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우리는 앞장에서 복음의 모조품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장에서는 우리의 신앙의 중심인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에 대해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우리 모든 신앙의 기초요 또한 핵심입니다. 사실,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야말로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격만이라도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 중 하나는 우리 가운데 복음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종교개혁자들이 기치로 내걸었던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를 외쳐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앞장에서 약간 살펴본 것처럼, 매우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그 말들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진정한 복음이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전도를 위한 프로그램, 구역확장을 위한 프로그램, 성경공부를 위한 프로그램, 봉사를 위한 프로그램, 선교를 위한 프로그램 등등. 그리고 우리는 그 프로그램들을 유지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정신없이 매 달립니다.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세워 집행하고, 성도들을 독려하여 동원합니다. 기도회를 갖기도 합니다. 목회자들은 그 되어져 가는 일들을 일일이 점검하느라 매우 바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때로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어떠한 성과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 늘어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복음의 그 놀라운 능력과 역사가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역사하는 곳에 당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는 참다운 변화가 우리들의 삶 속에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여전히 시기와 질투 가운데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들을 마치고 나면 일시적인 성취감은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주의 기쁨과 평강은 우리에게 없으며, 우리 영혼은 오히려 더욱 곤고하고 공허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상태입니다. 즉, 우리는 참다운 복음의 부재 가운데 살아갑니다.
복음의 성격
그럼,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이 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성경을 몇 구절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로마서 1장 16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고린도전서 1장 17절과 23-2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복음에 관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복음은 인격체(a person)라는 사실입니다. 위의 세 구절을 대조해 보십시요. 복음을 다른 말로 표현해서 십자가의 도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어떠한 사실들의 나열이 아니라, 인격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 자신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분에 관한 몇 가지 진리들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되신 그분과의 긴밀한 교제인 것입니다.
이점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주님을 아는 것의 차이를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우유병과 우유에 비유하여 생각해보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 혹은 다른 말로 해서 신학을 우유병에, 그리고 주님을 우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유병은 우유를 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유병도 중요합니다. 만약에 우유병이 우유에 비해 형편없이 작거나 혹은 구멍이 나 있으면, 우유는 다 땅에 쏟아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에 관한 바른 지식, 바른 신학, 바른 교리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의 신학이 찌그러지고 구멍난 우유병과 같이 왜곡되고 잘못되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우유병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유병은 우유가 아니며, 또한 우유병은 우유를 담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나 신학(우유병)은 주님(우유)이 아니며, 주님을 알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주님에 관한 지식과 주님을 아는 것은 다르며, 우리 신앙의 핵심은 바로 주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차이를 분명히 알아 우리 신앙의 초점을 핵심인 주님을 아는 일에 맞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고 큰 우유병이라도 그 병이 비어있을 수 있듯이, 우리는 훌륭한 신학적인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전혀 없이 하나님과 동떨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주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쌓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가장 근본적인 핵심인 주님을 아는 일에 소홀히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주님에 관한 지식들이 실로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범람하고 있고, 바른 교리와 신학적인 지식을 위한 수많은 성경공부들이 교회 안팎에서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우리는 주님을 아는 지식이 고갈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대로 교회를 수년 동안 다니고, 여러 가지 직분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또 성경공부의 이 과정 저 과정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전에 비해 조금도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와 있지 않으며, 그 삶에는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도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입술에는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같은 신학적인 용어들이 차고 넘치지만, 우리는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기쁨과 같은 하나님의 실체 혹은 실재(reality)들이 거의 경험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결과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통해 주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거의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인 것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수백 번 외쳐봐야 그것은 태산은커녕 겨우 작은 동산과 같은 조그마한 문제 앞에 선 우리들에게 어떠한 힘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옛날에 짓궂은 어른들은 신랑신부의 첫날밤을 엿보기 위해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창호지로 된 문에 구멍을 뚫고 그 사이로 방안을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우리가 손가락만한 틈 사이로 보는 것처럼, 아니 바늘구멍만한 틈 사이로 보는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았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달았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통해 가슴으로 전능하신 그분을 혹은 그분의 전능하심을 깨달았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에 우리가 그분의 전능하심의 억만분의 일만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 엄청난 태산 앞에서도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면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나 신실하심이나 사랑이나 자비하심 등등. 우리는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그렇게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나마 이렇게 알고(깨닫고) 그분을 신뢰했기 때문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며, 아래서도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만큼 변화됩니다.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핵심입니다.
