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강 복음에 대한 장애물
벧전 3:15, 벧전 4:15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오늘부터 두 주간에 걸쳐 복음에 대한 장애물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원래 복음 하면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라는 말입니다. ‘유’는 좋은 이라는 말이고 ‘앙겔리온’은 선포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즉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거짓이 다른 거지에게 음식 있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려면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데 장애가 되는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깨어진 관계
우리가 이 시리즈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관계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사랑이 아니냐고 반문하는데 사랑이 기차라면 관계라는 철로가 있어야 그 위로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가 깨어지면 하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증거되는데 방해가 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비유를 들면, 관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이 증거되려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와 우리 주위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면 파이프에 무엇이 막힌 것과 같습니다. 파이프가 막히면 아무리 물을 부어도 물이 흐를 수 없습니다. 이와 똑같습니다.
얼마전에 중고등부연합수련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부분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학생들이 부모님과 가지고 있는 깨어진 관계들 또 학교 선생님들과 가지고 있는 깨어진 관계들을 다루게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안정된 심령이 부어지는 것이 필요하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부모님과 깨어진 관계 그들의 선생님과 깨어진 관계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흐르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말씀드린대로 파이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와야 하는데 깨어진 관계가 파이프를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회개하게 하시고 중심에서부터 올바른 관계들을 갖게 하시고 그런 깨어진 관계들을 해결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껏 흐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실재가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하는데 우리와 하나님께서 우리 관계동심원안에 보낸 사람들과 깨어진 관계가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흐를 수 있는 길이 차단되기 때문에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 방해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위선적인 될 수 있거든요. 위선적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나와 나의 관계동심원 안에 있는 사람들과는 깨어진 관계에 그대로 있으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인 사람X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가까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렵다. 한편으로는 그 말이 맞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로만 하면 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우리 삶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 사람과 지속적인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하려 함이니. 이 말씀은 아내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남편들에게 하되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로 전하라 그때 남편들이 아내들의 행위를 보고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내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고 남편들과 부모들과 자녀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즉 가까운 사람일수록 말로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되고 진정한 사랑이 같이 가게 될 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서 그 사람을 만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가까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만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상대방에 대해서 실제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고 실제적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다시말하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상대방의 진정한 관심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선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첫 번째 장애물은 깨어진 관계입니다.
2.두려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큰 장애물은 두려움입니다. 거절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도 저 사람이 안받아들이면 어떨까?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도 아무런 결과가 없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큰 장애물입니다. 대부분 우리들이 느끼는 장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선 이런 두려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딤후1장 7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이런 두려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상대방에게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전하려고 시도할 때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할 때 이 두려움을 엄습합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읽은 본문에도 나온 것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담대함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하고.
여기 두려움으로 하라는 말은 지금 말씀드린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과 온유함으로 하되 항상 복음을 증거할 준비를 하라고 말함으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것인가? 간단합니다. 순종함으로 극복한다. 따라서 합시다. ‘순종함으로 극복한다.’
순종함에 대해서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합시다. ‘내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요15장 2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너희에게 보내실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장 13절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그는 진리의 영으로 나를 너희에게 증거하시리라.
또 하나님의 성령이 오시면 나의 모든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래서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런데 나의 모든 것은 곧 아버지의 모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크게 세 가지를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성품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계시하십니다. 그 목적을 계시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그 목적에 동참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방법과 길을 게시하십니다. 하나님의 길에 순종하도록 우리가 하나님의 길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과 목적과 길들을 계시하시는데 누구를 통해서 하시느냐? 성령을 통해서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만약에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는 중에 설교말씀을 듣는 중에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길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둘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순종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편 119편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도 가장 긴 장입니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가 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시편입니다. 그 시편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33-35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나에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여기를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길과 목적과 의도를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도록 구하여 섰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알기를 구했는가 그렇게 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기자는 그렇게 행하는 것이 자기의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약1장 22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으면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자기기만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7장에서 반석위에 집을 지은 자와 모래 위에 지은 자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풍랑이 일고 홍수가 나도 그 집이 든든히 선다 반면에 모래위에 집을 지으면 풍랑이 일고 홍수가 나면 무너지되 크게 무너진다고 비유를 들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게릴라성 폭우가 오지요. 그러면 집이 많이 무너지지요. 예수님은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고 모래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 것은 이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입니다. 반석 위에 지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래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들은 자가 아닙니다. 둘 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입니다. 구별은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듣고 행한 자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는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마지막 부분에서 하십니다. 산상수훈의 마지막 결론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하나님 자신과 목적과 길을 보이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든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하나님의 길을 여러분에게 깨닫게 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순종하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요한14장 21절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우선 여기에 계명을 가지고 지킨다는 말은 십계명과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것을 포함하지만 바로 앞절을 보시면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안에 너희가 내안에 너희가 내안에 잇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말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성령안에서 우리가 개인적인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갖고 그 관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런 뜻입니다. 당연히 성경에 나온 계명과 명령을 지키는 것을 포함하지만 그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길과 목적과 의도를 보이신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내 계명을 내 명령을 지키는 자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라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오스카 탐슨 박사가 쓴 관계중심전도라는 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책이 절판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선해서 책이 다시 새로 나옵니다. 그런데 관계중심전도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또 중보기도에 있어서는 더치쉬츠 목사님이 쓴 책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라는 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만 그중에서 그런 책들을 사용하는지 아십니까? 왜 그 많은 책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책들을 사용하느냐 하면 그 책들이 단순히 정보만을 담고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 개인적인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이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친히 세워가시면서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통해서 목적과 의도를 나타내시는 자들이기 때문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눈 내용이 단순히 정보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눈 내용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길을 나눌 뿐아니라 그 삶을 사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실제로 그 일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이 실제로 그들을 세워가시는 실제로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그들이 경험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이든지 실제로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하나님이 실제로 세우시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제가 오스카 탐슨 박사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나는 계산기를 사용해서 나의 하나님께 대한 나의 복종의 정도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것은 어떤 이론에다 맞추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계산해보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론적으로 따져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확실하게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현저하게 분명하게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그 분을 무시하거나 그분의 인도하심이 없이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으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우리의 삶에 온전히 통치하시며 그분의 인도에 우리가 전적으로 순종하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뿐아니라 우리에게 우리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넷째 주를 위한 바보가 되십시다.
