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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복음의 모조품 - 율법주의 신앙

시리즈설교/성령이역사하는교회

by 발의무리 2018. 2. 6.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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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음의 모조품 - 율법주의 신앙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3:7-10)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도 진정한 복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아무리 그럴듯한 외부적인 모양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는 아닐 것이며, 우리의 신앙도 헛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복음에 대해서 분명히 깨닫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랬던 것처럼, 복음의 모조품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 모조품은 참다운 복음과 매우 비슷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서 우리가 자세히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지 아니하면 속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조품으로써 참다운 복음이 아니며, 따라서 거기에는 참다운 구원이나 참다운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뿐 만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참다운 복음을 대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싸우셨던 가장 큰 영적 싸움중의 하나가 바로 이 복음의 모조품과의 싸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다운 복음에 대해서 상고해 보기에 앞서 먼저 이 장에서 복음의 모조품인 율법주의 신앙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율법주의 신앙과의 싸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과 율법주의

 

우리는 우선 율법주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율법과 율법주의 신앙의 차이에 대해서 먼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두가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이 둘의 차이를 정확히 알아야 우리는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먼저 율법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하나님의 법도,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으로서 거룩한 것이요 선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율법과 율법주의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하여, 율법을 우리가 피해야 할 나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12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당면한 주제와 관련하여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율법이 주어진 목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목적을 올바로 알아야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지 않고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

그럼, 우리가 복음의 모조품인 율법주의 신앙에 빠지지 않고 참다움 복음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율법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것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로마서 7:7은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처럼 율법은 마치 우리 영혼의 거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얼굴에 아무리 시커먼 오물이 묻어 있어도 거울을 보기 전까지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보면 우리 얼굴에 그토록 더러운 것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상숭배가 무엇이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죄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어떠한 죄도 전혀 짓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는 살인도 도둑질도, 간음도 한적이 없는 ,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 앞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면,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이요,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이 그야말로 얼마나 죄로 가득차 있는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죄를 심화시킵니다. 로마서 7:8은 말합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5:16-18 참조). 누가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더욱 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에게 생깁니다. 그래서 멀쩡한 유리인데도 그곳에다 유리를 깨뜨리지 마시오.’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보면 더욱 그것을 깨뜨리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죄가 율법을 통해서 욕망을 부채질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우리 속에서 죄를 심화시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서는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함)

 

셋째,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입니다. 갈라디아서 3:24은 말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나오는 몽학 선생이란 말은 오늘날로 하면 가정교사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 중에서 똑똑한 노예를 택하여 자녀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가정교사로 삼았는데, 몽학 선생은 그러한 사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와 같은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 인간의 철저한 타락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서 죄를 더욱 심화시킴으로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어떠한 의에도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철저하게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제 율법은 우리의 손을 붙잡고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도록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갑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러한 목적들을 위해서이지, 결코 우리가 그것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주의

율법은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인 반면, 율법주의는 사탄에게서 나온 하나의 신앙체계이며, 따라서 악한 것이요,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르게 하는 나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것을 철저하게 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율법주의 신앙은 하나의 신앙체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신앙이 어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더욱 신앙적인 모습을 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을 보아도 우리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분명한 하나의 신앙체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율법주의 신앙은 사탄에게서 나온 신앙체계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그 모양에 있어서는 성경이 말하는 참 신앙과 비슷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달라,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르게 하는 신앙체계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도 율법주의 신앙의 대표격인 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8:44).

 

