 이 세 부류가 실제로 달랐을지 몰라도 가치관은 똑같습니다. 니골라당을 보아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특별히 두 가지 죄로 인도했지요. 우상숭배,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통한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인도했어요. 이세벨도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인도했고요. 발람도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인도했어요. 가치관이 같습니다.
발람의 경우 선지자였습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해갈 때 발락이란 왕의 초청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할 것을 부탁받지요. 발람은 참된 선지자로 시작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었고 심지어 하나님의 천사가 막았고 나귀가 입을 열어 말할만큼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게 된 것은 결국 돈과 명예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데려다 저주하라고 하는데 주님의 음성을 듣고 축복합니다. 그러니까 서로 안좋았어요. 발람이 떠나면서 꾀를 가르쳐줍니다. 모압여인들을 풀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사제들을 풀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제사행위중에 하나가 음란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신을 움직여 가지고 풍년을 가져올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 때문에. 신전에서 일하는 사제들을 풀어놓으라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창녀들을 풀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와 음란에 빠지고 하나님이 심판이 있게 됩니다. 이 사람이 발람입니다. 발람은 참된 선지자로 시작했지만 신약성경을 보면 대표적인 거짓 선지자가 발람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참된 선지자에서 거짓 선지자로 전락한 사람입니다. 그 중심이 탐심 때문입니다.
이 가치관은 이세벨의 영이라고 말하는데 앞으로 자세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율법주의는 우리 신앙을 종교적인 몇 가지 절차나 의식으로 전락한 것이라면 이세벨의 영은 성령께 민감할 줄 모르지만 그 뒤에 음란 타협 조정이 결합되어서 또 다른 편으로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영에 대해서 앞으로 자세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중심에 탐심이 있으면서 이세벨처럼 사람들을 조정하면서 음람과 우상숭배로 인도하는 가치관 태도 자세를 가르킵니다. 특별히 두아디라 교회에 이세벨이라는 거짓 선지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두아디라 지역은 작은 지역이었습니다. 제가 어떤 주석을 보니까 작은 지역 이 편지 외에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은 알려지지 않는 지역인데, 그런데 그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가장 깁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이 두아디라 지역은 지역적으로는 작아도 그 지역은 교통이 발달한 지역입니다. 군사적인 목적으로 원래 지어진 도시인데 거기는 교통이 발달하고 산업이 발달했어요. 특히 길드 동업조합이 발달했어요. 두아디라 지역에는 직조 염색 도기 이런 길드들이 많았어요. 조합들이.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루디아가 자주장사엿다. 자주색 염색된 천을 파는 사람인데 이 루디아가 두아디라 출신이었습니다. 이 지역이 바로 상업 길드가 발달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조합들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합에 가입하려면 그 신에 대한 예배를 드렸고 예배행위 제사행위 만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만찬은 음란문화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성도들이 그 지역에서 먹고 살려면 길드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길드에 들어가려면 그들의 만찬에 참여해야 하고 예배에 참여해야 되는데 그들의 얘배는 우상숭배와 음란이 특징입니다. 만약 들어가지 않으면 상업도 할 수 없고 직장도 못얻고 살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아이들 학교를 보내야 했고 밥을 먹고 살아야했고 옷을 입고 살아야 했고 사회생활을 해야했어요. 그들이 처한 상황이 이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기보면 이세벨이라는 이름도 나오고 니골라당도 나오고 발람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이들이 타협안을 내놓은 것입니다. 어떻게 직장생활하면서 그렇게 안하고 살 수 있느냐 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것의 중심에 탐심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한편으로 은혜가 필요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결단하고 섰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내용을 보면 참 훌륭한 교회입니다. 네 사업을 안다. 영어성경은 행위라고 말합니다. 네 행위를 안다고 합니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 여기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 계명 중에 가장 큰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한 교회입니다. 여러분 사랑과 믿음과 소망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중요한 것이 믿음인데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종으로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한데 그들에게 섬김이 있었습니다. 뿐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행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사랑과 믿음과 헌심과 인내가 날마다 나아졌다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고 합니다. 이처럼 훌륭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 타협하는 무리들이 있었던 같고 타협하는 것을 가르친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이세벨의 영입니다. 탐심에 기초하여 타협과 조종을 일삼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타협과 우상숭배와 음란으로 인도합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이고 타협이 영적인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2.예수님의 심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심판에 있어서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다림줄에 의해서 심판하시고, 둘째,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분으로 셋째는 주석같은 발을 가지신 분입니다.
