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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거짓신앙체계

시리즈설교/십자가복음의삶

by 발의무리 2016. 9. 19.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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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거짓신앙체계

호4:1



지난시간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1)신앙의 본질, 핵심, 모든 것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편 신앙의 본질을 잘 알려면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 헌금, 봉사, 기도, 금식.... 이 모든 것들이 의식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인데 그러면 이 본질과 의식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겁니다.


2)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여러분 의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의식은 본질이 아닙니다. 본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의식 속에는 본질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3)의식은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예배, 헌금, 기도, 성경공부...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이러한 의식이 없이는 본질이 자라나지 못합니다. 모든 의식은 본질을 위한 수단입니다.

4)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5)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을 지난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거짓 신앙체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본질이 없이도 얼마든지 의식이 얼마든지 가득할 수 있습니다.

호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그 당시에는 신앙의 본질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와 호세아 시대는 똑같은 시대인데  그 시대에는 수많은 의식이 있었음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사1:10-15) 읽음.


얼마나 많은 예배가 있었는가 보세요, 인식일 지키는 것은 기본이고, 한 달을 하나님 앞에서 시작하는 의미로 월삭을 드리고, 대회(부흥회, 세미나)와 모든 절기(오순절, 사순절, 부활절, 추수, 맥추감사절...) 을 다 철저히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짐승을 잡는 것은 지금의 예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헌금이기도 한데 그 제물의 종류를 보세요. 수양, 살진 짐승, 수송아지, 어린양, 숫염소...등 그 제물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보세요. “무수한 제물” 지금으로 말하면 지극한 예배와 헌금을 드린 겁니다.


또15절에 보면 “많이 기도할지라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많이 기도했습니다. 이사야 58장에 보면 금식일 에는 왕으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이 다 굵은 베옷을 입고 제 가운데 앉아 금식하였습니다.


보세요, 본질이 없는데(호세아)도 얼마나 의식이 많았는지(이사야시대) 그러니 하나님께서 왜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하시며 그 예배와 헌금을 받지 않았는다 하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인데 당시에 의식은 많았지만 본질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혼반지의 예처럼, 이것은 이해가 가는데 오늘 살펴 볼 내용은 이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신앙의 본질이 없다고 하는데 이 말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이 많은 제사와 헌금을 드렸겠느냐는 겁니다. 이해가 되세요?


2.거짓신앙체계의 실체

그래서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거짓신앙체계의 실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꼭 보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보셔야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말했지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보셔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뭘 보아야 성경을 보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느냐하면 거짓신앙체계의 실체를 보셔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죠? 그렇죠? 심지어 심판이 온다고 하셨죠? 그런데 본인들의 입장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생각을 했겠는가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런 성경구절을 읽을 때 어떻게 읽는가 하면 당시 저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으니 당연히 심판이 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냥 단편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보아야하는가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상이 처한 상황이 어떠했으며 그들의 처지가 어떠했으며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두고 저들에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는가를 보아야합니다.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이... 그래야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주일이면 예배는 칼같이 드리며 모든 헌금, 절기를 다지키며 기도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저들이 하나님을 모든 다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이해되세요?


요5:37-38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6-47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을 지금 누구에게 하고 있는 건가요? 유대인들에게 여기 나오는 유대인들은 성경문맥에서 보면 유대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유대인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을 보면 똑 같은 상황에서 유대인이란 말을 바리새인이라고 교환해서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유대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는데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리새인들이었으니까요.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기준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안식일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613가지로 줄여서 365가지는 하지 말라는 것과 나머지 248가지는 하라는 것으로 이모든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힘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만든 기준에 맞지 않자 안식일을 범한다고 핍박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인데 안식일을 성경이 말한 대로 거룩하게 지키고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종류의 일을 안했거든요. 그래서 안식일에는 음식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 그 전날 미리 만들어 놓았어요. 먹기는 했지만 설거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일하지 않기 위해 그만큼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하는 것이 직업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힘쓰는 자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려고 했냐면 안식일에 땅에 침을 뱉어서 발로 비비지 않았습니다. 비비면 땅이 폐이니까 땅을 가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토록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하루에 몇 차례 기도하고 일주일에 반드시 하루는 금식하고 반드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데 선물을 받으면 가게에 가서 그 가격을 알아보고 십일조를 따로 드렸을 정도로 철저하게 드렸습니다.