그리고 이 율법주의 신앙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할 것 없이 모든 시대에 걸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는 신앙체계입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성도들을 미혹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하며, 참다운 신앙을 왜곡시키는 일을 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몇 가지 대표적인 예로 예레미야 시대에 있었던 거짓 선지자들이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율법주의는 악한 것이므로 성경은 율법주의 신앙을 철저하게 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처절하리 만큼 심각하며, 그야말로 불꽃튀기는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예레미야나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그토록 심하게 싸웠던 싸움이 바로 이 율법주의 신앙과의 싸움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율법주의 신앙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율법주의의 본질은 한마디로 줄여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종교적인 행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보다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신뢰하고, 마음의 상태보다 외부적인 복종을 강조하며, 인격체이신 성령님보다 규례와 규칙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주일예배, 십일조, 성찬식, 침례(세례), 성경이나 성경공부, 기도 등 우리 신앙의 모든 면이 율법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의식(rituals)으로서 상징(symbols)이지 결코 실재(reality)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의 실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은 알맹이요, 이러한 의식들은 예수님을 싸는 포장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의식들을 통해서 알맹이인 예수님을 더욱 알기를 구하는 것보다 그것들을 적절한 방법으로 지키고 행하는 그 자체에 중점을 두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고, 하나님의 신임을 더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을 더욱 알고 그분의 은혜와 그분의 뜻을 더욱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성경공부를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고(단순히 그분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다음 장에서 이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그분을 더욱 사랑하기를 힘쓰기보다 성경 공부하는 그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성경공부를 남보다 더 많이 하였다고 해서, 자기가 남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다 똑같은 말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좀 더 자세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연예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 편지를 너무 사랑하고 아낍니다. 그것이 자기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그 편지를 품에 안고 다닙니다. 잠 잘 때도 가슴에 꼭 품고 잡니다, 날마다 다섯 번씩 그것을 읽습니다. 때로는 그 문맥을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 전문가의 조언을 들어가며 그것을 읽습니다. 그런데 그는 막상 그것을 보낸 그 애인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그의 편지를 사랑할 따름입니다. 만약 이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마 정신 나갔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정확하게 똑같은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연애편지와 같습니다. 성경이 귀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알고 더욱 사랑하기를 힘쓰기보다 그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자체에 중점을 두며, 그것을 많이 하는 그 자체를 귀한 것으로 여긴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읽는 그들의 행위 자체에 그 중점을 두기 때문에, 자기보다 성경을 적게 읽은 사람을 필연적으로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 겉으로 매우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자기가 성경을 더욱 많이 읽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보다 신앙이 훨씬 좋고,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에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성경을 말이 읽었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요,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자기의 마음을 밝혀 주셔서 주님을 더욱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율법주의로 변질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보다 옳은 교리를 더 중요시하게 되고(당연히 옳은 교리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은 일정한 규칙들을 잘 지키는 것(conformity to rules)'으로 전락되어 버리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자기 의(self-righteous ness)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분리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우리에게서 걷히며, 우리는 영적인 실재(reality)에 대해 눈이 멀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신앙은 무섭습니다.

 

심각한 사실은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들이 정확하게 이러한 상태에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소위 성수주일하고 십일조하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몇 가지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그러한 것들을 잘 지키는 것을 신앙의 주요 목적으로 삼음으로서, 근본적인 복음의 길에서 벗어나 율법주의 종교에 빠지고 말아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 주위에는 신앙의 모양은 많으나 하나님의 실재와 생명은 없는 체, 하나님의 임재는 걷히고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서 떠나 있으며, 우리에게는 세상의 온갖 죄악이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사탄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단지 많은 성도들이 미혹되어 사탄의 신앙체계인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체계에 대해서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면역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나 다 수시로 이 신앙체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특징

우리가 위에서 율법주의의 본질을 살펴보았는데, 우리가 참다운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율법주의를 깨닫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고 있는 사람이 자기가 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잠에서 깨고 난 다음에야 비로써 그 사람은 자기가 잠들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참다운 신앙을 알지 못하고 율법주의의 실체를 깨닫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실체를 조금이라도 알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의 특징을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삶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인물들의 대표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이라 하면 예수님 시대에만 국한된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신앙은 그 당시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던 그 신앙체계는 앞에서도 말씀 드린 것처럼 그 이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 신약시대에도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매우 흔합니다.

 

영적인 우월감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자기가 남들보다 영적으로 훨씬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영적인 우월감입니다. 그들은 신앙의 본질을 규례와 규칙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에 두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잘 지킨 자기들이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훨씬 월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리와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의 모습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로부터 멀리 따로 서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1-12). 그런데 반면에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바로 영적인 교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한 번도 빠짐없이 성수주일하고, 그 많은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고, 교회에서 주일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교사로 성가대로 봉사하고, 철야기도나 새벽기도를 한 번도 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훨씬 월등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에 빠진 결과요, 이것이 바로 영적인 우월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우리의 참다운 신앙이 어떠한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데서 나오는 소치입니다.

