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성령의 은사 上
교회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접목시키기 위해 중요한 한 부분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너무나 필수적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옷 입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되 하나님의 길에 행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할 경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미혹되어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되고 말 것이며, 성령의 술도 쏟아져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날 덕을 세워야 할 성령의 은사가 오히려 교회를 분리시키고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회의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은사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귀히 여기는 환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 가운데 있는 은사로 인한 많은 문제들은 은사 때문에 생긴 문제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모든 성령의 은사는 온전하며 선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사실, 저도 과거에는 성령의 은사를 적극적으로 환영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은사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은사들로 인한 많은 부작용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년 전 하나님께서 그것이 옳지 못한 자세임을 비춰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은사를 가지고 아무리 잘못 사용하고 있을지라도 은사자체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선하며 온전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사에 대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을 가지고 있던 제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회개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를 소중히 여기며 환영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그 날부터 저에게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나타내시기 시작하셨고, 다른 은사들도 더욱 부어주셨습니다.
1. 성령의 은사에 대한 그릇된 이해
은사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은 교회에서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킵니다. 그 중 대표적인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은사를 신앙 성숙도의 척도로 이해하는 견해.
이 견해는 각 은사에 일정한수준의 신앙을 임의로 부과하는 견해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방언의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은 어느 정도 기본적인 신앙을 갖춘 사람, 통변이나 예언은 놀라운 믿음을 가진 사람, 기적을 행하는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은 최고로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러한 잘못된 견해가 매우 팽배해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날 때, 그들을 '추앙'하고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사들이 나타나는 장본인들은 내심 '그래도 내가 이 정도의 신앙이 되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셨지'라고 생각하며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사들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기도 합니다. 은사는 우리 신앙의 성숙도와는 별개로 주어집니다. 말 그대로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모든 비밀을 알 만큼 놀라운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이라도 영적인 분별력이나 하나님의 길을 아는 것 등 신앙적으로는 아주 어릴 수 있습니다.
이 왜곡된 견해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영향을 미칩니다.
첫째, 이러한 왜곡된 견해는 필연적으로 교회 안에서 시기와 질투를 야기 시켜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둘째, 많은 성도들이 자기들은 신앙이 어리다고 생각하면서 성령의 놀라운 은사들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은사들은 신앙이 좋은 목회자나 장로들이나 권사들에게나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러한 은사들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은사들은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고전 12:31 참조).
셋째, 어떤 성도들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성령의 은사들이 역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만약에 오늘날도 역사하면 영적으로 더욱 성숙한 자기들에게 먼저 나타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넷째, 어떤 성도들은 은사는 강하게 나타나는데 영적으로 매우 어린 성도들을 보면서 시험에 듭니다. 모든 은사는 우리 신앙의 성숙도와 상관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데서 발생하는 잘못들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그럼 신앙의 성숙은 은사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할 때,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은사들이 더욱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은사는 강하게 나타나지만 영적으로 미숙하면 성도들의 덕을 세우기보다 그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항상 구해야 합니다. 특히 무엇보다 아버지의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필수적인 마음입니다. 한 가지, 은사와 관련한 중요한 자세는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날 때, 은혜의 선물인 은사 자체나 통로에 불과한 그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은사를 주셔서 우리들을 만져주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가운데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들로 인하여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반면에 교만하거나 자랑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렇게 귀한 은사들을 우리 가운데 나타내셔서 우리들을 만져주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은사를 통해 관심을 받고 찬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은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2) 은사를 훈장이나 메달로 생각하는 견해
이 견해는 자기들이 노력하고 헌신한 댓가에 대한 보상으로 은사를 보는 견해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내가 3일 금식기도 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다" 혹은 ”내가 40일을 작정하고 철야기도 했더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다“라고 간증합니다. 이 말 속에는 당연히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댓가로 나에게 이런 은사들을 주셨다'라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른 누구보다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다면 다른 누구보다 자기들에게 먼저 주셔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모하는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령한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 (고전 14: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은사들은 우리 노력의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더 이상 은혜의 선물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들을 노력의 댓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보상이라고 생각할 때, 이러한 견해는 필연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내세우는 교만에 빠지게 만들 것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은사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자기들의 헌신과 노력을 자랑하고 내세웁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나타나는 은사를 명함에 써가지고 다니면서 광고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해서 받은 은사인데" 혹은 "내가 이 은사를 받기 위해 외국에 세미나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데"라고 말하면서 은사를 거저 나누어 주기를 거부합니다. 참으로 타락한 행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사모하라는 말은 간절히 사모하고 기대하고 갈급하라는 말입니다. 일정수준 이상의 기도나 금식이나 헌신이나 봉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1~5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듯이 성령의 모든 역사는 전적으로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에게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저회들 모임 가운데서 성도들이 특별히 기도하거나 금식하거나 헌신한 것도 아닌데 놀라운 은사들이 그들에게 부어지는 것을 수없이 봅니다.
