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편지4
계시록 3장 14-22절입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지난 세 시간에 걸쳐서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한 상황과 오늘날의 교회가 얼마나 비슷한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왜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런 상태에 처해졌는가 하는 원인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메시지를 가지고 설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저부터도 성도들도 이런 꾸중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런 말씀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책망하신다는 사실을. 19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신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를 보아도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신다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책망이 없으면 사생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해서도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사랑 때문에 책망하심에도 불구하고 이 책망은 매우 엄위하십니다.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께서 책망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돌이키고 회복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만 우리가 들을 귀를 갖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에게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성경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귀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세 가지 처방을 내리십니다.
18절입니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불로 연단한 금을 주님으로부터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2.흰 곳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3.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1.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여기서 말하는 불로 연단한 금은 참된 믿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참된 믿음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두 가지 종류의 부가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해하는 부가 있었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너희는 가난하다고 하시면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시는 부가 있습니다. 두 종류의 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불로 연단한 금이 참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로 베드로전서 1장 7절을 봅니다. 거기에서 두 종류의 부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여기보면 믿음의 시련을 금을 제련하는 과정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금을 제련하는 과정을 쉽게 설명하면 바위덩어리에 금맥이 있으면 그것을 깨다가 용광로에 넣으면 찌꺼지는 타서 위로 떠오르고 금은 가라않습니다. 그래서 순도 99.9%의 순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믿음의 시련은 이 과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은 참된 믿음은 제련된 순금보다 더 소중하다고 합니다. 참믿음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님 오실 때 칭찬과 존귀를 얻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보면 두 종류의 부가 나옵니다. 하나는 없어지는 부 세상적인 돈과 부입니다. 또 하나의 부는 참된 부인데 참된 믿음입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소아시아지역에 있던 교회들은 없어지는 부에 대해서는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많은 핍박과 혼란을 당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부에 있어서는 부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에 있어서는 부요했습니다.
그래서 1장 8절을 보면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반대였습니다. 세상의 부는 많았습니다. 그 지역은 산업이 발달한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부인 참된 믿음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가난했습니다.
이처럼 두 종류의 부가 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 자신에게도 물었는데 탄식의 기도가 나왔어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세상의 부와 참된 믿음의 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 정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정답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중심에 세상의 부와 참된 믿음 중에서 어느 것이 거 소중합니까? 무엇을 위해 더 수고하고 노력하고 사모하고 있습니까? 만일 세상이 부가 더 소중하다면 저와 여러분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조금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너무나 비슷합니다.
얼마나 다윗의 장막에서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를 말씀하시면서 오늘날의 교회가 정확하게 그렇다고 말하면서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오늘날이 정확하게 그런 모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도의 삶에서 참된 믿음보다 돈이 더 소중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 종류의 부가 있는데 참된 믿음이 진정한 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그들은 세상의 부는 많았지만 참된 부인 참된 믿음은 철저하게 고갈된 상태라고 하시면서 그 해결책으로 주님으로부터 불로 연단된 금을 사서 부요케 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참된 믿음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불로 연단된 금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서 부가 되어질 때 예수님이 우리 삶에서 보화가 되어질 때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집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서 부 보화 보물이 되어질 때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집니다.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느냐? 여러분 가장 소중한 부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빌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네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손해로 여길 뿐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가장 보배로운 것임을 인함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안에서 발견되려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가장 고귀한 보화는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언제 참된 믿음이 주어지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물이 되어질 때, 은을 구하듯이 금을 구하듯이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고 가까이 가기 원하고 동행하기를 원할 때입니다. 신앙의 본질에 설 때 가능합니다. 그때 참된 믿음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는가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신구약에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15장 2절을 보면