 

전통에 의존

율법주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전통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전통에 대한 의존입니다. 물론 모든 전통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전통을 따르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신앙은 규례와 절차를 중요시하여, 이것들에 집착함으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역시 바리새인들의 삶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3에서 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전통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통한 성경의 역사를 거역하고 대적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5장과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와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치신 날이 둘 다 안식일이었다고 해서 유대인들은 그 사건들로 인하여 예수님을 더욱 핍박하고 대적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행함으로서 안식일을 범했으며,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도 아니요, 그 치유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도 아니며, 따라서 예수님은 사탄에 의해 그 사람들을 고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기에 안식일을 범했다는 말입니까? 그 당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실 때, 그 병자에게 그가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그에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안식일을 범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님의 경우에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붙여주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진흙을 이기는 행위가 안식일을 범한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위들은 결단코 안식일을 범한 행위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전통적인 해석에 어긋났을 다름이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신앙은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합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이 우습게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예수님께서 소위 우리들의 주일 대예배시간에 오셔서, 성경에 나와 있는 바와 같은, 그 당시에 하셨던 일들을 똑 같이 행하셨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나라에 있는 매우 많은 교회에서 이단이라고 쫓겨나실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이만큼 율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보다, 예배순서와 절차에 관심이 더욱 많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의 예배순서와 절차가 자기가 과거에 다니던 그것과 다르다거나, 그 예배순서에서 자기가 기대하는 그 한 가지가 빠지거나 하면, 이내 곧 이상하게 생각하고 돌아 나옵니다. 이것이 곧 율법주의 신앙의 모양이요 그 특징인 것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통에 집착한 나머지 할례받지 못한 마음, 다시 말해서 배우고자하는 자세가 전혀 없는 강팍한 마음(unteachable spirit)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항상 성령을 거역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율법주의 신앙의 대표적인 인물들인 유대인들에게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7:51)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자세는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의 자세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의 자세는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자의 것과는 정반대로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입니다.(66:2) , 배우고자하는 자세 (teachable spirit)를 가진 자입니다.

 

능력이 없는 종교

율법주의 신앙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능력이 없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거기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이 그저 형식과 절차로 가득찬 종교입니다. 언제 우리에게 경건의 능력이 주어집니까? 경건의 능력은 우리가 교회에서 요구하는 요구사항들을 잘 지킨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킨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은 오로지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사실 때에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경건의 능력은 우리를 거룩케 하는 그분의 생명이요, 그분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교제는 소홀히 하고 규례와 규칙에 대한 외부적인 복종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경건의 능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주의 신앙에는 외식(위선)이 가득합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모양과 절차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겉모양은 매우 경건하고 거룩한 모양을 갖춥니다. 따라서 죄들을 속으로 숨깁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 외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부분을 가장 한탄하시며, 그들의 이러한 부분을 가장 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23:27-28). 이것이 또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갈 때에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모양을 갖추지만, 우리들 속에는 온갖 세상의 욕심과 정욕과 시기와 질투와 간음과 싸움과 교만과 명예욕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주의 신앙의 결과요 그 열매인 것입니다.

 

자기 의(self-righteousness)

율법주의 신앙의 또 다른 특징은 자기 의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에서 정해진 규정들과 규칙들을 잘 지키는 자기의 헌신과 노력이 강조되기 때문에, 이러한 신앙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의존하여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의지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또한 그 결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사랑하는 기준으로 열심히 성수주일하고 십일조하고 봉사한 성도는 그렇지 못한 성도들보다 자신이 훨씬 신앙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기에 자기는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들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충실하게 잘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자기 의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앙의 기초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종교적인 행위에 대한 자신의 순종과 행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마음속으로나마 무시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의 의를 의지하는 율법주의 신앙에는 무서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자기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끊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2-4은 이렇게 자기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에게 그리스도가 아무 유익이 없게 되고, 그는 다시 모든 율법을 행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되며,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함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의를 의지하기 때문에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설 수 없는데, 그 결과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 그리고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도 경험하지 못한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오직 교만 가운데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영적 장님(spiritual blindness)

