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유업(3)
* 본문말씀 : 로마서 8:15~17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이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7:7~11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는데, 응답하시는 가장 주된 이유가 그분이 우리의 아바 아버지 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수 있습니다. 기도응답도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신 유업입니다.
1. 우리의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와는 달라야 합니다.
*마태복음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여기에 보면 우리의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와는 달라야 되고, 이방인의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어느 주석에 보니까 [ 이 말의 원어는 ‘발타로게세테’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을 제외하고는 쓰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어원 역시 분명치 않다. 어떤 학자는 말더듬이인 ‘바투스’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며, 또 어떤 이는 장황하고 반복적인 시를 읊는 사람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대부분 이 말이 정확하지도, 그렇다고 명쾌하지도 않은 일종의 의성어에서 나왔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중언부언’이란 말은 잡다할 정도로 말을 길게 끌거나 아무 의미 없는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이방인들은 이와 같은 주문과도 같은 내용을 지겹고도 공허하게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들의 신을 질리게 만들었다.(왕상 18장) ]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이 대결할 때, 저들이 제물을 쌓아놓고 하루종일 대결할 때 주문을 외우면서 돌았던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중언부언’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이 두 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기도가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같은 한부분인데요. 그것을 놓고 학자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 말을 많이 하여야 : [이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방법이다. 그렇다고 기도를 언제나 짧고 간단하게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도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밤을 지새우며 오랫동안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기도 하시기도 하고, 모세도 30일을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운데 하나님을 찾아서 기도하기도하고, 엘리야는 머리를 양다리 사이에 넣고 일곱 번이나 간절히, 이말은 한번 간절히 기도한 다음에 종을 통해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보라고 말하고 없으니까 또 간절히 기도하고 또 보라고 하기를 일곱 번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아도 많이 기도한다고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이 학자도 분명히 그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 따라서 본문은 장황하고 긴 기도가 믿음의 순수한 표현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는 길이에 관계 없이, 그분이 자신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또한 기쁘게 응답해 주실 것을 믿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을 펴놓고 보시면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선명히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이방인들처럼 하는 기도는 않되 하시면서 저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마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깨서 아시느니라
그러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셨습니다.
*마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깨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2절의 “이는 다”는 바로 위에 나온 무엇을 먹을 것이며, 무엇을 입을 것이며, 무엇을 마실 것이며, 다시말하면 세상에서의 자기 목적을 위한 여러 가지 필요들을 말하는 겁니다.
위에서 ‘중언부언 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시면서 너희는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여기보면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이방인들이 구하는 기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에서 “구하는 것”이라고 변역된 단어는 단순히 기도하다라는 내용이 아니고요 추구하다는 내용입니다.
영어 NIV성경은 이구절을 번역하기를 ‘이방인들은 이 모든 일들을 향해서 달려간다’. 그들은 살아가는 삶의 목표가 이것들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세상에 이방인들은 그들의 인생의 목표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으로 대변되어 집니다. 이것이 그들의 목표이고 달려가는 삶입니다. 그들의 삶을 그것에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면 거기에 염려와 근심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더 많기를 원하기 때문에 염려와 근심이 있게되어 있습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희는 저들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방인들과 똑같이 합니다. 삶의 목표 자체가 이방인들이 추구하는 것과 똑같이 추구하고, 그것이 살아가는 이유이고, 그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기도는 이방인들과 똑같이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태복음 6:33절만 하더라도 완전히 자기식대로 해석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도,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의는 종교적인 헌신과 희생을 말합니다. 주일날 교회나오면 원하는 것 해주실줄로 생각합니다.
장사하는 분은 목사님이 신방가자고 하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으니까 목사님 심방따라가면 내 장사 잘될거니까” 생각하고 심방따라 갑니다.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바는 그게 아닙니다. 이방인의 삶을 말하면서 너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야 너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한 삶을 살면, 하나님이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채우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르심을 따라, 소명을 따라, 우리의 직업이 다를진 몰라도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창조된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고, 우리가 구원얻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원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3.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다시말하면 우리의 삶의 목표와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드려져야 할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할 때, 삶에서 추구하고 바라고, 삶을 드리는 그 목표를 말할뿐만 아니라 저는 기도도 포함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바라는 단어를 살펴봤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분을 아바라고 부르면서 경외함과 두려움과 그 기쁨 가운데서 나가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시도록,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이게 하나님 나라의 기도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삶의 목표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도해야할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1) 기도와 하나님의 뜻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요한일서 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안다”는 말은 경험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하나님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들으십니다.
요한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때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수없이 많이 경험한 것 같아요. 그래서 요한은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그분이 들으실 것을 알았어요.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했으면 이미 받은줄로 알았어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대단히 놀라운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듯이 역사하셨어요. 그만큼 요한은 그의 삶속에 기도응답이 함께 했어요.
여기에 보면 우리의 기도와 하나님의 뜻이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할 때 응답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나는 뭐야? 하나님 뜻만 있으면?” 이러는데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줄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영원전부터 영원끝까지 현재로 보고 계십니다.
그분이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분의 뜻은 최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모델은 예수님 이십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하신게 나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중언부언 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셨습니다.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한것도 예수님 자신이 먼저 그렇게 기도하면서 사신 삶입니다. 이렇게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자원이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모든 필요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너희가 구하기 이전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의 쓸 것을 아시느니라” 그러면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기도가 되어야합니다.