자 그러면 당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요?  물어본 자체가 그들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누구보다 믿었습니다.(보수신앙) 그래서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시죠?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을 안 믿는다. 여러분 이것을 보셔야 되요.


그럼 뭐가 문제인가요? 하나님이 의미하는 바와 그들이 이해하는 바가 달랐다는 겁니다. 이사야 시대 그 많은 헌금, 예물, 희생을 드렸으니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아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없다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들이 신앙을 이해하는 바가, 하나님을 아는 것, 사랑하는 것을 이해하는 바와 하나님이 이해하는 바가 달랐다는 겁니다. 이사야시대나 바리새인들이나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한다는 이해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가 달랐다는 겁니다.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시대를 초월해서 있습니다. 호세아 시대나, 예수님 시대나, 오늘날 시대에도 있습니다. 거짓신앙체계는 시대는 달라도 이해는 똑 같습니다.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이것을 못 보면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됩니다.


보세요, 여기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호세아시대 자기들의 조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요? 몰라요? 압니다.


마23:29-31 “29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호세아 시대 사람들은 이사를 톱으로 켜죽었습니다. 왜? 자기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사야가 와서 이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을 받았을까요? 안 받았을까요? 물론 안 받아 들였습니다. 왜? 하나님의 관점을 못 보니까 자기들의 관점으로 생각하니 자기들이 옳고 이사야가 틀린거에요. 그래서 톱으로 켜 죽인 겁니다.


그로부터 무려 600년이 지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조상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틀린 것을 알았나요? 몰랐나요? 알았어요?

위에서 읽은 마23을 보면 바리세인들은 조상들의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기의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새로 단장하고 비석을 꾸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 때에 살았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잘못한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들은 보았어요? 못 보았어요? 저들은 문제가 있는데 자기들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 자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럼 물어 볼게요.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저들이 어떻게 해서 틀린 것을 알았죠?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들은 성경을 믿었거든요. 그들은 이사야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고 또 이사야가 성경인 것을 믿었기에 성경이 저들에 대해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요,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그래서 심판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왜, 성경을 믿으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보셔야해요. 바리새인시대에 자기들에 대하여 기록한 성경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없었어요. 그래서 자기들은 자기대로 판단하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화있을찐저....하면서 너희가 그 조상의 그 자손임을 스스로 증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바리새인들은 칭찬은 못해줄 망정 너무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아니 우리가 스스로 증거 하다니요, 이해가 안 되었을 겁니다. 지금비석을 새롭게 꾸미고 있는데...


잘 보세요. 여기 바리새인들이 있어요.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왜 성경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데 자기들은 보지 못했어요.

문제는 자기 조상들과 똑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들은 못 보았어요. 자기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서 어떻게 했어요? 자기 조상들은 이사야를 죽였지만 자기들은 이아야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왔는데 죽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보이세요?


자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00년이 지나갑니다. 우리 입장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알아요? 몰라요? 당연히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우리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것을 알아요? 몰라요? 알아요. 어떻게? 성경에 나와 있으니, 그런데 우리에 대하여 기록한 성경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럼 성경이 한없이 계속 써여져야 하느냐? 아니에요.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호세아 시대에 무엇을 두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심판하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알았다면 자기들의 삶을 비춰보고 돌이켜야 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니까..