율법주의 신앙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영적인 무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거듭해서 소경이라고 부르신 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소경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23:24). 소경 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3:26).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자기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알고, 따라서 자기들은 가장 잘 본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는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의 실체 혹은 실재(reality)를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 말씀을 더 잘 안다고 주장하던 사두개인들에게 너희는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2: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잘 안다고 해서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말씀의 실체 혹은 실재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할지라도 말씀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는 말씀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그래서 누구보다 영적으로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실제로 영적으로 눈먼 장님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혹은 성령)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혹은 성령)이요 생명이니라”(6:63)라고 말씀하신 의미요, 사도 바울이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문자)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혹은 성령)으로 함이니 의문(문자)은 죽이는 것이요 영(혹은 성령)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라고 말한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진리는 주관적이 되어버릴 것이며, 그렇게 되면, 온갖 무질서와 혼란이 초래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과 그 실체 혹은 실재를 아는 것은 이러한 성서적인 해석과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문자적으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아는 것과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실체 혹은 실재를 만분의 일이라도 아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문자적으로 아는 것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체를 만분의 일이라도 아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실 우리 주위를 보십시오. 우리는 기도할 때에나 교회에서 이야기할 때,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미사여구들을 사용합니다.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거룩하시고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아버지여.....”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말의 어느 것 하나에 대한 실체 혹은 실재를 십만 분의 일이라도 깨달았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파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엄청난 태산 앞에서도 결단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단코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또한 어떠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체를 백만분의 일만 깨닫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실로 우리의 삶에서 죄를 버리기를 열망할 것이며, 그러한 하나님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긍휼이나 신실함 등과 같은 다른 모든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영적으로 눈이 멀어있는가를 아시겠습니까? 사실, 오늘날의 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종교적인 서적들이 범람하고, 셀 수 없는 세미나들과 강의들이 열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실체 혹은 실재를 거의 모른 체 소망이 없을 정도로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상태에 대한 한 가지 원인은 우리 가운데 독버섯처럼 널리 퍼져 있는 율법주의 신앙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 혹은 실재(reality)룰 전혀 모르기 때문에 참다운 믿음도 그리고 참다운 순종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45-47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오로지 모세를 믿고, 그 위에 그들의 모든 소망을 두고 있다는 말하는 유대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야 하시니라.” 어떻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구요? 한 번 보실래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의 별을 보고 동방에서부터 찾아온 박사들을 기억하시나요?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태어나셨느냐고 물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큰 난리가 났죠. 그러자 당황한 해롯왕이 서기관들을 불러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어디에 태어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서기관들은 이에 대해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하면서, 미가서에 나오는 이에 대한 예언들을 줄줄줄 외워대기 시작했습니다(2:5-6). 참으로 그들의 실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나요? 동방박사들이 이 말을 듣고 베들레헴을 향하여 떠나갈 때, 그 성경말씀을 그렇게 줄줄줄 외워대던 서기관들 중 한 사람도, 단 한 사람도 같이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소망은 율법이요, 모세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말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들은 약속들을 목숨 걸고 믿는다고 말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었더라면, 그들은 아마 동방박사들을 앞질러서 그리로 달려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 아십니까?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그들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오늘날 우리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진정한 믿음과 순종입니다. 한 마디만 말씀드리죠. 만약 우리들이 우리가 말하는대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우리의 모든 삶을 그분 앞에서 계산받는 날이 있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다시 말해서 그러한 하나님의 진리의 실체 혹은 실재를 깨닫고 그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으며, 우리는 그만큼 율법주의 신앙에 젖어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주의 신앙을 이기는 방법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적으로 은혜에 의한 생활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내건 하나의 기치가 오직 은혜로였듯이, 우리 신앙생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얻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2:5), 주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삶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2:21). 그리고 다른 이것은 모든 면에서도 만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좋은 예를 바울의 삶에서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선 자신이 구원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3:24).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도로 불러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3:7-8). 또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감당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전 3:10).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신이 성도들 앞에서 진실되고 거룩하게 살았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그리고 따라서 사도 바울은 그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삶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는 과연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충분한 정의입니다. ,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곧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에게 아들이 셋 있는데, 제가 저의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선물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이 경우, 자전거가 제가 제 아이들에게 값없이 준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이 수고한 대가로 제가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여 그저 값없이 그들에게 준 선물입니다. 그러나 자전거가 곧 값없이 주는 선물은 아닙니다. 자전거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퀴가 두 개 달린 교통수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러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앞에서 살펴본 구절들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한 것도, 그리고 성도들 앞에서 거룩하고 참된 삶을 산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그저 바울에게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고 말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랬습니까? 