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17
아브라함을 통해서본 하나님 나라의 리이더 쉽
세 번째, 아브라함은 실패를 통해 자라났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은 실패를 통해 자라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아브라함의 성품이 하나님 안에서 성숙하게 하는 일에 기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난 모든 사건들과 관계들을 통해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품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시가에 합당한 성품으로 자라나도록 사용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믿음의 거인으로 리이더쉽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전혀 믿음의 조상다운 면모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그는 하나님과 좀 더 깊고 성숙한 관계로 자랐습니다. 창 12장 1절부터 4절입니다.
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②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③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④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지만 하란까지는 부모와 동행합니다. 그리고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자 하나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75세쯤 되었을 때입니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쉽지않은 결정입니다. 어디로 가라고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냥 떠나면 알게하시겠다고만 합니다. 아브라함은 떠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순종한 것은 친척인 롯을 데리고 갑니다. 미지의 세계로 말입니다. 그것도 나이가 많은데 여기서 그는 젊은이라도 데리고가야 마음이 놓였는지도 모릅니다. 이것만 보아도 믿음의 조상으로 자라나야 했습니다. 결국 데리고 간 결과는 즉 작은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참담한 댓가를 지불합니다. 둘 다 부강하게되자 종들끼리 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정불화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가족끼리 싸우니 말입니다. 서로 의지가 되려고 했던 사이가 이제는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롯이 우하니까 아브라함은 좌합니다. 롯이 평지를 택하자 아브라함은 산지를 택해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소돔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은 간절히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롯의 자손들이 바로 모압과 암몬 자손들입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원수가 되어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다툽니다. 작은 불순종 하나가 그와 자손들에게 끼친 고통은 참으로 컸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이런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떤 것을 더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 못지않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완벽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뜻은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실패를 통해 배워야 하는데 배우지 못하면 그것이 심각한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실패를 통해 배웠어야 하는데 반복적으로 실패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유업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네 번째, 아브라함은 영적인 표징들 위에 세워졌습니다.
영적인 표징은 표석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떠한 표석들과 같은 것 위에 아브라함의 리이더쉽은 세워졌습니다. 창세기 12:7-9 입니다.
⑦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 ⑧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⑨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아브라함은 잘 한 것 중 하나가 예배를 잘 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자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갑니다. 지시할 땅으로 왔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세월이 흐르고 어떤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다가 단을 쌓고 예배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쌓은 단들을 주욱 연결시켜보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은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계시하였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해 가실 때, 하나하나 영적인 표석들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계시하시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는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보이시는 특정한 사건들을 통해 우리들을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들을 연결해 보면 주욱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그리고 어디로 인도하시는지를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무슨 일을 계획하시고 나를 부르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반면에 누군가가 나를 위해 예언기도했는데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것과는 전혀 별개야. 그러면 그것은 대개 잘못받은 것일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목표와 목적이 되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될뿐만 아니라 현재적인 열망 역시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주된 갈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서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선명하게 볼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필수입니다. 물론 그리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표징들을 주십니다. 그렇게 전환되어질 때 하나님께서 더욱 선명하게 보이시는 것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신 사건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날마다 만나주시면 좋겠지만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만나주신 사건. 이 사건은 하나님이 나를 방문하셨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건들입니다. 말씀하시고 알리신 사건들입니다. 돌아보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일직선 상에 있음을 봅니다. 저의 경우는 어디로 인도하신느지를 봅니다. 어떠한 일로 초총하시는지도 봅니다. 어떠한 일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시는지도 알겠더군요.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다른 영적 거인들과 비교하기를 원치않으시는 것같습니다. 안그러면 관점이 다르게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부르심은 각자에게 다릅니다. 즉 각자를 부르신 부르심이 다릅니다. 각자를 통해서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다 다릅니다. 성도들이 많이 모인 교회가 되었다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 큰 회당을 담임하는 회당장도 많았고, 성경을 잘 쪼개는 율법사들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많은 감동을 주었던 리이더들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같도다”하셨습니다. 목자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그리로 인도하는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외부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 너무나 세상적인 가치관에 토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각자를 부르신 부르심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의 부르심 신경쓰지 말고 나를 부르신 부르심에 신경써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마다 다릅니다. 교회를 세우신 부르심이 다를 수 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세계복음화를 위해 쓰셨고 예루살렘교회는 예루살렘교회대로 에베소교회는 에베소교회대로 쓰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부르신 부르신 가운데 행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비교하고 외보적인 관점에서 수치로 따지면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표징들로 인도하십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나주신 사건들을 정리해 보십시오. 특별히 말씀하신 부분들을 정리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디로 초청하시고 계신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 번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구속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것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걸 아시는 분이시니까 아브라함이 실수하기 전에 미리 도와주시면 될 것같은데도 하지 못하도록 막으시면 되는데도 억지로 그렇게하시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많은 경우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신 다음 그들을 구속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실패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범죄하기로 마음먹으면 억지로 막지는 않으십니다. 허락하십니다. 실패한 다음 하나님께서는 많은 경우 그 옆에서 구속의 하나님의 되어주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리하셨습니다.
저의 경우도 하나님이 많이 보여주신 때는 제가 넘어지고 실패하여 힘들어 할 때였습니다. 그럼으로 리이더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실패와 잘못들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복되지 않도록 필요한 조정을 거쳐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도 실패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가나안을 지시하셨지 애굽을 지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고 애굽의 풍년 소식을 듣자 물어보지도 않은채 떠납니다. 우리가 지금 처한 환경이 어렵고 다른 곳에 넉넉함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물어보지도 않은채 떠나면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가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내일로 마음 상해야 했습니다. 바로왕 앞에서 죽음을 면하기 위한 거짓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이 미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꿔가시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소망삼는 사람은 요한입니다. 요한은 우레의 아들중 하나입니다. 사마리아 지나면서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멸하소서”말했습니다. 주를 향한 열심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보통 성미가 급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가 바로 사랑의 사도가 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삼으신 것을 보면 우리도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연약함을 보지말고 하나님의 강함을 보십시오. 그러면 못빚어서 못쓰실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린 바되어 주님의 빚으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빚으실 수 있습니다.