첫째,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하셨고(호 4:6),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3). 우리의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진리가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앞장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지식적으로 긍정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우리 주님을 발견하고,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해 전적으로 그분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 그분만을 신뢰하게 될 때,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도 핵심입니다.
둘째,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우리의 성화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성화나 참된 영성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영성이 무엇인지, 참된 성화가 무엇인지 그 의미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영적으로 분별력이 없는 시대라고나 할까요. 우선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영성은 우리가 하거나 혹은 하지 않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참된 영성은 성수주일하고 십일조하고 전도하고 기도하는 것이라거나 혹은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욕 안 하고 거짓말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우리 신앙의 열매들이며, 또한 성도들의 삶 속에 있어야 할 중요한 열매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가 참된 영성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참된 영성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이런 것들을 잘 하거나 혹은 안 하는 사람들을 성숙한 성도들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율법주의 신앙이요, 우리는 필연적으로 잘못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영적인 교만에 빠지게 되어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게 평가하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겉으로는 매우 겸손한 모양을 갖출 수 있으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에, 이러한 것들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책감과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정확하게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영성관이며, 따라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그 엄청난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십시다. 여기 한 성도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큰 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반드시 성수주일을 지킵니다. 그리고 매달 천만 원이 넘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드립니다. 우리가 백만 원 벌 때 십만 원 십일조 드리기는 쉽지만, 일억을 벌 때 천만 원 십일조 드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매달 꼬박꼬박 천만 원씩 십일조를 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주일날이면 중고등부 교사로부터 시작해서 성가대까지 하루 종일 교회에서 봉사합니다. 그는 또한 매우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당신이 속한 교회에 이러한 성도가 있다면 다른 성도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아마도 교회에서 가장 신앙이 깊은 성도라고 모두들 그를 칭찬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진실로 성숙한 성도일수도 있지만, 동시에 또한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이러한 그의 행동들이 그의 참된 영성과 성숙에 관한 어떠한 기준도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이러한 모든 삶이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에서 나오는 참된 영성의 결과 일 수도 있지만, 반면에 또한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품이 신실한 사람에게 교회에서 일을 맡기면, 그는 교회 일도 매우 성실하게 잘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그의 영성이나 성화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시면 잠깐 기다리십시오. 우리가 참된 영성을 살펴보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참된 영성은 무엇입니까? 참된 영성은 예수님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 되시며, 동시에 우리의 생명되시는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이며, 이 교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헌신과 이웃을 향한 섬김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영성은 우리가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인격체되신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화는 오늘날 교회가 세워놓은 기준과 규칙들을 성도들이 잘 따라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참된 영성과 성화와 관련해서 중요한 성경구절 중 하나가 바로 고리도후서 3장 18절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구절은 성화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인데, 성화는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 성화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의 행위로 얻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성령의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셋째, 성화는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우리 속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상고해 보겠습니다.