(3) 은사를 자신의 신학과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으로 이해하는 견해
사실 이 부분은 매우 미묘하고 민감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주의깊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들을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내세우는 신학적인 주장과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신임하시는 증거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리와 우리의 행위를 신임하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러한 은사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떠한 모임에서 성령의 강한 은사들이 나타날 때, 그 은사들을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으로 생각하여, 그들의 열매나 그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에 합한 것인지를 살펴보지도 않은 채 그들을 맹목적으로 따릅니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또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혼란과 흔동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성도들은 신앙의 올바른 가치관 위에 서 있지 않고 주의 길을 따라 행치 않으면서도, 자신들을 통해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전적으로 신임하시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회자의 지도나 인도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교회에서 가장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며, 이러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미혹됩니다.
성령의 은사는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두 가지 면에서 이 점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심지어 거역하는 자에게도 은사를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에베소서 4:7~10과 거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시편 68:18을 대조하여 보면 이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십니다. 그분은 심지어 악인에게도 비와 햇빛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지어 거역하는 자에게도 그가 간절히 사모할 때 성령의 은사들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은사는 후회함이 없습니다. 성경 로마서 11:29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는데, 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잘못 사용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그 은사를 즉각 거두시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탄을 보십시오. 그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은 고유적으로 그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그가 타락하기 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능력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하고 난 후,하나님께서 주신 그 능력을 가지고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은사가 나타나는 사람의 신학이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신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우선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들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2. 은사와 성령님의 주권
성령의 은사를 이해함에 있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령님의 주권입니다. 즉 언제, 누구를 통해, 어떠한 은사를 나타내실 것인가는 전적으로 성령님의 주권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특별히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갖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무슨 은사를 주실 것인가는 성령님(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그 외에도 고전 12:7과 엡 4:11 참조).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그렇다면, 이 사실이 내포하는 의미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 우리에게 주신 은사의 종류를 결정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라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은사들을 서로 대조하여 시기하거나 반대로 교만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2~26에서 몸의 비유를 들어 이 점을 매우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펴고 그 구절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구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어떠한 은사가 더 귀하고 또 어떠한 은사가 덜 귀한가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매우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모든 은사가 그리스의 몸을 세우기 위해 다 요긴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은사들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가 주어지느냐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을 어떻게 감사하며 신실하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들로 인하여 교회 가운데 가장 많이 나타나는 문제가 바로 이 시기와 질투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오늘날까지 성령의 은사들이 강하게 나타났던 많은 교회들이 은사들로 인하여 교회가 서로 나누어지고 분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일부 교회와 교단에서는 성령의 은사들을 아예 무시해 버리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성령의 은사들이 교회를 분열시키는데 사용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사실입니까!
사실, 시기와 질투의 문제는 반드시 다루어져야 할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절대로 그것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시기와 질투는 교회를 분열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기와 질투가 다루어지지 않으면 머지않아 개인이나 교회 모두 미혹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니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느니라"(약 3:14-16).
시기와 질투는 개인적인 야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위 구절에서 말하는 다툼은 개인적인 야망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개인적인 야망이 다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본인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교회 전체를 위해서 자살 행위와 같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야망은 가장 흔하게 스스로 세우고자하는 자세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실 때까지 조용히 섬기며 기다리기보다, 자기가 나서서 스스로를 세우려고 합니다.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세워주실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섬기며 순종하기보다, 인간적인 방법과 광고와 홍보를 통해 그 사역을 스스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 경우, 그 뒤에는 개인적인 야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야망이 다루어지지 않은 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그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화가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교회 안에서 시기와 질투 그리고 개인적인 야망을 다룰 수 있을까요? 우선 하나는 은사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을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아무리 이론적인 지식이 많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십자가의 복음과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그 토대 위에 서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개인적인 야망이 다루어지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야 비로소 시기와 질투의 문제가 다루어질 것입니다.
