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유업(1)
* 본문말씀 : 로마서 8:14~17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이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 삼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유업을 우리에게 상속으로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라고 말하고 있고,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말은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유업에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상속자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부모의 유업을 균일하게 몇등분해서 그 일부를 갖게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동상속자라는 말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든 유업을 그리스도인 예수님에게 주셨는데, 우리가 공동 상속자로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유업을 공동으로 상속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동일하게 상속으로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주시는 유업은 무엇인가?
1. 하나님과의 친밀함.
‘아바’라는 단어에서 볼수 있습니다.
*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이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말 개정 개혁 판에는 이렇게 되어있는데요. 개인적으로 번역을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개혁성경에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로 되어있습니다.
* 갈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아바’라는 단어속에는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들에게 주신 유업중에 한 핵심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인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바’라는 단어는 아람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계실동안에 사용하셨던 언어가 아람어입니다.
그당시 공통언어가 코인의 헬라어를 썼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헬라어를 알면 다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쓰셨던 아람어를 번역해서 신약성경은 처음 쓰여질때부터 헬라어로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아바’라는 언어는 번역하지 않고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 그대로 가져온 겁니다.
헬라어 원어에도 아버지라는 말은 파테일이란 단어인데, ‘아바 아버지’란 단어를 ‘아바 파테일’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성경 번역한 걸보아도 그대로 ‘아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아바 파더, 독일어 성경에는 아바 파털, 그래서 한국말도 과거에는 아바 아버지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는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를 부르는 친근한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친밀함을 유업으로 주시는 것을 유업으로 주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1) 아바라는 단어는 친밀함의 단어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던 언어가 아바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나라에서 가정에서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던 그 아람어가 아바였다는 겁니다.
어린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2) 구약에서는 아바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부를 때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아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란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에게 아버지가 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삼하7:14 보면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말 1:6 ~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는 개념은 이스라엘의 창조자로서의 아버지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저들의 주, 주란 말은 주인, 주님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운 언약의 주인이라는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부를 때 ‘아바’라는 단어를 지칭해서 부른적은 단 한번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생각할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3) 하나님을 부르면서 아바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막14:36 이르시되 아빠(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여기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실 때 ‘아바’라고 부르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어떤 주석에 보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단어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전혀없다. 이와같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친근함은 이들로서는 불합리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예수님은 그분이 가지셨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확증하셨다.
이러했기에 그 당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많은 비판과 조롱거리가 되었을 겁니다.
*요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내 아버지께서" 라는 단어는 여기에는 헬라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아버지를 지칭할 때 이 구절에는 어떤 의미에서 사용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시면서 아바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셨고, 내 아버지, 너희들의 아버지, 이런 부분들을 볼때에 이 단어의 배후에도 아바라는 단어가 들어있을 확률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부르실 때 자신의 친 아버지라도 부르심으로써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대적과 핍박의 원인이 되었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렇게 그 당시 아바라고 사용하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것이었고,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일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는 하지않고 가르치기만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것이냐, 바리새인의 제자가 될것인가의 근본적인 갈림길이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먼저 행하고 우리가 가르쳐야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기도의 첫부분에 보면 하나님을 부를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독일 학자중에서 요하킴 예레미야스라는 학자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초대교회의 배경에 전문가입니다. 이분이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는 단어 속에 아버지여가 아바라는 단어랍니다. 그분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앞에 나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셨을 뿐만아니라 제자들에게 가르쳐줄때에도 하나님앞에 나갈 때 아바라 부르라고 가르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된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된 것은 의미가 약간 다릅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대해 말씀할 때 나의 아버지, 너희들의 아버지라고 말했지 한번도 우리들의 아버지라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말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나갈 때 부르라고 한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과 동일시해서 우리들의 아버지라고 말한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양자로 삼으셨는데, 양자로 삼으셔서 하시는 일중의 하나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라 부를수 있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 엄청난 특권을 준것입니다. 이 말의 핵심은 깊은 친밀함입니다.
5) 구약에서는 선지자와 같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하나님께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허락하셨습니다.