위의 성경구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요. 성경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볼 때, 그만큼 주의 형상으로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영광의 주님을 깨닫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만큼 우리는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며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를 위한 이러한 주님을 깨닫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만큼 우리의 삶 속에 이러한 주님의 ‘영광’이 함께 하시며, 우리는 그만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가 하는 그 무엇이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성령의 조명으로 주님의 그 놀라운 영광을 깨닫고 그러한 주님을 신뢰하는(믿는) 것이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 변화를 물리적인 변화와 화학적인 변화의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보다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물질이 변화하는 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물리적인 변화와 화학적인 변화입니다. 물리적인 변화는 나무로 의자를 만든 것과 같이 그 물질의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은 체 그 모양이 변하는 변화를 말합니다. 반면에 화학적인 변화는 두 가지 다 독소인 염산과 나트륨이 합하여 염화나트륨(소금)이라는, 우리 몸에 필수적인, 전혀 새로운 물질이 되는 것과 같은 변화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영성이나 성화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가 하는 그 무엇’의 관점에서 나온 영성은 오로지 물리적인 변화만을 가져올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가서는 이렇게 행동하고, 또 종교적인 면에서는 저렇게 행동하는 등 우리의 모양들을 바꿀 수는 있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전혀 변함이 없이 육신적인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말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기준을 철저히 지킨 사람들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십일조는 심지어 곡식의 낱알까지 세어 드릴 정도였으며, 일주일에 하루이상 정기적으로 금식했고, 또 자신들의 돈을 드려 구제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상황에 따라서 그들이 취해야 할 행동을 매우 잘 알아 그대로 했습니다. 마치 잘 단장된 무덤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그들을 회칠한 무덤 같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것으로 매우 그럴듯한 신앙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전혀 변화가 없이 온갖 더러운 육신적인 것들이 그들 속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잘못된 영성은 우리에게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반면에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 측면에서의 참된 영성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우리의 가치관, 사고, 삶의 방법, 삶의 목적 등 우리의 모든 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독소와도 같은 육신적인 삶이 변하여 소금과도 같은 영적인 삶으로 지속적이고도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한 예로서 이사야의 삶을 보십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3년 동안을 벌거벗고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선지자들을 보내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에게로 돌아오라고 권면하시고, 또한 그들을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이제 최후의 수단으로써 이사야에게 벌거벗고 다니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끝까지 거역하면 이사야와 같이 벌거벗은체 이방나라에 포로로 끌려갈 것을 그들에게 실물로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죠. 그런데 당신은 이사야가 어떻게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그가 창피와 모욕, 그리고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무릎쓰고 그렇게 순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명령하신다면 우리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사야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사 6장 참조).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가 있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높이 앉으셨으며, 그 위로 스랍들은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찬양을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차는 그 놀라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이사야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사람들의 평가나 조롱이나 멸시 따위는 그에게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실로 우리도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깨닫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영화와 영광은 더 이상 매력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살아감에 있어 사람들의 평가나 멸시 따위는 더 이상 우리에게 중요한 요소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설교자라고 불리우는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이여 내 눈에 영원한 세계의 인을 쳐주옵소서, 그리하면 세상의 모든 영화가 내 눈에는 희미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라고 기도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사야처럼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까 읽은 성경구절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님의 영광을 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우리가 오늘날은 주의 영광을 보되, 희미하게 부분적으로 밖에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거울은 오늘날과는 달리 구리를 잘 닦아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비친 형상은 매우 희미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볼 수 있는데, 성경을 말하기를 우리가 그날에는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희미하게 보는 주의 형상으로 변화시킬 것이며, 영광에서 더 큰 영광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그분을 더욱 알기를 간절히 열망해야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 구절 첫 부분에 나오는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 모세로 대변되는 구약시대와 대조시켜 말하고 있는데, 구약시대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수건을 벗은 것처럼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영광스러운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요 은혜입니까?
셋째,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다음 기회에 좀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의 사역은 그저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닥치는 대로하는 우리의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역은 우리가 주님의 인도에 민감하여 그대로 순종하는 가운데,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고 나타나시는 그분의 열매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는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도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역에 대한 하나의 예를 아나니아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 다메섹에서 살고 있던 평신도였습니다. 그는 사도도 아니었고, 장로도 아니었으며, 집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까지도 가장 훌륭한 기독교인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을 전도하고, 치유하고, 그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는 일을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그 사건 하나만 하더라도 그는 어느 누구보다 큰 일을 감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그가 그렇게 귀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까? 한편으로 그것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즉, 그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셨고, 그는 단지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나누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렇게 놀라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는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명령대로 그 당시 사울이 머물고 있던 집으로 찾아가 사울의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고 조용히 기도했을 따름입니다. 심지어 기도할 때에도 그는 사울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게 하기 위해 그의 머리를 짓누르며 목이 터져라고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믿습니다. 