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사도들의 사역 下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도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처럼, 사도들의 삶에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 정확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사역은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사역이라는 두 축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 둘이 사도들의 모든 사역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예수님의 삶에서 그랬던 것처럼, 각기 다른 별개의 두 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역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 사역의 조화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교회 안에서 조화를 이룰 때, 그곳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성도들의 삶이 놀라웁게 변합니다. 놀라운 은사들과 능력들이 풀어집니다. 놀라운 사역의 확장이 있습니다. 마른 뼈들과 같은 성도들이 다시 살아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로 일으켜 세움을 입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개의 토대가 교회 안에 든든히 세워질 때, 예배를 비롯해서 교회의 모든 임무들이 참으로 회복되어집니다.
1. 말씀과 성령의 조화
예수님과 같이, 사도들도 단지 말씀으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을 뒷받침 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잘 나와 있는 부분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1:1부터 이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 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사도행전은 그 이전에 쓰여진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승천하실 때까지의 모든 사역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즉, 가르치시는 사역과 행하시는 사역, 다시 말해서 능력을 행하시는 사역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어에 보면 이 구절이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시기 시작하신 것을 기록하였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NIV성경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승천하신 때까지의 모든 공생애를 기록하면서, 왜 그것이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것에 불과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이어지는 사도행전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자신의 사역을 계속해 가시는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해 가시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사역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사역에는 예수님의 사역에서처럼 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도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사역을 해 가시는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사역은 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룬 사역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들은 사도행전 전체에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를 따로 들지 않겠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몇 구절만 언급하려고 합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4).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행 14:3).
특히 초대교회 때는 사도들만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한 것이 아니었음을 사도행전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 내부의 구제 사역을 위해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 일곱 집사들은 당연히 구제의 적절한 분배를 위해 자기들의 임무를 감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먼저 예수님의 사역자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일곱 집사 중 두 사람의 일이 대표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두 사람모두 그랬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행 6:8, 10).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 8:12-13).
오늘날의 교회는 제직이 마치 신분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 숫자도 마치 '전교인 제직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대부분이 제직입니다. 그리고 그 임무에 있어서도 교회 내부적인 일을 감당하는 것이 주요 임무인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18-20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교인 사역자화를 추구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특히 제직들은 당연히 교회 내부의 일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하지만, 먼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는 일반 성도들도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을 전도한 사람은 다메섹에 살던 아나니아라고 하는 일반 성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도 예수님과 똑같은 방법으로 사역을 감당했고, 그 결과 사도 바울을 전도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행 9:10-12, 17-18).
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께 대한 민감함입니까! 저도 개인적으로 더욱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아나니아는 평신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놀라운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제 가운데서 들은 주님의 음성에 순종한 결과, 바울을 전도하고 치유하는 놀라운 일에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사역을 감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은 비단 사도행전만이 아닙니다. 이 점은 서신서에도 뚜렷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몇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1-5).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 15:17-18).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 2:3-4).
특히 로마서 15:17-18을 보십시오. 거기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역을 말과 일로 나누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에서 누가가 예수님의 사역을 그렇게 나누는 것과 정확하게 똑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계속해서 거기에서 말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란 바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의미했습니다. 영어 NIV 성경은 이러한 관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들의 사역은 단순히 말씀으로만 전하는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처럼 말씀과 성령의 사역이 조화를 이루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명하신대로 사도들은 순종했고, 사도들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그대로 재현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평신도들을 포함한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열두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즉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성령으로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28:18-20에 나오는 대위임령에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바입니다.
2. 사도들의 삶 속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그럼, 사도들의 삶속에는 어떤 성령의 역사들이 나타났습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위에 언급한 데살로니가전서 1:5와 히브리서 2:3 글에 잘 나와 있습니다. 먼저 히브리서 2장은 이것을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표적들, 기사들, 여러 가지 기적들,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전서 1장은 그것들을 능력, 성령, 그리고 큰 확신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외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에 나오는 성령의 역사들은 여기서 말한 범주 안에 다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역사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 다 중요합니다. 특히, 그 균형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의 사역 혹은 초대교회의 사역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면서, 성령의 내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방향성과 열매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외적인 성령의 역사
큰 확신, 표적들, 기사들, 여러 가지 기적들,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
내적인 성령의 역사
속사람을 강건케 하시는 것, 의와 평강과 기쁨을 부어주시는 것,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 거룩한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 아버지의 사랑과 소망을 부어주시는 것 등등.
