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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강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

시리즈설교/관계중심전도

by 발의무리 2011. 2. 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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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강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


마22:37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관계중심전도를 시리즈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의 관계동심원 사랑의 동심원안에 주신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기도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부터 두세 주에 걸쳐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성경에 나온 가장 큰 계명은 우리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의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계명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계명 속에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형제나 이웃을 사랑하되 상대방의 필요를 알아서 그 필요를 채움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고 했고 하나님은 영이시고 어떤 필요도 없으신 분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필요를 채움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스카 탐슨 박사에게 신학생이 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할 중요한 것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 사이의 관계입니다. 다시말해서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 사이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항상 처음이고 근본입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 나오겠습니다만 우리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혹은 사랑의 동심원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근원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에 대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광고시간에도 말씀드렸는데 우리가 다른 나라를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를 섬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많은 돈을 투자하고 많은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섬긴다고 해서 우리 사랑을 알아줍니까? 반응을 보입니까? 곧바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느냐? 전혀 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다 내려놓으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돈을 안써도 되고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마음이 편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대가에도 불구하고 왜 섬기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먼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근원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두 계명 사이의 관계중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5장 35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데 양으로 비유되는 무리와 이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즐거움에 같이 데리고 들어가실 자들입니다. 그리고 염소로 비유되는 무리들로 나누는데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버림받은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양으로 비유되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무리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내가 벗었을 때에 옷을 주었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나를 돌아보았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너희가 와서 나를 찾아보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양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이 우리가 언제 주님이 병든 것을 우리가 보고 돌보았으며 언제 우리가 주님이 갇힌 것을 보고 우리가 찾아보고 돌보았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이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소에 비유되는 사람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버리면서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이 주린 것을 보고 먹이지 않았으며 목마른 것을 보고도 마시지 않게 했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이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이 구절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만 보면 그렇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때 성경전체를 가지고 이해해야 됩니다. 성경전체를 가지고 이해할 때 이 구절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하나님 사랑에 대한 언급하는 부분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가장 먼저 되는 계명이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먼저되는 계명인 하나님사랑에 대한 것은 한 마디도 없고 이웃사랑 형제사랑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합니까? 아주 중요한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것이 형제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신앙의 본질을 이야기해왔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우리의 전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 그분이 우리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되면 그것이 형제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라는 말이 틀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라는 부분을 살펴보면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는 이웃사랑이 하나님사랑의 열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사랑할 때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귀중한 사람들이 당신에게도 귀중하게 생각된다면 당신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통로가 되어서 필요를 채우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2.사랑의 대상 :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께서 나의 관계동심원안에 보내신 자들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께서 나의 관계동심원안에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구주로 주인으로 영접했다면 우리가 누구를 사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을 이미 포기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호감이야 그런데 저 사람은 비호감이야. 그러나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라면 우리가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보내신 자들을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이 사랑할 만한 사람이건 반대로 전혀 사랑할 말한 사람이 아니건 상관없이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해야할 책임과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제가 처음 교회 개척하면서 개척교회 처음 하면 그런 일이 많습니다. 소위 말하면 쓸만한 사람들이 별로 안옵니다. 이것은 매우 타락한 가치관입니다. 너무나 잘못된 것이지요. 그 당시에는 그렇게 이해가 된 것입니다. 쓸만한 일꾼들은 안아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다 돌보아야할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이 주로 많이 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그렇게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들만 보내시나. 말씀드린 대로 너무나 타락한 생각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목회자라면 목회자로 섬기는 훈련을 할 때 가장 먼저 훈련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목회자로서 훈련 뿐아니라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우리 삶의 동심원안에 보내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기 쉽거든요. 왜 내 주위에는 이런 사람들만 오나 좀 쓸만한 사람들이 와야지. 주위 사람들은 말도 통하지 않고 생긴 모양도 그렇고 왜 저런 사람만 내 주위에 있냐라고 말하기 쉬운데요. 아니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금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반드시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영역에 보내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방법과 관점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통로가 되지 못할 뿐아니라 이땅에서 어떤 모양으로건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선택해서 우리의 삶의 영역에 보내신 자들을 하나님의 방법과 관점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할 것인가를 선택한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랑해야할 의무와 책임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탐슨 박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뜻대로 당신을 장막에 거하게 하시는 이유는 먼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당신을 통해 세상에 그분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곧 당신의 인생의 목적이라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통해 사랑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3. 사랑은 의지이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리의 관계의 동심원안에 보내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한 가지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입니다.