주여“하며 악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사울(바울)에게 나아가 그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라고 말했을 따름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주님의 사역이요, 또한 그 방법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와 같이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야말로 주님을 위한 사역의 기초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위한 사역보다 주님과의 교제를 우선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주님을 위한 사역보다 우리의 삶에서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삶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위한 사역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우선적으로 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행할 뿐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마치는 것을 자신의 양식으로 삼으셨으며, 또 그렇게 하심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요 4:34, 17:4 참조).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나님을 위한 사역보다 더 앞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대표적으로 누가복음 5:15-16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잠시 이 구절을 자세히 묵상해 보십시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무엇을 위해 오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에 계실 동안, 그 구원의 사역의 일환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고 선포하시며, 전인적인 치유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바로 그 일을 구하여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하셨습니까? 그분은 오히려 그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과 교제하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였을까요? 아마도 우리는 ‘드디어 이제야 기회가 왔구나’하는 태도로 신이 나서 그 일에 매어 달리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앞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역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에서 나와야하며,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능력도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따라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구했던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분주하게 서둘던 마르다보다 더 좋은 부분을 택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아는 것, 다시 말해서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을 알 수 있을까요? 이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우선적으로 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한다니 무슨말이냐구요? 이전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은 주님의 손을 구한다는 말과 대조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을 구한다는 말은 우리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시도록 하나님의 도움이나 능력과 같은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는 것을 의미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을 더욱 알기를 구하는 것, 하나님 자신을 더욱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 즉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이 두 가지가 별 차이가 없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더욱 알기 원할진데, 주님의 손을 구하기보다(물론 이것도 필요합니다만) 주님의 얼굴을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이 두 가지 사이의 차이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하는 중요성에 대한 좋은 예를 우리는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손만을 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길을 모른체 미혹되어 불신 가운데 행했고,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히브리서 3:7-11에서 볼 수 있는데, 성경은 불신에 대해서 경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 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우리는 이 구절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성경은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과 불순종의 표본으로 하여 우리들을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경고하고 있는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 다음, 그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몰라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들이 40년 동안 하나님의 그 놀라운 행사들을 경험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 이래로 오늘까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 가운데 살았습니다. 애굽에서의 10가지 재앙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홍해의 사건, 바위가 터져서 물이 솟아져 나온 사건, 날마다 먹는 만나, 메추라기 고기, 그들 앞서가는 불기둥과 구름기둥, 그리고 40년 동안 전혀 닳지 않은 의복과 신발 등등.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몰랐고, 따라서 그렇게 미혹되어 불신과 불순종 가운데 행동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의 그러한 삶의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으나 끝내 견디다 못해 맹세코 그들을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그들의 문제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줄여서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손만을 구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없을 때, 하나님께 불평하며 물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 불평하며 먹을 양식을 구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필요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그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구했지만, 그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 자신을 더욱 알기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순종하기를,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러한 그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계속해서 채워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도 알지 못한체, 미혹되어 그토록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가장 우선적으로 구한 자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출애굽기 33:12-13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였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이 구절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이 구절의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바로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그 우상을 숭배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멸하시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내산 위에서 영문도 모르는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멸하시려는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그러나 이제 산을 내려와 사실의 전말을 깨달은 모세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천사를 그들 앞에 보내 돕도록 하겠지만, 자신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시내산에 다시 올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바로 출애굽기 3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의 기도를 자세히 보십시요. 그가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나가 가장 우선적으로 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길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따라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알기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분의 은총 가운데 계속 머물러있기를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우선적으로 구한 자였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모세를 향해 주신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보십시요. 하나님은 그러한 모세를 기뻐하시고 곧 마음을 돌이키사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4절).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까지 보여 주십니다(출 33:17-34:10). “그 행위(길)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이셨도다(시 103:7).”
