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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에베소교회를 향한 편지

시리즈설교/소아시아7교회

by 발의무리 2011. 2. 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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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강 에베소교회를 향한 편지



계2:1-7절입니다.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오늘부터 2부예배 시간에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에베소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포도나무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시기적절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교회를 향한 편지를 신학적으로 두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하나는 교회사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시대가 바로 지난 시대이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말세지말의 교회를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또 하나는 당시 소아시아교회를 향한 일곱교회를 향한 편지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어느 해석이든지 상관없이 일곱교회는 실존하는 교회에 보낸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교회가 처한 현실과 관련해서 주신 메시지이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일곱편지 다 크게 5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둘째, 칭찬. 셋째, 책망. 넷째, 회개촉구. 다섯째, 회개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 나옵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에베소교회를 향한 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편지에서는 크게 신앙의 본질과 교회와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신앙의 본질과 교회와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1.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사랑함이 가장 높은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교리적인 앎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개인적으로 실질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우리 전존재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존재로 사랑한다는 말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것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열망과 열정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결혼식 주례를 했습니다. 이런 설교를 했어요.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날 많은 분들이 하나님이 목적이고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니까 많은 분들이 거부감을 가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냐고 합니다. 신앙생활하면 적당히 봉사하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 된다는 것은 과도한 메시지라고 합니다. 누가 예수믿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몰라서 그럽니다. 예를 들면 부부간에 있어서도 오늘날 결혼생활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살고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심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생명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하게 주려고 오셨다고 하는데 성도들의 삶에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신앙의 올바른 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성경을 보면 상반되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아비나 어미를 아내나 자식을 미워하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론 미워한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는 것은 아니지요. 주님보다 더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 관계 우리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비교해서 가까운 사람에게 미움이 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극단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다른 곳에서는 말합니다. 남편들이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하라고 합니다.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셔서 죄를 지시고 그당시 가장 끔찍한 벌인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만큼 사랑하라고 합니다. 또 아내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되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 같이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해가 잘 안되는 것입니다. 상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제는 미워하라고 해놓고 언제는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상반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파라독스입니다. 자식이나 부모를 미워하지 않으면 합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누구든지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고 잃으면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 되시는 것에 들어가지 않고 적당하게 하면서 하나님이 도와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남녀간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여자가 능력좋고 배경좋은 남자를 위해 의도적으로 잘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잘해주어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신해도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수단되는 삶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이 삶에 있어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내 목표 내 필요 내 가정 내 식구가 목적이고 내 미래 내 사업이 목적이고 하나님은 이것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헌신과 봉사를 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수단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머나먼 거리에까지 가서 향료를 사다가 하나님께 드려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목적이 하나님이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이 되면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진 삶을 살면 가정에 부부간에 진정한 평화가 화합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고 목표가 되라고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거부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버겁다고 합니다. 적당한 신앙생활은 이해를 하겠는데 하면서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전적인 하나님 사랑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주고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에베소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주신 메시지인데 5절입니다.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너희가 그곳에서부터 떨어진 높이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높은 곳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높은 곳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함이 높은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입니다.

첫째는 우리에게도 그것은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만큼 귀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안에 진정한 생명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과 신선한 만남에서 보았듯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신앙의 본질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모든 생명이 우리에게 흘러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빌3장에서 보면 종교적인 배경 신앙적인 교파 지식 종교적 열심. 613가지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지켰습니다. 우리는 꿈도 못꾸지요. 바울은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말로 인격체이신 주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것보다 더 소중하고 높은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알기 위해서 배설물로 손해로 떨어버렸다고 합니다. 여기도 보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뿐아니라.

그래서 에베소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신앙의 본질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를 기억하라. 높은 곳에 있었는데 너희가 떨어졌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편에서도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이 높은 것이며 가장 소중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2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을 사랑함입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임재가 걷혀있어서 고민합니다. 개인 가운데 교회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될까 고민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복됩니다.

여기서도 보면 교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계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한분입니다. 예를 들면 슬픔을 당한 자에게 예수님은 위로자로 오십니다. 연약한 자에게는 예수님이 반석으로 오십니다. 위험에 처한 자에게는 산성으로 오십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오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몸의 죽은 것 같은 자에게 없는 것처럼 있는 것처럼 보이시는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의 하나님으로 보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서 나타나는 모습이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이 교회마다 다른 이유는 처한 상황 때문입니다.

에베소교회에 나타나신 모습은 오른손에 일곱별을 가지시고 일곱 금촛대 사이로 운행하시는 분으로 보이십니다. 이 모습은 1장 20절에 나옵니다. 별은 교회사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다 어떤 사람들은 목회자라고 하기도 말합니다.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오른편에 주의 사자들을 들고 계시고 예수님이 촛대 즉 교회 가운데 운행하고 계십니다. 이 모습은 신약에 약속하신 그대로 예수님이 임재하시며 교회 가운데 운행하시는 모습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하나님의 성전된 삶과 관련해서 나옵니다. 16절입니다.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구약을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구약성경에 내가 저희 가운데 행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고 저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하신 말씀처럼 신약성경에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교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거하시며 두루 행하신다는 무엇을 말합니까? 증표는 광야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성막은 신약성경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성막은 하나님이 백성을 성전삼고 거하시는 교회를 상징했습니다. 성막은 진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사남북으로 진을 쳤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 중심에 임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두루 행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먹을 것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입을 것을 마련하셨습니다. 원수에게서 보호하셨고 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광야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보이신 것처럼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교회 가운데 거하시며 보호하시며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며 저들을 위해 싸우시며 필요를 채우시며 원수의 세력을 멸하시며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일이 교회안에서 성취되고 이루어져서 교회안에서 주님이 운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른손에 일곱 별을 가지시고 촛대 사이에 두루 행하시는 모습으로 보이신 것은 약속하신대로 예수님이 교회 가운데서 운행하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말을 잘 들으세요. 여러분 이렇게 약속하셨는데 이미 신약시대에 이루어졌는데 오늘날 교회 가운데 실재가 안되는 것입니까? 왜 신약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이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안이루어지니까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전혀 경험되지 않고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은 신앙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격체되신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전 존재로 사랑하고 구하고 찾는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과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는 길은 신앙의 본질에 거하는 것입니다.


