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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열매 맺는 삶

시리즈설교/성령이역사하는교회

by 발의무리 2018. 2. 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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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열매 맺는 삶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1-8)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열매 맺는 삶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열매 맺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이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 중 하나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15:16). 그리고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우리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이 부분은 우리의 사역과 관련된 부분으로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성경적인 원칙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임의로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 맺는 삶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15장입니다. 그런데 열매 맺는 삶에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점은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우리가 임의로 맺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이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스스로 혹은 임의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사실, 열매 맺는 삶은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바로 예수님이 사셨던 삶인데, 예수님은 거듭 자신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스스로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최선을 다해 그 은혜의 빚을 갚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의 동기는 매우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저 우리의 노력으로 열심히 수고해서 맺는 우리의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우리의 노력을 다해 맺는 열매는 우리의 열매에 불과하며, 그것은 우리의 의를 드러낼 뿐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하나님은 김치찌개를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평생을 그의 모든 열과 성을 다해 그리고 그의 모든 재산을 다 드려 온갖 종류의 김치찌개를 하나님께 끓여드렸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런데 그가 막상 하나님 앞에 가서 보니 하나님은 전혀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그의 인생을 헛되이 산 것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저 우리의 임의대로 우리의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경이 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엘리야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아합에게 가서 그의 우상숭배와 죄로 인하여 수년 동안 그 나라에 우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그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아합왕 앞에 나가 그렇게 전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순종입니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우리 나라의 5공 시절 전두환씨 앞에 나아가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있은 직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처음에는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어 있으라고 하셨다가 나중에는 사르밧에 있는 과부 집에 가서 숨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번에도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드디어 이제야 내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시작했다라고 생각하며 조금 전에 아합왕 앞에 나아갈 때 가졌던 그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고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의 불을 토해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했더라면, 사람들의 눈에는 그의 신앙생활이 매우 훌륭하게 보이고, 그가 놀라운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가운데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그 상급이 똑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경우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예를 들면, 이 일이 있고 난 후 하나님은 엘리야를 다시 아합에게 보내셨고, 이번에는 아합과 바알의 선지자들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사 하늘에서 불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 있어서는 그를 잡아죽이려고 3년 동안 온 나라를 샅샅히 뒤진 아합왕 앞에 다시 목숨을 걸고 나간 일이나,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린 일이나, 혹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3년 이상 동안 사르밧 과부집에 숨어있던 일이나 그 상급이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하셨고, 엘리야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에 순종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열매를 사람의 눈에 보이는 외부적인 모양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크고 많게 보이는 것을 큰 열매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위 우리 교회에 몇 명이 모이고, 예산이 얼마이고, 교회 건물이 얼마나 큰지를 내세우며, 그러한 것을 이루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저 열심히 노력해서 사람들의 눈에 가시적인 일을 성취했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우리가 스스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관련해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점을 상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점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엄청난 교만을 범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도 겸손함으로 신실하게 섬기기보다는 안일하고 나태한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부분과 우리의 부분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인지 예를 들어 쉽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엘리야 경우를 다시 한 번 보십시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엘리야가 갈멜산 위에서 제단을 쌓아 놓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아합왕과 바알의 선지자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 제단 위에 놓인 제물을 사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그곳에 있던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처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 이일로 인하여 엘리야가 취할 수 있는 부분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아합왕과 이방신의 선지자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곳에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 밖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을 부분도 바로 그 부분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나머지는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놀라운 일로 인하여 칭찬을 받으실 분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시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엘리야에게 있어서는 그 많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린 일이나 혹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3년 이상 동안 이방인의 과부집에 별다른 일도 없이 숨어있는 것이나 그 상급이 똑같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점을 조금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사도 바울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16절부터 18절 사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그런데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기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한 기름부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임의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에 대한 상급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자기에게 상급이 없으며,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는 복음을 전함에 있어, 당연히 복음이 부여하고 있는 권한인 복음으로 인하여 살 권리, 즉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을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이 일을 하며 복음을 전함으로서 그로 인한 상급을 받기 원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구요? 우리는 예레미야의 경우에도 비슷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열국 위에 선지자로 세우려고 하셨을 때, 예레미야는 매우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나이도 어리고 또 말도 잘하지 못한다며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는 예레미야에게 다른 것 다 염려하지 말고 그는 그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는 말씀만 전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1:4-10 참조). 그런데 머지 않아 예레미야는 실망하고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듣기 싫어했습니다. 그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씀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그들은 예레미야를 싫어하고 따돌리고 배척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는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참다못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속였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하면서 다시는 입을 열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20:7-9).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읽어 보면 참으로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마음먹었을 때, 하나님의 불이 그의 입이나 가슴속에서 정도가 아니라 그의 뼈속에서부터 타올라 그는 입을 열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기름부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기름부음이 바로 사도 바울 속에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처럼 그는 하나님의 강한 기름부음으로 인하여 강권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기가 취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넓은 대륙을 바라보며 그 지역에서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할 곳이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15:23). 그런데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포기하며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우리 자신들을 한 번 살펴보십시다. 이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를 참으로 정신 번쩍 들게 만들 것입니다. 이 진리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오늘날 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예만 들어볼까요? 목회자에게 있어서 교회가 부흥해서 아무리 큰 건물을 짓고, 아무리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또 자신이 아무리 감동에 넘치는 설교를 하고, 아무리 하나님의 비밀을 깊이 쪼개낸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그가 취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목회자가 취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여 순종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순종으로 인하여 그가 사람들로부터 많은 대우와 칭찬을 받았으면 그 만큼 상급은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목회자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체, 그러한 일들이 마치 자기가 잘해서 일어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리고 소위 자신이 목회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기가 가로채는 엄청난 죄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될 때,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엎드려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 순종하기를 원하기 보다, 자신은 그저 잘하고 있다는 나태와 안일함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자세들은 엄청난 교만으로서 여기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가 있습니다.