둘째, 우리에게 무슨 은사를 주실 것인가를 결정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라는 사실이 내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맺는 열매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를 가지고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저에게 세 아들이 있는데, 마치 성탄절을 맞이해서 내가 나의 세 아이에게 각각 내 마음에 정한대로 선물을 사주는 것과 같습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그 선물을 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댓가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선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 성탄절에 큰 아이는 중학생이라 만년필을 사주고, 둘째는 초등학교 4학년이라 새 책가방을 사주고, 막내는 초등학교 3학년이라 레고를 사주고 나서 둘째 아이에게 “너는 왜 만년필이 없어?”라고 그를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일 겁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은사도 우리들이 그 은사를 받을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그 댓가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문자 그대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은사를 받았는가 혹은 어떠한 은사를 받지 않았는가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가지고 어떻게 활용하는 가를 포함해서 우리가 맺는 열매를 가지고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그러나 열매를 중요시하고 은사를 소홀히 하는 자세 또한 옳지 않습니다.
오늘날 일부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앞세운 나머지 여러 가지 은사들로 인하여 소위 펄펄 뛰는 반면, 성령의 열매는 거의 없어 불신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반면에 또 다른 일부에서는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며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성령의 은사는 무시합니다. 은사는 감정적인 ‘무식한 기독교인들이나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매우 무기력하고 무능력 합니다. 이 둘 다 잘못된 극단입니다. 우리는 둘 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은사와 열매의 조화와 균형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삶에는 어느 누구의 삶보다 성령의 열매가 넘쳤던 반면, 동시에 그 분의 삶에는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어느 누구의 삶보다 더욱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들은 정확하게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은사와 열매의 차이는 은사는 주어지는 것이고 열매는 길러지는 것입니다(Gifts are given; fruits are grown). 즉, 성령의 은사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없다가도 내일부터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열매는 우리에게 어느 날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맺혀지는 것입니다.
3. 은사에 대한 두 이해(소유냐 나타나심이냐?)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해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를 소유로 보는 견해와 나타나심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둘 중에서 오늘날우리나라에는 소유로 보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 소유 개념으로서의 은사
이 개념에서는 은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이해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고전 12:12~13 참조). 그래서 이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각 성도는 교회의 한 지체로서 교회 전체를 위해 감당해야 할 한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곧 성령께서 주신 은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12:27~30을 이에 대한 좋은 성경적인 예로 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각 성도에게 하나씩 몸의 지체로서 각각의 직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소유의 개념에 따르면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1) 각 성도에게는 그들이 거듭날 태 하나의 은사가 내재적으로(innately) 주어진다.
이 경우 은사는 각 성도에게 소유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성도에게는 하나 이상의 은사가 주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많아야 두 개 내지는 세 개로서 제한된 숫자의 은사만이 주어집니다.
2) 이 은사들은 발견되고 개발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자주 "은사 배치도" 혹은 "은사 개발“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 말들이 바로 이 견해를 반영하는 것들입니다. 각자는 이미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하여 개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사의 발견은 개인적인 경험, 예언, 시험 등을 통해서 될 수 있고, 개발은 보통 적절한 훈련코스를 통해서 되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3) 각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로 만족해야 한다.
이미 각자에게는 은사가 주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은사를 달라고 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는 구절을 각 성도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보다는 더 큰 은사를 가진 지체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는 교회에 주어진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견해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1) 어떠한 은사도 우리 마음대로 활용할 수 없다.
이 견해가 맞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하고 개발하였으면, 그 은사를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외에는 어떤 은사도 우리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치유의 은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사람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자기가 원하는 때에 치유할 수 없습니다. 치유는 전적으로 성령께서 움직이셔야 가능합니다.
