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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편지3

시리즈설교/소아시아7교회

by 발의무리 2011. 2. 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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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강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편지3


계시록 3장 14-22절입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가 두주간에 걸쳐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왜 이렇게 말씀하신지 우리 삶에 철저하게 비추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철저하게 눈 먼 교회였고 어떤 하나님의 생명도 없었고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교회의 모습이 너무나 비슷합니다.

오늘은 왜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에는 해결책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면 왜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런 상태에 있었을까요? 즉 철저하게 눈먼 교회였고 하나님의 어떤 생명도 없었고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가 걷혔는가? 그 원인은 한 마디로 말하면 교회가 하나님을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해결책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여기보면 예수님이 교회 밖에 계십니다. 우리는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내 이름으로 두 세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고 하셨으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엿으니까 주님이 이곳에 계실 것이라고 자동적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실제로 함께하는지 안하시는지 그 사실도 모른채 성경에 나오는 교리적인 고백을 통해서 당연히 우리 중에 주님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당연히 주님이 계셨어야지요. 왜냐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보면 교회에 보낸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교회안에 임재로 함께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 밖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임재가 생명인데 예수님이 함께하지 않자 그 교회안에 어떤 생명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들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이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관점에서는 그들이 가련하고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는데 그 사실도 몰랐습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들을 떠났고 그래서 하나님의 어떤 생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1.영적인 법칙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도 우리를 떠나십니다.

서론에서 잠깐 말씀드린 것을 요약해보지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이 떠나계셨습니다. 문 밖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생명이신데 하나님이 떠나계시니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떠나계셨는가? 그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영적인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신구약성경을 통하여 이것이 아주 강조되는 영적인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자와 함께하시고 하나님을 떠나는 자를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은 찾는 자와 함께하시고 멸시하는 자를 멸시하십니다.

역대하 15장 2절입니다.
2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여호와를 함께하는 것과 여호와를 찾는 것이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항상 모든 성경에서 중요하듯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의미가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12절입니다.
12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13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14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15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여호와께서 만난 바 되시니까 사방에 평안을 주셨습니다.

말3장 7절입니다.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돌아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만난 바 된다는 말입니다.

삼상 2장 30절입니다.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엘리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편에 속해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입니다.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여기보면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흐르는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만난 바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면 하나님도 존귀하게 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도 우리를 떠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멸시하신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조건적이라는 말이냐?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 아니냐? 그래서 신율법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게 않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내주시면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신 것도 대가로 건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들을 사랑하사 모세를 보내서 건져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건지시고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는데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떠나시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행동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가까이하십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하면 하나님도 멸시하고 떠나면 하나님도 떠나십니다.


2.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면 당연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연히 주일날 골프약속도 취소하고 교회에 나왔고 당연히 하나님과 함께하기 때문에 소득의 십일조도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과 함께하기 때문에 틈나는대로 기도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일이라 시간이 제약이 되어서 구약에서 읽은 성경을 일일이 살펴볼 수 없습니다만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까 말라기서를 보면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고 했는데 제사장들마저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고 하고 있습니다. 왜요? 그들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디로 돌아오라는 말인가 이해를 못한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의미로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우리의 존 존재로 사랑하는 삶에서 떠나는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 1절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호세아 시대에는 신앙의 본질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입니다.
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절대로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6절입니다.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입니다. 여기보면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린다고 합니다. 지식은 1절과 대조해보면 세상적인 지식 성경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린다는 말을 같이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떠난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 그러면 하나님도 떠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것이 개인이든지 나라든지 상관없습니다.

아까 엘리 제사장도 보십시오. 너와 네 집이 내 앞에서 영원히 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영히 이전에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그렇지 아니하니. 말을 바꾸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은 보증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초청입니다. 보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의 경우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너와 네 집이 영영히 섬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 약속이 거두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경우도 교회의 경우에서도 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호세아 약속은 이 약속은 나라에게 준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약속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너희가 내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를 보면 저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으므로 하나님도 저들을 버려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을 취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두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취소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이처럼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저들을 버리실 것이고 약속이 비켜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최소한 그들에게는.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율법에서 떠난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호세아 시대 사람들은 성경공부도 안했고 율법을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판이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성경공부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호세아 시대와 이사야 시대는 같은 시대입니다. 그 시대에 얼마나 많은 종교적인 의식이 있었는지 몰라요.

