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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강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

시리즈설교/관계중심전도

by 발의무리 2011. 2. 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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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강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


마5:43-48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관계중심전도를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하나님이 목적된 삶을 살 때 하나님 사랑이 형제를 사랑함에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관계중심전도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 관계의 동심원안에 보내신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것인가를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다 듣고 있지는 못하지만 오이코스 보고서를 통해서 혹은 오이코스 리더모임을 통해서 지체들이 배운 그대로 삶에서 실천해가면서 하나님의 귀한 은혜들을 역사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나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들도 설교를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실제로 삶에서 추구하면서 삶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주부터 오늘까지는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어떻게 우리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관계 동심원안에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사랑할 것인가 하는 부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부예배때 설교하면서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구나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1.사랑은 편애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상대방의 필요를 채움으로 사랑하는 삶을 사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가 사랑할만한 사람만 사랑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우리가 사랑할만한 사람만 사랑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 쉽잖아요.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들 사랑할만한 사람 사랑하면 나에게 나중에 득이 될만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쉬운데 나에게 가사가 되고 어려움을 주는 사람들은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잠시 하나님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기 농부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예배드립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원합니다. 다른 농부가 있는데 하나님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욕할 때만 하나님 이름을 부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하나님이고 다른 사람이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배도 드리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에게만 비를 주고 저놈은 정신을 좀 차려야해 하면서 비도 해도 안줄텐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해와 비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사랑함에 있어서 사랑할만한 사람만 사랑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합니까?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보내시는 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이 사랑할만한 사람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그랬습니다. 지금 탈레반이 우리 한국 인질들을 잡아서 두 명을 벌써 죽였습니다. 그 땅을 위해서 하나님이 순교의 피가 뿌려지게 한 것 같아요. 또 나머지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축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들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기 원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떻게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사랑할 것인가? 그들의 필요를 채움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뿐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대하듯이 똑같이 그들에게도 대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려면 기도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려면 기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보내시는 사람들이 항상 사랑할만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관점에서 볼 때.

또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들의 필요를 저로 보게 해주세요.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아십니다. 제가 어디에 가든지 누구와 만나든지 소금이 되기를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소금으로 상처있는 영혼을 싸매주며 도와주며 사랑하겠습니다. 그들을 위한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려면 몇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의지이며 행동입니다. 또 하나는 기억해야할 것은 사랑은 환경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할만한 환경이니까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보다 훨씬 깊은 동기에서 나오는데 사랑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또 하나는 진정한 사랑은 사랑에 대한 어떠한 보답을 기대하거나 바라서는 안됩니다. 이런 것들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2.하나님의 약정과 우리의 반응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사랑으로 상대방을 구원하고 치유하고 싸매고 만지시기를 원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 환경을 움직이셔서 하나님이 만지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을 우리 관계 가운데로 환경 가운데로 불러들입니다. 때로는 우리 주위에 사랑할만한 사람 뿐아니라 사랑하지 못할 사람도 있는데 이때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 환경을 조성해주셔서 하나님이 저들을 만져주시고 그런 계기를 마련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환경을 조성하셔서 하나님이 만지시기 원하는 자들을 우리 환경 가운데로 불러들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만지시기 원해서 우리 환경 가운데로 불러들이는데 이런 사람들이 모두 우리가 사랑할만한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뭐냐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만지기를 원하시는 자들을 환경을 주장해서 우리 관계가운데로 불러들이실 때 우리가 성령께 민감해서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우리가 반응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만지시고 치유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렇게 반응을 보이지 않고 섬기기 않을 때 하나님이 보내신 기회가 소멸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관계중심적인 전도 책에 보면 좋은 예가 나옵니다. 아주 귀한 예입니다. 한번은 수업시간 후에 젤이라는 학생이 오스카 탐슨 박사에게 찾아왔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니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그런 것 못느끼세요. 포도나무교회에 오면 점점 어려워진다고 해요. 왜 그런가?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니까 그 하나님의 기준에서 자기가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가 보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실천하려고 안하면 절대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듣고 흘려보내면 되니까요.