고전4장 10절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믿음을 미국 사람인데 믿음을 risk라고 있습니다. 원래 믿은 faith인데, 그분은 risk라고 했어요. 모험을 감수하다라는 뜻입니다. 위험부담을 감수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모험을 감당해야 하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를 위험부담 사람들 앞에 오해받을 수 있는 위험부담 사람들에게 받을 수 있는 위험부담. 이런 위험부담이 없이는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순종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는 경우가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순종하려면 반드시 대가가 따릅니다. 그 대가중 하나가 오해받고 멸시당하고 때로는 조롱당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되느냐? 영광은 하나님만 받으시고 바보는 내가 되고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기꺼이 바보가 되고자 하는 자세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순종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어떻게 이기느냐? 순종함으로 이깁니다.
3.사랑이신 분을 못 만나는 것.
관계중심전도의 저자도 잘 다루고 있습니다. 그분도 하나님의 관해서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아는 것과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동심원들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은 아마 당신이 사랑이신 분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만나셨습니까? 여기에 먼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에게 인격체이신 주님을 만난 거듭난 체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스카 탐슨 박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다섯 개의 감각기관으로부터 세상을 지각합니다. 이렇게 지각한 바를 우리는 지식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지식을 가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여러 가지 개념들을 가질 수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깨닫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고백할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고백을 받고 기뻐하셨습니다. 기뻐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를 인식하고 압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교리를 고백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본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를 보게 한 것은 혈과 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남만 해도 예수님의 교리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통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그리고 그분을 구원과 죄용서를 위해 신뢰하고 그분을 우리 삶의 구주와 주로 영접하는 것이 거듭나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수님을 그렇게 만나셨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다녔을지 몰라도 주님을 그렇게 만나지 못했으면 다른 사람을 전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뭐냐면,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추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야 합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기를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 구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기를 구하고 그분의 온전한 통치 가운데 들어가기를 구하고 그분만을 온전히 신뢰하기를 구하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야 합니다.
전도는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음식이 있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노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사람이 어디를 갔는데 빵을 산더미처럼 싸놓고 원하는 대로 가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컷 먹었습니다. 호주머니에 잔뜩 넣어왔습니다. 그 사람이 다른 노숙자들에게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이 어디를 가면 당신이 원하는대로 빵을 먹을 수 있다고 전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도 다 가서 똑같이 할 것입니다. 전도는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내가 한번도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에게 빵있는 곳을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교회는 오래 다녔을지 몰라도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너무나 피상적일 뿐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아는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그리고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경험하는 것이 전혀 없다면 누구에게 그 생명을 전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신 하나님 그분을 만나지 못한 것이 전도의 장애물입니다.
어떻게 해야되느냐고요? 하나님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세계에 어디에 있는지. 가난한 나라들을 가면 그런 것을 자주 느껴요? 아무리 하나님의 길을 제시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해합니다. 한국은 참 잘 삽니다. 진짜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부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써야 합니다. 표류할 때 바닷물을 먹으면 더 갈증이 나서 죽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언제까지 자기를 위해 싸놓고 보관하고 자기를 위해서만 들이키고 싸놓고 보관하고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를 가면 이런 경향이 있어요. 지금은 한국이 잘사는 것을 압니다. 한국이야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해도 주변에 부자도 있고 돈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들을 통해서 역사할 수 있지.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다 가난한 사람들 뿐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뿐인데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돼냐. 그래도 우리는 부강한 당신의 나라나 서구 사람들이 도와주어야 돼지. 이런 인식들이 팽배해 있어요. 아무리 하나님을 이야기해도 주님을 보지 않고 환경만 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 뿐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디에 있든지 어느 나라에 있든지 어떤 상황 가운데 있든지 여러분이 진실로 주님을 추구하고 구하고 사모하고 주님을 알기를 사모하고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분의 통치 가운데 거하면 반드시 그분이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오시면 반드시 그분의 생명이 넘칩니다. 여러분 광야생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런 삶을 가르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삶으로 가르치시되 그들의 먹을 것 입을 거 그 모든 것을 채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가운데 함께할 때 우리가 그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습니다. 전도는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음식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의 전도를 방해하는 세 가지 장애물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이 고후5장 17-2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심을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시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화목케 하는 사신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우리와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관계중심전도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안에 보내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부터 배우고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부터 배우고 그 관계의 철로를 통해서 사랑의 기차가 전달될 뿐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고 생명과 은혜가 전달되어 그들도 하나님께로 화목되어져서 하나님의 축복이 더욱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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