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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하나님을 경외함

시리즈설교/성령이역사하는교회

by 발의무리 2018. 2. 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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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을 경외함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예레미야 32:39-41)

 

주님과의 교제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성경에 나오는 우리들의 신앙요소 중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한 가지입니다. 우선 하나님을 경외함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필수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은 우리가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도 필수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되 끝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도 필수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우리가 죄를 이기는데 있어서도 필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매우 귀하고 놀라운 축복들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특히 말세지말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야할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성도들의 삶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나 성도들의 개인적인 삶에서나 가장 찾아보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많은 성도들이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 신앙의 여러부분에서 핵심적인 하나님을 경외함이 어떠한 것인가를 여러분이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함이 여러분의 삶 속에 실제로 주어지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것의 정의부터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에 앞서 우선 여기에서 경외함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두려움이란 단어라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경외함이라는 단어를 모두 fear(두려움)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다하나님을 두려워하다로 번 갈아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저도 여기에서 이 두 표현을 번 갈아서 사용할텐데, 그것들이 같은 의미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혹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에 앞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그것이 아닌 것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아니며, 또한 종교적인 두려움이 아닙니다.

 

우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자주 서로 상반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을 두려워하다 보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결과를 낳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의 삶뿐만 아니라, 신약과 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에 나오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울의 경우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의 관계에 대해 매우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울은 사람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원래 하나님의 놀라운 기름부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하나님의 성령께서 매우 강하게 그 위에 임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0:5-11 참조). 그런데 그러한 그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쏟아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그 당시 사울이 처해 있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에 보면 우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는데, 때는 사울이 왕이 된지 약 2년쯤 지났을 즈음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군대는 우리나라 해방 직후의 군대처럼 아직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탱크와 같은 병거나 마병은 하나도 없이, 일반 군사의 수만 다 합해서 겨우 3천이었고, 그나마 그들은 아직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기에 불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려고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들은 병거만 해도 삼만이었고, 마병이 육천이었으며, 오늘날 보병에 해당하는 일반군사는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6.25때 수많은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속수무책 육탄으로 막아야 했던 우리 남한의 상황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두려워 떨며, 여기저기에 숨기 시작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죠.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사울은 싸우러 나가기에 앞서, 사무엘의 명대로 그가 와서 그들을 위해 제사 지내주기를 7일 동안이나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7일 동안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되자 마지막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사무엘을 기다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사울에게서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얼마나 다급하고 조급한 상황입니까? 과연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어떠한 상황을 그 상황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사울은 기다리다 못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이제 자기가 직접 나서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막 마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했고, 그제서야 도착한 사무엘은 사울을 보고 그를 향해 하나님의 심판만을 전달하고는 곧 떠나버렸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삼상 13:13-14).

 