3. 외적인 성령의 능력의 역사
(1) 표적
표적이나 기사나 여러 가지 기적들은 다 비슷한 말들입니다. 성경에서 이 말들은 자주 서로 교환해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경우에 동일한 사건이 때로는 표적으로, 때로는 기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각기 다른 성령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다른 단어들이 사용된 것은 최소한 그 의미들이 다른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표적은 성령님이 행하시는 많은 역사들이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영어로 signs라는 말로서, 어떤 것의 징표 혹은 싸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책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다 기록한다면, 그것이 온 세상에 가득 차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1:25). 그러면서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중 일곱 가지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들이 표적들로서 어떠한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가를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은 율례와 규례를 따르는 신앙생활을 성령에 의한 삶으로 바꾸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신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눈 먼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신 사건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인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역사 중 많은 부분은 표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행하시는 것을 육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째, 표적으로서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성령의 능력의 역사들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역사들은 마치 화살표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화살표들이 가리키는 본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행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행 3:12-13).
요한계시록 19:10 마지막 부분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이 말의 뜻은 모든 예언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모든 예언은 마치 화살표처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역사들이 표적으로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우리들이 유의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능력의 역사들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지, 사역자들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능력의 역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자 혹은 사역자들을 증거 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많은 능력을 행하시면, 그것은 곧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능력의 역사들은 메시지,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메신저를 증거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사도행전 3:12-13입니다. 하루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미문에 앉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사람은 감격에 넘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온 성전을 뛰어 다녔습니다. 그러자 성전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물려 들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오랜 세월을 성전 문에 앉아 구걸을 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알아봤습니다. 이렇게 몰려든 군중들을 향하여 베드로가 그 치유사건에 대해 한 말이 바로 위에 나오는 사도행전 3:12-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 치유가 자신들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인하여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기 위해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딤후 2:20-21 참조).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은 우리의 경건 때문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것이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요,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능력의 사건이 베드로나 요한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도들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종들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그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은 오직 그리스도에 관한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교회 가운데 더욱 부어질 오늘날 사도 베드로가 가졌던 올바른 이해와 마음의 자세를 반드시 그리고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곧 바로 타락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전혀 임하지 않은 것보다 더 못하게 될 것입니다.
2) 우리의 초점은 표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표적이 말하는 예수께 고정되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이정표를 보고 그것이 좋아서 그곳에 머물러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무리 이정표가 예쁘게 단장되어 있고, 좋은 내용을 담고 있고, 또 아름답게 디자인 되어 있다 할지라도, 단지 이정표에 불과합니다. 목적지로 인도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표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적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것에만 집착하고, 그것이 가리키는 예수께로 적극적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이정표를 보고 큰 감동을 받고, 그 내용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그 이정표에 집착하여 그 곳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절대로 그러한 자세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심각한 식량난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약속된 메시야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몰려드는 그들을 전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이 명백하게 내포하고 있듯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신 것을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기적을 통해서 그 표적이 가리키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보려고 혹은 알려고 하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오직 그 표적 자체에 있었습니다. 이 경우 예수님께서 기적을 통해서 만드신 떡에만 온갖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이렇게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 표적들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더욱 알고, 그 분을 더욱 사랑하고,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려고 하기보다, 그 표적들 자체에 온갖 관심을 둡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모든 예언의 본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예언을 통해 예수님의 뜻을 더욱 알고, 그래서 그 분을 더욱 기쁘게 해드리기 원하고, 그 분과 동행하기를 힘쓰기보다, 그 예언 자체에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예언을 통해 자기가 듣기 원하는 것을 듣기 원합니다. 예언을 통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원합니다. 예언으로 인하여 자부심을 갖기도 하고, 그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예언을 쫓아다니는 성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역자들은 성도들의 이러한 점을 적절히 이용하여 예언을 그릇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모든 눈은 예수님께 초정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NIV성경은 이 구절을 "우리의 눈을 예수께 고정하자"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고, 또 그것을 완성하실 분입니다. 그 분이 모든 것의 본체이십니다.