바울은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값없이 그 모든 것들을 선물로 안겨다 주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또한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바를 우리로 하여금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임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은혜를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우리 힘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무엇을 성취했건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가능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그 공로를 위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제가 몇 개월 전에 제 생애에 두 번째로 결혼 주례를 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로 얼마 전에 처음으로 주례를 섰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러니까 첫 번째로 주례를 설 때, 참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예식장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자 사람들이 조용했고, 매우 짧은 설교였으며, 또 나는 떨면서 하는 설교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중에는 감동을 받고 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두 번째 주례를 하기 위해 예식장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간단한 기도를 드리는데, 제 마음은 그렇게 심각하지도 간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는데, 그 때 언 듯 내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내가 주례를 서는데 이번에도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겠지.’ 글쎄, 내가 그러한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그냥 그러한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자주 저에게 은혜를 많이 받았다느니, 또 설교를 잘 한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는데, 그러한 말들을 듣고 저도 모르게 그러한 말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었나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마자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이러한 감동을 주셨습니다. “내가 여태까지 너와 함께 한 것은 한 번도 너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은혜였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똑바로 앉아 간절히 절실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 드렸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이 여태까지 저와 함께 하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 오늘도 저는 주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제발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내려주셔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이와 같이 우리가 율법주의 신앙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생활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전적으로 믿음에 의한 생활인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오직 믿음으로라는 또 하나의 기치(旗幟)를 내걸었습니다. 성경도 우리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그런데 사실, 오늘날 이러한 진리를 모르는 성도는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매우 많은 성도들이 이 말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럼 과연 믿음에 의한 삶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지식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까?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구원받는 믿음에 내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우리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까?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이러한 사실들을 지식적으로 믿는 것 그 이상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들에 관한 사실들을 지식적으로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과연 성령의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어렵게 느껴지십니까? 사실 이 진리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안내하고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 그럼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원을 얻는 믿음을 포함해서 모든 종류의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조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지고 십자가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진리의 실체 혹은 실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깨닫게 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지식적인 긍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성령의 역사로 이러한 주님을 발견하였으면, 오로지 믿음으로 겸손하게 그분께 나아가 나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나의 죄 용서를 위해 전적으로 그분만을 그리고 공로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포함한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가 우리 주님의 실체를 깨닫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가 이렇게 발견한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로지 믿음밖에 없습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나의 어떠한 행실이나 종교적인 행위나 헌신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주님을 발견하고 겸손하게 오직 믿음으로만 그분께 나아가 주님을 오직 믿음으로 신뢰하게 될 때, 주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주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지신 주님을 발견하고, 그분 앞으로 나아가되 나의 모든 노력과 개인적인 의를 포기하고 겸손하게 믿음으로만 나아가. 나의 구원과 죄의 용서를 위해 오직 주님만을 믿음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위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삶에서 이러한 믿음에 대한 좋은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석학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다닐 때에도 그는 ‘Holy Club'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철저한 성경공부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들이 얼마만큼 성경공부를 조직적이고 철저하게 했든지 그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Methodists’라고 놀렸고, 이 말이 나중에 감리교의 명칭이 되었습니다. 학교를 마친 다음, 그는 사재로 안수를 받고, 미국 죠지아주에 가서 2년 동안 선교사로 봉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에서의 선교 사역을 실패로 끝내고 영국으로 돌아온 후, 어느 날 모라비안 교도들이 예배드리는 곳에 찾아가, 그들과 함께 예배드리던 중 그곳에서 진실로 구원을 받기 전까지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직 구원얻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일기에 의하면, 그날 밤 예배의 설교는 어떤 형제가 루터가 쓴 로마서 강해서의 서문을 읽는 것이었는데, 그는 그 설교를 듣던 중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으며, 그날 밤에서야 비로서 그는 자기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으며(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그 실체를 깨달은 것을 말함), 그 때에야 비로소 그는 자기의 죄를 위해 오로지 그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온전히 의지하게 되었고, 자기의 구원을 위해 온전히 그 예수님만을 신뢰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 얻는 믿음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고 나의 구원을 위해 오로지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 오직 믿음으로 그분만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 신앙의 다른 모든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삶도 거룩한 삶도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그저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외친다고 해서 이러한 삶이 우리에게 있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이미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를 악물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러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삶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과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가지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통해서 사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고, 날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 사시도록 그분을 신뢰하고 믿을 때,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살았던 삶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0-21).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살아야 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포도나무 가지의 삶입니다. 그리고 허드슨 테일러도 뒤늦게나마 바로 이 삶을 발견하였으며, 그 이후 그의 신앙생활과 그의 사역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려운 역경 가운데서도 중국 내륙으로 2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한푼의 도움 없이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여 파송할 수 있었고, 그 수많은 난관 가운데서도 주님 안에서 안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삶의 비결이야말로 구원의 진리와 별 차이가 없는 쉬운 것이라며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다음은 허드슨 테일러가 그 당시 영국에 있던 자기 자녀들과 그 자녀들의 보모와 그리고 그의 평생 후원자였던 누이에게 보낸 편지들인데, 약간 길긴 하지만 여러분의 도움을 위해 그대로 싣고자 합니다.