탐슨 박사도 그렇게 말합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 세 가지입니다. 에로스로 남녀간의 열정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성적인 관계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에로스 사랑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반드시 부부관계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것이 부부관계 밖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큰 범죄와 수많은 아픔을 낳고 있습니다. 필리아라는 사랑이 있는데, 필리아는 관계의 질이 강조되는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하고 어떤 사람이 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지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좋아해. 이 사랑도 좋은 사랑입니다. 거기에는 감정과 정서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은 여기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여기에만 머문다면 우리의 사랑은 감정에만 머물게 됩니다. 우리들은 우리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과 비호감의 사람으로 나눌 것이고 우리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게 될 것이고 우리에게 비호감되는 사람들을 피할 것입니다. 그래서 왕따가 생기지요. 교회에서도 자기에게 맞는 사람끼리만 모이기 원하고 자기들끼리만 사랑하기를 원하고 그 외에는 관심조차도 없을 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아가페사랑입니다. 탐슨 박사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반드시 그것은 감정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논리적이며 심사숙고한 의지력의 표현입니다. 아가페란 여기에 필요가 있으니 내가 그 필요를 채워야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인간적인 감정에서 나왔을까요? 아니지요. 감정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뭐였습니까? 박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해서 깊이 느끼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그분을 십자가로 보낸 것은 어떤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필요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에 대해서 깊이 느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감정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보시고 우리의 절실한 필요를 아셨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십자가의 고뇌를 초월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으시면서 내가 너희의 필요를 채워주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아셨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사복음서에 보면 긍휼이 여기사 민망히 여기사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문둥병자를 보실 때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시며 치유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오는 것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이 여기사 그럽니다. 나인성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사 상여를 멈추게 하셨고 살리십니다. 이처럼 긍휼이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는 말이 여러번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 긍휼이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는 말은 헬라어의 한 단어입니다. 스플랑크리조마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떤 성경은 분노하사라는 말로 번역하시고 합니다. 이 단어 속에는 분노의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를 들면 그 당시 문둥병자는 살이 썩어갑니다. 죽어갑니다. 뿐아니라 격리되게 되었습니다. 관계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뿐아니라 어떤 사람이 문둥병자에게 손만 대도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지 못했습니다. 벤허 같은 영화를 보면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고 소리 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육신이 죽어갈 뿐아니라 사람과 관계가 차단되었을 뿐아니라 하나님께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차단된 사람입니다. 사람의 모든 영역에 고립된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그가 처한 상황을 보시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인데 그 인생의 모든 면에서 상처뿐인 그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을 뿐아니라 그를 억압하는 문둥병을 제거해버리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에게 임하게 하길 원하시는 그를 억압하는 병에 대한 분노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참고로 능력치유 부분에서 많이 이 부분을 다루었는데요. 여러분에게 어떤 병든자에 대한 그런 마음이 부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으시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이 부어질 때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역사가 동반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예수님을 통해 많은 역사가 나타날 때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가? 아가페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알고 처한 상황을 알며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그를 불쌍히 여길 뿐아니라 그를 억압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한 분노에 가까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결단하고 동참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할 사랑입니다. 이것은 감정을 훨씬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바로 이런 사랑으로 우리의 관계동심원안에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사랑하기를 배우기 시작해야 합니다.

다음 주에 살펴보겠지만 당연히 이 사랑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그 근원이 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렇게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탐슨 박사가 말합니다.
오후 5시 30분에 심방요청이 있을 때는 짜증이 난답니다. 어떨 때는. 미국에서는 목회자들도 6시면 정확하게 퇴근을 하지요.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밤늦은 시간에도 심방요청이 있으면 짜증이 날 수 있지요. 또 다른 일 때문에 피곤하고 지쳐있을 때 심방요청을 하면 짜증이 날 수 있지요. 그런데 사랑은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를 알고 그것을 채우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런 상황에서도 감정을 이기고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결단하는 그리고 결단 가운데 동참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배우자나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시간을 내지 못한다면 세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사랑의 통로가 되어 당신의 예루살렘인 당신의 가정에서부터 출발하십시오.

그래서 관계의 동심원 제일 안에 자기가 있고 그 다음에 가족들로부터 시작되는데 가장 가까운 예루살렘에서부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질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전달되게 하시고 치유와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삶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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