2) 이 견해로는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9에서 "다 선지지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답변은 "아니다" 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에서 우리에게 예언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사도바울은 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답변은 '아니다' 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방언하는 자는 모두 통역하기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 사도 바울은 한편으로는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고전 12:30)라고 말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가 다 방언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고전 14:5). 그리고 고린도전서 14:31을 자세히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예언할 수 있는 것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희는 다‥‥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이렇게 볼 때, 소유의 개념으로는 이 구절들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은 각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 은사에 대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
이 견해에 따르면, 성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가 무엇이든지 감사하게 여기며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에 대한 그러한 수동적인 자세는 성경이 취하고 있는 자세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데서도 은사에 대한 그러한 수동적이거나 운명적인 자세를 권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성령의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2:31, 14:1, 12). 그리고 사도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집합적으로 교회를 향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성도를 향해 하고 있습니다. 방언(고전 14:5, 13)이나 예언(고전 14:1, 31, 39)에 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보면, 이것들이 개별적인 성도들을 향한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2) 성령의 나타나심으로서의 은사
저는 위의 문제들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보는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2:7은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나타나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 사람이 나았으면 지금 나에게 치유의 은사가 주어진 것입니다. 또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했는데, 그 사람을 위해 예언이 주어졌으면, 예언의 은사가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타남"이란 단어는 영어로 'manifestation'인데, 영어의 'manifestation' 이란 단어는 '춤추는 손'이라는 뜻을 가진 두 개의 라틴어 단어가 합해져서 생긴 단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는 마치 성령의 춤추는 손과 같습니다. 즉, 오케스트라에서 각종 다양한 악기들이 지휘자의 손에 의해 소리를 내듯이, 성령의 지휘에 따라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납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에서 14장은 교회가 예배로 모일 때를 배경으로 쓰여졌습니다. 고린도전서 11-14장에 보면, "모일 때에"나 "교회에서"나 이와 같은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 번 나옵니다(고전 11:4-5, 17, 18, 33, 12:28, 14:19, 23, 26 참조). 그래서 교회가 예배로 모일 때, 성령의 지휘를 따라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이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이렇게 성령의 지휘아래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나는 예배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4:26이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보십시오.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님의 지휘아래 이 사람에게 계시가 주어지기도 하며, 저 사람에게 방언이 주어지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통역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찬양도 그리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통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개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1) 모든 성도들을 통해 모든 종류의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소유의 개념으로 성령의 은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은사는 가지고 있는 반면 그 나머지 은사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나타나심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그 분이 택하시는대로 각 성도를 통해서 각종 다양한 은사들을 그때 그때 나타내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의 두 구절이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11)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말은 우리를 통해서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그분의 나타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물론 언제, 누구를 통해, 어떤 은사를 나타내실 것인지는 전적으로 성령님이 결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그리고 특히 예배로 모일 태, 성령께서 우리들을 통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고, 치유해 주시고, 세워주시고, 주님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사모하고, 기도하고,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팀 사역을 하다보면, 이 부분을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을 통해 다양하게 역사하십니다. 한 사람을 통해 예언을 주시고, 다른 사람을 통해 지식의 말씀을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통해서 치유를 행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예언, 지식의 말씀 그리고 치유의 전문가들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다른 때에는 동일한 사람들을 통해서 다른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그들을 통해서 전혀 역사하시지 않고 오히려 전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런 일을 볼 때마다 저는 오직 성령님께서 이 모든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너무나 선명하게 봅니다. 이 모든 역사들은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 분의 주권대로 그 때 그 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여러 사람을 통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4. 성령의 은사의 4가지 단계
우리가 성령의 은사를 이렇게 나타나심의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하게 될 때, 성령의 은사에는 네 가지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성령의 은사만을 말한다면,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단계는 세계적으로 참으로 놀라웁게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존 윔버 목사가 정리한 것인데, 성령의 은사를 네 단계로 설명할 때, 이해가 더 쉽습니다. 이 단계들은 지극히 성서적일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은사에 대한 다른 어떠한 설명보다도 고린도전서를 포함한 성경의 가르침에 가장 잘 부합합니다.
(1) 첫 번째 단계 : 임무(role)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전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가르치고, 치유하고, 위로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합리적인 사고의 차원에 속합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실함입니다. 사실 성도로서 우리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는 바로 신실함입니다(히 3:1~6참조). 우리가 예수를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이 신실하게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치유를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낫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어차피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잘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주님의 명령을 따라 치유를 위해 신실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르치는 것이나 위로하는 것 등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급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엘리야의 경우에서와 같이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것이나 과부 집에 가서 숨는 것이나 그 상급은 똑같을 것입니다.
