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서머나 교회를 향한 편지
계시록 2:8-11절입니다.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오늘은 서머나 교회에 보내진 편지를 통해서 참 믿음의 길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의 차이
서머나 교회에게 보내진 편지에 보면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이 다를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9절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매우 작은 교회였습니다. 작고 가난했습니다. 일곱교회를 교회사 가운데 나타난 일곱교회의 모습이라고 해석하는 신학자들은 에베소교회에서 사도들이 떠난 이후의 교회를 말하고 서머나 교회가 열흘동안 핍박을 받으리라는 말을 로마 열명의 황제 아래서 받을 핍박을 말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해석이 맞고 틀리고 상관없이 서머나 교회는 핍박을 받았고 어려움을 당했고 매우 작은 교회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궁핍한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교인 자신들도 가난한 작은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다 너희는 실제로 부요한 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이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서머나 교회와 다른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서머나 지역과 달리 산업이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의류가 발달했어요. 그래서 성도들의 생활수준이 높았습니다.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당연히 헌금도 많았고 교회도 부요했고 선교헌금도 많이 했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우리는 부자라 부여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실제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벌거벗었고 눈이 멀었는데 너희는 그 사실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이 철저하게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인 것에 기초해서 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제적인 부 세상적인 지위 삶의 수준 정도 등 외부적인 것을 인하여 부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런 것을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들은 전혀 믿음이 없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계19장에 보면 예수님이 오실 때 그리스도의 신부가 세마포 옷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의로운 행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말은 그들에게 의로운 행실이 전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눈이 멀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길이 아닌지 무엇이 세속적인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인지 무엇이 신앙의 길이며 무엇이 신앙의 길인지 무엇이 죄인지 가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눈이 멀어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육신적인 소경은 자신이 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적으로 눈먼 자들 중에 자기들이 못본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소경은 절대로 자기가 소경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못보느냐면 소경에서 벗어나기까지 보지 못합니다. 벗어나고 난 다음에야 깨닫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에게 영적으로 소경된 인도자여 소경된 인도자여 말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전혀 자기들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보지 못한다면 내가 보게 할텐데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너희에게 남아있도다 내가 심판하러 왔노니 보는 자들을 보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외에 주를 닮은 성품 주를 향한 열정에 있어서 철저하게 가난하고 벌거벗고 가련하고 눈멀고 부족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 다름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우리는 교회적으로 숫자가 많고 건물이 크고 예산이 많고 프로그램이 많고 목회자가 많은 공부를 했고 학식이 높으면 그 교회는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요하고 배울만큼 배웠고 삶에 큰 어려움이 없고 어느 정도 잘 나가고 그러면 우리는 잘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우리 신앙의 길은 좁은 길임을 볼 수 있다. 십자가의 길이다.
마7장 13-14절입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우리 신앙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이라는 말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선 예수믿는 것이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의 생각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길은 넓습니다. 그리로 행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그 뒤에 사단이 있습니다.
엡2장 1절입니다.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이처럼 세상은 넓은 길인데 거기에서 우리가 건짐을 받았습니다. 좁은 길로.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안에서의 넓은 길은 어떤 길인가? 거짓신앙체계를 말합니다. 마음과 육신의 원하는 대로 살아가며 중심에 탐심이 있으며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삶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삶입니다. 멸망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어도 살아가되 거기에다 종교적인 모양만 옷입은 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거짓신앙체계의 핵심은 탐심입니다 기복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한 수단입니다. 부를 위해, 명예를 위해, 자녀가 공부잘하는 것이든지. 세상에서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은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봉사하고 헌금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목적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삶 가운데서는 자기 임의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인본주의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예수님시대에도 기독교 역사에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생활하는 과반수 이상이 이 넓은 길을 갔습니다. 오늘날의 대다수의 성도들이 이 넓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넓은 길을 가고 있습니까? 좁은 길로 가라는 말이 낮설게 느껴져요. 그만큼 우리는 넓은 길로 가고 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세상 풍습을 따라 거기에는 사단이 있다고 했는데 자기 임의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노 가운데 있는 하나님 밖에 있는 삶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믿는 자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중고등부 연합수련회 때 이 부분을 설교했는데 어떤 학생이 찾아와서 말했어요. 목사님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으려고 예수믿는데 그것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것이어요. 그것 거짓신앙체계여요. 어떻게 이해해야되요 하고 물었어요. 제가 이렇게 대답했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구원받기 위해서 나올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가정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나올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치유받기 위해서 나올 수 있어요. 삶의 어려움을 해결받기 위해서 나올 수 있어요. 그러나 어떤 목적으로 하나님께 나왔다 할지라도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지는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 가운데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처음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는 것이다. 만일 그가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이런 삶에 머문다면 부끄러운 구원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경험이 없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종교적인 모양만 가지고 있는 모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넓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지는 자기 목적을 위해서 그래서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그리고 임의대로 신앙생활하는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순종하고 부담스러운 것은 적당히 넘어가는 이런 부분적인 순종을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거짓신앙체계입니다. 그것이 넓은 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본질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삶을 살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살게 됩니다.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순종하는 것에 부담이 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안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대 순종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까? 신앙생활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집니까? 짐이 되어집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거짓신앙체계에 있을지 모릅니다. 왜 그러냐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내게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내 멍에는 가볍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보면 사랑하는 자가 순종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과 순종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순종에 문제가 있다면 순종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적이 되지 않고 여전히 수단이 되어지는 삶이기 때문에 순종이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두 말에 발을 딛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한 발은 주께 한 발은 세상에. 그런데 두 말은 정반대방향으로 갑니다. 세상과 하나님은 정 반대로 갑니다. 그러니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세상은 세상대로 가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가니까. 모든 일에 부담스럽습니다. 예수님이 내게 와서 멍에를 매고 배우라는 말은 양 발을 주님께 두고 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쉽습니다.