 

이것은 평신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 엄청난 헌금을 드리고, 참으로 놀라운 성경적인 지식과 영감으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그가 찬양할 때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시고,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놀라운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고 위로하고 구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 성도가 취할 것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여 순종한 부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그 순종으로 인하여 그가 칭찬과 대우를 받았으면, 그의 상급은 그만큼 더욱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성도가 그 모든 일들로 인하여 자신의 교회에서 목소리를 내세우고, 사람들에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기가 없으면 그 교회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엄청난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엄청난 나태와 안일함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말하는 열매가 무엇인자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열매

그럼 성경이 말하는 열매는 관연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며, 예수님의 제자로써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열매 맺는 삶이 필수적인데,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과연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열매가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전도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열매는 근본적으로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 여기에서 말하는 열매가 무엇인지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서 그렇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사과나무에는 무슨 열매가 열립니까? 당연히 사과가 열리지요, 그럼 배나무에는 무슨 열매가 열립니까? 당연히 배가 열립니다. 그럼 여기에서 나무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가지인 우리들이 맺어야할 열매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열매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시고 그분의 일을 행하시는 바로 그분의 열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여 순종하고, 그러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이 열매 맺는 삶은 우리의 머리인 예수님께서 지체인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의 몸으로써의 삶과 똑같은 삶이며, 또한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삶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삶과 똑같은 삶을 말합니다.

 