오스카 탐슨 박사가 말합니다. 무슨 일이세요? 박사님이 말씀하셨잖아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나의 동심원안으로 인도해주신다고요. 하나님께서 환경을 움직이셔서 나의 생활권안으로 그들을 데려오심으로 그들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거나 아니면 못할 수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자 제리가 하는 말이 저는 실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데요? 그랬더니 제리가 말합니다. 달라스까지 30마일 되는데 학생들은 틈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야합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닙니다. 그런데 주차를 했는데 똑같은 오토바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오토바이에는 거울이 없었어요. 그런데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자기 오토바이는 거기에 그대로 있는데 자기 오토바이의 거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울이 거기 그 오토바이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거울에 표시를 해두었기 때문에 가서 보니까 자기 것입니다. 그래서 성질이 나서 자기 거울을 다시 빼서 달고 발로 뻥 차버렸답니다. 그런데 망가지지는 않았는데 오토바이가 쓰러져서 일으키고 하느라고 30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왔는데 성령님이 다루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멀어져 있는 것 같더래요. 그래서 낙심이 되어서 교수님에게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교수님이 그랬대요. 성령님이 뭐하고 하시던가요? 그러자 제리라는 학생이 그러실 줄 알았어요 하며 투덜투덜하면서 문을 꽝 닫고 가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요일 수업이었습니다. 그 다음주 수업 시간에 제리가 왔어요. 그러면서 간증을 합니다. 제리가 그 다음주에도 일하러 갔는데 그 오토바이가 그 자리에 또 있더래요. 그때에 속으로 중얼중얼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친구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내 삶의 영역에 보내셨다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가만히 보니까 거울을 훔쳐가는 것을 보니까 이 사람의 필요는 거울인 것 같더래요. 그래서 오토바이 가게에 가서 거울을 사서 거기에 달고 이런 메모를 남겼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거울을 가져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오토바이를 발로 찬 것도 나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이런 태도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메모에 전화번호를 적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전화가 왔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동안 많은 도둑질을 했는데 이런 반응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그를 자기 집으로 초청했고 학교 앞 자기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그를 초청했고 그날 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제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환경 속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분이 주도권을 잡으시고 사람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을 구원하고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인도하십니다. 이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그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럽니다. 그것 손해보는 것 아니냐고. 비현실적인 것 아니냐고 합니다. 세상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요.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은 것입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하고 하십니까? 누가 너희에게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가라고 합니다. 그 말은 그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로마군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탁하면 5리 1마일은 들어다주게 되었습니다. 자기 일을 하다가도 들고 다라고 하면 들고가야 했습니다. 들고 갈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평하고 불만을 토하고 욕하고 5리만 오면 오자마자 뜨거운 물건을 집어던지듯이 내팽기치고 되돌아갔습니다. 이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기쁨으로 들을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할 뿐아니라 5리를 지나고 10리까지 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로마 군인이 너무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너희를 핍박하는 자에게 그렇게 하라 그러면 불타는 숯불을 머리위에 올려놓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경을 조정하셔서 하나님이 만지시기를 원하시는 자들을 우리의 삶 속으로 보내시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쏟아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에 의한 삶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가 말로 한 것을 하나님께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등등.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한 것을 한 것으로 여기십니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십니다. 사랑도 정확하게 행동입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행동입니다.

