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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강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편지1

시리즈설교/소아시아7교회

by 발의무리 2011. 2. 7.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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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강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편지1


계시록 3장 14-22절입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일곱교회 중에서 가장 타락한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타락했다고 하니까 거부감이 들지 모르지만 제가 사용하는 타락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길에서 떠난 하나님이 안기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일곱교회 중에 두 교회는 칭찬만 하셨지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그리고 네 교회는 예수님이 먼저 칭찬하시고 나중에 책망도 하십니다. 그런데 특별히 라오디게아 교회는 한 마디의 칭찬도 없이 책망만 했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그런 것 같아요. 서머나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를 좋아합니다. 우리도 칭찬을 받기를 좋아하니까. 주님이 주신 말씀이 너무 좋잖아요. 요즘 교회중에 서머나 교회라는 이름 많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 싫어합니다. 내가 토하여 내치리라 이런 말을 누가 좋아합니까? 그래서 싫어합니다. 이런 내용을 설교도 잘 안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라오디게아라는 교회 이름이 있는가 보세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좋은 말을 받기를 좋아하고 나쁜 말은 멀리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말만 받고 나쁜 말은 멀리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서머나 교회를 볼 때 왜 주님이 칭찬했는가를 보고 우리가 칭찬받기 위해서 어떤 개인이나 교회가 될 것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으로 개인의 삶이나 교회를 조정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나오는 메시지를 싫어할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는다 원인이 무엇인가? 그 교회의 상태가 무엇이었는가를 보고 주님이 왜 안기뻐하셨는지를 발견하여 우리가 우리의 삶이나 교회에서 주님이 안기뻐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에도 그런 자세와 태도로 들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날의 교회와 너무 비슷합니다. 한 시간에 다 살펴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먼저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 그 다음에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왜 이런 상태에 있었는가 하는 원인 또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개인이나 교회의 모습으로 전환할 수 있는 처방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상태를 살펴보겠습니다.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보겠습니다. 첫째, 철저하게 눈이 먼 교회였습니다. 둘째, 어떠한 하나님의 생명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셋째, 라오디게아 교회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가 완전히 걷힌 교회였습니다.


1.라오디게아 교회는 철저하게 눈이 먼 교회였습니다.

본몬에 보면 17절입니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눈이 멀었다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뿐아니라 내용을 보면 얼마나 철저하게 눈이 멀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교회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어떤 하나님의 생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눈이 멀었습니다.

여기서도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교회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관점만 통합니다. 인간의 관점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들이 눈이 먼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자기들이 눈이 멀었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세요.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 신앙생활 잘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들 뿐아니라 그 당시 온 종교계가 바리새인들이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회로 이루어진 공회에서 그 당시 정치적인 사건 외에 모든 것을 관장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지도자들 중에 소수였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자타가 공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래새인들에 대해 말하기를 반복적으로 소경이라고 했습니다. 소경된 인도자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멀면 눈이 멀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이 될 수 있고 그러면 실제로 하나님을 떠났고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보세요. 돌이키지 않으면 내가 토하여 내치라라고 하셨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볼 것은 눈이 멀었을 때 나타나는 증표들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영적으로 눈이 멀게 되면 우리에게 증표들이 나타납니다. 그때 우리는 곧바로 우리가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가서 주님 제가 눈이 멀었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시고 고쳐주세요 하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바디매오처럼.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는 상황에서도 눈이 먼 사실을 알았고 눈이 뜨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이 눈이 뜨게 해줄 때까지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요9장에 보면 날 때부터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증표로 뜨게 했습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빛으로 오신 것을 보이기 위해 날 때부터 눈 먼 자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종교지도자들이 대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그 심판이 무엇이냐면 보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려는 것이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소경이라는 것입니까? 하고 묻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너희가 소경되었더라면 죄가 없었을 것인데 너희가 본다고 하니 죄가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왜? 보는 것이 필수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보아야 그 길로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의중을 보아야 주님 계신 곳에 같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을 보아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눈을 뜨게 하려고 오셨는데 눈이 뜨려면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애통함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오히려 더 눈이 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싸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싸인이 있다면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증표가 무엇인가?

1)자만입니다.

높아진 생각입니다. 우리 속에 자만이 있으면 그것은 곧 우리가 보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 설교를 세상에서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분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잘 따라간다고 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제일 먼저 저에게 해당되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보지 못하는 것의 가장 먼저 싸인은 자만 높아진 생각입니다.

부흥이라는 책에 보면, 죽은 정통주의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교리는 정통인데 실제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창조의 하나님은커녕 능력의 하나님을 경험해보지도 못합니다. 보통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습니다. 실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온갖 종류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나 그것이 안되면 낙심합니다. 다시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그분의 신앙은 하나님에 관한 이론적인 신앙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제이시고 그 하나님이 전능하신 창조주이신데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이것을 두고 죽은 정통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죽은 정통주의는 이단 못지 않게 위험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죽은 정통주의는 전적으로 옳은데 전적으로 쓸모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 철저하게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어 있었거든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로는 하고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생명이 고갈되어 있어요.