*출 33: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기의 회막은 장막을 말합니다. 회막이라고 말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이 여기나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곳에 나가 하나님을 찾았는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영광중에 임하셔서 사람이 친구와 대화하듯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이야기 하셨다는 말입니다.
*아모스 3:7절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비밀이라는 단어는 친밀함이란 단어입니다.
어느 주석학자는 비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 는 은밀한 협의란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밀접한 관계에 기초한 적극적인 의논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깊은 관계성을 통해 미리 알려주는 계획을 가리키기도 한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에 있으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의 심판에는 그에 앞서 항상 경고가 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도 그러했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도 미리 경고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는 회복에 관해서 알리시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시편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어느 주석학자는
여기서 친밀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소드’ 는 본래 비밀회담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비밀도 없이 그의 뜻을 보이신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말은 비밀스런 교제, 밀접한 관계를 뜻한다.
- ‘보이시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 곧 체험적 지식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저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비밀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체험하고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밀함을 허락하시되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시고, 의중과 계획을 알리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으셨는데,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이 은혜가 주어졌다는 겁니다.
6)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친밀함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바’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앞에 나아와 그분을 부를때에 ‘아바’라고 부르도록 하신겁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목자로 비유하시고, 우리를 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부르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겁니다.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예수님을 아는 것같이 우리가 예수님,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친밀한 교제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 비유를 사용하신 겁니다.
*요한일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여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이처럼 신약시대에는 아들로서 주신 유업이 있는데, 구약의 일부에만 주어졌던 친밀함을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노예에게는 주인의 상세한 계획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노예에게는 이것 저것을 시키기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노예로 부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는데, 친구라고 부른 이유를 예수님이 저들에게 보게 하셨다는 겁니다.
*요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사 하나님의 행하심의 모든 것을 알리신다고 했는데요.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모든 것,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써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친밀한 교제로 부르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님 아버지(아바) 내가 저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했습니다. 앞으로도 알게 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저들안에도 있어서 저들이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고, 나도 저들을 사랑하여 저들가운데 머물며 운행하기 위함입니다.
7) 하나님의 모든 유업은 우리가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할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알고 존재를 다해 사랑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에 우리 온 삶으로 동참해서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만 하더라도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게 되고, 그 위에 믿음에 설 때 하나님의 유업을 삶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편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되 마음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주님을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어느날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찬양중에 마지막 부분인 ‘영원히 계시는 아버지’라는 부분을 찬양을 드리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이 선명이 인식이 됐습니다.
저는 어릴적부터 교회다녀서 당연히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선명히 깨달아 졌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마음눈을 밝히사 하나님이 아버지 되신 것을 선명히 보게하신 겁니다.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의 생각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귀한부분도 많았지만 부족한 부분도 많았죠. 하나님 아버지는 영원히 거룩하시며, 영원히 전능하시며, 영원히 자비하시고 사랑하시되 온전하신 그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이 선명히 비춰졌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붙잡으려고 힘썼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기도하려는데 그때까지도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이 선명하게 인식이 됐습니다. 다른 아무말을 할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임을 얻기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이미 받아들여졌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분의 아들되는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로 인한 나에게는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분의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전혀없는, 저는 이미 그분께 받아들여진 것이 선명하게 보여졌습니다. 아버지라는 한마디만 했습니다. 그런데 느낌인지 모르지만 온 방안이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그당시 느껴지는게 히4장이 말하는 안식, 어떠한 노력도 필요하지 않은 안식, 그게 그것을 의미하는 것같았습니다. 정말 주님의 사랑이 주님이 아버지 되심이 인식되어지면서 그 안에 평안과 주님앞에 온전히 받아들여진 주님의 사랑이 깨달아지는 그 자리로 돌아가기를 열망하고요. 그 자리에 머물기를 열망하고요.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양자 영을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아바라 부르게 하셨다는 것을, 예수님이 하나님과 가지셨던 친밀함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치루셔서 가능하게 한겁니다.
그런데도 주님을 찾지 않는 다면 할말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고, 그 사랑과 그 은혜에 감격해서 그분의 품에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아버지(아바)라고 부르기 전에 오늘 살펴본 내용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고 그 말속에 포함된 내용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시고 하나님께 아바 아버지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