또 하나 기억해야할 것은 이런 우리의 행동은 누가 우리의 삶을 통치하시는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할지 몰라도 내가 나의 주인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인가에 따라서 이런 행동이 가능한가 아닌가가 결정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말할지 몰라도 주일날 하루도 안빠지고 십일조를 드리고 하루에 5시간씩 기도할지라도 내 삶에서 내가 주인이며 내 삶을 내가 다스리고 있는 한 사랑하기에 부담스러운 사람들도 사랑하되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일 때만 가능합니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원하는 인격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옛성품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 삶을 살려면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옛사람이 죽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을 따르면 자기중심적인 삶을 내려놓고 주님의 기뻐하시는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이런 성품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려면 자기 자신이 반드시 내려져야 합니다. 자기 옛 사람이 내려지지 않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순종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것만 순종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더라도 우리가 사랑할만한 것만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만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랑하기에 부담스러운 사람도 사랑하려면 자기중심적인 삶이 내려지고 주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 가운데 설 때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 더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환경을 조성해서 그런 사람들을 보내실 것인데 우리가 잘못행동하면 우리 육신을 따라 반응하거나 내거 선호하는 대로 반응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성령을 소멸시키는 죄를 범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지나가는 이야기로 하는데요. 제가 목사잖아요.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부르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왜 나를 하필 목사로 부르셨을까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목사가 안되었으면 정말 엉망으로 살았을 것 같아요. 예수는 믿고 구원은 얻었을지 모르지만 상급은 하나도 없었을 것 같아요. 저같은 사람이 이런 사람이거든요. 나는 내 일 할테니 너는 네 일해. 이것은 내 공간이고 너는 네 공간에서 살아. 이런 사람입니다. 내가 목사가 아니었으면 나 혼자 교회 왔다갔다 하면서 신앙생활 잘했을지 모르지만 옆에 사람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필요와는 상관없이 나만 홀로 잘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조금이라도 상급을 주시려고 목사니까 의무적으로라도 섬겨야 되고 그러다보니까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져야 되고 의무적으로라도 섬기려고 보니까 내 자신을 내려놓게 되고 내 선호하는 바를 내려놓게 되고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연약한 자를 택해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택하신 것을 보면 일반성도들 중에서 가장 형편없기 때문에 목사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목사라 아니라서 잘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하셔야 되요. 바꾸어 말해서 잘 안되면 여러분이 목사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여러분이 목사라 생각하면 나는 내 혼자만 잘 살면 돼 당신도 혼자 잘 살면 될 것 아니야. 나 당신 봐도 안하고 당신 나 봐도 안하면 될 것 아니야 이렇게는 안되지요. 목사라면.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안하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목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사랑하려고 애써야 되지 않겠어요. 성경을 보면 우리 모두가 다 제사장이라고 했잖아요. 때로는 어려워도 때로는 하기 싫어도 내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취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애쓰는 삶을 살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잘 안되면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나는 목사다. 혹은 나는 제사장이다.


3.하나님의 자원으로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런 종류의 사랑은 우리 자원으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잘해주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안 식구들은 쫄쫄 굶고 있는데 친구들에게는 잘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친구들에게는 인기가 있는데 집에서는 원망을 듣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처럼 잘해주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자원으로 사랑하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머지 않아 고갈됩니다. 바닥이 드러납니다. 상대방에게 잘해주었는데 상대방이 인정해주지 않고 기대했던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잘해주었는데 효과가 빨리 안나타난다. 그러면 속에서 쓴뿌리만 가득합니다. 원망 환멸로 바뀝니다.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낙심과 좌절만 남습니다. 관계에 금이 갑니다. 목회자도 자기 자원으로만 섬기려고 하면 오래가지 못하고 탈진하고 속에서부터 사람에 대한 실망과 낙심만 가득하고 성도들에 대한 원망과 불평만 가득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원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원으로 섬긴다는 말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자원으로 섬긴다는 말은 먼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긴다는 말이고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랑에 반응해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후에 갈릴리로 갔지요. 예수님이 찾아갔습니다.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묻습니다.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하시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내 양을 먹이가 내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 예를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지만 우리가 양을 치는 것 먹이는 섬김이 어디서 나와야 하는 것인가를 말해주느냐면 예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이번에 케냐도 가고 여러 나라도 갑니다만 외국을 섬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많은 돈을 희생을 진액을 쏟아가면서 섬깁니다. 기도로 섬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섬긴다고 해서 상대방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떤 때는 그렇게 섬기는데도 결실이 없기도 하고 반대로 결실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런 환경만 보면 우리 속에서 배신감 불신 원망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언제만 이런 사랑과 섬김이 가능한가?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에 감격해서 우리도 그분을 향한 사랑을 드리기를 원하는 그래서 우리 신앙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그 토대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명령에 순종에서 우리안에 있는 사람들 나라들을 섬기지만 이 섬김이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올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탐슨 박사도 그렇게 말합니다. 잃은 영혼에 대한 관심 보다 훨씬 먼저 되어야 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감격하고 감사하고 그래서 우리도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정과 열망이 먼저입니다.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간에도 항상 좋은 것만 아니지요. 싸우면 꼴보기도 싫고 그럽니다. 그런데 부부간에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대로 상대방이 어떠하든지 나는 나대로 하나님의 기준대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면 가장 가까운 남편이나 아내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좋은 성품만 가지고는 절대로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섬기되 하나님의 자원으로 섬겨야 합니다.