먼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매우 공평하지 않다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울이 처한 그러한 상황과 그만큼 기다린 그의 인내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체 그렇게 하실 수 있느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 피조물이 무엇이기에 창조주되신 하나님께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기름부음이 클수록 더 큰 책임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모세가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가서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 앞에서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가 그 명령을 어기고 과거에 해 본 경험으로 반석을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처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가나안 땅으로 들이지 않으신 것입니다. 물론 그를 지옥으로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시고 계획하셨던 것과는 달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지는 않으셨습니다(20:1-13 참조). 레위기 10장에 보면, 그 당시 제사장이던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전에서 제사를 드리되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자 하나님은 성전에서 불을 내어 그들을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난 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10:3). 이처럼 하나님의 기름부음과 은혜가 클수록 이에 대한 책임도 큽니다. 그런데 사울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너무 모르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선 여기에서 하나님은 나중에 다윗에게 주셨던 축복을 원래 사울에게 주시려고 계획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삼상 13:13에 나오는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이라는 말씀을 보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중에 다윗에게 그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며, 그를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는 축복을 주셨는데, 하나님은 원래 이 축복을 사울에게 주시려고 계획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주시려고 계획하셨던 그 축복과 은혜를 그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기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구요? 여러분은 일부에서 더러 그런 것처럼 운명론적인 예정을 믿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려고 한 일은 내가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성경이 말하는 예정이 아닙니다. 위에서 본 모세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원래 그를 부르실 때에는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그는 요단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경우를 보면 우리는 이것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육적으로 뿐 아니라.,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떠난 엘리 제사장에게 심판을 예언하시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리라 여기리라”(삼상 2:30-31). 하나님께서 전에 엘리 제사장에게 그의 자손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 영원히 섬기리라고 약속하셨으나, 그가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그 약속을 거두고 그의 가족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맹세와 하나님의 약속이 다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맹세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이루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떠한 일에 대한 보증(guarantee)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떠한 하나님의 축복으로의 초청 혹은 초대(invitation)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조건들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믿음과 순종이 거기에 포함됩니다. ,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축복을 놓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러한 사울의 불순종의 밑바닥에는 사람을 두려워함이 근본 원인으로 깔려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11절에 나오는 사무엘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처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반대되어 사람을 두려워 하다보면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께 불신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참으로 사울에게 나타난 결과를 볼 때,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핑계 대는데 우리가 처한 상황을 사울이 처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그것은 비교도 안될 만큼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말이 율법주의처럼 들린다구요? 우리는 그와는 달리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구요? 이 말은 율법주의가 아니며, 또한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더 큰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큰 순종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길을 너무 모르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이 이러한 일이 있기 바로 직전 사무엘상 12장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12:14, 20, 24). 그러므로 만약에 사울이 그러한 사무엘의 가르침을 진실로 이해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는 아무리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기름부음 받은 왕인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설령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그 적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그 적들을 물리친 것은 불순종을 통한 사울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삼상 14장 참조).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사람을 두려워하였고, 사람들이 흩어지자 이를 막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던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과 처지를 핑계 삼아서 말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울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적군 토벌에서 돌아와 보니 그 동안 다른 적군이 재산을 다 노략질해 가버린 것을 발견하고도, 그리고 그 결과로 아끼던 자기의 부하들이 자기를 돌로 치려하는 긴급한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적들을 쫓아가야 할 것인지 혹은 가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셨더라면 그는 아마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훨씬 더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자기 목숨에 직접적인 위험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심각할 정도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는 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우리의 삶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생활이나 교회의 생활에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더라도 우리는 이 심각성을 확실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 한 교회에 초대를 받아서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내려왔더니 그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그날 그분을 아는 몇 분의 목사님들이 집회에 참석하고 다녀간 이야기를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설교 말씀이 맞기는 다 맞는데, 오늘날 그렇게 설교하면 성도들이 한사람도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그 담임 목사님은 저에게 그분들은 자신들이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위로하셨습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인본주의적인 사상입니까?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분들은 실로 그분들의 그 말이 내포하는 사고와 가치가 얼마나 무섭고 끔직한 것인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 얼마나 더욱더 무서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맞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설교하면 성도들이 좋아하지 않고 따라서 그들이 교회에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정직하게설교해서는 안 된다면 과연 우리는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은 실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고갈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공공연히 그렇게 이야기합니다만, 오늘날의 교회는 소위 일주일동안 사회에서 시달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래서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그저 듣기 좋고, 소위 은혜로운 말씀만을 골라 성경적으로 설교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설교가 주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들이 성경적일 수는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가지고 성경적으로 풀어서한 설교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이 성경적일지는 몰라도 결단코 주님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9: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만 설 수 있는데, 십자가는 우리가 세상과 죄에 대해서는 죽는 것이요 하나님에 대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6장 참조).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요, 우리 속에서 주님이 사는 것이라고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2:20). 여러분 기억하십시요. 제가 여기에 간단히 언급한 삶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수준 높은 삶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살아야할 가장 기초적이고도 기본적인 삶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오늘날 수천 혹은 수만의 교인들이 모인다는 교회들이 많은데, 거기에서 6개월 동안이라도 지속적으로 이러한 참다운 신앙의 길을 설교한다면, 6개월 후에 과연 몇 퍼센트의 교인들이 여전히 그 교회에 참석할까요? 그 대답은 여러분 각자에게 맡기겠습니다. 이만큼 오늘날 우리들은 인간 중심적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에는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붙잡기 위해 그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앞다투어 주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도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본주의로 가득하다보니 오늘날 우리 가운데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전혀 없으며, 우리는 사울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앞에서 그분의 거룩함을 땅에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에는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이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더 이상 아니며, 이에 대한 결과는 매우 심각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또한 마귀가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연상할 때 마치 심판의 검을 들고 당장 에라도 우리를 내리치려고 하시는 냉엄하고도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은 오히려 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8:15).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14:18).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하여 불안과 공포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불안과 공포는 사탄이 가져다주는 것으로서, 우리는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러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종교적인 두려움이 아닙니다.

