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편지2
계시록 3장 14-22절입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세 부분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첫째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 둘째는 그 이유 셋째는 그 해결책을 살펴볼 것입니다.
첫 번째 부분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세 가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1)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은 철저하게 눈먼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가려진 교회였다. 2)하나님의 어떤 생명도 걷혀있는 교회였다. 3)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어떤 임재도 없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은 그중에서 첫 번째 부분만 살펴보았습니다. 철저하게 눈 먼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눈이 멀면 영적으로 눈이 멀면 자기가 눈이 먼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눈 먼 징표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증표들 중에 일부가 자만 높아진 생각 자기들 상태를 보지 못함 갈급함이 없음 적당한 신앙생활 등입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돌이켜야 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 중에서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어떤 생명도 있지 않았다는 부분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하게 고갈된 교회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대로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듣기를 원하지 않아요. 너희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 않아서 내가 토하여 내치겠다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메시지만 듣기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칭찬만 있고 책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우리가 좋아하는 메시지만 선별적으로 취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왜 하나님이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하셨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하셨는가 하는 바탕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칭찬하신 이유를 살펴서 우리 삶에 비추어서 우리는 칭찬할 만한 자리에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서 왜 예수님이 책망하셨는지 그 이유를 보고 그 말씀으로 우리 삶을 비추어서 전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올바른 신앙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내 자신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아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두 번째 상황은 어떤 생명도 없는 교회였습니다.
17절입니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그들 스스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기에는 그들은 곤고하고 가난하고 눈멀었고 벌거벗은 교회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얼마나 생명에서 고갈된 교회였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하나님의 생명도 그 가운데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와 상관이 없어 우리 삶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시거든.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는데 라오디게아 교회에 어떤 간증도 없었다는 말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잘 들으세요.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이런 간증이 많았습니다. 나 예수믿고 난 다음에 수입이 늘었어. 금년 수입이 작년보다 두배로 늘었어. 이런 간증이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뿐만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을 위한 어떤 사역도 없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는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성도들이 부요했어요. 그러니 교회도 부요했어요. 그래서 큰 건물을 지었고 여러 개척교회를 도왔을 것이고 선교사님들을 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 가운데 수입이 두배로 뛴 성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그들의 고백을 보아도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들에게 어떤 사역도 없고 어떤 프로그램도 없고 이런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데 나는 부자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 속에 프로그램이 많고 돈을 많이 벌었고 사업이 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한 일들이 많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간증이 없는 교회가 아니라 차고 넘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어떤 생명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개척교회하면서 성도들이 한두명 밖에 없고 월세가 밀리고 원금 다까먹고 이런 교회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난 번에 살펴본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하나님의 생명도 없이 걷혀있는 교회인데도 그들은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철저히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소중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조금 있다 살펴보면 알겠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에 철저하게 하나님이 생명이 걷혀있고 눈이 멀었습니다. 오늘날 나름대로 교회가 부요하고 개척교회를 돕고 많은 선교헌금을 보내고 성도들이 지난달보다 이번달 수입이 많아진 간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생명이 걷혀 있고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부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 보화되는 것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 주님만이 우리에게 능력이고 지혜임을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런 것들이 걷혀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이라는 책을 인용하는데, 로이드존스는 이 책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시험하는 시금석은 그 사람이 얼마나 바쁘고 일의 활동을 많이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운 시금석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쁘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임재를 진실로 느끼도록 노력할 때 그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책에서 한 청교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교도가 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매마른 길이었고 가지고온 식사로 빵과 물을 꺼내서 식사를 하려는데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거기서 그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잠시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가 50년동안 책을 통해서 연구하고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노라고.
우리 신앙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때 세상을 이길 거룩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소중합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는 부강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어떤 생명도 전혀 없었습니다.