그런데 그들은 성경을 표면적으로만 알았어요. 표면적으로만 믿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성경말씀을 표면적으로 그대로 믿었기에 자기 조상들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그들의 문제가 자기들의 문제인 것을 이 만큼도 보지 못했어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문제가 뭐냐 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다 성경을 믿기 때문에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바리새인들이 잘못된 것을 알아요. 수없이 설교를 들었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무엇 때문에 문제가 있었는가를 몰라요. 그래서 우리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거짓신앙체계를 보셔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3.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리는 것이 거짓신앙체계입니다.

거짓신앙체계의 대표적인 것이 율법주의인데 율법주의를 한마디로 줄이면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버린 것입니다.

자~~ 무슨 말인가 하면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별 문제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거예요. 사랑하니까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각종헌금, 봉사, 전도, 성경공부, 기도를 한다고 말할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각종헌금, 봉사, 전도, 성경공부, 기도...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바리새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겁니다. 왜? 우리보다 훨씬 잘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이사야시대 사람들도 우리보다 훨씬 잘했어요. 여러분 이것만 보아도 우리가운데 신앙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팽배함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오늘 1000만 성도 중에 10%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개인, 가정, 교회. 사회가 이렇지 않을 겁니다. 교회가 이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바닷물에 소금, 0.2%가 있으면 썩지 않는다는데…….

바꿔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열매를 보면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안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다 사랑한다고 해요. 그런데 문제는 이해가 달라져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해가 달라져 있는지 여러분 보세요. 이것입니다.


구약시대나 예수님시대나 오늘날이나 다 거짓신앙체계가 있는데 이 거짓신앙체계는 진짜 같지만 가짜예요. 가짜니까 열매가 없어요. 조화는 진짜 같지만 죽었기에 향기도 열매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 가짜의 한 부분이 율법주의인데 율법주의는 의식이 본질을 대체해 버린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의식 잘하는 그 자체가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호세아시대 사람들이 자기들이 생각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 했겠느냐는 겁니다. 그렇게 철저히 예배, 헌금, 금식, 기도...하는데 그럼 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나고 생각했는가? 의식을 잘하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것이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하셨는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질이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질이 없으니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은 의식 자라는 그 자체가 신앙의 본질이라고 이해하는 겁니다. 이해가 다른 것이죠.


바리새인들의 예) 그 당시 그들만큼 철저히 예배, 헌금, 십일조, 기도, 금식, 구제, 성경연구 하는 사람이 없었다니까요.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나요? 간단해요. 의식 잘 하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 봉사, 성경 읽고... 그러니 사랑한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그 속에 그의 삶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런데 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나요? 의식 잘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해가 달라져 있는 것이죠.


여러분 오늘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하세요? 만약 예수님시대 바리새인이 다시 살아서 한국교회에 오면 어떤 대우를 받으리라 생각하세요? 오늘 교회에서 집사 임명할 때 어떤 사람을 임명하나요? 여러분이 이해하기에 교회 안에 누가 신앙생활 잘합니까? 혼동되시죠? 그러니 끝까지 들으셔야 해요.


무슨 말이냐. 오늘날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똑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더 하면 더 했지.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살아서 한국교회에 오면 최고의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이 안 중요하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잘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면 이사야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예수님시대 바리새인들은 누구보다 잘했어요. 하나님이 그들을 칭찬하셔야 했어요. 그들을 축복했어야 했다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그들을 책망하시고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셔야 합니다.


그럼 무슨 말이야! 의식 그 하나하나가 다 중요할지 몰라도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핵심이고 이 삶이 의식으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삶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조금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 신앙은 가짜니까, 거짓신앙체계이니까.


이것을 보면 압니다. 이사야시대 백성들이 많이 기도 할지라도 듣지 않겠다 하셨죠? 그러면서 너희 손에 피가 죄가 가득하다 하셨습니다. 보세요, 신앙의 본질에 서지 않으면 죄가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십일조 빠지지 않고 드리고, 봉사해도 신앙의 본질에 서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고 전 존재로 사랑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들어가지 않으면 절대로 죄가 다루어 지지 않습니다. 세상사랑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탐심, 돈 욕심 내려지지 않습니다. 세상 가치관 절대로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서 의식 잘해서 직분 받고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성도들 가운데 세상 사랑이 내려지지 않고 탐심, 탐욕이 내려지지 않고 시기, 질투 다루어지지 않았고  세상적 가치관 조금도 다루어 지지 않은 겁니다.


