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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사도들의 사역 上

시리즈설교/성령사역의회복

by 발의무리 2008. 10. 1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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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사도들의 사역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살펴 본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 사역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역의 최종목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는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나타난 사도들의 사역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들의 사역 또한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도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한 사역이 어떠한 사역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어떠한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도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역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예수님에게서 배운 그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역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몇 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사도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또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사도들의 사역도 예수님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그 초점이 하나님 나라에 맞춰졌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 구절들을 보면 이 점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8:12)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19:8)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 할 줄 아노라(20:25)

28:23, 30-31

28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 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그러나 사도들의 사역으로 접어들면서, 그들의 메세지의 초점은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 대신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지금 통치하시며, 다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실 왕되신 예수님에 맞춰집니다.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춰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메세지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도들은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2:36)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3:13-15)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명백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잘 말해주고 있는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전 1 :23)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이처럼 사도들의 메세지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복음과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정확하게 같은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토대로 한 하나님 나라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회복되어야 할 절실한 필요를 가지고 있는 메세지도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이요, 또한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명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2. 십자가의 복음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 :16)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 :18)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 :23-24)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들이 십자가의 복음에 의지하여 서게 될 때, 그 곳에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 뿐 아니라, 죄와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등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들이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복음 앞에는 어떠한 사탄의 고소도 힘을 잃습니다. 세상의 그 화려한 유혹도 그 빛을 바랩니다. 반면에 주를 위해 진정으로 헌신하고자 하는 열망은 샘솟게 됩니다. 만약 오늘날 성도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성도들이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사도들은 십자가의 능력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상적인 지혜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의 능력이 소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말의 지혜나 세상의 철학을 따라 하지 않았다고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 :17)

여기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은 영어 NIV 성경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능력이 소멸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고린도전서 2:1-5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처럼 우리들이 세상의 지혜를 따라 전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능력이 소멸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지혜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세상의 지혜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흔히 공자나 맹자와 같은 사람들의 말을 인용한 윤리적인 설교 혹은 세상적인 진한 감동을 담은 좋은 이야기들을 사용한 설교 등을 세상적인 지혜를 따르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이것들은 바울이 말한 세상의 지혜를 따르는 설교입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의 지혜를 따라 하는 설교는 훨씬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들이 성경에 기초한 가르침들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의 복음 위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가르침들은 다 세상적인 지혜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를 들어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 위한 7단계' , '사업의 축복을 받기 위한 믿음의 법칙' , '성공적인 삶을 위한 세 가지 법칙' 과 같은 유형의 많은 설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나름대로 성경적인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바울이 말한 세상적인 지혜를 따르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여러분에게는 의아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설교들을 통해서 성도들이 부분적으로 도움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들이 세상의 가르침을 따르는 설교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들이 십자가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면, 이 점은 선명하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 위한 여러 가지 지혜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것들은 나름대로 성경적인 가르침에 기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혜들을 따름으로써 여러 가지 도움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기초하지 않을 때, 거기에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 지혜들을 통해 우리의 가정에 소위 더 큰 행복이 깃들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 결과, 우리들이 주님의 형상으로 더욱 변화되지도 않고, 우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지 않는 다면, 그 모든 것들이 무슨 진정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은 십자가 복음의 토대 위에서만 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성도들의 삶속에 변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믿은 지 20, 30년이 되었는데도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총동원하여 온갖 노력을 다해 보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교회 안에 하나님의 진정한 열매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노력과 수단을 통해 이루어 놓은 실적들은 종종 있으나,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루어 놓은 열매들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 가장 주된 이유가 오늘날 교회 안에 진정한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교훈이나 철학이나 지혜나 삶의 방법을 전하지 않고, 철저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했는데, 오늘날의 교회는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의 삶이 변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들은 참다운 복음의 능력으로만 얻어지는 것들 입니다.