그러면서 로이드존스 목사는 죽은 정통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 자만이라고 합니다. 높아진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높아질 때 모든 안좋은 것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모든 죄의 출발입니다. 자만하기 시작하면 눈이 가려지고 죄에 넘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실제는 걷히기 시작합니다.

이 자만 높아진 생각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현재 포도나무 교회를 다루고 계시는데 중요한 한 가지를 언급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도 높아질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장막을 통해서 하나님이 많은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신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포도나무 교회와 새물결선교회 가운데 놀라운 은혜를 붓고 계십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께 이 일로 감사와 찬양을 돌리기 원하십니다. 이렇게 감사하고 찬사를 돌리면 하나님이 더 강하게 임재하시고 더 큰 은혜를 부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잘 들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초점은 은혜에 있으면 안되고 하나님께 있어야 합니다. 초점이 은혜에 있기 시작하면 마음이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교수님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주셨는데 지금 그 말씀들이 실감이 나는 것 있지요. 그들 뿐아니라 우리들 중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지 알겠어요. 실제로 일어나고 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은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약해서라고 합니다. 그들은 작은 나라로 강대국 틈에 끼어서 보잘 것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을 택하신 이유는 그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원하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나라에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타락하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특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우월감을 갖기 시작했어요. 다른 나라를 이방인으로 취급하여 개처럼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구별된 사람들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타락했고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들 중에 많은 은혜를 주셨고 주고 계십니다. 당연히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초점이 은혜에 머물면 마음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낫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그런 일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높아진 마음입니다. 마음이 높아졌다는 것은 눈이 가려졌다는 것이고 볼 것을 못본다는 것입니다. 안일함 높아진 생각은 내가 못본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성경적인 지식이 많아도 아무리 체험이 많아도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에 안일함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한 증거입니다.


2)우리가 보지 못하면 나타나는 증거는 자기 자신을 못봅니다.

바리새인들 보세요. 예수님이 그토록 반복해서 강조해서 소경이라고 하는데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세요.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고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정작 뭐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보지 못합니다. 자기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무섭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서머나 교회 메시지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서머나 교회라고 짓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 싫어합니다. 이런 구절을 본다는 자체가 싫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리새인 하면 위선자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인식이 박혀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실은 바리새인들이 살아 돌아오면 혀를 찰 것입니다. 이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하냐고, 습관적으로 헌금하는 것, 예배드리는 자세, 이것을 보았다면 바리새인들이 문에 지켜서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당신들 지금 예배드리는 것이냐고. 우리의 예배가 너무나 습관적입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리새인 하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거든요. 그런데 그 성경구절에서 하나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삶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환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의 문제가 바로 내 문제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눈이 가려지면 자기를 보지 못하니까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이 문제라는 것은 잘 아는데 내가 문제라는 것은 전혀 모릅니다. 우리가 그들과 똑같은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더 심한데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인들의 잘못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자기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의 문제는 알면서 자기들에게 똑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처럼 눈이 가려지면 특징이 자기를 못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면 두 가지가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보게 하시기 시작하면 두 가지가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을 봅니다. 예를 들면 죽은 정통주의는 이런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사랑하셨잖아요. 자기 사랑을 확증했잖아요. 그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당연히 믿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해요. 이론은 있는데 실제가 없어요. 죽은 정통주의입니다. 이단 못지 않게 위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있느냐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사랑이 이론적으로 알았던 그 사랑이 비추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이 비추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속에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만을 사랑하기 원하는 열망이 솟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에 주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이 솟기 시작합니다.

둘째 우리 자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속에 어떤 선함도 없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다림줄 기준이 비추어지면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길이 비추어지면 진정으로 우리는 겸손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단 하나의 기준이라도 행할 수 없는 능력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나는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인간임을 보게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는 순간도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긍휼을 배푸소서 하면서 엎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보통 때는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비추어주시면 우리가 그동안 행동해왔던 것 이런 자세가 얼마나 교만했었는가 외식적이고 편견 차별대우가 가득했던가를 보여지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눈을 여시면 하나님이 보이고 우리 자신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이 가려지면 절대로 자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은 꽤 쓸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만 고치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어떤 선함도 없는 자임을 보지 못합니다.


3)눈이 먼 증표는 갈급함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이 가려지면 우리 속에 갈급함이 없습니다. 자만 높아진 생각 안일함이 갈급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을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보면 하나님이 우리 눈을 여시면 우리는 반드시 그 갈급함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모세가 사무엘이 그랬습니다. 구약이건 신약이건 기독교 역사이건 믿음의 선배들이 영적인 눈이 열려있을 때는 그들에게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 갈급함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증표입니다. 우리가 지금 눈이 멀었거나 멀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바디매오 보십시오. 그는 자신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갈급함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이 먼 사실을 모르면 갈급하지 않습니다.