이 열매 맺는 삶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와 똑같은 삶인 하나님의 동역자의 삶을 가지고 좀 더 설명드리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열매 맺는 삶을 요한복음 전체에 비추어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동역자로써의 삶을 가지고 설명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동역자란 말은 다른 말로 동업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동업자는 세상의 동업자와는 다릅니다. 세상의 동업자는 자본이나 노력을 공동으로 투자하여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윤을 서로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동역자 혹은 동업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동업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투자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인도에 민감하여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투자하시고, 또 모든 것을 다 행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들과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무슨 말인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홍해를 가르신 사건을 아시지요. 누가 홍해를 갈랐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가르셨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동풍을 보내신 것도, 강한 바람으로 바닷물이 벽처럼 서게 하신 것도, 그리고 그 바닥을 말리신 것도 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으로 홍해를 가르셨지만,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라고 명령하셨고,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렇게 하기까지는 바다를 가르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 경우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로 내민 것이 바다를 가르는 일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무슨 힘이 나와서 바다를 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일은 어차피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가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동역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열매 맺는 삶도 정확하게 이러한 삶을 의미합니다. , 우리는 예수님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셔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고, 자신의 뜻을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본보기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열매 맺는 삶이 바로 이러한 삶인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이러한 삶을 먼저 사셨으며, 우리에게도 이러한 삶을 살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열매 맺는 삶이 어떠한 삶인가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삶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삶의 모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열매 맺는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절이 요한복음 5:19-20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지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일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삶에 대한 두 가지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아무 것도 임의로 행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는 것만 그대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아무 것도 임의로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뿐 아니라, 요한복음의 여러 곳에서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 대로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 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5:30).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8:28).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14:10). 이처럼 예수님은 그분의 말과 행동에 있어 어느 것 하나 임의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맺으셨던 열매도 우리가 맺어야할 열매와 똑같이 스스로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는 이 열매를 절대로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는 것만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분의 말과 행동에 있어서 순간순간 하나님께 민감하셔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그대로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 요한복음 5:19에 나오는 헬라어 시재가 현재형이라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시간적인 면에서는 현재를, 그리고 행동의 종류에 있어서는 지속적인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그때그때 순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셨으며, 그대로 순종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구절의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과 관련하여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믿고 치유를 받기 위해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날 그곳에 모여있던 사람들 중에서 38년 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한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고 해서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고 대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행동을 설명하시면서 위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 날 하나님께서 그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날이 안식이었다고 해서 많은 유대인들이 대적할 줄 알면서도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신대로 그 병자에게 일어나라고 말했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사 그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왜 다른 사람들은 고쳐주시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해답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만 순종하셨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삶은 단순히 이 구절에만 단편적으로 나와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전체에 거듭해서 강조되어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그 중 몇 가지 대표적인 구절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8:26, 28). 여기서도 예수님은 자신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만 행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다른 구절은 요한복음 10:37-38입니다. “만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여기서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을 자신도 행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동사들이 현재형인 것을 유의하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현재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은 전반적인 예수님의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사역을 이러한 방법으로 감당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행하는 관계를 다른 말로 바꿔서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는 관계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나중에 우리가 맺어야할 열매를 맺는 방법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또 다른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14:10-11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여기서도 예수님은 자신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말은 그저 자신의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이 말은 때로는 심하게 귀신들린 사람 속에서 귀신이 그 사람의 의식과는 관계없이 그 사람의 성대를 통해 자기의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의식과는 관계없이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신다는 의미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럼 이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이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도 되시지만,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임의로 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듣고 그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어 NIV성경은 이 말을 내가 너희들에게 하는 말은 단지 내 말이 아니다(The words I say to you are not just my own)"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동사들이 현재형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아무 것도 임의로 하지 않으시고, 순간 순간 하나님께 민감하셔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그래도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열매를 맺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확하게 우리가 살아야 할 열매 맺는 삶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열매의 성격에 있어서나, 그 열매를 맺는 방법에 있어서 예수님의 삶과 우리가 살아야할 삶이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매 맺는 삶의 중요성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가 무엇이고, 열매 맺는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다른 모든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그러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법을 알면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더욱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는 위에서 이 열매 맺는 삶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써의 삶이나 예수님의 지체로서의 삶과 같은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보기 위해 바울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떻게 해서 바울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대로, 바울(그 당시 사울)이 구원받게 된 계기는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압송해 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막 지방에 내리 쬐는 정오의 태양보다 더 밝은 그분의 모든 영광으로 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를 부르심으로서 마련되었습니다.(9장 참조). 그러나 막상 바울이 구원을 받고, 주님의 그 밝은 영광의 빛으로 인하여 어두워진 눈을 치유 받고, 또 성령으로 충만케 된 것은 아나니아라는 다메섹에 살던 한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신비요 사람이며, 또한 주님의 방법이요 깁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영광으로 직접 그에게 나타나시고, 또 그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 있었다면, 얼마든지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그분께서 직접 그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나아갔을 때에도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고, 그 모든 일들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단지 바울에게 나아가 조용히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라고 기도했을 따름이었습니다(9:17).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모든 일들을 자신이 하지 아니하시고, 아나니아를 그에게 보내, 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게 하셨고,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울에게 나아가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역사하사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 모든 일들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바울에게 가서 기도하지 않았다면, 아마 바울은 그 당시 치유 받지도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신비요, 또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입니까? 이것이 바로 주님의 길이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주님의 지체로써, 혹은 주님의 동역자로써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한 삶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은 뭐든지 하실 수 있다. 그래서 나 같은 것이 없이도 능력의 주님이신 그분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삶이 바로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이요, 이러한 삶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정확하게 성경이 말하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숨겨두었다가 주인이 오셔서 계산할 때 그것만 달랑 주인께 드림으로서 주인으로부터 심판을 받은 악하고 게으른 종말입니다(25장 참조). 우리는 그 악하고 게으른 종이 이러한 사람과 정확하게 똑같은 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께 자신의 열매 맺지 못한 삶을 변명하면서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25:24)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주님 당신은 강하신 능력의 주님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뿌리지 않아도 당신께서는 능히 거두실 수 있고, 내가 추수하지 않아도 능히 모으실 줄로 알았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그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방법을 올바로 알지 못했고, 따라서 그는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함으로서 그분으로 하여금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를 그분에게 드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주님으로부터 열매 맺지 못한 삶에 대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수님은 그 열매 맺지 못한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서 예수님이 주셨던 그 한 달란트를 빼앗고, 그를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사실 열매를 맺지 못한 자에 대한 심판은 요한복음 15장에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1).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6). 이 얼마나 심각한 심판입니까? 저는 이 말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여기에서 말하는 가지는 의심할 나위 없이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말은 열매맺지 못한 성도들은 지옥불에 던지우리라는 말씀입니까? 저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 지옥불에 떨어지리라는 말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밖에 버려진 가지를 불에 던져 사르는 자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인 것을 보더라도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열매를 맺지 못한 성도들이 다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가지인 성도들이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할 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적으로 고갈되게 되며, 그 결과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열매 맺는 삶을 사는 성도들을 크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15:2).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15:8).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 원하고, 또 예수님의 제자된 삶을 살기 원할진데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에게도 기쁨과 평강이 넘치고, 우리 주님의 생명과 능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열매 맺는 삶을 사는 방법