또한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우리들이 처음으로 구원 얻을 때에나 필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사도 바울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바로 그 십자가의 공로아래 서야합니다. 기도 응답이건, 치유건,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건, 죄의 용서건, 어떠한 하나님의 은혜라 할지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 것도, 우리의 모든 개인적인 의가 파괴되는 것도 다 우리들이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에만 의지하여 그 아래 설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의지하여 믿음으로 서게 될 때, 비로소 주님께 대한 진정한 헌신이 시작됩니다. 기복주의적인 사고나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정욕적인 의미에서의 헌신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열망하는 헌신이 시작됩니다. 십자가 아래 설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감격이 넘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사탄의 권세가 파하여지며, 동시에 사탄의 어떠한 고소도 무기력해집니다. 죄와 세상과육신과사탄에 대한 전정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은사주의 운동이 가지고 있던 맹점 중의 하나도 바로 이점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메세지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빼 버렸습니다. 오늘날 소위 영성 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이는 어떠한 참된 영성도, 어떠한 참된 능력도, 어떠한 참된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쓰러지기도 하고, 은사를 받기도 하고, 치유를 받기도 했지만, 진정한 삶의 변화나 주님을 아는 지식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No Cross, No Glory."

사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값싼 것으로 만들어 어린 뒤에는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다시 전파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군대를 일으켜 세우고 계시며, 또 하나님의 교회를 회복시키고 계신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이 세우시는 군대의 군기가 될 것입니다.

4.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진리들을 이론적으로 알고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신입니다. 저는 제 책 새 부대의 교회를 위한 다섯 기둥에서 외국 처녀의 몸으로 현지 경찰들도 들어가지 않는 우범 지역인 홍콩의 한 지역에서 마약 거래상, 갱단 두목들, 버려진 창녀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감당한 잭키 풀린저 여사의 이야기를 소개 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사역을 통해서 갱단두목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20년 이상 동안이나 마약 중독에 걸렸던 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둥 수없이 많은 '불가능한 사람들' 이 주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한 몇 가지 진리들이 그들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불가능한' 그들도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여인같은 경우에는 30년 동안이나 마약 중독에 걸렸었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할 때 외에는 가장 간단한 수치계산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그 여인은 잭키 여사팀의 맴버로 전 세계를 다니며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자신들의 생을 전적으로 헌신하여 과거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일에 전임으로 봉사하는, 그것도 단 한 푼의 댓가도 받지 않고 봉사하는 사람만 해도 백 명이 넘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복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참으로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바로 고린도전서 1:232:1-5입니다. 그 중 고린도전서 2:1-5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여기서 바울은 세상의 교훈이나 철학이나 지혜나 삶의 방법을 전하지 않고, 철저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2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이 아니고, 인격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2절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외에는" 라고 번역해야 더 옳은 구절입니다. 이 경우, 헬라어로 남성과 중성의 모양이 똑 같은데, 우리말 성경처럼 중성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남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은 구절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 외에는"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진리가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님 그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을 전하기에 앞서 자기가 먼 그 예수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사실, 그것이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목적이요 목표였습니다. 여기 고린도전서 2:2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만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아는 만큼 또한 변화됩니다. 이러한 바울의 목표는 빌립보서 3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 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3:7-10).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서신중에서 상대적으로 일찍 쓰여진 서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으로서 상대적으로 그의 사역 말기에 쓰여진 서신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 예수님을 아는 것을, 특히 십자가에 달리 신 예수님을 아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목표로 삼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역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사역에 앞서, 예수님을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복음은 그저 처음으로 예수를 믿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하는 모든 복음의 핵심이요, 전체입니다.

5. 개인과 교회의 모든 삶이 십자가 복음의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전하기에 앞서 우리들이 먼저 그 분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우리 개인과 교회의 모든 삶이 십자가 복음의 토대 위에 세워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위임령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12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기에 앞서, 우리들이 먼저 12 제자들처럼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복음에 있어서도, 그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우리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과 사역의 영역에서 철저하게 그 복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한 매우 중요한 구절이 바로 갈라디아서 2:11-l6에 나오는 안디옥에서의 베드로 사건입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 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떠나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그 당시 유대법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과 섞여 식사함으로써,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선포된 음식들을 먹을 위험이 있었으며, 그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배경으로부터 온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그러한 관습과 전통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위의 사건은 안디옥에서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여러 사람들이 그 곳에 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는데 별 어려움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안디옥 교회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는 대부분이 유대인의 배경을 가진 성도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사람들이 내려 왔을 때 발생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람들이 내려오자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던 베드로가 갑자기 자리를 떠서 따로 앉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성도들 뿐 만 아니라, 또 그 사실이 예루살렘 교회에 알려졌을 때 그들이 자신에 대해 내릴 평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자리를 뜨자 같이 있던 유대 기독교인들 역시 자리를 떴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바나바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분개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베드로를 직면합니다. 그는 베드로의 이 행동이야말로 복음의 진리를 역행하는 행위라고 규정합니다(14). 그리고 외식하는 행동이라고 말합니다(13).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6)