2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말라기 3장 7절입니다.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야고보서 4장 8절입니다.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사무엘상 2장 30절입니다.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이처럼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길 때 하나님도 우리를 존중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같이 날씨 좋은 날 밖에 놀러가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왔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기 때문에 나름대로 헌금을 드리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말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기보십시오. 삼상 2장을 보면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엘리제사장에게 그 집이 하나님 앞에서 영영히 제사장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니 이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심판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시면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일점일획 어기지 않는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주신 약속은 보증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할 때 그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동행할 때 그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존중히 여길 때 그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할 때 그 약속은 비켜갑니다. 오늘 엘리에게서 바로 그 모습을 봅니다. 약속은 초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여기 하나님은 엘리를 멸시하는 자에 넣고 있는데 엘리는 사실은 자신의 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보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면 엘리제사장에게는 자기 두 아들이 한 날에 죽는 것보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기는 것이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엘리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엘리를 존중히 여기는 자리가 아닌 멸시하는 자리에 넣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존중이 여긴다는 말은 우리 마음에 이르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여러분에게는 부와 참된 믿음 중에서 뭐가 더 소중하냐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세상의 돈과 주가 참된 믿음보다 더 소중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리오디게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떠나셨습니다. 교회안에 안계시고 문 밖에 서 계셨습니다. 떠나셨는네도 은혜로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존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존중히 여기지 않았다니까 예배도 안드리고 헌금도 안드리고 봉사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주어지는가? 예수님이 우리 삶에서 보화와 보물이 되어질 때 그때 하나님을 경외함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그때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하나님나라를 비유하시면서 값진 보화를 산 사람과 값진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고 비유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살 길은 저와 여러분이 살 길은 우리 포도나무 교회가 살 길은 또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고 전도방법이 아니고 예수님 그분이 우리에게 보화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삶과 가치에서 예수님이 보물이 되어지는 신앙의 본질로의 회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습니다.
2.흰 옷을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안목이 너무나 중요한 것 같습니다. 주석책을 읽다보니까 라오디게아는 직물 산업이 발달했고 안약산업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려한 옷을 입었겠어요. 좋은 옷을 입었겠어요. 그런데 주님은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어 수치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십니다. 요즘은 세상이 타락해서 사람들 앞에 벌거벗고 모델이 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쓰여지던 시대는 벌거벗은 것은 수치로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직물업이 발달하고 염색산업이 발달한 그 지역에서 좋은 옷을 입었을지 모르지만 너희가 벌거벗어 수치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참된 의의 옷을 입어 수치를 가리라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여기 흰 옷은 의의 행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을 봅시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를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6절입니다.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예수님의 신부를 예비합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때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하실 것인데 그날에 세마포는 무엇입니까?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것을 의로운 행실이라고 합니다. 어떤 성경은 의의 행실이라고 번역합니다. 여러분 성도들의 의의 행실이 우리가 그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입을 세마포입니다. 다시말합니다. 의의 행실이 우리 주님이 오실 그날에 우리가 입고 설 세마포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의의 행실이 없으면 그 날에 서지 못합니다. 의의 행실이 없이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벌거벗은 수치를 가지고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저도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우리가 믿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비유에서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열처녀의 비유를 보세요. 열처녀 다 예수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준비된 다섯명만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나머지는 밖에 캄캄한 어둠에 버려져 슬피울며 이를 간다고 합니다. 이 다섯 처녀가 지옥같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지옥이라고 한다면 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바깥 어두운 가운데는 구원을 잃는다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부끄러운 구원받는 것은 무엇인가? 벌거벗은 채로 수치를 드러내고 불 가운데서 건짐받은 것처럼 건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계시록과 고린도전서 4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릭 조이너의 책을 보면 밖에 어두운데 버려지 슬피울며 이를 가는 것이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말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 믿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날에 우리가 입을 세모포는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지 모르지만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25장에서 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비유를 마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이해하기도 하는데 칼빈이 잘 말했어요. 