좀더 예를 들까요? 사도바울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입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주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우선 여기보면 주를 위해 받는 고난 그것이 생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삶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빌3장에서 인격체이신 주님을 아는 것이 삶의 목표였습니다. 기꺼이 그래서 주님과 함께 고난에도 동참하기를 열망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돈을 잘 벌었다고 하는 사람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주와 함께 기꺼이 기쁨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6절입니다.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여러분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이런 생명이 철저하게 고갈되어 있었습니다.
또 다른 예입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입니다.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기쁨 영광 주님을 아는 지식 주님을 전존재로 사랑하기에 기꺼이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상대방의 필요를 위해서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랑의 교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온 참된 의미에서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나누는 예배, 그래서 하나님이 영적인 태를 열어서 날마다 잃은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성령의 역사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생명이 철저하게 고갈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날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너무나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 성장하는 교회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 감동적인 메시지가 들려오는 교회도많습니다. 우리 가운데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도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선교비를 보내는 교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십자가의 능력으로 세상과 죄를 이기는 삶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우리 목적되셔어 우리 온 삶을 나누어 심지어는 재산을 나누어 구제하고 상대방의 필요를 채는 사랑의 교제는 너무나 고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날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태가 철저하게 막혀있습니다. 몰려오는 사람들은 많을지 몰라도 잃은 영혼이 주께 돌아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어 있고 태가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명이 고갈되면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생명이 고갈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실제가 우리 가운데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리적으로는 정통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다 알아요. 이론적으로는 다 믿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실제를 삶 속에서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 어떤 하나님의 실제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고 오늘날의 교회가 그럽니다. 하나님의 실제가 걷혀 생명이 고갈된 신앙의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믿습니다의 신앙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을 보면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리스도인을 시험하는 시금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거나 아무 체험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지성적인 승낙이나 이지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이론적인 믿음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전체가 하나님을 체험하는 여러 경우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믿을 뿐아니라 그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안다는 말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을 견고히 붙잡고 나가며 믿음으로 행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잘 보세요. 우리 신앙생활은 믿음을 붙잡고 나가며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을 보면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한다고 했잖습니까? 그러면 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믿음을 견고히 붙잡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만이 아닙니다고 한 말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따옴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 신앙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되면 한 가지 특징이 믿습니다의 신앙입니다.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성장시킬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줄 믿습니다. 즉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어떤 경험도 없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지 안하시는지 오늘날의 성도들을 말해요.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이론들을 그대로 고백할 따름입니다. 이대로 행하실 줄 믿습니다라고. 이것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믿음을 보세요. 홍해 앞에서 하나님이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행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상황을 볼 때 하나님을 전 존재로 신뢰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전 존재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구체적으로 만남과 동행하는 삶이 없으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타락하면 그저 믿습니다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중심으로는 믿지 않습니다. 이론적인 지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 교제도 없고 확신도 없습니다.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 고백하고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세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징은 어떤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철저하게 걷혀진 고갈된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1)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십니다. 우주보다 더 크십니다. 한국에도 미국에도 계십니다. 지금 현재 동시에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십니다. 그런데 이것과 하나님이 임재로 어느 곳에 계신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임재로 어느 곳에 거하신다는 말은 친히 거하시고 운행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성전삼고 거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자세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원하셨던 것은 임재로 거하시며 그들 가운데서 운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신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심은 너희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은 성경말씀을 잘 연구해서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그들이 성경말씀을 잘 연구해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히 잘 연구해야 할 것이지만 그 말의 의미는 광야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생명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실 물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치라는 그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살았습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에게 생명이 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을 지시하시고 지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먹을 주시고 마실 것을 주시고 적들로부터 지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막을 진 가운데 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열두 지파의 진을 치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시기를 원하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에 영광으로 임재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지성소를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떠나면 하나님의 심판이 옵니다.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후6장에 보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말합니다.
16절입니다.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듯이 오늘날 우리에게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이 있습니다.
2)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것이 있습니다.
출34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모세 앞에 임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리어 경배하며 9 가로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
여러분 모세는 우리가 지금 설교를 듣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날 아침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임하셔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아까 청교도가 길을 걷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 이것입니다.