여러분, 이 사건이 왜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은 사도 베드로까지 꾸짖은 사도로서, 베드로보다 더 우월한 사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여기에 기록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 뿐 아니라, 이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럼 왜 이 사건이 여기에 기록되었을까요? 갈라디아서 전체의 맥락을 살펴보면, 이 점은 너무나 선명합니다.

성경은 우리 삶에서 모든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철저하게 버리고,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이 철저하게 오직 십자가 복음의 토대에만 세워져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여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사도 중의 사도인 베드로의 체면이 깍이는 것을 허락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이 사건을 이곳에 싣게 하셨습니다. 그만큼 성경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사도 베드로의 행동은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행동이 반영하는 그 가치관이야말로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고, 거룩케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신뢰하는 것 뿐 입니다. 그런데 그 행동이 반영하는 가치관은 우리들이 어떤 음식을 안 먹거나 혹은 어떤 사람들과 식사를 안 하는 것이 거룩함을 유지하게 해 준다는 율법주의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이야말로 바로 십자가의 복음을 정면적으로 대적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사람들을 끊어지게 만드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입으로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서, 행동으로는 그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외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강하게 이 사건을 질책했던 것입니다. 아니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 삶의 모든 부분과 우리 사역의 모든 면이 그 가치관이나 방법이나 행위에 있어서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위에 적힌 16절을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로 이해합니다. 당연히 그 구절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베드로 사건의 맥락에서 바울이 베드로에게 한 말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에 대한 답변으로 주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들이 처음 구원을 얻을 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이미 "떼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너무 피상적으로 안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16절의 이 말이 사도 베드로가 그동안 십자가의 복음도 모르고,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율법주의 신앙을 가르쳤다는 것을 말합니까? 그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당연히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실, 이방인들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곳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10:43)

그리고 할례의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므로 주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으로 할례와 같은 종교적인 의식이 믿음에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던 것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줄을 믿노라 하니라 (15:7-11)

이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베드로는 율법주의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철저히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십자가의 복음, 오직 은혜에 의한 삶, 오직 믿음에 의한 삶이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강력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베드로는 십자가의 복음을 올바로 알고, 올바로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반영하는 행동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선 우리가 얼마나 쉽게 율법주의적인 사고에 빠질 수 있는 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중의 사도요, 가장 먼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복음을 전한 베드로, 그리고 그토록 십자가의 복음을 강력하게 전한 베드로가 율법주의적인 사고에 빠질 수 있다면,하물며 저와 여러분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을 보면 또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과 사역이 십자가 복음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 우리의 삶에서 율법주의적인 모든 가치관과 사고를 철저하게 버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예수님을 따르던 12 제자들에게까지 그토록 반복적으로 바리새인의 누룩 곧 율법주의 신앙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던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베드로가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반영하는 행동을 취하게 된 배경에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2:12). 이처럼 우리들이 율법주의 사고를 반영하는 행동에 빠지게 되는 가장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의 특징이 그렇듯이, 그것은 많은 경우에 신앙적인 전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그것을 분별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그 동안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빠지는 이유가 바로 동료들과 다른 성도들로부터의 부정적인 평가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율법주의적인 사고에 빠지면, 그것은 십자가 복음을 대적하는 행위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5:2-4).

베드로의 사건처럼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나 율법주의적인 가치관을 반영하는 행동들은 오늘날 우리 가운데 수없이 많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이해하고, 여러분의 삶과 사역 그리고 교회의 삶과 사역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수많은 예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율법주의의 누룩이 철저하게 버려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의 모든 부분이 십자가 복음의 토대 위에서만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성령과 복음의 축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축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월절 축제에 비유하고 있습니다(7-8).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에 앞서 집 안에서 모든 누룩을 찾아내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율법주의의 누룩을 우리의 삶과 사역에서 모두 찾아내어 버린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놀라운 축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축제 그리고 복음의 축제가 놀라웁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6. 십자가의 복음과 사역의 열매

사도들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십자가의 복음과 사역의 열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에는 참으로 놀라운 사역의 열매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사역의 열매 사이의 상관관계를 잘 말해주는 구절은 갈라디아서 4:24-27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여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 54장과 대조하여 보면, 이 부분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 한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4:24-27).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찌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찌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찌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54:1-5).