2) 우리의 필요를 위한 기도
(1) 우리의 필요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대부분 채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면, 우리가 하나님을 존재를 다해 사랑하고, 그분이 앞서가심을 따라 온 삶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면 우리의 필요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대부분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마 7: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이 필요를 채우시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유업중의 하나입니다.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2) 그럼에도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자리도 있습니다.
주기도문에도 보면 세가지를 말하고 난 다음에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라고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도 성경적인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온 삶으로 동참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기를 기뻐하십니다.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떡과 생선은 기본적인 삶의 요소를 말하는 겁니다. 개인의 필요를 위한 기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처럼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도 우리의 삶에 필요를 위한 기도를 드릴때가 있습니다. 이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앞에 나갈 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포도나무교회가 세워져서 지금까지 오도록 우리가 계획해서 온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고 주님을 추구하면 주님께서 주님의 목적을 보이십니다. 우리가 그 삶을 조정해서 따라갑니다. 그러면 주님이 뒷받침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가도 어떤때는 일이 막힐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이것을 해결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인도해서 왔고, 주님이 아시는데 이런일이 생기면, 주님 왜 이런일이 생기나요?. 우리에게 뭐가 문제인가요?. 우리의 삶이 어떻게 조정되기를 원하시나요?. 하나님의 뜻과 의중이 무엇인가요? 하면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조정해야할 부분들 회개해야 할 부분들, 돌이켜야 할 부분들, 또한 주님의 보다 온전한 뜻을 보이심으로 우리가 주님의 합당한 뜻으로 우리의 삶이 돌이켜지게 하심으로써 주님이 뒷받침 하셨습니다.
시편119편의 기자만 하더라도 그는 삶의 역경가운데서도 집중적으로 주님을 알기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마음눈을 열어주셔서 주의 길을 보여 달라고, 주님의 법에 소중함을 보여달라고, 주님의 법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길에 행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가야 합니다.
다윗이건, 모세건, 바울이건, 하나님의 귀한 사람들은 하나님앞에 나가 그분을 찾을 때에, 그분을 찾는 중요한 것중의 하나가, 그들의 삶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3) 일용한 양식은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나라 백성을 위한 일용할 양식입니다.
일용할 양식에는 우리의 필요를 위한 기도도 포함됩니다. 거기에 덧붙이려고 하면 주기도문의 내용을 보아도 그렇고 일용할 양식이라는 용어를 보아도 그렇고, 여기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등.
하늘의 양식을 오늘 이 시대에 부어주셔서 그 은혜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능히 승리하며 살아갈수 있는 은혜를 부어달라는 것이 이 기도입니다.
3)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강청하는 기도가 두 번 나옵니다. 강청하는 기도의 핵심 내용은 둘다 옳았다는 겁니다.
-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눅18장)
과부가 틀린 이야기를 가지고 재판장에게 갔는데 들어준게 아닙니다. 옳은 이야기인데 재판장이 교만해서 안들어 준겁니다. 그런데 계속 구하니까 들어준 겁니다. 이게 대조법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악한 재판장도 그렇게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들어주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도를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도, 옳은 기도를 말하는 겁니다.
-친구의 비유 (눅 11:5~8)
집에 손님이 왔는데 옆의 친구에게 먹을 것을 빌리러 갔더니 옆의 친구가 하는 말이 애들하고 잠자리 들어서 안돼, 그랬는데 친구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더니 친구로서는 안줄지 몰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그 요구대로 주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 나라에는 한 집에 손님이 오면 그 집의 손님 뿐만 아니라 마을의 손님으로 받아들여졌답니다. 이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집 주인뿐만 아니라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섬겨야할 의무가 있었답니다. 이 주인이 옆집에 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한 것은 옳은 것입니다.
악한 친구라도 친구로서는 안줄지 몰라도 계속 두드리니까 내어줬던 것처럼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듣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반복적으로 말씀하신게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집중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듯이 들으시겠다는 그 말씀입니다. 엘리야의 기도처럼. 이게 우리가 드려야할 기도입니다.
4. 포도나무의 삶이 핵심입니다.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하니까 기도응답도 그때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시대에는 그 많은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자리를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버렸습니다.
* 이사야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사무엘상 미스바 성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리로 돌이켰더니 하나님이 저들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삼상 7: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사야 시대 안식일, 월삭, 모든 대회와 절기, 숫송아지, 숫염소, 어린양, 가장 살찐 것을 무수히 드렸는데 안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린양 하나 드렸는데 온전한 제사라고 합니다.
이들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떠난채 의식만 남아있는 거고, 그나마 하나님은 자기 삶에서 수단으로 전락되어 있는, 기도만 하더라도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와 똑같은 이해와 삶의 자세를 가지고 그런 기도하면서 그거 이뤄달라고 하는 수많은 예배, 하나님이 전혀 안받으십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의 길로 행하며 주님만을 섬기는 자리로 돌이켜서 드리는 이 한 마리의 양의 제사를 보시며 이 기도를 응답하신 겁니다. 신앙의 본질과 예배가 같이 갑니다.
*삼상 7: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처럼 신앙의 본질 가운데 거할 때 하나님의 생명, 기도응답도 주어집니다.
이게 포도나무의 삶입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기도응답은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게 주신 유업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신앙의 본질 가운데서 주님을 사랑하는 삶, 주님과 함께 하는 삶, 그 가운데 있을 때에 그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와 뜻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때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