둘째, 표적으로서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행하시는 것을 육적으로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영적인 소경을 고치러 오신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표적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하시는 일을 육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서도 똑같은 일들을 행하고 계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가운데서 요즈음 허리 아픈 사람들과 무릎 아픈 사람들을 많이 치유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서 실제로 그에 대한 많은 간증들을 듣습니다.
모 성경 통독프로그램에서 가끔 눈과 관련된 질환이 있는 사람들이 치유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싸인 곧 표적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통독을 통해 성도들의 영적인 눈을 치유하시고, 영적인 안목을 열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육신적인 눈을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의 역사는 우리에게 반응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사람들에게 표적으로 보여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나님의 행하심 가운데로 나오라는 강력한 촉구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 심판이 임합니다.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영적인 눈을 치유하러 오신 분임을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영적인 눈을 치유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그들의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여 대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그저 죄가 있느니라"(요 9:39-41).
예수님은 또한 수많은 표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행하심 가운데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0-22).
하나님의 방문은 주권적인 방문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우주의 주인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방문 앞에 우리는 회개함으로 사모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함으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 심판을 의미합니다.
(2)기사들(Wonders)
기사들이란 말은 기이한 일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렇고, 사도들의 경우에도 그렇고 많은 성령의 역사들은 실로 기이한 일들이었습니다. 많은 표적들이 기이한 일들 곧 기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단어는 많은 경우에 서로 교환하여 쓰여졌습니다.
몇 년 전에 한번은 저희들 가운데서 몇 사람들의 이가 금니로 바뀌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 의치로 씌어져 있던 부분이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그 변해가는 과정을 다른 사람이 옆에서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들은 지금도 금니로 남아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금니였는데, 그 이들이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새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실제로 그 광채는 일반 금보다 훨씬 더 빛났습니다.
물론 저희들은 그러한 현상들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예수님을 구합니다. 그런데 그 날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특히 저는 그 이후로 최소한 몇 사람의 삶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떤 분의 경우에는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근본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정과 교회에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놀라웁게 세워지고 있습니다.
(3) 여러 가지 기적들
기적이라는 말과 기사라는 말은 비슷한 말입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일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새물결선교회 정기집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사모님이 그 곳에 참석했었습니다. 그 분은 얼마 전부터 배가 심하게 아프고 혈변까지 나오기 시작해서 그 전 주에 병원에 갔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병원에서 더 큰 병원으로 그 분을 보냈고, 그 큰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대장과 소장 사이에 큰 종양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의사들은 급히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만약 그 종양이 좀 더 자라 장을 막으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수술 스케줄을 취소하고, 그 사모님을 먼저 수술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았습니다. 큰 병원에서 그 결정을 내린 날이 바로 그 전 날 월요일이었고, 수술날은 그 주 목요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이 그 화요 집회 시간에 설교를 듣는데, 허리 쪽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좀처럼 예배시간에는 자리를 뜨지 않는 분인데,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나중에 그 분에게 들어서 안 내용들입니다. 얼마나 뜨거웠든지 속셔츠가 겉옷 색깔로 염색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가서 그 분은 화장실에 갔고, 가서 이상한 물질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틀 후 그 분은 다시 병원에 갔습니다. 수술하기 위해 부분 마취를 시키고 의사들이 내시경을 집어넣어 그 종앙을 찾는데, 그 종양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담당 의사가 종양을 발견하지 못하자 동료 의사들까지 불러서 의사 열 명이 그 사모님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며칠 전에 찍은 사진을 옆에 걸어 놓고, 종양을 찾고 있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그들은 그 종양이 있던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종양은 온데 간데 없고, 그 자리가 마치 흑인의 피부처럼 까맣게 타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그러자 담당 의사가 예수 믿는 사람이었는지, 사모님에게 혹시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그 둘러 싼 의사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닐 뿐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런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적들은 이러한 치유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우 다양합니다.