3.하나님을 사랑함에서 떠나면 주의 임재가 걷힙니다.

예수님이 너희 가운데 거하시며 두루 행하시는 분으로 보인 다음에 너희가 나를 사랑함에서 떠나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돌이키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임재를 거두신다는 말입니다. 임재를 거두면 우리에게 남은 것이 없습니다. 임재가 걷히면 피폐해집니다. 회복되는 길은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우리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여러 해동안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머물면서 하나님이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던 지역입니다. 바울의 손수건을 갖다 얹어도 병자가 낳았습니다. 그림자만 지나가도 나았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던 지역이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들이 바울의 삶에서 그런 식으로도 나타났습니다. 아데미 라는 신전이 있었고 우상숭배의 핵심지였는데 그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또한 에베소교회를 사도요한에 담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을 보면, 그 당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전 세계적으로 소문이 나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포도나무 교회도 순식간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에베소교회가 떨어졌다면,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만큼 잠들어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교리적으로 뛰어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세웠고 요한이 가르쳤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정확하게 거짓선지자들을 분별해서 쫓아냈습니다.

본문을 보면, 2절입니다.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뿐만아니라 말씀을 잘 알아서 자기들 나름대로 열심히 섬긴 사람들입니다. 너희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 너희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며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안다고 예수님이 인정할만큼 열심히라고 신실함이라고 부지런함이라고 한 교회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잠시 하다 만 것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했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오늘날 한국에 있다면 금방 소문날 것입니다.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말씀에 서고 하나님을 열심이 섬기고 인내하고. 드믑니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점이 많은데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떠나있고 그것을 돌이키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봉사 헌신 이런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의식을 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해가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모든 의식 속에 들어있어야 하는데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목적과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포도나무 교회에 이 부분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어제 오이코스 리더 모임이 있었는데 그분들 가운데서 감동을 받았고 저에게도 감동이 있고 이길수 목사님을 통해서 설교했는데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일들을 행해오셨습니다. 그런데 제 자신을 보거나 우리 교회를 보거나 우리의 마음이 높아졌어요. 무슨 말이냐? 우리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행하심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로 인하여 우리 마음이 높아졌습니다. 주님을 알기를 열망하는 마음이 식어졌어요.

제가 지난 금요일 철야기도 하면서 제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이래서는 안되겠어요. 최권능 목사님이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저녁에 여관에서 자는데 엎지락 뒤치락 하면서 잠을 잘 못자더래요. 옆에서 들어보니까 빨리 새벽이 와야 할텐데. 빨리 새벽이 와야 할 텐데 그러더래요. 그렇게 하루 종일 수고하고 힘든 몸을 가지고도 새벽이 기다려져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열정. 그런데 성경을 보면 세례요한이나 엘리야나 그 외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열정이 있었어요.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부흥을 예배한 자들에게 이런 열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 자신을 보면 그런 열정이 제 속에 없었어요. 한편으로는 절망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절박한 기도가 나와요.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로만 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를 향한 열정을 회복시켜 주세요.

제가 어떤 분하고 전화했어요.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서 인사라도 해야할까봐 전화를 했어요. 교회에서 주무시면서까지 주님을 찾는다고 합니다. 사방이 꽉 막힌 것은 상황인데 하나님께 열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때 저를 만났는데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으라고 권면했는데. 하나님 사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저에게 소중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목적되기를 원합니다고 기도했는데 지금은 그때처럼 절박하게 주님을 찾는가 했을 때 그러지 못합니다. 제 자신이. 또 교회가. 목회자인 제가 더 잘못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함께하시고자 하시는 일들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때문에 우리 마음이 높아지면 안됩니다. 절박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그런 엄청난 교회가 능력이 쏟어졌을 뿐아니라 말씀으로 양육되어지고 실천이 따라서 믿음과 사랑의 소문이 세계에 났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졌다면 저와 여러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은 이대로는 안되겠다 다시 절막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한편으로 감사하면서 하년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는 자리에 우리가 서야할 것입니다. 이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이고 우리 삶이 피폐해질 것입니다. 꺾어진 가지처럼 말라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시기를 소원합니다.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는 찬양과 경배입니다. 찬양과 경배 소홀이 하지 마십시오. 그분만을 바라보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그분께 사랑의 고백과 찬사를 드리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다윗의 장막입니다. 다윗의 장막에 다 참여하십시오. 의무적으로라도 참여하십시오. 그런 가운데 회복될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라도 오십시오. 중보기도가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것이고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을 깨달아 그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우리 포도나무 교회가 하나님께로 더 회복되어지고 지속적으로 그 가운데 머물러 있어 은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모든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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