책에 보면 좋은 예가 있습니다. 예를 살펴보면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탐슨 박사님이 목회할 때 였습니다. 십대 여자아이가 이름이 브렌다라는 아이인데 사무실에 돌진하듯이 뛰어들어 왔답니다. 머리에는 빨간물을 들였고 얼굴을 활기찬. 의자에 앉더니 거짓 눈물을 몇방울 떨어뜨리더랍니다. 오스카 목사님 저는 불행합니다. 왜? 아무도 저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다. 너는 네 부모님들을 아는데 부모님이 새롭게 사업을 시작해서 바쁠지 모르지만 그분들이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네 친구들을 아는데 그들이 너를 사랑하는데. 무슨 소리야? 아니어요. 그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요.  나는 죽고만 싶어요. 그래서 보통 때는 잘 감싸주는데 그날은 직면을 했나 봅니다. 브렌다야 너 그리스도인이지. 그랬더니 충격을 받아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왜 갑자기 그리스도인이라고 묻습니까? 하나님은 너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너를 창조하셨어. 그런데 너는 그 사랑의 물길을 거꾸로 돌리려고 하니까 네가 불행한 것이야.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사랑의 물고를 돌려서 상대방의 사랑이 내게 오게 하려고 노력하니까 불행한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네가 불행한 이유임을 네가 알아야해 네가 창조된 목적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올바르게 진행된다면 너는 그런 비참한 생각을 절대 하지 않을거야. 너는 사랑을 하도록 지음을 받았어. 그 사랑이 늘 너를 향해서 너쪽으로 흐르게 하는 것은 고여있는 연못과도 같아. 브렌다 너는 흐르지 않는 연못과도 같아. 너는 가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해. 그들이 위대한 사람이라고 느낄 필요가 없어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아도 돼. 그러나 마음 속으로 이렇게 기도해야 돼.  사랑의 하나님 당신께서 저의 길에서 만나게 하신 사람들이 누구든지 저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를 원합니다 하고 결단해야 해. 내일부터는 이제 네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과 친밀한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이제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힘써. 그러면서 이렇게 물었답니다. 너는 네가 가장 사랑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이 누구니? 그랬더니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주디요 그러더랍니다. 누군데? 신입생이요 그 바보같은 애요. 버스를 함께 타는데 타기만 하면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잔소리만 해요. 지겨워요. 신입생이 고참한테. 그랬더니 목사님이 그랬데요. 대 선배의 권위를 가지고 무지한 신입생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봐. 나 약속이 있으니까 나가봐야될 것 같아 하고 헤어졌습니다.
브랜다가 다음 주일에 와서 목사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목요일 아침에 버스를 탔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주디가 자기 옆으로 오더랍니다. 앉자마자 이야기를 하는데 미칠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나는 주디의 필요를 채워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경청해주는 것일 것 같았대요. 그래서 주디의 얼굴을 보고 쳐다보면서 들었데요. 그런데 똑바로 쳐다보았더니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의 아픔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픔을 말로 쏟아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 제잘거림의 배후에 상처받은 어린 소녀의 모습이 보이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를 만져주기 원하는 마음에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네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겠니? 네 아빠나 엄마나 오빠나 동생이나 가족에 대해서? 하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갑자기 잠잠해지더랍니다. 입을 여는데 브렌다 내 아빠와 엄마나 지금 이혼하려고 해 나는 두려워 어쩌면 우리가 이사갈지도 몰라 나는 나의 세계가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아 라고 이야기를 하더합니다. 그래서 브랜다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저에게 나타내야하나 고민하는 중에 꼭 껴안아주었답니다. 학교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더니 책을 땅에 내려놓고 주디가 브렌다를 꼭 안아주면서 나는 언니를 사랑해요. 그러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처당한 자를 치유하고 잃은 영혼을 구원하고 억압당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우리 삶 속에 보내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이루실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기회가 쏟아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1부 예배를 마치고 잠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가 너무나 많이 내 중심적으로만 살아왔어요. 내가 사랑받기만을 원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희생해주기만을 원했고 내가 원하는 바만 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수많은 사람들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것에 대해 민감하지도 않고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내 중심적으로만 행동해버린 결과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 보내신 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와 회복이 전달되어지는 기회가 쏟아져버릴 뿐아니라 성령을 소멸시킨 죄를 수많이 범해왔음을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삶을 내려놓고 우리 신안은 하나님중심적인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흘려가게 하시려고 그분께 우리 삶을 맡기고 순종해갈 때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줄 믿습니다.
그런 삶으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랑할만한 사람만 사랑해서는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러면 자기중심적인 자세가 내려지지 않고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랑하고 이런 놀라운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제적인 역사를 삶에서 경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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