(4)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
예수님의 삶 속에는 모든 종류의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들이나 초대교회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7).
오늘날의 교회에도 모든 종류의 성령의 은사들이 다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 그리고 사도들의 삶 속에 그 은사들이 필요했다면, 우리들의 삶에는 어떠하겠습니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교회 가운데 놀라운 은사들을 회복시키시고 계십니다. 비단 목회자들에게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4. 내적인 성령의 능력의 역사
성령의 역사하면, 우리는 흔히 위에서 언급한 외적인 성령의 역사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외에도 내적인 성령의 능력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둘 사이의 조화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내적인 역사가 소홀히 되고 외적인 역사만 강조되면 특히 두 가지 면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첫째는 신앙방향의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외적인 표적이나 기사를 우선적으로 추구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은 곁길로 가게 됩니다. 성도들이 처음에는 신기하니까 호기심을 갖게 될지 모르지만, 결국 그들은 미혹되기 쉽고, 머지않아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게 됩니다. 둘째는 열매의 부재입니다. 내적인 성령의 역사가같이 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고, 따라서 참다운 주님의 열매가 그 삶에 맞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소위 영성 사역 한다고 하면서 위에서 언급한 외적인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고 추구한 나머지 너무나 이상하게 되어 버린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1) 큰 확신
먼저 큰 확신입니다. 큰 확신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치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요한복음 16:8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에 대해서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구약의 요나와 신약의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구약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가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전했을 때, 니느웨 사람들은 왕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잿더미에 앉아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이켰습니다(욘 3:4-6). 이 얼마나 놀라운 성령의 역사입니까!
요나의 경우를 보아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 사람의 성숙이 항상 정비례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영적으로 매우 어린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처음에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을 때, 하나님의 명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강권적으로 주장하셔서 그로 하여금 니느웨로 갈 수 밖에 없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내리시려고 했던 심판을 거두셨는데, 요나는 그것을 보면서 자기가 말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체면이 무엇이 되었느냐고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이에 대한 두 번째 예는 오순절날 있었던 베드로의 경우입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놀라웁게 임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온 예루살렘으로 퍼지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7, 41). 그리고 그날 삼천 명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 중 큰 확신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낳은 가장 훌륭한 설교자라고 하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예를 잘 압니다. 그분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한창 미국에 놀라운 하나님의 부흥이 임했을 때 쓰임 받았던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분은 눈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등잔불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원고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설교를 듣던 성도들은 땅을 치면서 통곡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의 불이 보이는 것 같아서 회개하면서 울었고, 어떤 사람들은 구원 받은 감격과 기쁨이 넘쳐서 울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구원 받지 못한 식구들을 위해 절규하며 울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바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참고로 우리는 죄를 깨우치시는 성령님의 역사와 정죄하는 사탄의 역사의 차이점을 알아야합니다. 사람들의 죄를 깨우치시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깨우친다는 말은 영어로 convict라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죄를 깨우쳐 주실 때, 그것은 회개로 이르게 됩니다. 성령님은 죄를 깨우쳐 주시면서 용서의 길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깨우쳐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진심으로 통회하며 죄로부터 돌이키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도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정죄합니다. 여기에서 정죄란 영어로 condemn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죄를 가지고 우리를 고소하며, 정죄합니다. 우리를 실망과 절망 가운데로 빠뜨립니다. 낙심과 좌절 가운데로 빠뜨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혼동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이렇게 고소할 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흐르는 하나님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공로에 의지하여 사탄의 고소를 대적하여야 합니다.