그럼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합니까? 요한복음 15장은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포도나무의 가지된 우리들, 다시 말해서 이미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예수님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자동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구절은 항상 그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구절을 이해할 때, 그 구절 속에 있는 단락, 그 장, 그 책, 더 나아가 성경 전체에서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 말은 우리가 그대로 순종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민감하여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우리들이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했고, 또 성경은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사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예수님에게 다 알려주셨다고 말하고 있는데(5:20), 과연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해 주십니까?

 

이에 대한 성경의 답은 정확하게 그렇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 보십시요. “그가(성령이)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도다”(16:14-15).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17:26). 이 두 구절을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약속입니까?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약속이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알려주실 것이며, 성령님은 예수님의 모든 것(그것이 곧 하나님의 모든 것임)을 취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정확하게 예수님이 사셨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 수 없는 삶을 살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따라서 만약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께 민감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는 예수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들이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12). 우선 예수님은 이 말씀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실 때 쓰시는 표현입니다. 그 다음, 믿는 자는 누구나 예수님이 사셨던 삶(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하는 일이 열매 맺는 삶이라는 사실은 바로 그 앞에 나오는 구절들을 보아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0-11). 끝으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16:7)라는 말씀과 대조하여 보면 이러한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오늘날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예수님이 사셨던 것과 같은 그러한 한 멸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PLO의 법칙

 

이와 같이 우리 모두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사는데 있어 핵심은 PLO의 법칙입니다. 사실 이 법칙은 열매맺는 삶을 사는데 있어서 뿐 아니라,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위해서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 핵심입니다. 그럼 PLO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PLO는 영어 단어의 첫 글자로써 P기도(Pray), L듣는 것(Listen), 그리고 O순종히는 것을(Obey)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에 순종해야 합니다.

 

P(Pray)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는 그저 우리가 임의로 열심히 노력해서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가 필수입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살펴본 젓처럼 이러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순종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가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매우 좋은 예를 예수님의 삶에서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열매 맺는 삶을 위해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구했으며, 이를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사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우선적으로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하나님을 위한 사역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우선적으로 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15-16은 말합니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전인적인 치유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신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4;23, 9:35 참조).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그 목적의 일들을 위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본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만약 우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 우리들은 드디어 이제야 기회가 왔구나하며 기도고 뭐고 다 제쳐놓고 그 일에 매달리느라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심지어 하나님을 위한 사역보다 더 앞세우셨습니다.(2장의 부분 참조)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위해서 실로 기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특히 누가복음에 보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금식기도 하셨고(4:1-2), 새벽기도 하셨으며(4:42), 그것도 특히 바쁜 날 다음 새벽에... 예수님은 소위 오늘날로 치면 기도원에 가셔서 기도하셨고(9:28-29), 또한 정기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3:21-22, 4:1, 4:14, 24:49 참조). 예수님의 기도생활과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역사가 깊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울러 강조하고 있습니다(3:21-22, 4:1-2, 4:42, 6:12, 17:19 참조). 이처럼 우리도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구해야 합니다.