이 점에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 자신에게 일어났던 한 가지 사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사건은 저의 삶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신앙과 사역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이해가 변하게 되었으며, 나의 삶도 하나님 안에서 근본적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1991년 말 경에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서울 송파구 오금동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교회에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저는 잘 하지도 못하는 금식을 하며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넌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저에게 충격이었을 뿐 아니라, 나의 삶 전체를 흔들어 놓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는 땅에 엎드려 회개하며 ‘그렇습니다. 주님, 전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와 이 사건의 중대성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이 말의 뜻에 대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제가 이 말을 같이 나누는 유일한 이유는 주님을 아는데 있어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여러분이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뿐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그렇고, 그러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이 말은 그 동안 제가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동안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그저 저의 소욕을 위해 했다는 말도 아닙니다. 저는 신학을 미국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7년 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87년 3월에 귀국한 후 약 1년 동안은 영등포 공장단지 근처에서 사역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점심시간에 아내가 커피를 끓여 가지고 나가서 식사를 마치고 쉬는 근로자들에게 대접하고 나면, 제가 나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여 1년 동안에 총 20명 이상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는 3백만원 보증금에 6만원 월세인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살았는데, 집 앞에 공장에서 나오는 쇳가루가 흩날리고 있었고, 집에는 같이 사는 약 15세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재래식 화장실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나이 어린 우리 세 아들은 빠질까봐 무서워서 그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들은 부엌에서 신문지를 깔고 볼일을 보고 나면 아내가 화장실에 가져다 버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1년 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오금동에 와서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도 지하실에서 살면서 여기저기 신학교에 나가 강의해서 번 돈으로 생활하고 교회의 필요를 채워가며 살았습니다. 저는 이 모든 일들을 주를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며 해 왔습니다. 그리고 또한 교회의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설교만 하더라도 제 임의로 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전하려고 기도하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성도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때로는 매우 힘들고 심지어 고통스러운 일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온 제가 ‘넌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습니다.’라고 동의하며 회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모든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전혀 틀린 말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뛰고 노력했을진 몰라도, 그리고 수시로 당면한 일과 문제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을진 몰라도, 제가 전하려고 노력하던 그 하나님, 제가 삶의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리고 그분을 위해 산다고 하는 바로 그 하나님, 그분 자신을 더욱 알기를 구하고, 그 하나님 자신을 더욱 사랑하기를 구하는 일에는 정작 소홀히 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떠한 교리의 집합체가 아니며, 인격을 가지신 인격체로써 우리에게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보다 그분과의 사랑과 순종의 긴밀한 교제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모든 삶을 드려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정작 그 하나님 자신을 알기를 소홀히 하고, 그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기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이러한 저의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그 때부터 근본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알기를 무엇보다 열망하고,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기를 간절히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삶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삶을 직접적으로 간섭하시면서 다루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삶에서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으로 채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말로는 많이 언급하나, 실제로 그 의미와 실체 또는 실재(reality)는 전혀 알고 있지 못하는 하나님의 의, 거룩함, 하나님이 은혜, 하나님을 경외함 등 하나님의 축복들이 저의 삶에서 경험되어지며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 더욱 민감할 수 있게 되었고, 그분과 동행하는 법을 하나하나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과거에는 깨닫지 못하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것들에 관한 진정한 의미와 실재(reality)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열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원할진데, 또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요, 우리의 불타는 열망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신앙을 한마디로 주이면 주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주님을 알기를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배들도 다 그렇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여기서 성경에 나오는 두 사람만 예로 들고자 합니다. 그들은 구약의 다윗과 신약의 바울입니다. 먼저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라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여길 보십시요. 다윗은 평생 동안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을 그의 오직 한 가지 구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소원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많은 소원 중에 가장 우선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을 더욱 아는 것을 그의 유일한 소원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만을 구할진데,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다윗에 관하여 직접 증거 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신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약의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2: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여기에 보면, 바울도 예수님을 아는 것을 그의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구절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말하는 구절로써(2:1-4), 주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면 그분을 진정으로 전할 수 없는 것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3:7-10)이 바울의 소망과 열망을 보십시요. 빌립보서는 바울의 사역 말기에 로마 옥중에서 쓰여진 서신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서신을 쓰기 전에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차례 만났으며(사도행전에 기록된 것만 하더라도), 삼층천까지 가서 사람의 언어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보았고, 그는 그의 모든 계시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으며, 그의 손수건에만 닿아도 사람들의 병이 나을 만큼 놀라운 성령의 역사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이와 같은 모든 것을 다 경험한 후에도 주님을 더욱 알기 원하는 것을 그의 일관된 소원이요 목표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님을 더욱 알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 같이 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아는 지식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귀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도 바울도 주님을 알기를 더욱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사실, 그것을 그들의 유일한 목표요 소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원할진데, 우리도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열망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부귀영화도, 혹은 주를 위한 어떠한 사역도 그분과의 긴밀한 교제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깊이 알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여 나아가기만 하면, 나머지는 그분께서 다 하십니다. 그런고로 그분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요, 목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여, 우리 주님을 더욱 알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 것을 당신의 유일한 목적과 목표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 주님께서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당신에게 가까이 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고 약속하신 그대로 주님께서 당신에게 가까이 임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유익
끝으로, 주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근본일 뿐 아니라,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첫째, 우리 속에 거룩함이 산출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을 다해 죄를 이기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성경은 피를 흘리기까지 죄를 대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우리의 노력만 가지고는 우리는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각오와 결심을 했습니까? 그리고 그 각오와 결심들이 얼마나 자주 이내 곧 무너지고 말았습니까? 그리고 설령 우리가 우리의 노력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서 악한 일들을 다 버렸다 할지라도 그것은 거룩함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바리새인들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영적인 우월감을 갖게 되고, 따라서 지극히 악한 종류의 교만에 빠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거룩함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 속에 사실 때에만, 우리 속에 주님의 거룩함이 산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성경공부나 율법적인 행위를 통해서 산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임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고, 아울러 우리 속에 주님의 거룩함이 산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이 가장 귀하기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그것들을 기쁨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영을 씻어줍니다.