진짜로 배우는 것은 실무 즉 실제로 살아가면서 주님과 동행해 가면서 실패와 넘어짐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구속을 경험하고 옳은 것을 경험하는 가운데 배웁니다. 이론적인 것을 공부를 통해 배우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다 준비될 때를 기다린다면 절대로 기회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따라 행하기 보다는 환경을 따라 행하고 거짓말까지 했음에도 하나님은 그 사건들을 구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거짓말한 댓가는 작지 않습니다. 나중에 한 번 더 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자식이 그 거짓말을 그대로 합니다.
사람의 성품적인 결함을 그대로 놓아두면 다음 세대까지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출 34:7 신 5:9입니다.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구속을 경험했다고해서 넘어짐을 정당화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넘어짐을 통해서 구속을 나타내시고 우리를 빚어가십니다.
여섯 번째, 아브라함은 지름길을 취하도록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영적 리이더들에게는 지름길을 취하도록 허락되지 않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리이더들이 취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0이 넘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자녀를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양자를 들이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법입니까.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네 핏줄이 유업이 될것이라고 합니다. 그 후 10년이 흐릅니다. 씨받이를 들였습니다. 당시의 행위입니다. 사라가 도리어 권면했습니다. 아브라함은 10년을 기다린 다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의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사람의 방법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시는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의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도우려고 할 때 실패합니다. 이게 지름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지혜로울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길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지름길을 택했고 커다란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이스마엘의 탄생으로 하갈이 주인행세합니다. 사라를 무시합니다. 가정불화가 또다시 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마도 엄청난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어 쫓으라고 하십니다. 자식과 그 자식의 어미를 내어쫓는 아브라함의 마음이 오죽 답답했겠습니까. 성경에도 표현되기를 불편한 심기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아랍자손들입니다. 지금까지 전쟁이 계속됩니다. 아브라함은 지름길을 택하자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사탄이 와서 시험한 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십자가의 길을 가지말고 지름길을 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빵을 공급해주고 사람들에게 능력을 과시하고 그 능력을 의지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루라고 충동질하였습니다. 쉬운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훈련을 시키실 때 지름길을 택하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으십니다. 지름길이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인간의 방법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됩니다. 지름길을 택하면 리이더는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쇼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의지하여 마치 야곱이 씨름하여 응답을 얻어냈듯이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방법에만 메달려서 쇼부를 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워지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 아브라함은 믿음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성숙해 갔습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이 실망하자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셔. 별을 세워보라고. 해변가에 가셔서 모래알 세워보라고. 네 자손이 그 같으리라. 별을 보면 자기 자식들을 보는 것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기다림에 지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했다가 그 때마다 깨어집니다. 자식을 내어쫓아내는 지경에 까지 이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깨달 았을 겁니다. “아, 내 방법으로 했다가는 안된는구나” 배웠습니다. 깨어진 다음에도 못배우면 문제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부터 22절입니다.
○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니 ○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이런 믿음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자랐습니다. 자기 몸의 죽은 것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연약해지지 않을 정도로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믿음에 의한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름길을 동원하면 넘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실패했지만 실패를 통해 배웠고 마침내 믿음으로 의지하는 데에 까지 자랐습니다.
여덟번째,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같은 말입니다. 복종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됩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은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 끝났는줄 알았는데 한 가지가 더 남아있었습니다. 이삭을 각을 떠 제사지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방신에게 있는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았지만 쉽지 않았을 겁니다. 다시말해서 이삭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이루어지는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바치라고 하는 것은 모든 비전과 모든 언약의 기대, 성취 이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용납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마저도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다 포기하라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유일한 유업이요 소망인가를 보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순종을 통해서 채우시는 여호와 이레를 경험합니다. 말씀하시는 바를 채우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믿음은 자라납니다. 아이가 없어 주실 줄 믿는 것과 있는 아이를 죽여서 제사로 드리면 재 속에서 부활시켜 다시 살리실 줄 믿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는 비교가 안됩니다. 나중에는 믿음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어느날 갑자기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통해서 자랍니다. 믿음이 드러나면서 훈련을 통해 자라납니다.
아홉 번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빚어진 결과 그는 경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족장이 되었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되었고 무엇보다 이사야 41장 8절과 야고보서 2장 23절 입니다. 하나님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우리가 하나님께 “전 하나님의 친구가 되길 원합니다” 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넌 내 친구야”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후자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었음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시작할 때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이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든 성품 자질,지혜, 정력, 힘을 보고 택하시지 않고 그의 중심을 보고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빚어가셨습니다. 시작할 때는 보통 사람이었지만 빚어질 때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어서 빚으신대로 삶을 조정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워 이렇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유업은 부모때부터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본격적인 훈련은 75세부터 시작되었는데 참 대단합니다. 그때부터 시작해도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빚어져서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우리 모두를 위해서 놀라운 계획을 세우시고 계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체로서 자리가 있습니다. 이미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시고 선한 일을 위하여 택하셨고 인도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시키시는 지를 보고 여러분 삶 속에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꺼이 빚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환영함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들을 세우실 때 리이더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택하시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심을 보고 택하십니다. 그들로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일, 하나님을 성품을 닮아가는 일로 계발시키시고 그리고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통해서 하실 일들을 기대합니다. 하나님의 계획들이 남김없이 다 여러분의 삶 속에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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