 

자기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아, 너희도 예수님께 너희 마음을 맡겨 주님께서 매일 보호하시도록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를 원한다. 나는 내 마음을 내 힘으로 보호해 보려고 애썼었단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노력은 항상 허사였지, 그러던 중 마침내 자신이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대신 보호해 주실 것을 의뢰하기로 했단다. 너희들 생각에도 이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것이다. 아마 너희들은 가끔 나는 지금부터 이기적이지도 않고 불친절하지도 않으며 불순종하지도 않겠다라고 작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그것을 내게 맡기라. 그러면 너의 마음을 내 능력으로 보호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또한 실제로 그렇게 해주신단다. 한 때 나는 예수님을 한 순간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꾸 잊어버리곤 했단다. 이제는 내가 주님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 맡기고 있으며 주님은 그렇게 해 주신단다. 이것이 가장 좋은 길이란다. 블레췰리 양에게 이것에 대해서 더 얘기해 달라고 말하려무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진리를 너희에게 분명히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려무나. 그리고 너희가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하려무나.

 

아이들의 보모 블레췰리 양에게 보낸 편지

 

나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편지했습니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내재하시는 것에 관한 고귀한 진리를 일찍 체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 진리가 아주 뒤늦게 깨달아졌지만 이 진리는 구속에 관한 진리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며,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블레췰리 양이 나의 아이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생활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되 놀랍게 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마음의 평안과 안식이 지금 이 세상에서는 가능하다고 믿지를 못했습니다. 천국은 이곳 지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경우, 하늘과 땅은 중요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누이 워커 부인에게 보낸 편지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다고 느끼며 내 마음이 예수님으로 차있음을 발견하고 항상 나와 교재를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는 것은 실로 즐거운 일입니다. 이것은 내가 주님 안에 거하려고 애쓰는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의 힘이시고 구원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봉사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 되십니다. 주님의 가슴은 우리가 쉬는 곳이며 지금부터 영원까지 동일하십니다.

 

보십시오. 이처럼 우리 속에서 예수님께서 사시는 삶도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 속에서 사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를 채우시는 주님을 믿는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에게 필요가 있을 때, 우리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서 그분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사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만약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더라도 우리의 노력을 통해 다른 방법으로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을 가지고 있을 때에 한해 그렇게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의지했던 그 최후의 수단마저 무너져 버릴 때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말로는 주님을 의지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그 최후의 수단을 의지했던 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에게 그 최후의 수단마저 무너져 내릴 때 진정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 어떻게 우리 주님을 믿을 수 있을 까요?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조명으로 실로 부요하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원하시는 사랑의 주님의 실체 혹은 실재를 깨닫고, 오로지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 나의 모든 필요를 위해 오직 믿음으로 그분을 신뢰할 때,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2천명 이상의 고아를 먹여 살렸던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가 깨달았던 삶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삶은 믿음에 의한 삶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아는 만큼, 다시 말해서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성령의 조명으로 주님의 실체를 깨닫는 만큼, 우리는 주님을 믿을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믿는 만큼 우리 주님의 능력과 생명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열망해야 합니다. 그분 자신을 알기를 간절히 열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말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전 2:2).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를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3:7-10).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우리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할 때, 우리의 삶에서 율법주의 신앙은 발붙일 자리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항상 머물러야 합니다.