 

L(Listen)

그 다음, 우리가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그리고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양으로써 우리가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4-5).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27).

 

어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그저 환경적인 변화에만 의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면 이렇게 되게 해 주시고, 만약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것을 막아 주십시오.’ 라는 식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나서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결정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그러한 방법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을 사는데 있어 매우 제한될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만약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이러한 방법에만 의존했다면 그들은 결단코 그들이 감당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복음의 길을 막는 것과 사탄이 그의 복음의 길을 막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나 여호수아는 환경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해 나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성도들은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해서 적용하면 되지, 하나님의 음성을 따로 들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날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바로 그 성경 말씀에 의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책을 한 권 남겨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똑같은 분이신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였듯이, 오늘날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성령님의 바른 인도를 구별하기 위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육법전서를 지키듯이 책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체이신 하나님 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고후 3:6). 그러므로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성령님의 조용한 음성을 듣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O(Obey)

마지막으로 우리가 열매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할 때,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모세의 경우에도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지팡이를 손에 쥐고 홍해 위로 내밀었을 때, 하나님께서 강한 바람을 보내사 홍해를 가르셨고, 아나니아의 경우에도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울에게 가서 그에게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예수님께서 바울을 치유해 주시고 그를 성령으로 충만케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항상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웁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설교하는 중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임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은 그 당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셔서 그들을 유대인들과 똑같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이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고넬료와 베드로가 각각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각각 그대로 순종함으로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방법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있어서 특히 베드로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사도행전 10:28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유대인인 그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 당시 전혀 전례가 없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그 당시 교회에서 사람들로부터 지탄과 징계를 받을 만한 일이었고, 동료 사도들로부터 따돌림과 질책을 받을 만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상을 통해서 그리고 음성을 통해서 그에게 말씀하신 성령님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을 뿐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교회 전체의 이해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 이후로 교회는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성령의 인도와 말씀의 조명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15:6-18 참조).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에 대해서도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사람들의 반대와 대적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셨을 뿐 아니라, 이러한 사람들의 핍박과 대적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을 조금도 위축시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5장에서 이세 대한 한 예를 볼 수 있는데, 우리가 살펴본 대로 거기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38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던 한 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특히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고 해서 오히려 예수님을 대적하고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주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이 사람을 고치면서 안식일을 범했다(사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전혀 범하지 않았습니다. 누워있던 침상을 가지고 가는 것을 안식일에 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는 일로 간주한 그 당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안식일관을 범했을 뿐입니다). 그런고로 이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이 능력은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그것은 바로 사탄이 그에게 준 것이다. 그는 사탄에 사로잡혀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사탄에 들려 그러한 일을 행한다고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어떤 사람들은 난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 예수님이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하지. 안식일에 말고도 6일이나 있잖아. 6일 동안 얼마든지 와서 그 한 사람 뿐 아니라,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고쳐주면 얼마나 좋아.’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반대와 대적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나온 바와 같이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5:19). 이와 같이 예수님은 어떠한 사람들의 편견과 대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이, 그리고 베드로와 같이 이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순종하여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더욱 계시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이러한 열매맺는 삶을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보는 것이 필수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야 그대로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자신을 더욱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예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모세나 다윗이나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예를 들어 누가 자신을 배반할 것인가를 예수님의 제자 중 아무에게도 알려주시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품에 기대고 있던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인 요한에게는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21에서 예수님은 나의 계명(명령)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랬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의 행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주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5:20 참조).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사 그렇게 하신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셨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이유는)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명령)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10:17-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명령)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명령)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15:9-12).

 

저는 지금까지 열매 맺는 삶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매맺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제자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을 뿐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의 생명과 축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맺는 삶을 사십시오. 만약 여태까지 이러한 삶을 살지 못하신 분이 있습니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그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였을 때에도 그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두 번째로 말씀을 해 주셔서 그로 하여금 니느웨로 가서 그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 그것도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며 부인한 베드로를 예수님은 직접 찾아가셔서 그를 다시 불러주심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베드로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태까지 성경이 말하는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셨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럼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두 번째 기회를 주셔서 열매맺는 귀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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