그것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의의 행실을 가져오게 되어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의의 행실은 무엇이니까? 마6장에 나옵니다. 사람 앞에서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영어성경은 너희의 의의 행실로 말합니다. 의의 행실에 대해서 네 가지를 말합니다. 기도 금식 구제 헌금을 말합니다. 이것을 의의 행실이라고 말하면서 이 의의 행실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동안 기도 금식 구제 헌금이 의식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의식 속에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함이 없으면 의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의식은 필요없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의식 또한 중요합니다. 문제는 의식 속에 본질이 없어서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추구하는 다시말해서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보화가 되시며 보물이 되는 신앙의 표현으로서의 우리에게 의의 행실과 의식들은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 앞에서 받은 세마포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날에 벌거벗고 설 것이고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성경에서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되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의 행실을 하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시는가? 예를 들면 기도 금식 구제 헌금을 말하면서 기도에 대해서 말하면서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이런 것입니다. 제가 중보기도하는데 중보기도 하는 자세를 깨닫게 하시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어찌하든지 상관없이 나는 이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고 그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하며 간구하고 동행하는 것으로 족한, 누가 보아서가 아니라 알아주어서가 아니라 주님이 계신 곳에 내가 있는 것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주님을 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이셨어요. 이것이 마태복음 6장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헌금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행실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 있으면 당연히 의의 행실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것은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오시는 그 날에 우리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입고 들어갈 세마포는 우리의 의의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첫 번째 부분이 예수님이 보화가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을 갖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에 하나는 제가 지금 설명하는 방법대로 여러분이 의의 행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보기도든지 기도든지 찬양이든지 헌금이든지 섬김이든지 봉사든지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알아 하나님의 행하신 곳에 같이 잇기를 원하고 다른 삶이 보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내 이름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이 내 일이기 때문에 아버지 있는 곳에 같이 있기를 원해서 내 삶으로 아버지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의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그래서 예수님은 흰 옷을 사서 수치를 가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의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려 하지 말고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의의 행실인 흰 옷을 가서 입음으로 단장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하라고 하십니다.
보라는 말입니다.
지금껏 일곱교회를 향한 편지를 보면서 영적분별력의 중요성을 보았습니다.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도 부에 있어서도 지나가는 부를 소중하게 여겼지만 진짜 참된 부는 소홀이 여겼습니다. 세상에서 옷은 잘 입었지만 진짜 하나님 앞에서 옷은 벌거벗어 수치를 드러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들에게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하라고 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라.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오늘날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안목입니다. 왜요? 우리 성도들이 너무나 영적인 눈이 가려져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언어가 너무나 세상적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무엇보다 영적인 분별력을 구해야 합니다. 분별력에 대해서는 시리즈로 살펴보았기 때문에 책을 참고하세요. 그런데 언제 영적인 분별력이 주어집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보화가 될 때 주어집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인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열망이요 열정이고 나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이 계신 곳에 같이 있기를 기뻐하는 삶 가운데 설 때 영적인 분별력과 안목이 주어집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얼마나 라오디게아 교회와 비슷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들을 귀가 없으면 보는 눈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이 아침부터 내가 너희를 불렀으나 응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언제 우리를 불렀냐고 하지요. 여러분 이번 말씀을 통해서도 여러분 아무리 센 확성기를 사다가 여러분에게 말씀해도 우리에게 들을 귀가 없으면 못 듣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못듣고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책임이 회피되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을 보였는가는 성경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오래 가지 못한 것은 압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우리 모습이 같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강력하게 설교를 통해서 말씀해도 여러분에게 들을 귀가 없으면 전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가슴을 치며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말합니다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믿음을 갖는 열망보다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갖는 열망이 더 크다면 여러분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같이 있기 원해 아버지의 일이 내 일이기에 내 삶으로 의의 행실을 통해 하나님이 계신 것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의의 행실이 없다면 라오디게아 교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셔서 우리가 우리 가운데 미지근한 신앙이 있다면 거기서 돌이켜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돌이켜지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열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