단순히 주님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을 쌓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씻어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이 여러 종류의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 거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반면에,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 가운데서 주님이 내게 하신 말씀은 참으로 내 영혼을 정결케 해줍니다(엡 5:26-27). 그리고 아울러 우리는 정기적인 영적 목욕을 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 때가 끼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목욕을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때가 끼지 않도록 우리는 정기적인 영적 목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가 우리의 영을 씻어줍니다.
셋째, 우리의 혼을 보호합니다.
주님 앞에서의 참된 순결은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자신을 간절히 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보호막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줍니다. 우리의 각오와 결단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뜨거운 사랑만이 우리를 모든 죄의 유혹에서 이기게 해 줍니다. 예를 들어, 신혼여행 때 다른 여자(혹은 남자)에게 눈 돌리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넷째, 우리 마음에 주님을 향한 불길을 당겨줍니다.(아 8:6)
우리가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분과 같이 있기를 더욱 간절히 열망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깊이 앎이 없이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깊이 알지 않고도 외부적인 신앙의 모양은 갖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임의로 설정해 놓은 경계선 내에서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을 위해 ‘봉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깊이 앎이 없이 그분을 위해 소위 옥합을 깨뜨리는 사랑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중 주님을 위해 옥합을 깨뜨린 사람은 늘 주님의 발아래서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과의 긴밀한 교제를 우선적으로 구했던 마리아였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그렇게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자기를 향한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먼저 깨달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갈 2:20 참조)
다섯째, 인간의 영을 만족시켜 줍니다.
한 시편 기자는 주의 전에서의 하루가 세상에서의 천 날 보다 더 귀하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무슨 말일까요? 그저 교회에서 하루 보내는 것이 세상에서 3년 이상을 보내는 것보다 더 좋다는 말일까요?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함께 있을 때, 그것은 실로 우리에게 만족을 줍니다. 주님의 임재하심 가운데서 그분과 함께 있는 단 5분이라도 그것은 세상에서의 그 무엇보다도 귀하고 아름답고 기쁘고 만족스럽습니다. 이처럼,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보다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 더 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귀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해로 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해줍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환경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위, 혹은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로부터 우리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찾으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가질수록 우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우리에게 자존감과 가치를 부여해 주며, 따라서 다른 종류의 두려움과 불안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해줍니다.
일곱째, 내적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게 될 때, 주님은 우리 가까이 찾아오셔서 그 부드러운 사랑의 손길로 우리 속에 있는 깊은 상처까지 만져주시며, 그것들을 치유해 주십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주님께서 성령의 조명을 통해 내 속에 있는 상처들을 치유해 주사, 나에게 참다운 자유로움을 주신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덟째, 영적 전쟁에서 승리로 인도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됩니다.
성경은 날마다 순간마다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날마다 싸우는 영적 전쟁에서 주님과의 깊은 교제보다 더 큰 승리의 비결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웠던 모든 전쟁은 영적인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들이 나가서 창과 칼을 가지고 실제로 적들과 싸우지 아니하고 그저 앉아서 기도로써 싸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나가서 창과 칼을 가지고 실제의 적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쟁에서의 승패는 한 번도 군사력의 우위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전쟁은 모두 영적인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는 아무리 큰 적이라도 물리칠 수 있었지만, 반면에 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을 때는 엄청난 군사적인 우위를 가지고도 매우 작은 적 앞에서 대패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전쟁에서 승리의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어떠한 환경과 군사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전쟁에서 승리의 비결은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인 것입니다.
아홉째, 주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성경에서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사무엘, 엘리야, 다윗, 바울 등등 모두가 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구할 때, 말세지말을 당한 이 때에 주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