오늘날 매우 많은 성도들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인 두려움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적인 두려움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럼 종교적인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종교심에서 나온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일날 놀러가고 싶은데 예배를 안 드리고 놀러갔다가는 도중에 교통사고라도 당할까봐 두려워서 1부 예배에 일찍 참석함으로서 소위 성수주일을 하고 놀러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러한 두려움이 바로 종교적인 두려움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십시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는데 만약 십일조를 안드렸다가는 하나님께서 사업에 어려움을 주실까봐 두려워서 십일조를 드렸다고 생각해봅시다. 이것이 종교적인 두려움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주일날 교회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열매의 한 부분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이러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결단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위해서나 참다운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 우리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두려움은 율법주의적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데 방해가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의 두 가지 측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이것을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이것은 두 가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마치 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한 가지 것의 두 가지 측면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압도되어 그분 앞에서 감격하고 감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서성경 중에서 KJV(킹 제임스 성경)라는 성경이 있는데, 그 성경은 시편 33:8에 나오는 하나님을 경외하다(두려워하다)’라는 말을 “stand in awe of Him"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마치 금강산을 처음 구경간 사람이 그 산의 절묘한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놀라 입을 벌리고 서서 감격하고 감탄하듯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거룩하심과 위대하심과 크신 능력에 놀라 감격하고 감탄하는 것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모세를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친히 모세와 함께 거기 서실 뿐 아니라, 친히 자신의 이름을 반포하시며 모세 앞으로 지나가십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가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 대까지 보응하리라”(34:5-7). 이 얼마나 놀랍고 장엄한 하나님의 모습입니까? 그러나 출애굽기 33:22-23과 대조하여 보면 이렇게 우리의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그 아름답고 찬란한 모습도 사실 그분의 뒷모습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하나님의 얼마나 놀랍고 장엄한 하나님의 모습입니까? 이러한 하나님이 놀라운 영광을 본 모세는 즉시 그 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34:8).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지요. 만약에 여러분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모세와 똑같이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과 사랑에 압도되어 그분을 인하여 감격하고 감탄하는 것, 그리고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혹은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러나 오늘날 과연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세와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8은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이 구절은 우리가 잘 아는 구절로써,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오늘날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는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우리 얼굴에서 수건이 벗겨졌다는 사실입니다(고후 3:14, 16 참조). 그래서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오늘날에는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보지 못하고, 마치 그 당시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본다는 사실입니다(고전 13:12 참조). 셋째, 우리가 비록 오늘날에는 주의 영광을 희미하게 밖에 볼 수 없으나,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그분의 형상으로 변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도 다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도 그리고 그 결과로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도 다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볼 때 여기서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본다는 말은 성령의 조명으로 그 놀라운 영광의 주님을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로 그분의 그 놀라운 모습 앞에서 감격하고 기뻐하며 감탄하게 될 것이며, 실로 그분 앞에 엎드려 그분께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의 또 다른 측면은 영광의 하나님이 가장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기를 열성적으로 사모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리의 삶에서 버리기를 열정적으로 원하는 자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토록 놀라운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알게 될 때,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분이 되며, 우리는 마치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무엇보다 그분과 함께 있기를 열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을 기쁘게 하는 일들을 행하기를 열정적으로 사모하게 되고, 반대로 그분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열정적으로 버리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시편 128:1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하나님의 길()에 행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길에 행한다는 말이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요.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러 시내산에 올라간 그는 무엇보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33:12-13). , 모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길을 자기에게 알려주셔서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해주시고, 자기가 그 길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계속적으로 은총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서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진노하사 모세에게 그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대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요, 또 천사들을 앞서 보내어 그들을 위해 싸우게 하실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그들과 함께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보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광야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앞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면서도 그는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데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34:9)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는 하나님의 곁에 있기를 무엇보다 간절히 열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입니다. 오늘날 많은 우리들과는 얼마나 다른 태도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의 이러한 기도를 들으시자마자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지 않으시겠다던 진노를 푸시고 그들과 같이 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33:14).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결과로 또한 위에 말씀드린대로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보십시요.