이 두 구절을 대조하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 처음에는 교인들의 수가 줄어 들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부담없이 평안하게 들을 수 있는 메세지를 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가운데로 나오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세지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사실, 많은 목회자들이 이 점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어떤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방문 온 어떤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 말씀은 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하면, 오늘날 어떤 성도가 교회에 오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저는 매우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옳은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듣기 원치 않으니까 안 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분명 실패한 사역이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사역이 실패란 말이 아니라, 오늘날 목회자들의 관점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예수님은 나타나는 그 놀라운 능력과 그 권세 있는 말씀을 가지고 참으로 성공적인 목회를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병이어의 기적사건 때만해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남자 장정만 해도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약 2만 명 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참으로 열성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그 곳이 어디이든지 그들은 가리지 않았습니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마을이면 마을, 전국 각지에서 그들은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어떤 때는 사흘씩이나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능력으로 치유받기 원했고, 또 그 능력을 보기 원했습니다.

상황이 이 정도쯤 되면, 예수님은 전국 각지에 교회들을 세우고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들을 세우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갈릴리 성전, 사마리아 성전 등등. 만약 오늘날 어떤 목회자의 사역에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나오는 예를 보십시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14:25-27, 33).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 라“(13:44-46).

 

예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보다 더 큰 교회를 세우려 하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을 떨어뜨리려고 작정하신 분 같았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갔습니다. 그 중에 많은 자들은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매우 어려운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만약 실제로 세상에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값진 진주를 발견했다고 하십시다. 그리고 그 가격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집이 빨리 팔리지 않아서 잠을 자지 못하고 안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슈는 그 값진 진주를 사람들이 보느냐는 것입니다. , 예수님 안에서 가장 값진 진주를 보는 자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보는 눈이 복이 있다고 하셨고, 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부자 청년의 경우와 예수님 제자들의 경우입니다 부자청년은 예수님 안에서 가장 값진 진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토록 간절하게 영생을 사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신 예수님에게로부터 슬픈 기색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것으로 가장 값진 진주를 살 수 있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똑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베드로는 부분적으로라도 예수님 안에서 가장 값진 진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것을 중단하고 돌아갔을 때, 너희들도 가려느냐고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6:68-69).

 

이처럼 예수님께서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감없이 전하자, 승천하실 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겨우 500명 남았습니다. 그 중에서 380명은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분명 실패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그 120명을 가지고 전 세계를 변화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지금 섬기고 있는 포도나무 교회를 개척할 때 200명이 넘는 성도들이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교회가 단지내 상가에 있기 때문에 새로 입주한 성도들이 다닐 교회를 찾기 위해 방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5명도 안되는 성도들만이 교회에 정착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고 생각되는데, 하나는 전파하는 메세지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고, 예배 형식이 그들의 생각과 약간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십자가의 복음을 가감없이 전할 때, 최소한 처음에는 교인들의 수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4장에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자 혹은 구로치 못한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 때의 수치나 과부 때의 치욕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과부의 치욕이 얼마나 컸습니까? 이것은 당해 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목회자로서 생산치 못하는 것만큼 큰 치욕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이 요즈음은 몇 명이나 모이느냐고 물을 때 당하는 목회자로서의 수치가 얼마나 큽니까?

한편으로는 목회자들이 이 수치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기보다는 전하는 메세지에 있어서 타협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제가 어느 곳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 곳에 참석했습니다. 그 날 저는 율법주의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잠간 쉬는 시간에 제가 지나가는 옆에서 한 목회자가 다른 목회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마 저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복음으로 못 잡아 놓을 것 같으면, 율법주의로라도 잡아두어야지.“ 율법주의로라도 성도들을 교회에 붙잡아 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입니까! 성도들의 영혼이 죽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지건, 예수님에게서 떨어지건 상관없이 그저 교회에 붙잡아 두어야겠다니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당연히 그 분은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몰랐겠죠.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로 사역의 열매로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추가적으로, 하나님의 세우심을 볼 때, 하나님은 사랑하는 종들로 하여금 열매 없는 시기를 지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집중적으로 찾게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이 시기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빚으시고 다듬으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 가운데 있을 때,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특히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담대하게 전하십시오. 사실, 목회자로서 그 외에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승리가 바로 여러분 앞에 있을 것입니다.