로이드존스목사님도 그 부분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흥 때 우리 신앙이 올바르게 될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체험이 아닙니다. 이사야를 보세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들어가서 하늘에 갈라지고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것을 이사야가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이사야가 인식하는 것입니다. 114쪽입니다. “여러분은 부흥의 역사에 대해서 읽어보면 그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교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임재를 인식했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여러 표징들을 알았다고 하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인식으로 깨달음으로 압도당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의 의식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을 듣게 될 것입니다.”
모세를 보세요.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자 그 영광의 임재 앞에 압도되어져서 남작 주님 앞에 엎드려 자기와 백성들의 죄를 보면 하나님의 소중하며 아름다움을 보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세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세요. 이 백성은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 가운데 오세요라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고꾸라지는 일도 있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애통하는 일도 있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기뻐하는 일도 있습니다.
3)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임재가 가장 소중합니다. 출33장에 보면 모세를 보세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너와 네 백성들에게 주겠다 그러니 너는 그 백성들을 데리고 올라가라.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천사들을 너희 앞서 보내서 싸우게 하심으로 너희로 그땅을 차지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습니다. 애굽을 떠난 뒤로 부추나 마늘이나 먹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샤워한번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어떤 땅입니까? 포도 한 송이를 장정 두 명이 매고 갈 만큼 기름진 땅입니다. 축복 말할 필요가 없지요. 뿐만아니라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땅을 차지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역의 확장 모세에게 사역의 그 엄청난 확장 엄청난 부의 축복 안정된 삶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함께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는 함께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주님의 임재가 함께하지 않으려면 우리를 여기서 올려보내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세에게는 그 엄청난 사역의 확장 부와 명예 세상적인 부 하나님의 능력 모든 것도 하나님의 임재 없이는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흥이라는 책도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똑같은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총명의 진수입니다.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루어야할 입장입니다. 여기에 갑자기 각성하여 엄청난 인식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류의 축복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어떤 가치도 없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젖과 꿀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 함께있는 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가치있다는 것을 그들은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흥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 문 밖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문밖에 계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할 뿐아니라 임재가 걷힌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을 뿐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마음에 어떤 애통함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세상적인 부와 명예로 족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럽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과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보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세상에서의 부와 명예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안정된 삶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타락하고 눈멀고 가난한 교회인지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그래요. 오늘날 미국교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걷힌다고 해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90% 이상의 일들과 사역들이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진행될 것이라고 했어요. 맞는 말입니다. 한국교회에도 정확하게 맞는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어요. 하나님의 임재는 실제적입니다. 인식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여러분 모두가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바꾸어말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에게 실제적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에게 실제적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할 때와 임재가 걷힐 때를 분별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다면 여러분이 세상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 세상에서 아무리 안정된 삶을 즐기는 것보다 소중하게 여기십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기를 위해 주님 앞에서 애통해하며 애타하며 배고파하여 갈급해하십니까?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에게 실제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근본적으로 신앙에 문제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제가 포도나무 교회에 속한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포도나무교회에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각자의 삶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 가운데 아무리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더라도 때로는 강력하게 나타나도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 개인에게 실제적이지 않으면 여러분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에게 실제적이냐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과 관련해서 남은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주 설교와 나란히 같이 들어보면 좋을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철저하게 눈이 먼 교회였습니다. 증표 하나하나를 보면 우리와 너무나 같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 교회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그렇습니다.
이런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네가 미지근하여 차지도 더웁지도 않는데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 입에서 토하여 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이 너희가 미지근할 바에야 차라리 차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차기를 원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나 얼마나 미지근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았으면 예수님이 그렇게 까지 말씀하셨겠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상태라면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얼마나 심각하게 주님 앞에서 애통해하며 주님 도와달라고 주님 앞에 나가야하겠습니까? 이론적인 지식의 공허한 고백에서 벗어나서 임재 앞에 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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