우리 신앙은 좁은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신앙의 본질 위에 세워진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길입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길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칩니다. 아까 좁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에 생명이 넘칩니다.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배울 때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배울 때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면 쉼을 얻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 말씀을 설교 많이 하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까지만 설교하고 내 멍에를 매고 배우라는 말은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넓은 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좁은 길에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 필리핀 사역 때 목이 타는 것 같았어요. 기도해주면서 펌프로 물을 퍼 놀리는데 아래 물이 있어야 하는데 물이 없으면 모타가 타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줄기차게 전하는데 물이 없으니까 모타가 타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들의 모습만일까요.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에게 생명이 있습니까? 진정한 안식이 잇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강이 부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동행하십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아직도 여러분은 넓은 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은 좁은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지면 십자가는 부담이 아니라 특권으로 느껴집니다.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부담으로 느껴지는 것은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기쁨이며 특권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길인데 여기에는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절들을 읽어보세요.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부자가 되게 하겠다고 단 한번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선생님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겠다고 하자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합니다. 아마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면 수지 맞을까봐 따르겠다고 한 것 같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따르는 제자들에게 핍박이 있을 것을 여러분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10장입니다. 24-25절입니다.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핍박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의 삶을 봅시다. 고후 11장 23절 이하입니다.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은 이방인에게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에게 동족들에게 유대인들에게 예수믿는 자들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에게 예수믿는 성도들에게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갈라디아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핍박을 받되 가장 가까운 남편 아내 자식에게 핍박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마 10장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21절입니다.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핍박이 가정에서부터 있을 것을 말함니다.
오늘 서머나 교회가 주님을 따라가면서 핍박을 당했습니다. 오늘날은 너무나 좁은 길이 낮설게 느껴지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메시지를 왜곡시켰습니다.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고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 교회성장 방법들을 동원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희생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주를 위해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이 너무나 낮설게 느껴집니다.
3.아주 중요한 부분이 이제 나옵니다.
예수님이 처음과 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서머나 교회에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인 분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하나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 줄 아십니까? 무슨 말이냐? 예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처음이며 마지막이기도 합니다. 히 12장 2절입니다.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주라는 말은 믿음의 저자라는 말입니다.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고 완성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만물과 인류 역사의 처음이요 끝입니다. 요1장 1-3절을 보면 삼위일체이심을 말하며 예수님을 통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1장에 보면 눈에 보이는 세계 뿐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의 세계도 창조되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천지와 인류 역사의 시작이며 또한 마지막이신 분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잊으면 여러분은 다 잊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마감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고 그날에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텐데 주님의 평가만 중요하고 인류의 평가는 쓸모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평가만 남습니다. 제가 아까 주님과 관점과 사람의 관점이 다르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날에는 하나님의 관점만 남습니다. 그 하나님의 관점이 최종적이며 영원합니다. 예수님이 처음이요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전4장서도 십자가에 못박힌 그분이 교회의 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세운 자들은 조심하라고 하면서 불로 심판하실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 맞는 것만 남고 그 외에는 다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는 그야말로 큰 사역 놀라운 사역 성공적인 목회 훌륭한 교회로 칭찬을 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기준만 남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다 불타버릴 것입니다. 부끄러운 구원만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로 갑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어떤 핍박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나가는데요. 돈도 있을만큼 있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누릴만큼 누리고 사는데요.
그런데 그날에는 오메가 되시는 주님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때 인간의 관점은 쓸모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서머나 교회에 이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서머나 교회는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교회였습니다. 많은 핍박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진실로 부요한 자였습니다. 너희들은 가난하지 않아 내가 오메가야 그날에 내가 너희에게 축복을 줄 것이야 너희는다시는 두 번째 죽음을 당하지 않아. 그러니 너희는 죽기까지 끝까지 충성해. 우리가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울 때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그런데 직분대로 죽을때까지 열심히 봉사하면 충성하고 봉사하면 하나님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전혀 그런 구절이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는 충성해야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주님을 따라감에 있어서 많은 핍박을 받아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끝까지 그 믿음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그리하면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으로 왜 나타나셨을까요? 너희가 지금 환란을 받으나 그것은 가벼운 것이다. 나도 환란을 받고 죽었다. 십자가에. 그런데 내가 부활했다. 다시말하면 너희가 환란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 환란을 통해서 너희가 영광에 이를 것이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행전을 보면 우리가 핍박을 통해 환란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고후4장에 보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주의 길을 가면서 좁은 길 십자가의 길로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핍박은 잠시 가벼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고난을 통해서 영원한 영광 큰 영광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을 고정해야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후4장 16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NO CROSS NO CROWN!
오늘 저는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서 참 신앙의 믿음의 길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정반대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오메가가 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날에는 그분의 관점만 통합니다. 그래서 참다운 믿음의 길이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거기는 고통스러운 길이 아니라 생명이 넘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준에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더 나아가 포도나무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교회가 성장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믿음의 길을 가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교회가 성장해야하지만 그 이유는 잃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잃은 영혼을 구원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지 않으면 그 모든 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믿음의 길에 서서 하나님안에 거하면 그것이 축복이며 승리입니다. 이 믿음의 길을 간 서머나 교회를 예수님은 한번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칭찬만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 한분한분이 우리 포도나무 교회가 이런 믿음의 길을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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