 

하나님을 경외함과 예배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 있어야 할 매우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를 가지고 드리는 예배라야 그 예배가 진정한 예배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28-29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는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여기 우리말에 섬기다라고 번역된 말은 예배하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영어성경들이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건함과 두려움이라는 말은 영어 NIV성경에 “with reverence and awe"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정확하게 위에서 살펴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예배요, 또한 우리는 그러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모세를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그 장엄하고 위대하고 거룩한 모습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즉각적으로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바로 이것은 참다운 예배입니다. 물론 우리는 대부분 모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으로 그 놀라운 우리 주님의 사랑과, 능력과, 위대하심과, 신실하심을 깨닫고 실로 그 주님 앞에 엎드려 그분을 높이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경배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는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요, 성전의 뜰만 밟고 지나가는 예배입니다. 말라기 1:6은 말합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데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명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그 당시 제사장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습니까? 정확하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정해진 제사를 꼬박꼬박 잘 지냈습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의무를 잘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있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어리석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나님께 반문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어리석음입니까? 특히 제사장들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는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요,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 두 가지 있다면, ‘아버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두렵게도 우리의 삶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소위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고 종교적인 모양을 갖추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심히 두려운 한 가지 사실은 말라기 1:6의 말씀이 정확하게 오늘날의 많은 성도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소화하기 힘든 말씀이긴 하겠습니다만 우리가 또한 주시할 수도 없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예배는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아까 읽은 히브리서 12:29에서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인 것이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라는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명기 4:24에 보면 우리는 이 말이 하나님의 질투와 연관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의 질투란 하나님의 것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아울러 하나님께 합당치 못한 것들을 사르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부정적인 한 예로 성소에서 다른 불을 드리다가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의해 죽임을 당한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레위기 10장 참조). 그러므로 히브리서 12:29에 나오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예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해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들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얼마나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죄를 이기는 힘을 주십니다. 출애굽기 20:20은 말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시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를 보아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은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혹에 빠지거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경은 죄와 싸우되 피를 흘리기까지 대항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2:4).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또 늘 경험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힘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단단한 각오와 결심을 해 봅니다만 며칠이 못되어 이내 곧 똑같은 죄를 짓고 후회하며 탄식하며 낙심하며 좌절하며 회개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부여해 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함이 우리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귀하고 또한 그분의 임재보다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그러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갈라놓으려는 어떠한 죄의 유혹에 대해서도 나지막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확신하고 “NO"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며, 또한 무엇보다 가장 귀한 것으로써 우리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는 많은 구절 중에서 매우 중요한 두 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첫째는 시편 25:12입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친밀함이라는 말은 깊은 우정과도 같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말합니다. 이 얼마나 사모할 만하고 흠모할만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친밀함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경배하며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33:9-11).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한 가지를 부수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십니다. 우리는 이점도 모세의 삶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대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모세를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너희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34:10).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다른 중요한 구절은 잠언 2:3-5입니다. “지식을 불로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화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잠언에 나오는 지혜는 단순한 삶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되시는 예수님을 나타냅니다(8:12-36 참조)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구하되 감추인 보화를 찾는 것같이 그분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집안에 여러분의 조상이 숨겨놓은 엄청난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밤잠을 자지 않고 그 보화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 온 집안을 다 뒤집고 온 땅을 다 파서라도 기필코 그것을 찾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의 모든 생각은 오로지 그 일로만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보화를 찾기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러한 자세와 열심히 예수님을 찾고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실 것이며, 그것은 곧이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하나하나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진실로 보호하십니다.