사1:10-15절입니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율법을 버렸다는 말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처럼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자기들처럼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하고 기도 많이 하고 헌신을 하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버렷다니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톱으로 켜 죽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이 가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못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린다 멸시한다는 말이 자신들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많이 기도하고 예배하고 헌금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마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라면 이사야 시대나 호세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훨씬 더 잘했습니다. 우리는 주일날 대예배 한번 드리는 것도 힘겨워하는데요.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것은 신앙생활도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살아오면 우리에게 그것도 신앙생활 하는 것이라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눈이 멀었으면 이사야나 호세아 시대를 보면서 저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렸으니까 저들이 하나님을 떠났으니까 저들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생각하면서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여러 가지 의식으로 넘쳤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저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존귀게 여긴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는 것을 말합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엘리제사장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 속에 들어 있어요. 그런데 엘리제사장은 하루에 두 아들을 잃었지요. 그런데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뒤로 넘어져 고개가 부러져 죽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리에 넣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비교해봅시다. 교회 불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과 자기 자식 둘을 한꺼번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 중에서 무엇이 더 충격적일까요? 그러면 엘리 제사장이 좀 이해가 됩니까? 물론 오늘날 교회 불난 것하고 당시 언약궤를 빼앗긴 것은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이렇게 보면 엘리 제사장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제사장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리에 둡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이 몇 가지 의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전 존재로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라오디게아 교회가 예배도 안드렸다고 생각합니까? 성경공부도 안했을까요. 아닙니다. 많이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하실에서 성도들도 몇 명 없는 교회가 나는 부자가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 지역이 부자였기 때문에 교회도 부자였고 물질이 넘쳤기 때문에 많은 사역과 구제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추측입니다만 그들이 자시들을 이해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며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을 알고 전 존재로 그분을 사랑하는 그 일이 마음에서부터 있는 일인데 그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포도나무 교회에 하나님이 참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도 개인 개인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든지 거두어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도 거두어졌습니다. 물론 남은 자를 통해서 유지되었지만.

렘 7장 5절을 보아도
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이 우리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중심에서 목적되고 목표된 것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임을 보여줍니다.

저는 여러분 한분 한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포도나무 교회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열망이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삶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떤 세상적인 것이 있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숫자가 적어도 부요한 사람이 없어도 우리가 우리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신앙의 본질이 실제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는 말을 들으면 당연히 주님을 알기를 구하지요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본질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것 같아요. 이 시점에서 인격체이신 주님을 아는 것이 내 마음 속에 간절한 열망인가 하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내 삶 속에서 간절한 열망인가 하는 것입니다. 살펴보세요. 여러분의 삶에서 주님을 알기를 열망하는 것이 가장 주된 것입니까? 주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인데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전 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격체이신 주님이 나의 모든 것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을 아는 것이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내 속에 있는 열망이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일성수할 수 있습니다. 헌금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보다 훨씬 잘했습니다. 더 잘했어요. 일주일에 한번 교회 나와서 예배 겨우 드리는 우리에 비하면. 그런데도 하나님이 강력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요 여기서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본질로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됩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너무나 비슷합니다. 그 이유는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3.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생명이 고갈이 있습니다.

렘2장 13절입니다.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저희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고갈됩니다. 하나님이 저들이 나를 버렸다는 말은 저들이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않고 더 이상 헌금을 드리지 않고 성경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아서 버렸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에게는 많은 예배가 있었습니다. 전국을 쫓아다니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못들었어요. 하나님이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또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따르는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종교생활 형식적인 예배도 심지어 성경공부도 터진 웅덩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 위한 수단인데 그것이 목적이 되면 그렇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많은 예배가 있었을 것이고 많은 헌금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떠나있고 문 밖에 계십니다. 그마나 하나님의 은혜루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찾아오셨다고 말하면서 올바로 돌이키라고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영적인 고갈이 있습니다. 왜 고갈이 있는가?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도 우리를 떠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떠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떠난 이후에 우리안에 있는 종교적인 것들은 터진 웅덩이에 불과합니다. 교회든지 예배든지 무엇이든지. 터진 웅덩이에 불과합니다. 절대로 물을 저축지 못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헨리불랙가비 목사님도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만. 주님이 생명이시라는 것입니다. 신30:20절입니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그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든지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는데 잘못 살면 생명을 거두어서 다시 지옥자식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예수님 그분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 속에 사실 때만 주님이 우리 삶에서 다스리시며 운행하시는 삶을 말합니다. 이런 삶은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머물 때만 일어납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을 알고 전 존재로 주님을 사랑하는 삶 가운데 머물러 있을 때 이때에만 주님이 우리 삶 속에서 실제로 임재하고 통치하며 운행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에게 있는 모든 생명이 우리 삶에 가득합니다. 임재, 보호, 기쁨 감격 세상과 죄를 이기는 능력, 거룩함, 열정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모양은 있을지라도 생명은 거두어집니다. ‘독수리 같이’라는 경배와 찬양이 그대로 보여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그들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난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떠납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모양과 헌신과 행위가 가득해도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하나님도 떠나서 어떤 생명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고갈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인 분별력이 사라졌습니다. 영적인 분별력도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포도나무교회가 다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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