왜?  신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면서 우리는 이사야 시대 저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바리새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왜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그들과 우리의 대부분이 똑 같은데도 우리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왜 자기들에 대해서 쓰여진 성경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우리에 대해서 성경이 쓰여지지 않아도 성경이 이미 해답이 다 나와 있습니다. 호세아 시대의 해답이 바리새인들을 위해서 나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위해서 구약과 신약의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면 성경을 읽어도 전혀 우리를 보지 못합니다.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열매가 없습니다. 왜? 가짜니까. 오늘 교회가 한계에 다 달았다는 것 다 압니다. 이대로 안 된다는 것을 다 압니다. 왜 열매가 없잖아요. 우리의 삶과 교회의 삶이 왜 그런가?  하나님 사랑하지 않아서 그래요. 가짜이니까 그렇습니다.


4.율법주의가 타락하면 의식을 남용하게 됩니다.

율법주의는 의식이 본질을 대체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의식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식은 중요합니다. 문제는 의식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의식은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담는 그릇인데 그런데 신앙이 잘못 이해되면 의식을 잘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라고 왜곡되게 됩니다.

그럼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없기 때문에 세상적 가치관이나 죄는 전혀 다루어 지지 않고, 하나님과도 상관이 없고, 신앙의 열매는 없고, 하나님의 임재가 그치고 모양은 많은데 능력이 전혀 없는 그런 껍데기로 전략됩니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어떻게 되느냐?

의식을 남용하게 됩니다.

삼상2장 엘리제사장 시대는 한마디로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성경에 제사장들로부터 하나님을 몰랐더라 라고 말합니다. 엘리제사장은 과거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근데 더 이상 그게 가능하지 않았고, 영적으로, 육신적 눈이 멀었고 그 자녀들이 제사장들인데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몰랐다고 하니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들은 신앙교육도 안 받았고 신학도 안했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몰랐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삶의 죄가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제사장 직을 감당하되 자기의 뱃속을 채우기 위해서 합니다. 제사재물 중 좋은 부위는 먼저 갔다먹고 수종여인들과 음란을 행하고 그래서 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는 시대입니다. 그때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전쟁을 했는데 질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을 떠났으니까...그런데 본인들은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죠, 그 많은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을 떠낫다고 생각 하겠느냐는 거예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언약궤를 가져가면 이기리라 생각한 겁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니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니 저 언약궤를 가지고 가면 이기리라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의식을 남용한 것입니다.


결과 이겼나요? 졌나요? 언약궤는 빼앗기고, 엘리제사장 두 아들은 전쟁에서 죽고 이 소식을 들은 엘리도 죽고, 여러분 율법주의가 타락하면 의식을 남용하게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식당에 성구액자, 이것이 타라가하면 기독교 부적이 될 수 있습니다.

보세요,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우리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그분 자신이 우리의 삶의 유일한 목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실 것이고, 삶의 필요를 채울 것입니다.  사업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 성격적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 성경구절을  걸으놓으면 사업 잘되리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부적이 아니고 뭐냐는 겁니다. 아무의미가 없는 겁니다. 왜?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궤 가지고 간 것과 똑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로 나와야 합니다.

여관 - 불륜을 제공하고 돈 버는 곳입니다. 그러면서도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한다고 신앙생활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구 걸어놓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꺼야 하는 것 부적에 불과합니다. 신앙이 타락하니까..