시편 34:7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그리고 시편 31:19-20은 말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보호를 원할진데, 마음의 순전한 동기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온전한 보호가 자동적으로 보장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진정한 보호가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순전한 마음의 동기를 가져야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는, 즉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곁에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마음에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어떠한 일을 추진해 나가는데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거나 혹은 하나님의 온전한 보호가 없을 때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길을 잘못 알고 있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진실로 보호합니다.

그가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순전한 마음과 하나님의 길에 행하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점을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를 살펴보면서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시편 86:11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로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에 향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NIV 영어성경을 보면 우리가 이점을 더욱 확실하게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 구절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두 가지를 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NIV 성경에는 이 구절이 “Teach me your way, O Load, and I will walk in your truth; give me an undivided heart, that I may fear your name."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주의 길과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 구절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기억해야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위해 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위해 구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undivided heart)입니다. 이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데 있어 실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나누어진 마음이 바로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37). 이 말씀은 물론 그 당시에도 널리 알려진 신명기 6:5을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6:4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되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이유를 들면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으로써, 그분만이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며,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의 근원이십니다. 따라서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찬양과 예배와 사랑을 받으시기에 홀로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든 찬양과 예배와 사랑을 모셔놓고 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 혹은 세상의 어떠한 것을 향하여 나누어질 때, 이것이 곧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탐심 곧 돈에 대한 욕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또한 하나님의 길을 자기에게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따라서 하나님의 진정한 보호와 도움 가운데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에 행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길에 행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리말 성경에는 이 길을 한자로 길도자를 써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이 말이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나님의 교훈을 가르쳐 주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다윗이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나와 있는데 사실 이 구절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에 행한다는 말은 우리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움직이심과 행위 혹은 소위, 즉 하나님의 을 발견하고 그 일에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려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 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그래서 우리말 개혁성경은 시편 103:7에 나오는 하나님의 길을 하나님의 행위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진정한 보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두 가지를 그토록 간절하게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이것이 바로 모세가 간절히 구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진실로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시편 34:9-10은 말합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산에서 왕자는 사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가뭄이 들고 환경이 열악하여 다른 동물들은 굶어 죽어간다 할지라도 젊은 사자는 먹을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자가 궁핍하여 주릴 정도면 그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 경우를 말하겠습니까? 그리고 다른 동물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북한의 예를 들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북한에는 많은 주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김정일은 온갖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김정일이 궁핍하여 주릴 정도가 되면 그 상황은 어떠한 상황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부족함이 없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치유의 광선을 발하십니다.

말라기 4:1-2은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이 예언은 말세지말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의의 태양이신 예수님께서 임하실 것이요,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함께 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더 많은 놀라운 축복들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147:11).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3:16-18).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놀라운 축복들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한 가지 큰 위로의 말씀을 전함으로 이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없이 이 모습 이대로 있지만, 우리에게는 놀라운 소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세지말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놀라웁게 부어주시리라고 약속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때, 설레는 가슴을 진정할 길이 없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레미야 32:39-41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우선 이 구절은 말세지말에 관한 예언입니다. 문맥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죠. 그리고 여기에서 이제 하나님은 몇 가지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다음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한마음(나누어지지 않은 마음)과 한 도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제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워 그들을 절대로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해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웁고 가슴 벅찬 약속입니까? 그 의미 하나하나를 더욱 깊이 묵상해 볼 때, 이 약속을 생각하며 느끼는 기대와 감격은 그 만큼 더 클 것입니다. 숨은 보화를 찾는 것처럼 그분 자신만을 간절히 찾을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와 같이 예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우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을 심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분의 마음과 정신을 다해 우리를 이 땅에 삼으실 것입니다. -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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