(2) 두 번째 단계 : 성력의 나타나심(manifestation)
두 번째 단계는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해 나감에 있어 성령께서 택하시는 대로 나타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께서 나에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문제를 알려 주십니다. 그전에 내가 전혀 알지 못하던 사실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보에 기초해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그 사람이 놀라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고 내가 전한 복음에 대해 매우 많은 관심을 보이더니 결국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 순간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의 지혜로 사역을 감당하는 것과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의 차이를 알면 이 단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로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가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다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전도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전도하면, 우리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말을 건네고, 또 어떤 순서를 따라 복음을 제시할 것인가를 잘 압니다. 그리고 그 순서대로 나가서 행합니다. 물론 어떤 방법으로든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의 나타나심을 따라 전도하는 능력전도는 다릅니다. 우리는 먼저 나갑니다. 필요한 모든 연장을 준비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빈 연장통을 가지고 나갑니다. 나가면서 필요한 때에 성령께서 필요한 연장을 준비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나가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절박하게 구합니다. 그 때 성령께서 필요한 대로 지식의 말씀을 주시기도 하고, 지혜의 말씀을 주시기도 합니다. 혹은 다른 은사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나타나심을 따라 순종할 때,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가 자주 나타나는 것을 느낍니다. 상담을 하면서 자주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저는 자주 난관에 부닥치곤 합니다. 도무지 내 지혜로는 무엇이라고 권면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자주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저는 겉으로 계속 상담을 하면서, 속으로 '성령님, 도와주세요. 성령님,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그 분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면 저는 자주 성령께서 대화를 인도해 가시면서 감히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로 그 사람의 당면한 문제와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정확하게 제시해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런 경우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해 나감에 있어 성령께서 택하시는 대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혹은 우리를 통해 나타나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의 차원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면서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고 구하고 기대해야 합니다. 속으로라도 '성령님, 도와주세요.' 라는 기도를 자주 드리면서 그 분의 인도와 역사를 기다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가끔 성령께서 택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혹은 우리를 통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세 단계로 나누지 않고, 네 단계로 나누는 데는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단계가 직접으로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첫 번째 단계를 신실하게 잘 하는 사람에게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단계가 더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실하게 전도를 잘하는 사람에게 그들이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구할 때 지식의 말씀의 은사, 치유의 은사, 지혜의 말씀의 은사 등 전도를 위한 은사들이 강하게 자주 나타납니다. 어차피 은사들은 우리 가슴에 달고 다니기 위한 훈장들이 아니라, 주님의 사역을 위한 도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성령의 나타나심이 우리에게 있을 때 이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한 삶을 사는데 있어 순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더욱 강하게 나타나시고, 순종할 때 우리는 놀라운 능력을 경험합니다. 때로는 작은 감동에 순종했는데 참으로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타나실 때, 그대로 순종한다는 것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나는 주님을 위한 바보다'(고전 4:10)라는 자세를 가지고 사람들로부터 창피와 모욕을 당할 각오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령께서 놀라웁게 사용하시는 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나님의 인도를 배워 갈 때, 하나님은 가끔 길가에 앉아 있는 중에게 가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라는 것과 같은 감동을 종종 주셨습니다. 그런 일이 쉽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창피를 무릅쓰고 순종했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3) 세 번째 단계 : 사역(ministry)
세 번째 단계는 사역입니다. 방금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나아갈 때 때로는 성령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특정한 은사가 자주 나타날 뿐 아니라, 또한 더욱 깊고 높은 차원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그 사람에게는 그 사역이 성령님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떤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놀라운 예언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숨쉬기가 바쁠 만큼 줄줄이 주어진 적도 한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예언이 주어지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이 드뭅니다. 보통 한 두 마디의 감동을 주시는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제 아내의 경우는 다릅니다. 제 아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도 나를 통해서 주신 것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예언을 주십니다. 그것은 곧 제 아내에게는 예언 사역이 맡겨졌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가르치는 은사가 자주 그리고 때로는 매우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것은 저에게 맡겨주신 사역과 관련이 있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은사에 대해서 말하면서 몸의 지체에 비유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사역이 바로 이 부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4) 네 번째 단계 : 직분(offices)
마지막 단계는 직분입니다. 이 단계는 교회가 각 성도에게 나타나는 사역을 발견하고 그를 공식적으로 그 직분에 임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28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 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은사가 바로 직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사용된 단어의 시제가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2:10~11절에 나오는 단어들의 시제와는 달리 단순 과거형인 것을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말하는 은사는 앞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나타내 주시는 은사와는 달리 아예 임명해 주신 은사를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빌립 집사의 네 딸들은 모두 예언 사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예언이 빈번하게 그리고 깊이 주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가보에 대해서는 선지자라는 칭호가 붙었습니다(행 21:9~10). 그 이유는 그에게 주어진 사역을 교회가 발견하고 그를 선지자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일군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세워져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야 그 일군들이 하나님이 세우시는 일군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사역에 대한 어떠한 검증과정도 전혀 거치지 않습니다. 제직들의 경우 우리는 단지 교회에 대한 충성도나 교회에 등록한 연도 등을 감안하여 임명합니다. 그리고 전도사나 목사의 경우는 목회 경력이나 학력을 보고 임명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교회가 되지 못하는 가장 주된 원인 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성령께 민감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또한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직분이 타락하게 된 가장 주된 원인 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시면서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창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5~12절)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들은 직분을 마치 신분처럼 여기며, 그것을 통해서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려고 하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내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사용합니다.
제6장 성령 세례 (0) | 2018.02.09 |
---|---|
제5장 성령의 은사 下 (0) | 2018.02.09 |
제3장 사도들의 사역 下 (0) | 2008.10.18 |
제2장 사도들의 사역 上 (0) | 2008.10.11 |
제1장 예수님의 사역 (0) | 2008.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