지금 성구를 걸어놓은 것이 나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전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삶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격체 이신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목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전환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나와야 되고, 우리가 사업을 하는 것도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되고, 그 분의 인도를 따라 해야 되고, 그분이 우리의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면 주님이 운행하십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리기 위해 성경 구절을 얼마든지 붙여놓고 사람들에게 주님을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치관이 안 믿는 사람과 똑 같이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삶에 수단에 불과하면서 의식 잘하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성구액자를 붙여 놓으면 하나님이 복 주실 거라고 생각한다면 부적에 불과 합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타락한 율법주의입니다. 우리 가운데 너무너무 가득합니다.


목회자들도 의식을 남용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사람들은 종교적이기 때문에 종교심을 적당히 이용하면 별거를 다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겉으로 나타난 것으로는 모릅니다. 그 뒤에 있는 동기, 자세, 태도가 올바른 신앙인지 그릇된 신앙인지를 나눕니다. 겉으로 나타난 그 자체로는 모릅니다. 중심이 중요합니다.


성구액자 - 어떤 동기, 자세, 태도로 걸었느냐, 그 중심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매월 사업체 심방도 중심에서 그 한분 한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이 목적인 자리로 인도해야합니다. 사업을 해도 그 목적과 이유가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사업하도록 인도해야합니다. 그 가운데서 목회자가 가서 얼마든지 축복해주고, 기도하고 말씀으로 권면하고 하는 것은 소중합니다.


그런데 그 삶으로 인도하지 않고 사업을 하는 것도 자기의 목적을 위해, 자기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수단이 되는 삶을 살면서 가서 기도해주면 사업이 잘 될 거라고... 이것이 의식의 남용입니다.


그렇게 가서 기도해주면 사람은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종교적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대단히 큰 죄악입니다. 사업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심을 이용하여 자기목적을 이루고자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심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가치관, 중심의 자세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본인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러한 신앙적 가치관이 팽배합니다. 왜 이것을 강조하느냐? 이러한 신앙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빠져있으면 본인은 신앙생활을 잘한 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 바리새인들도 그랬어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이런 가짜신앙체계는 조화와 위조지폐처럼 어떠한 신앙의 열매도 없습니다. 삶에서 절대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거룩한 삶도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랑이 깨뜨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함은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하길 원하며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길 원하며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남이 우리어지길 원하면 이 거짓신앙체계가 버려지고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서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타라가한 호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오라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라고 말하잖아요.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러니 많은 사람들이 이러잖아요 저들은 성경공부도 하지 않았구나, 그러니 문제라고 해요. 아니라니까요,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을 아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나오라는 겁니다. 인격체이신 그 분을 아는 길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나오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그 시대에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저들에게 오실꺼라고, 그러면 그들이 회복될 것이고, 나라가 회복될 것이고, 개인, 가정이 살고 나라전체가 살 것이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거짓신앙체계를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보셔야 합니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누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보면 거짓신앙체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있었고, 예수님 때에도 있었고, 거짓신앙체계는 시대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 성격은 시대를 말론하고 똑 같습니다.


그 성격이 뭐냐 하면, 거짓신앙체계는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인데 의식 잘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질처럼 왜곡되게 잘못되게 거짓되게 이해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시낭체계에 빠지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본인들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인들은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 예배나 그 헌신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러나 본인들은 이해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말씀 드린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의도와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 가운데 그러한 거짓신앙체계가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성도들의 삶 속에 열매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 세상 사랑이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죄가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 안에 세상적인 죄가 그대로 살아있다는 겁니다.  왜 입니까? 간단합니다. 신앙이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기도를 헌금을 적게 해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신앙에 대한 이해부터 e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을 공부하면서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이 전환되어지고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우리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그 삶으로 회복되어짐으로 개인과 교회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가 더 회복되길 바라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이 회복되길 바라고 우리 속에 하나님의 실제가 경험되길 바라고, 하나님의 거룩함이 온 입혀지길 바라고, 하나님의 승리가 경험되길 바라고 하나님과 실제적으로 동행하는 삶이 이루어지길 원하며 우리가 결단을 가지고 신앙의 본질을 더 추구하고 주님을 향한 목마른 삶이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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