우리의 참다운 신앙은 항상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율법주의 신앙을 이길 수 있는 길도 바로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적하고 고소하는 모든 율법의 요구들이 다 멸하여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예수님과 함께 다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가 멸하여 졌으며, 우리를 지배해 오던 영원한 사망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죄와 죽음과 율법주의 신앙을 통해서 역사하던 사탄의 세력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2:14-15은 말합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발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영원한 죽음과 멸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된 것도,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 수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도 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는 길은 오직 그곳에 머물며 그 공로만을 겸손히 믿음으로 의지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곳에서는 우리 개인의 어떠한 의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아래서는 율법주의 신앙의 핵심인 자기 의와 교만이 산산이 부서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항상 머물게될 때 우리는 율법주의 신앙을 이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요. 그는 항상 그리고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머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전하기 원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을 알기 원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기 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7-18).“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라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우리도 이처럼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고 그곳에 머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머무는 삶을 살아야할 사람은 각 성도 개인뿐만이 아닙니다.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에 떡을 떼기 위해서 모였습니다.(20:7) 여기에서 말하는 떡을 떼는 것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아직 애찬과 분리되지 않은 성찬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회 모임의 중심이 성찬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모든 모임에서 성찬식을 하건 안하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교회의 그 중심이요 핵심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인데,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념하고 기억하고 이를 인하여 감격하고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모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5:7-8은 우리의 예배 뿐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 전체가 축제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하면서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그러해야 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축제의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분들이 의미하는 축제의 분위기는 그저 신나고 흥겹고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는 그러한 의미의 예배를 의미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예배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축제는 그저 세상적인 기준에서 축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스도의 승리와 우리의 승리 등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와 그것이 이룬 그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감격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그러한 축제가 되어야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우리의 예배는 물론 교회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어야 함으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반하는 어떠한 기준이나 행위도 다 버려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받아들이거나 일꾼들을 세울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미하는바 외에 어떠한 것도 그 기준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외모나, 사는 집의 평수나, 타고 다니는 차의 종류나, 세상에서의 지위나, 학력이나, 출신 성분 등 그 어느 것도 기준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인하여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교회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기초하여 상대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떠한 기준도 있을 수 없고, 또한 절대로 있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 상대방이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어떠한 삶이든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너무 자주 이렇게 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일꾼을 세우는 기준만 보아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에서 훌륭한 교회를 성공적인 교회라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자들이 많은 교회, 교회 안에 국회의원이나 고위 관료들이 많은 교회, 많은 예산과 좋은 건물은 가지고 있는 교회들을 소위 변변한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변변치 못한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매우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이 말은 그렇게 소위 변변한교회가 문제가 있다거나, 또한 그렇게 변변치 못한교회가 훌륭한 교회라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교회를 그렇게 평가하는 그 가치와 신앙관이 심각한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초하고 있지 않으면, 그 교회가 아무리 세상적으로는 훌륭하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함께 하시는 진정한 교회는 절대로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반하는 이러한 일들이 행해질 때, 거기에는 심각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서신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일 때, 거기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함께 하시고(고전 5:4),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함께 하시는(고전 14:26) 등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들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십자가에 반하는 일들이 행해질 때, 유익해야 할 모임은 오히려 해가 되고, 그곳에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차별했습니다. 그러자 성경은 유익해야 할 그들의 모임이 오히려 그들에게 해가 되어 그러한 죄로 인하여 그들 중에 많은 자들이 약하고 병들어 심지어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 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17-18, 30).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이건 교회건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거기에 진정한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어떠한 개인의 의도 다 부서지고, 죄에 대한 정죄도 사라지고, 육신적인 정욕이나 세상을 향한 욕심도 다 멸하여지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십자가 곁에 항상 머무십시요. 우리 찬송가에 있는 가사처럼 십자가에 기대고 서서 하늘나라 가기까지 항상 그곳에 머무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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