2) 십자가의 복음에는 놀라운 사역의 확장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을 율법주의 신앙과 십자가의 복음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위에서 읽은 구절에 보면, 이사야 54장에서 약속된 놀라운 사역의 확장과 열매가 십자가의 복음에서 맺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렇게 볼 때, 이사야 54장의 남편 있는 자의 자식은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서 자식을 얻는 율법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열매를 의미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4장이 말하는 것처럼, 남편 없는 자의 자식은 하나님이 그 남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사역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의 복음의 열매가 율법주의 신앙이나 인본주의 신앙의 열매보다 훨씬 많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자녀들이 열방을 얻게 될 것이고, 그 자녀들이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자들이 될 것이고, 그들의 사역이 좌우로 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율법주의 신앙의 태가 막혀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세지말에는 흔들만한 모든 것들을 흔들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오늘날 교회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 오늘날 어떠한 인본적인 방법으로도 교회의 태가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상태를 보십시오.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안 되지 않습니까?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인본주의적인 방법이 통했습니다. 이사야 54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편 있는 자의 자식이 더러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제가 믿기로는 하나님께서 흔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모 신문에 나오는 모 교단의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교단의 재산을 다 합하면, 그야말로 수 십 조원에 이를 것입니다. 수 천 억 정도가 아니라, 수십조 원에 이를 것입니다. 그런데 작년 한 해 동안 늘어난 성도의 수가 천 명당 한 명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 교단의 모든 교회를 천 명의 교인으로 나눌 때, 각 교회마다 작년 1년 동안에 1명이 늘었다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천 명 교인의 교회에 성도가 일 년에 한 명 늘었다니요. 그 천 명 성도의 자라나는 자녀들만 해도 최소한 몇 십 명은 될 텐데요. 그런데 이것은 비단 그 교단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교단들이 다 그렇습니다.

또한 율법주의로라도 성도들을 교회에 잡아 두겠다고 했는데, 잡아질 것 같습니까? 저는 며칠 전에 모 신문을 보고 너무나 마음이 서글펐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기고한 글이었는데, 우리나라가 주 5일 근무제가 되면, 한국 교회는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분 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성도들이 토요일까지 일하면, 그 다음 날 교회에 올 텐데, 금요일까지 일하면 토요일부터 놀러갈 것이니 교회가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라니요. 이러한 말이 목회자와 성도들의 입에서 서슴없이 나을 정도이니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잘못되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로 성도들을 묶어놓은 결과입니다. 아니, 5일 일하기 때문에 놀러가서 주일날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율법주의의 속박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저는 주 5일 근무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쉬는 날이 하루 밖에 없어서 성도들과 함께 주말을 통해 기도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도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일반적인 태가 닫혀 있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저희들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의 삶에 나타나는 변화, 치유, 다른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키는 수축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사역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수평이동에 의한 확장 뿐 아니라, 전혀 예수를 모르던 자들이 예수님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놀라웁게 변화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초신자들도 그저 좋은 말을 듣기 위해 교회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근본적으로 만날 뿐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자라나기를,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진실로 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들은 저나 포도나무 교회 성도들이 뛰어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 모든 유업들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복음에 주신 약속들이요 유업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십자가의 복음을 가감없이 분명히 전하게 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놀라운 열매들이 맺혀질 것입니다. 목회자 개인이나 교회가 전반적으로 다루어지고 다져지는 기간은 있겠지만, 그 이후에는 놀라운 사역의 확장이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전하신, 그리고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명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토대로 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복음을 전하셨고, 제자들에게 다름 아닌 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토대로 한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 즉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 외에 우리들이 전할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리고 사도들처럼 십자가의 복음을 가감없이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교회는 놀라웁게 회복되고 세워질 것입니다. , 그 결과로 일어날 하나님의 역사 하나하나를 생각만 해도 얼마나 가슴이 벅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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