(2)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능력
에베소서 3:14-17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이 기도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성도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속사람을 강건케 하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속사람이 강건케 되어진 결과로 그들이 예수님이 내주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내주하시는 삶을 산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성도들 속에 들어오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런데 이 삶을 실제로 살기 위해서는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능력으로 속사람이 강건케 되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그러한 삶을 살기 원하나 속사람이 약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같이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졸고 있던 제자들과 같이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마 26:41)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성령을 통해 강력한 능력을 부어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을 구하되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충만하게 부어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3) 의와 평강과 기쁨
로마서 14:17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가운데 세워질 때, 우리에게 의와 평강과 기쁨이 부어집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들은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우리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다 의와 평강과 화평 가운데 살아가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대다수의 성도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것들입니다. 그 중 한 예로 기쁨을 보십시다. 데살로니가전서 1:6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주를 본받은 자가되었으니." 여기서 성령의 기쁨이라는 말은 성령이 주시는 기쁨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 NIV 성경에는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인하여 베드로전서 1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베드로전서를 쭉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성도들은 많은 환난과 어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가운데서도 마치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처럼 큰 기쁨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냥 큰 기쁨 정도가 아니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했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기쁨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주위에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의와 평강과 기쁨이 성도들에게 부어지는 경우를 수 없이 봅니다.
(4) 아버지의 사랑이 부어집니다.
성령의 내적인 역사 중 또 하나는 아버지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5:5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성경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을 표현하면서 자주 '부어지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예. 행 2:17-18, 33, 10:45, 디 3:6). 여기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진다는 말은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성령의 임재가 강하게 나타나는 곳마다 성령께서 공통적으로 하시는 놀라운 일 중 하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으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의 일입니다. 한번은 휴가를 받아서 기도원에 갔습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 분은 여기저기서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 하나님이 행하신 많은 치유들을 간증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도사님은 많이 사랑하는데, 나는 전혀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그 생각이 틀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 어디 가서 병든 자들을 위해 기도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힘이 빠졌습니다. 낙심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어깨가 축 처진 채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앉자마자 갑자기 뱃속에서부터 큰 소리로 방언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뚜렷하게 "주봉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제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날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니...' 저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대통령도 재벌도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날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 날 이후 저는 여러 달 동안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그 일만 생각하면 감사하고 감격이 넘쳤습니다. 물론 저는 그 이전에도 하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바로 성령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이 나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5) 우리에게 소망이 부어집니다.
로마서 15:13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에게 소망이 부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부어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소망 또한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의 약속을 기다림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6) 지혜와 계시의 성령
에베소서 1:17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이미 아는 성도들을-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들이 우리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더욱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것을 위해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라고 번역된 말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라고 번역해야 더 옳습니다. 실제로 많은 영어 성경들이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은 우리의 영을 일깨워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오늘날 바로 이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필요한지요. 율법주의 신앙으로 가득 찬 오늘날의 상황에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가장 필수적인 역사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역을 하면서 수없이 경험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성도들을 위해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축복하고 구하라는 하나님의 감동입니다.
(7) 양자의 영
로마서 8:15-17에서 양자의 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양자의 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깨닫게 해주고, 구원의 확신을 증가시켜 주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스런 임재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만들어 줍니다.
약 1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철야 기도를 인도하면서 찬양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가사 중에 "영원히 계시는 아버지" 라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 분을 부르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저의 아버지 되심이 선명하게 조명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나님께서 저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몰랐단 말이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도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 되심이 더욱 선명하게 깨달아진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저의 육신의 아버지와 달랐습니다. 그 분은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면서도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분이셨고, 강한 능력의 아버지이시면서도 친절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다음날 자리에서 일어나서 조용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고 한 마디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의 임재가 저를 감싸시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아버지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제가 열심히 수고해야만 그 댓가로 저에게 임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제가 항상 그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함 가운데 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저는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때, 그 분이 저의 아버지이심을 늘 기억하려고 힘씁니다. 그리고 사랑의 아버지 앞에 나아가 그분의 임재를 구하고 그 분을 기뻐할 때, 제 마음은 그분의 마음과 그 뜻이 합하여지고, 주님이 저의 기도를 인도해 가시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그 동안 예수님의 사역과 사도들의 사역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의 모델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성령의 사역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회복되어야 할 그 사역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이요 또한 사도들의 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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