1)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신다.
지난 주에 살펴본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같은 가르침을 한 자들 입에서 나오는 칼을 가지고 심판하신다고 하십니다. 긴 칼은 하나님의 기준 다림줄을 가리킵니다. 말씀 장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두렵고 떨림으로 설 수밖에 없는 것이 이런 부분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부분에 대해서 아모스서를 봅시다. 당시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이 환상으로 꿈으로 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모스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암 7장 7-8절입니다.
7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8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아모스가 보니까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다림줄을 가지고 서계셨습니다. 다림줄을 건물을 지을 때 수직을 맞추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다림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드리우고 내 백성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는 벽은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도는 다림줄은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을 떠나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제시고 심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아모스시대 때도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했습니다. 모든 절기를 지켰고 십일조 철저히 드렸고 기도 열심히 했고 봉사 열심히 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완벽하게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있겠어요. 저는 지금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자기들 임의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임의대로 했다는 것이 자기 개인의 생각을 따라서 한 것 뿐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고 전통적으로 그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인식되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길에 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의 가치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세상에서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채우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다림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하십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사회생활 할 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힘들었어요. 여러분 그렇게 살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사업을 못하는데 아이들 학교를 못보내는데 먹고 살 수 없는데 승진은 둘째치고. 그래도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했으니까 이런 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불꽃 같은 눈을 가지고 빛난 주석같은 발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상하지요. 제가 헌금기도를 하려는데 이상한 생각이 침투해요. 성경에 보면 돈 물질 돈에 대한 것은 청지기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 앞에 심판받는다고 했지요.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지요. 그래서 돈은 하나님이 맡겨준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합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이고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꾼으로 키우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다 드리는 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돈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져야 하고 목적으로 하나님이 돈을 맡겨준 것이고 그 목적으로 하나님이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내껏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나머지는 내것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십일조도 제대로 하지 않는 분들이 많지요. 내가 복받아서 내것인데 누가 이것을 터치하라고 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으니 내것이라는 인식입니다. 너무나 인식자체가 예레미야 시대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더 나아서 더 많이 벌기 위해서 헌금하고 더 봉사하고 그럽니다.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어와요. 그러니까 돈 한 가지만 해도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 기도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와요.
하나님이 우리를 제실 때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제십니다.
2)불꽃 같은 눈으로 오십니다.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저도 감히 잘 안옵니다. 어떤 분이 저를 위해 기도하는데 이런 감동을 주신데요. 엄청나게 큰 눈이 저를 기켜보고 있다고. 불꽃 같은 눈 그 말씀인 것 같아요. 불꽃 같은 눈은 본문에 보면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23절입니다.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뜻은 원래 원어로는 콩팥입니다. 중심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의지 동기 이런 것을 가리키고요. 마음은 우리의 지성 사고 이해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나만 아는 완전히 숨겨진 그 모든 것을 알 뿐아니라 우리 마음의 동기와 생각까지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전4장에 보면 바울이 나를 판단하지 말라 나 자신도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 앞에 비추어볼 때 거리낌도 없지만 자랑할 것도 없다고 하면서 말합니다.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숨어진 동기와 뜻까지 드러내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세벨의 영의 중심에 탐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타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3)주석 같은 발이라고 말합니다.
주석같은 발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 중 27절입니다.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예를 들면 철장은 철로된 지팡이지요. 이것으로 옹기를 깨뜨리면 얼마나 잘 깨지겠어요.
여기도 보면 하나님이 시간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은 금방 심판하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인내하십니다. 인내는 우리로 회개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 여기 두아디라 교회의 그릇된 삶을 사는 자들에게 회개하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침상에 던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침상에 던진다는 말은 질병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이 심판의 표는 아닙니다. 그러나 질병이 심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란 가운데 빠질 것 죽임을 당할 것을 말합니다.