4)눈이 멀면 나타나는 특징이 적당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그들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일로 미워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저희에게 너희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고 말씀하셨겠어요. 아니 차게 된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떠난다는 말인데,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교회를 우리를 구원하시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인데 하나님이 교회가 차지기를 원하셨겠어요. 말도 안되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너희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겠아요. 왜냐하면 미지근한 신앙은 찬 것보다 더 못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차면 자신이 예수믿지 않고 구원을 받지 못한 것아라도 압니다. 차라리 차면 자기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도 압니다. 차라리 차면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을 알아요. 차라리 차면 자기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을 알고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문제가 있고 하나님을 떠나있고 하나님의 어떤 생명도 없고 심지어는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 있으면서도 미지근하면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미지근한 것이 이처럼 위험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차지도 더웁지도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차라리 차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눈이 먼 전형적인 특징이 갈급함이 없고 보편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다시말합니다. 이런 증표들이 하나만 여러분에게 나타난다면 여러분은 눈이 멀어있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 하나만 나타나도.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요 우리들의 모습인데 하나 정도가 아닙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죽은 정통주의의 특징이 안일함 자만이라고 말하면서 거기에 나타난 특징중 하나가 사람들이 보편적인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탐사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친다고 그렇게 말하면 때린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레미야 시대 호세아 시대에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의 말로 그들을 쳤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의 말로 내가 저들을 죽였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기준이 밝혀져서 우리 삶이 해부당하고 우리 자세와 태도와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하며 회개하면서 우리 삶의 태도와 목적과 중심이 돌이켜져서 하나님의 길로 돌이켜져야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정통주의는 그것을 들추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내부의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덮어두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메시지를 듣기를 원합니다. 평화의 메시지 축복의 메시지를 듣기를 원합니다. 고무시켜 주는 메시지를 듣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너무나 보편적인 메시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중직자들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고요. 목회자인 내 삶 속에도 그래요. 세상사랑 돈에 대한 집착, 탐심이 너무나 가득해요. 우상숭배 사술과 음란은 성도들의 가정 심지어는 교회 공기에 가득찬 것처럼 가득해요. 철저하게 눈이 멀었어요. 하나님의 생명은 철저하게 고갈되어 있는데 거기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부 예배 시간에 한 아이가 기도해달라고 왔어요. 그런데 그림을 보여주어요. 강이 흘러가야 하는데 모래가 흘러가더라고요. 예배 가운데 설교 가운데 하나님의 생수가 흘러야 하는데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고 양식이 없어 기갈이 아니라 생수가 흘러가야 하는데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되고 강이 되어야 하는데 그곳에 사막의 모래가 흘러가고 있어요.

보편적인 메시지를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신앙은 삶에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 삶에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편하고. 또 어려울 때 기도하면 나름대로 도와주시고. 이처럼 우리 삶에 약간의 유익을 주는 것으로 우리 마음을 약간 고무시켜 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모든 것이 되게 하라고 하면 일언지하에 거절할 것입니다.

죽은 정통주의의 하나는 열심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종교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고 적당한 모양으로 신앙생활하고 적당히 유익을 얻으면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삶의 목적과 목표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자기의 부족한 것을 조금 채워주는 유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지 못하는 결과입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는 눈 멀었습니다. 철저하게 눈이 멀었습니다. 칭찬받을 만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자기들은 스스로 눈이 멀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앗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자기들은 부자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생각에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저들 가운데 하나님의 어떤 생명도 없었는데 그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생명이 고갈된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것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사업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지난 달 보다 두 배로 하나님께서 매상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것은 그들 가운데 넘쳤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지역은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성도들이 부자였습니다. 지난 달보다 매상이 두배나 되었다는 간증들이 그들에게는 넘쳤습니다. 뿐만아니라 성도들이 부자니 교회도 당연히 부자였을 것입니다.
교회 건물의 싸이즈도 컸을 것이고 교회도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꾸몄을 것입니다. 물질이 넘쳐서 선교헌금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개척교회도 도왔을 것이고 선교사님들도 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라 우리는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 신안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눈이 멀어서 무엇이 신앙생활인지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신앙인지도 조차도 몰랐습니다. 신앙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도 몰랐습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눈이 멀었습니다.

눈이 멀면 오늘 살펴본 네 가지 징조들이 나타납니다. 자만 높아진 생각 자기 상태를 보지 못합니다. 갈급함이 없습니다 적당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날 아침에 여러분 이중에 한 가지라고 해당된다면 여러분이 눈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예수님이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이같이 응하였도다. 저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고 저들의 마음은 굳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징조가 나타남으로 여러분의 눈이 멀어있으면 들을 귀라도 가지고 계십시오. 이날 아침에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음성이라도 들으십시오. 그래서 성경은 이 말씀을 마치고 난 다음에 귀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눈이 멀어있는데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도 없다면 여러분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과 무엇이 다릅니까? 말씀드린대로 이 징표 중에 단 하나라도 여러분의 삶에 있는 것이 보인다면 눈 먼 사실을 깨닫고 경각심을 가지고 주님을 찾을 때입니다. 그냥 놔두면 안됩니다. 더 가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귀도 들리지 않고 마음에 굳어져서 습관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거기까지 가면 심각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 징표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기를 바라고 라오디게아 교회를 통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도나무교회가 주님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길로 돌이켜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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