3.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1)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점없고 흠없는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살면서 타협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우상숭배와 음란에 적당하게 타협하고 정당화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자체를 용납하지 않은 것을 보면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점없고 흠없는 영광스러운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엡5장 26-27절입니다.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문맥입니다. 교회를 세우시는데 하나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시고 보혈로 씻으셔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교회를 세위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계19장을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신부를 세우실 것인데 신부의 모습은 하얀 세마포 옷을 입은 영광스럽고 거룩한 교회로 서는 것을 봅니다.
2)주님이 원하시는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삶입니다.
너희가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고난과 핍박을 당할지라도 왕따를 당할지라도 가난하게 될지라도 내 길을 따라 행하라. 내 기준대로 살라는 말입니다. 말씀드린대로 두아디라 지역에서 길드에 참여하지 않으면 사업을 할 수 없었고 돈을 벌 수 없는 상황인데 생활하고 자녀교육을 위해서 돈이 필요한데, 예수님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가난 어려움 핍박 고난이 잇을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점에서는 조금도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 지난 주에 살펴본 서머나 교회를 보십시오. 그들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가난하고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부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환란과 궁핍을 안다고 할만큼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부요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에게 돈은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청지기의 개념 자체가 들어본 지도 오래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이 되었고 그것을 위해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당연한 한 부분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시대에는 타협하지 않으면 굶어야 했습니다. 사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타협하지 않는다고 사업을 못하지는 않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도 타협하지 않는다고 해서 많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아디라 교회에 비하면 불이익이 적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에도 두아디라 교회가 타협했을 때 주니미 용남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 시대보다 훨씬 더 좋은 시대를 살면서 타협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데, 당연한 삶의 일부인 것처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주님의 관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너무나 돈이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로마서 12장 1절에서 말합니다. 로마서가 1-11장은 교리적인 부분이고 12장 이하는 실천부분입니다. 그런데 실천적인 부분의 가장 처음에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야 할 부분을 가장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제는 너희 몸을 주님을 위해 살라는 말입니다. 너희를 피로 값주고 사신 바되었기 때문에 이땅에 사는 목적이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죽여 제물로 드렸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네가 죽어서 태워져서 주님께 영광을 돌렸다면 이제는 산체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네가 할 일이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2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시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유행을 따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산다고 그렇게 살지 말고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살지 말고 다른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핍박과 가난을 감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주님은 부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안디바라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사아 지역의 첫 순교자 전승에 따르면 그는 도미티안때에 순교했는데 놋솥에 넣고 천천히 가열하여 죽이는 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솥에다 집어넣어서 불을때서 죽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핍박 환란 그런 적대를 받으면서도 주님이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 타협하여도 심판하는 모습으로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중심에 탐심이 있습니까? 타락했습니까? 얼마나 우리 삶 속에 거룩함이 없습니까? 얼마나 우리 삶 속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살지 않고 있습니까? 얼마나 우리는 하나님이 안기뻐하는 가운데 있습니까? 그러면서 우리 가운데 아무 일이 없다고 무감각하는데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말하기를 내가 심판을 지체하는 것은 저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시간을 주어서 회개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가운데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이 그 일이 용납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삶을 뒷받침하시고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려운 것입니다.
3.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상
주님은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 심판자는 세상에 타협해서 이세벨의 영을 받아 그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게 해당됩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거짓 선지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믿음을 지켜 하나님의 말씀과 기준 가운데 살아가는 그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에게 말씀하기를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지금 하는대로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그러면서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메시지는 선명합니다. 너희가 세상에 살아갈 때 나로 인하여 환란과 불이익과 핍박과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의 자녀로 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시며 그런 삶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권세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권세가 연결되어 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보내시고 아들의 삶을 산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열방을 다스릴 권세를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철장 권세를 가지신 심판권세자로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동시에 끝까지 믿음으로 행한 자들에게는 열방을 다스릴 하나님의 권세 예수님의 권세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탐심으로 가득찬 우리 삶, 욕심이 너무나 우리 마음에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함도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태도가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내려지고 타협하여 적당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는 두려운 말씀입니다. 이날 아침에 이 편지를 통해서 우리 모습이 비추어졌을 때 말씀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더 늦기 전에요. 회개하고 말씀앞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승리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